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13. 압빠마다(appamāda) (20090818)

담마마-마까 2019. 11. 27. 18:09

https://youtu.be/WJQ4VSWrbuw 

* 압빠마다(appamāda) (20090818)

 

'압빠마다(appamāda)' 라고 하는 겁니다.

꼬삼비에서 일어난 일화를 가지고 부처님이 하신 얘긴데, 꼬삼비에 왕 두 분이 있다가 사람이 자꾸 죽는 모습을 보고 '아! 참 무상하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두 분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출가를 해서 생활을 하고 있다가 이 두 사람이 그런 결의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출가수행자가 된 것은 뭐 먹지 못해가지고 남에게 빌어먹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생사해탈을 위해서 출가한 거니까 너는 이 꼭대기, 나는 이 꼭대기에서 서로 열심히 정진하면서 살자. 그리하더라도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확인은 해야 되니까 보름마다 산꼭대기에서 횃불을 피워가지고 그렇게 확인하자' 이렇게 합니다.

그러다가 보름에 한 번씩 피어올라야 될 횃불이 한쪽에서 안 피어오릅니다. 그걸 보고 있던 한쪽에 있던 수행자가 '아! 저쪽 산에서 수행하던 내 친구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죽은 수행자는 죽고 나서 천신이 돼서 올라간 상태라. 천신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수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천신이 언제 죽는지 알아요?

당연히 수명이 다 했을 경우에, 여러분들 같이 일정하게 나이가 되면 죽듯이 천신도 수명이 있을 거란 말이라. 윤회하는 세상 안에 있으니까 그 수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게 되는 거라.

또 어떤 경우가 있냐면 공덕, 내가 쌓은 복덕, 지은 복이 다하면 양식을 이마만큼 가지고 있는데 쌀 요거 다 먹고 나면 쌀이 떨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복덕, 복을 쌓은 것들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는데 그 복이 다해버리면, 조금씩 빼먹다 보면 다하겠지. 그러고 나면 죽게 되는 거라.

또 언제 죽느냐면 천상세계는 즐거움이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나게 노는 거라. 여러분들이 어디 놀러가가지고 신나게 놀듯이,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다가, 그걸 경전에서는 영양분이 다했다고 그러는데 실제적으로는 천신도 먹어야 사는데 먹을 생각을 못하고 즐거움에 휩싸여 있다가 기력이 다해서 죽는 거라. 여러분들도 거의 마찬가질 겁니다. 놀 때는 그렇게 신나게 놀아서 어떻게 될 줄도 모르고 이렇게 하는 거지. 그래가지고 죽는 경우가 있고.

그다음 네 번째는 어떤 경우냐면 화를 낼 경우, 화를 낼 경우에는 그 즉시 죽음을 맞는다고 그럽니다. 이런 경우에도 천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어쨌든 천신으로 올라간 친구가 한쪽에서 아직도 수행하고 있는 알라깝빠라고 하는 친구에게 찾아갑니다. 물어봅니다.

 

“알라깝빠야! 내가 전생에 너하고 있던 친구인데, 내가 그래도 과거생에 복을 많이 지었는가 내가 죽어서 천신으로 태어났다. 뭐 도와줄 거 없느냐?”

알라깝빠가 그럽니다. “야! 나 지금 귀찮아 죽겠다. 이 숲에서 살다보니까 이놈의 코끼리가 와서 맨날 똥 싸고 어지럽히고 가고 이러고 온다는 거라. 코끼리 저거 어떻게 좀 안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니까 이 친구인 천신이 우리말로 할 거 같으면 거문고 같은 것 줄이 이렇게 세 개가 있는 거문고를 하나 줍니다. 그러면서 이 거문고를 치면서 내가 말해주는 주문을 '뭐라뭐라뭐라' 외우면 코끼리가 안 올 것이다 하고 그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수행만 좀 할라면 코끼리가 와서 방해하고, 코끼리가 방해한다면 코끼리는 발자국이 크기 때문에 툭툭 디디면 그게 파여집니다. 파여지니까 경행할 때 파여진 곳을 하면 경행하는데도 불편한 거라. 온데 똥냄새가 나고 이러니까 또 불결하고.

 

그런데 이 천신이 준 게 뭐냐면 거문고 같은 건데 첫 번째 줄을 퉁 튕기면서 주문을 돌돌돌돌 외우면 코끼리가 꽁지빠지듯이 뒤돌아서 도망을 간다는 거라. 두 번째 줄을 퉁 튕기면서 주문을 외우면 코끼리가 한 발자국 떼고 나서 돌아보고, 또 한 발자국 떼고 나서 돌아보고 이러면서 도망을 간다는 거라. 어쨌든 천천히 간다는 거라. 세 번째 줄을 퉁 튕기면서 주문을 외우면 코끼리가 자기한테 와가지고 납작 엎드린다는 거라. 자기가 조종하는 데로 다한다는 거라. 올라타고 유람을 할라면 유람을 하는 거고, 이리 가자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면 저리 가고 이렇게 한다는 거라. 그 거문고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뒤부터는 코끼리를 조정하게도 되고 쫓기도 하면서 수행을 열심히 했어.

 

그리하는 중에 어느 때 꼬삼비의 왕과 왕비가 밖에서 야유회를 즐기고 있다가 왕비가 왕이 입고 있던 망토를 장난삼아 가지고 있으면서 왕이 끼고 있는 왕의 상징이라는 반지를 빼서 만져보고 있는 사이에, 보통 왕의 상징물들은 붉은색을 띄고 있습니다, 옷이. 그러다보니까 하늘에서 날고 있던 큰 새가 뭔 고깃덩어린가 해가지고 그 왕비를 채가 버렸어요. 만삭이 돼서 곧 애를 낳을 왕비를. 그래가지고 떨어진 곳이 이 수행하고 있는 알라깝빠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어요. 그래서 알라깝빠가 구해줘 가지고 애기를 낳습니다.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가 언제 태어났느냐 하면 아침에 해가 딱 떠오를 때 그때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름을 '우데나'라고 이름지었습니다. 해가 떠오른다, 따뜻하다, 온도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의 따뜻한 그런 것들을 상징한다고 그러죠. 그런 뜻으로 우데나라고 그렇게 했어요.

 

우데나 왕은 꼬삼비의 왕이지만 실제적으로 경전에서는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왕은 아닙니다. 불교를 그다지 신봉하는 왕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들이 '보디'라고 하는 분이 출가해가지고 법구경 같은 데는 많이 등장을 합니다.

지금도 스리랑카에는 보디 비구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보디 스님. 그분이 교학에서는 아주 뛰어난 스님으로 있습니다. 스리랑카나 태국 버마 같은 곳에서는 대부분 스님들 이름을 지을 때 옛날에 있었던 스님들의 이름을 그대로 이렇게 합니다. 스님도 이름이 뭡니까? 뺜냐와로죠. 빤냐와로도 옛날에 있었던 스님들 이름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등장하는 분인데 이 우데나 왕이 그렇게 태어나서 결국에는 왕에까지 이르릅니다. 이 우데나도 아버지 격이던 수행하던 수행자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배우고 하니까 코끼리를 자유자재로 조정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왕이 상징은 얼마만큼 코끼리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 또 코끼리를 얼마만큼 잘 다루느냐를 가지고 표시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외우고 거문고를 치면서 코끼리를 마음대로 다루게 되니까 온 숲속에 있는 코끼리를 다 끌고 갈 수 있고 하니까 결국은 왕이 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데나 왕이 결혼할 나이가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데 꼬삿까라고 하는,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재벌, 재벌집 딸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꼬삿까도 참 많은 죽음을 겪었다가 결국 재벌이 됩니다. 양자가 돼가지고 재벌이 되는데, 그 딸도 꼭 마찬가지로 사마왓디라고 하는 분인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가 이 꼬삿까의 양녀가 됩니다.

 

어떤 일화가 있느냐 하면 이 꼬삿까가 많은 죽을 고비를 겪고 했으니까 참 삶이 덧없거든. 이렇게 살면 뭐하겠나,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되겠다 해서, 요즘말로 하면 빈민구호소 같은 거를 집 앞에다 차려놓고 맨날 밥을 나눠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밥을 얻으러 갔어요. 하루는 세 사람 분을 타가고, 그다음 날은 두 사람 분을 타가고 그다음 날은 한 사람 분을 타가고. 그래서 밥을 나눠주는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이상한 거야. 똑같은 사람인데 왜 세 사람분, 두 사람분, 한 사람분, 너 왜 이렇게 거짓말 하느냐 그렇게 하니까, 그게 아니다 내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밥을 타가지고 먹다가 그제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두 사람 분을 타가게 됐고, 엄마도 결국 어제밤에 돌아가셨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 사람 분을 타가는 것이다 합니다.

사람이 굶주림이 심하면 갑자기 밥을 먹으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그럽니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경전에는 그런 부분은 정확하게 안 나왔는데 아마 그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게 그 모습을 보고 그럼 네가 밥을 퍼주는 걸 내 옆에서 시중이나 들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밥을 퍼준다 하니까 오만 사람들이 올 거 아니라. 시끌벅적 한 거라. 그런데 이 사마왓디가 보니까 지혜가 있어가지고 이 사람들이 들어오는 길하고 나가는 길을 달리 만들어 놓으면 조금 덜 시끄러울 것이다 해가지고 요쪽은 들어오는 길에다가 울타리를 치고, 나가는 길에도 울타리를 치고 하니까, 당연히 다 관리할 필요가 없어. 들어오는 길에 한 사람만 있다가 “이리오시오” 하면 되고, 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나가도록 만들어주면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조용하게 되는 거라.

꼬삿까가 가만히 보니까 만날 시끌벅적 했는데 하루는 조용하거든.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가 해가지고 가보니까 그렇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거라. “이거 누가 만들어 놓은 거냐?” “이 여식이 한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꼬삿까라고 하는 대재벌이 그 여자를 자기 양녀로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사마와띠라고 지었습니다. '사마'라고 하는 것은 얼굴에 주근깨가 많다 라는 뜻이 있고, '와띠'라고 하는 것은 울타리라는 뜻이 있어서 주근깨가 많은 여인이 지혜롭게 울타리를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했다라는 그런 뜻이겠죠.

 

그런 사마와띠라는 분이 있는데 그런 소문이 왕에게까지 퍼집니다. 그래서 왕이 그 사마와띠를 보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와띠가 첫 번째 왕비가 돼죠. 이 사마와띠는 심성이 굉장히 착했던 여인이었던 것 같아요. 불교에 대해서도 많이 공헌을 하게 되고 이러는데 왕이라는 게 한 사람하고만 결코 결혼을 안 합니다. 이 우데나 왕도 한 세 번 정도 결혼을 했던 모양이라. 세 번째 결혼을 했던 왕비가 누구냐면 마간디야라고 하는 사람하고 결혼 했는데,

 

이 마간디야는 아버지 어머니가 장성한 딸이 너무나 예쁘고 하니까 아무한테나 시집을 보내기 싫은 거지. 딱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시집 보낼려고 생각을 했던 거라. 그런데 부처님이 지나가는데 보니까 너무나 걸음하고 아름답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내 딸 줄테니까 데리고 가서 사시오 이러거든.

부처님이 뭐라 하겠어?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어. 그러다가 이 마간디야의 아버지가 자기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간 사이에 부처님이 떠나갔어. 부처님이 떠나갔는데 발자국이 남아가지고 있거든. 당연히 맨발로 다녔으니까. 이 마간디야의 어머니가 자기 남편의 말을 듣고 사위 대상이 누구인가 볼려고 가보니까 발자국만 있고 사람은 없거든. 그런데 발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딱 찍혀있는 거라. 마간디야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 이 사람은 출가한 사람이고 계속 출가할 사람이지 절대 이렇게 세속적인 곳에 물들 사람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사위 삼을려고 쫓아간 거라.

 

발자국이 보통 어떻게 남느냐면 여러분들 발자국이 보통 어떻게 남습니까?

가운데가 이렇게 움푹 패이죠? 이렇게 가운데 발바닥 안쪽이 잘 안 보입니다. 그게 뭐냐면 탐심이 많으면 그렇다고 그럽니다. 탐심이 많은 사람은 이게 더 잘 안 보인데요. 대부분 인간들은 적고 많고의 차이가 있을 뿐 탐심은 다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같이 이렇게 딱 펴져서 찍히지를 않는다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어떻게 찍힐 것 같애요? 발바닥이 아주 거칠게 찍힌다고 그럽니다. 반듯하지 않고, 반듯한 바닥에 발을 딛고 갔는데도 거칠다는 거라.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주 거칠어요.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발바닥이 찍히는 게 질질질질 끌리는 형상을 한다고 그럽니다. 뭐 하기 싫다는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질질질 끈다는 게. 그렇게 찍힌다고 그러는데.

 

어쨌든 그리해도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까 부처님이 있으니까 부처님한테 가서 사위 삼을라고 하니까 부처님이 거기서 법을 설합니다. 그 법을 설하는 소리를 듣고 이 마간디야의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법의 흐름에 들어가게 됩니다. 불교신자가 됩니다. 그런데 마간디야는 오히려 악심을 품습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말했을 거 같애요? 딴하(tanhā)-갈애, 그다음에 아라띠(arati)-혐오하는 것, 그다음에 라가(rāga)-애욕을 가지는 것, 그런 마라(mara) 이런 것은 마라라는 거라. 마구니라는 거라. 그 마구니의 딸이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해도 나는 그 유혹에 안 넘어갔다는 거라. 그 마라의 딸들은 마간디야 너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는 거라. 왜 안 넘어갔느냐는 거라. 어차피 아름다운 사람이든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든 똥주머니라는 거라. 똥오줌이 가득 들어있는 더러운 물건 덩어리인 이 몸인 것이지 그게 깨끗한 게 아니라는 거라.

밖으로는 다듬어서 예쁘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적인 것은 안 그렇다는 거라. 얼굴 하루만 안 씻고 이틀만 안 씻어도 시커멓게 땟국물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 몸은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건데 내가 이 마간디야한테 무슨 욕망을 느껴가지고 결혼하겠느냐, 나는 마간디야의 발조차도 만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본인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얘기라? 그런데 엄마 아버지는 '아! 참 그 말씀이 맞구나' 해가지고 결국은 불교신자가 됩니다. 이 마간디야는 당연히 악심을 품겠지 '한번 두고 보자' 하고.

 

부처님이 왜 그랬을까? 이렇게 악심을 품을 말은 잘 안하시는 분인데 왜 그럴까? 딱 목적은 하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법을 듣고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중에 나에게 악심을 품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법을 설합니다.

스님이 부처님 법을 설할 때 누구에게나 다 맞게끔 얘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사람이라도 '아! 내가 수행하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겠다' 그 말로 인해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게끔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고 부처님 말씀이고 그걸 전해주는 스님들의 입장입니다.

어쨌든 그리하더라도 두 사람은 내편으로 만들었지만 한 사람은 적을 만드는 형태가 된 거라.

 

마간디야가 아름다우니까 어쨌든 이 우데나 왕하고 결혼을 하게끔 됩니다.

그리하는데 아까 첫 번째 왕비가 된 분이 사마와띠라고 그랬죠. 그 사마와띠는 매일 같이 꽃을 장식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자기 하녀, 그 시종이 '쿳줏따라' 라고 그럽니다. 나중에 '다문제일'이라고 일반 재가인들 중에서 가장 부처님 말씀 많이 들은 사람이 되는데, 쿳줏따라에게 가서 맨 날 꽃을 사오라고 그럽니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사천 원 줘가지고 장미꽃을 사 오게 합니다. 그러니까 쿳줏따라는 매일 가서 꽃을 사오는 게 일이라. 하루는 보니까 똑같이 사천 원을 줬는데 오늘 사 온 장미는 두 배가 많은 거라. 그래서 왕비가 물어봅니다. “왜 이렇게 많냐?” 하는 거라.

 

“나는 이제 거짓말을 못합니다.” 꽃을 사러 갔는데 사러 간 집에 마침 부처님이 초청되어가지고 온 거라. 그래서 그 꽃을 파는 사람이 분주하고 하니까 “야! 지금 내가 바쁘니까 꽃을 못 판다. 그러니까 조금 있다 보자.” 그래서 뭔 일인가 보다가 부처님 말씀을 듣게 된 거라.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거짓말하기가 양심에 찔리거든. 그전에는 사천 원을 받았으면 이천 원어치는 사고 이천 원어치는 떼먹는 식으로 이렇게 한 거라. 그러니까 만날 이천 원어치만 사 온 거라. 그런데 인제는 사천 원을 줬는데 그걸 땡가먹지 못하니까 사천 원어치를 그냥 사가니까 전에보다 두 배가 많게 되는 거라.

 

그렇게 했는데 이 사마와띠 왕비가 “아! 그래? 부처님이 뭔 말씀을 했는데 네가 거짓말도 안 하고 정직하게 됐느냐?” 이러니까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는 거라. 그 부처님 말씀을 듣고 “아! 이게 진짜 성인의 말씀이구나” 하고 그걸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 사마와띠 왕비가 이 시종에게 “너는 이제 다른 일 안 해도 된다. 너는 이제 내 스승이 돼가지고 맨날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을 듣고 와서 내한테 그걸 전해다오.” 그다음부터 쿳줏따라는 아무것도 안 해. 맨 날 눈만 떴다 하면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 듣고 와서 왕비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해줍니다. 그러니까 왕비 입장에서는 인제는 부처님이 보고 싶어 죽겠는 거야. 그런데 왕비이기 때문에 함부로 밖에 나가지를 못해. 부처님이 지나가는 데도 그걸 볼 수가 없는 거라. 생각하다가 안 돼가지고 벽에다가 구멍을 뚫습니다. 구멍을 뚫으면 적어도 부처님이 탁발하러 나가는 모습이나 이런 건 보일 거 아니라. 그 모습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고 이리 하거든.

 

그런데 아까 세 번째 왕비가 된 마간디야 같은 경우는 부처님한테 악심을 품고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이 사마와띠가 부처님 볼려고 몰래 구멍을 뚫어놓고 몰래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옳다구나” 자기가 셋째 왕비가 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부처님으로 인해서 이리된 것을 생각하니까 한꺼번에 모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어가지고 왕에게 일러바칩니다. “왕비가 나쁜 짓을 한다.”

왕이 가보니까 구멍이 뚫려져 있거든. 왕비한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보고 싶어서 구멍을 뚫었다는 거라. 그러니까 이 우데나 왕이 벽을 딱 허물어버리고 거기다 창문을 딱 달아줘 버립니다. 몰래 보지 말고 그냥 보라고.

그러니까 이 셋째 왕비는 자기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린 거라.

 

그리해도 이 마간디야는 부처님에 대해서 악심을 풀지를 않습니다. 어쨌든 모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왕에게 살아있는 닭 여덟 마리를 주면서 “우리 오빠가 싱싱한 닭이라고 가져왔는데 이걸 요리해 먹읍시다.” 그러니까 왕이 “그래 요리해 먹자.” “그러면 저기 첫째 왕비가 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첫째 왕비한테 가서 요리하게끔 줍시다.” “그리해라 그럼.” 살아있는 닭을 요리하라고 첫째 왕비한테 주니까 이미 불교를 믿고 있는 자의 입장에선 살아있는 걸 요리할 수 있습니까? 못하는 거야. 왜? 내가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또 죽였다고 의심됐을 때는 그걸 자기가 먹지도 못하고 이리 하는데, 더구나 직접 내가 죽이는 거거든, 내가 안 먹더라도.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할 거라. 그건 못한다고.

 

그러니까 이 셋째 왕비 마간디야가 “저 첫째 왕비는 부처님한테는 닭요리 잘해가지고 주더라. 그런데 왕은 싫어하니까 왕한테는 안 해준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 그러면서 죽어있는 닭을 갖다가 첫째 왕비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이걸 요리해가지고 부처님한테 갖다 드리십시오.” 부처님한테 갖다 드리라니까 얼마나 좋아. 그것도 죽은 닭인데, 그걸 잘 요리해가지고 부처님한테 가져다 드립니다. 왕이 그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도 설마 첫째 왕비가 그렇게 마음이 착한 사람인데 뭐 그러기야 하겠나? 하고 넘겼어요.

 

그러고 나서 또 좀 있었는데 자기의 거문고 안에 셋째 왕비가 뱀을 넣어놓은 거야. 그래놔 놓고 첫째 왕비가 넣었다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뱀이 탁 나타나니까 왕이 놀랠 거 아니라. 그래서 화가 나가지고 이 첫째 왕비를 죽일려고 그럽니다. 왕비를 죽일려고 저기 세워놔 놓고 활을 쏘거든.

 

그런데 첫째 왕비는 이미 부처님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절대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거라.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품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보냅니다. “행복하기를, 남을 해치지 않기를” 이런 마음을 자꾸 보냅니다. 왕이 활을 쏘는데 화살이 갔다가 다시 '퉁', 이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있는데,

또 어떤 주석서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안 나와 있고, 왕이 그래도 이 왕비를 그렇게 끔찍이 사랑했으니까 차마 활을 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뚝뚝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비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나를 한번 봐라.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 것 같으면 눈물 흘릴 일도 없고 그렇다.”하고 얘기하면서 왕을 달랬다는 얘기도 다른 주석서에는 그렇게 기록이 돼있는데,

어쨌든 이 경전에는 화살을 쏘았는데 그리해도 어쨌든 실패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방출하므로 인해가지고 그 자애의 힘으로 인해서 외부적으로 오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되는 거라.

 

그리해도 이 셋째 왕비 마간디야가 첫째 왕비에 대한 미움을 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첫째 왕비가 살고 있는 방에 기름을 붓고 불태워 죽여버립니다. 왕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슬펐겠어요? 그런데도 이 범인을 잡아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감쪽같이 속이고 셋째 왕비 있는데 가서 “아이고! 참 그 첫째 왕비가 나를 죽일려고 뱀도 놓고,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닭요리도 해주지도 안 하고 그랬는데 인제 첫째 왕비가 죽고 나니까 아! 참 좋다. 그런데 아쉬운 게 내가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있으면 그 사람한테 상을 내릴 건데” 이러니까 셋째 왕비가 그 소리 듣고 아! 내가 죽였다고 하는 거라. “그래? 그럼 너 혼자서 죽일 생각했나?” 아니요. 우리 오빠들하고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래? 그럼 그 사람들에게 내가 포상할테니까 다 데려와라.” 하니까 모두 데려오는 걸 보고 땅에다 싹 다 묻어버립니다. 묻어버리고 짚을 그 위에 얹어서 불태워버립니다. 결국은 첫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다 죽게 되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스님들이 앉아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아! 참 죽는다는 게 뭐고, 살아있다는 게 뭔가? 참 허무하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얘기한 게 뭐냐면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게송입니다.

"알아차리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자이고,

알아차림이 없는 자, 방일한 자는 죽은 자와 같다." 하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등장한 게 '압빠마다(appamāda)'라고 하는 건데,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방일하지 마라' '불방일'이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압빠마다(appamāda)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는 설명해 놓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노력하는 것, 힘쓰는 것, 불방일'이라는 이런 뜻으로써 많이 쓰고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맛드'라고 하는 의미 자체는 '미쳤다'고 하는, '혼란해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취한 상태' '미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취하지 않고 미친 상태가 아니다' 하는 뜻으로써 앞에다가 부정형 '아'를 붙여가지고 '압빠마다'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취하지 않고 미치지 않는 상태일거 가틍면 어떻게 돼요? '깨어있는 상태, 의식이 있는 뚜렷한 상'를 얘기합니다.

 

그럼 '압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깨어있는 상태!

깨어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사띠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력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띠하지 않는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사띠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은 사띠하지 않으면 죽은 자와 마찬가지고, 사띠하면 살아있는 자와 마찬가지다 하고 이 게송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살아있다고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살아있죠? 죽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살아있습니까? 지금 현재 사띠하고 있느냐는 거라. 사띠하지 못하면 죽은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사띠하지 않는다는 거는 과거에 매여 있든지, 미래에 가 있다든지 해서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띠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을 굴리고 과거 일들을 회상을 하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현재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미래를 계획하고 미래에 대해서 청사진을 입이 헤벌레 해 있더라도 그건 지금 현재하고는 관계없는 거라.

 

사띠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얘기라.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고 거기에 방황을 하게끔 되고,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걸 또 체험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들이 많고, 또 미래를 생각하면서 또 마찬가지로 현재에 대해서 애매하게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든지 미래든지 그것을 즐겁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것이 불만족스럽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지금 현재 만족스럽지 못하게 살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삶이 바른 삶이겠어요?

과거나 미래에서 즐거운 것들 생각하고, 아니면 괴로운 것들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지금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라. 그럼 과거나 미래는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데, 바르게 만족스럽게 잘 살아가는데는 오히려 장애의 요인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왜 그렇게 살아가야 되느냐는 거라.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과거나 미래에 빠지지 않고 지금 현재 찰나찰나를 바르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얘기한다 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라는 것은 지금 현재 내가 보고 있는 것, 냄새 맡는 것, 느끼고 있는 것, 맛보고 있는 것, 또 생각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지금 있는 그대로 내가 알아차리는 거라. 내가 지금 보고 있다면 보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거고, 냄새 맡으면 냄새 맡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아! 내가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라.

이렇게 하다 보면 자꾸자꾸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현재 현재에 머물도록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겁니다.

수행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와 같고, 하루라도 수행하는 자는 백 년을 수행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고 사는 자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이와 같이 압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게으르지 마라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념적인 해석입니다.

게으르지 마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를 사띠하는 것,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압빠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게으른 것은 어떤 것을 얘기합니까? 사띠하지 않는다는 것은 뭘 얘기합니까?

첫 번째, 나쁜 행위, 나쁜 행위에 마음이 가 있는 겁니다. 나쁜 말을 하는 거라든지, 나쁜 생각을 한다든지, 나쁜 행동을 한다든지 이런 쪽에 마음이 가 있으면 어떻게 돼요? 나쁜 짓 하게 돼있습니다. 나쁜 행위에 마음이 가 있으면 그건 사띠를 안 하고 있겠지. 사띠를 하고 있으면 적어도 아! 내가 나쁜 말을 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있으면 나쁜 말을 안 하게끔 됩니다. 사띠는 현재에 머물러야 되는데, 어쨌든 내가 자꾸 나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거라. 그런 쪽으로 마음이 가 있으면 아! 내가 지금 '압빠마다'가 아니고 '빠마다'하고 있구나. 방일하고 있구나. 내가 사띠 안 하고 있구나 하고 퍼뜩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 욕망을 일으키는 것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하는 이런 것들, 그런 것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 보면 어떻게 돼요? 잘생긴 사람이면 ‘아! 멋있다’ 그렇게 보이는 대상에 마음을 뺏긴다는 거라. 그런 쪽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떻게 돼요? 사띠 안 하니까 이런 거라. 무슨 음식을 먹으면 맛있다, 맛있으면 어떻게 해요? 더 먹을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거라. 어! 내가 사띠하고 있지 않았구나 하고 퍼뜩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러면 맛있으면 맛보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맛있다’ 하지 말고! 소리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색성향미촉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들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 그런 상태이면 사띠 안 하고 있다는 거라. 방일하고 있다는 거라.

 

그다음 세 번째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은 행위를 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 이것도 사띠 안 하고 있는 거라. 방일하고 있다는 거라.

사띠하고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지금 내가 뭘 해야 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사띠하고 있는 것은 좋은 행위입니다. 탐진치가 없는 마음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거기 때문에 좋은 행위를 짓고 있는 거라. 그런데 좋은 행위조차도 안 할려고 하는 거라. 나쁜 행위도 안 하지만.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나쁜 행위를 안 할려고 한다고 해가지고 나쁜 행위 쪽으로 마음이 안 쏠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언제든지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휩쓸리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통계가 마음이 어느 쪽으로 많이 휩쓸리는가 사람에게 통계를 내보니까 80%가 나쁜 쪽으로 휩쓸린다고 그럽니다. 좋은 쪽으로 휩쓸리는 쪽은 20%밖에 없대. 그게 의학적인 통계라. 꼭 그 통계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마음은 항상 나쁜 쪽으로 휩쓸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띠를 안 하면 내가 좋은 일을 안 하고 나쁜 일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나쁜 방향으로 휩쓸리게 된다는 거라.

 

좋은 행위를 짓는 건 뭡니까? 도덕적인 행위들, 조금 전에 여러분들 오계 했죠? 거짓말하지 말자. 남의 물건 훔치지 말자. 이런 것도 그걸 지킬려고 해나가는 거고, 그런 건 좋은 행위라는 거라.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거라. 그리고 마음을 넓게 펴서 자애로운 마음을 자꾸 내고 베푸는 것들, 남에게 베풀고, 정신적으로도 베풀고 물질적으로도 베풀려고 자꾸 하고, 그런 것들도 좋은 행위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할려고 하고, 수행을 하면서 자꾸 현재에 살면서 좋은 행위들이 축적이 되도록 자꾸 만들고, 이런 것들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되는데 거 안 할라고 하는 거라. 시간만 나면 오늘 같이 수행 안 가는 거라. 나쁜 행위를 하는 건 아닌데 그건 결론적으로 나쁜 행위 쪽으로 휩쓸리게끔 만든다는 거라. 그거는 방일한 거라.

압빠마다, 적어도 사띠하고 사띠를 확립하고 게으르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마찬가지 세 번째 나쁜 짓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거라.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아! 내가 그냥 무덤덤하게 있다. 이것도 내가 지금 방일하고 있다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자꾸 할려고 하고, 사띠 할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꼭 나쁜 행위 쪽으로 마음이 가 있는 것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을 비롯해서 무덤덤하게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대하는 대상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이런 쪽으로 마음이 휩쓸리는 것도 그게 나쁜 것들이라.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사띠를 할려면 반드시 몸과 말과 생각을 바르게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나쁜 행위 나쁜 말 나쁜 의도를 가지는 걸 차단시킨다는 거라.

그리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것에 마음이 뺏기도록 하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뭐라고 그래요? 대상 쪽으로 마음이 나가도록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대상이 나에게 다가와야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봐야 될 것 같으면 대상이 와 닿도록 하라는 거라. 볼려고 마음을 밖으로 주지 말고, 저놈이 와서 내 눈에 탁 닿도록, 그래서 내 마음은 요 눈에다가 탁 고정을 시키라는 거라. 대상으로 마음을 뺏기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무덤덤하게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거는 결과적으로는 나쁜 쪽으로 휩쓸리게 돼 있다는 거라. 끊임없이 대상은 나타나게 돼 있다는 거라. 그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게 바로 압빠마다라는 겁니다. 압빠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자! 오늘은 여덟시 반이 됐으니까 이번 게송만 하고, 다음 시간에 다음 게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걸어갈 때는 걸어간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내가 듣고 있으면 아! 듣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방일하고 있다는 거라.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항상 방일하지 않도록 그래서 압빠마다가 확립되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다 종합해가지고 딱 한마디만 들어라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이 "압빠마다"를 듭니다. 딱 한 마디로 줄이라고 하면! 그 정도로 중요한 말이고 압빠마다란 것은 결국은 사띠하는 것들입니다. 사띠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하고 판단들을 하고, 사띠를 끊임없이 하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