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15. 수행(오력)의 균형 (20090901)

담마마-마까 2019. 11. 28. 23:45

* 수행(오력)의 균형 (20090901)

 

오늘은 수행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용이하게, 조금 더 진척있게 해나갈 것이냐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행할 때 필요한 게 뭐 인거 같애요? 뭐가 꼭 있어야 될 거 같애요?

사띠(sati)는 항상 있어야 될 것이고 사띠 말고 필요한 게 뭐가 있을 거 같애요?

사마디(samādhi)-집중하는 것, 또 뭐가 필요하겠어요?

위리야(viriya)-노력, 또 뭐가 필요하겠어요?

삿다(saddhā)-믿음, 또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마음-찟따(citta),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겠지. 또 뭐가 필요하겠어요?

빤냐(paññā)-지혜, 또 뭐가 필요하겠어요?

삐띠(pīti)-희열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부차적인 게 있고, 수행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물론 수행하는데 기쁨도 있어야 되고, 즐거움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들도 있어야 됩니다.

 

그리한데 여러분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어가지고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담마스쿨을 통해가지고 오력에 대한 것들은 많이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중에서 여러분들에게 부족하고 또 꼭 필요한 것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스님이 수행을 어떻게 하라 그럽니까?

좌선하고 경행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라 그럽니다. 좌선을 한 시간 했으면 경행을 한 시간 하라. 반드시 그렇게 시간 배분을 균등하게 해야 된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게 인제 수행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법입니다. 아무래도 앉아서 수행할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들이 더 큽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경행을 할 거 같으면 아무래도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 것뿐 아니라 몸이 흔들리지 않게끔 그렇게 노력들도 해야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중하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것들이 좀 많이 배가가 됩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좌선과 경행을 하면서 서로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의 균형을 좀 맞춰줘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이 안 맞으면 수행을 잘 해나가지 못합니다.

 

수행이 잘 될려면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이

집중하는 힘하고 노력하는 힘하고 균형이 맞아야 된다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다음에 경전에서는 필요한 것들이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는 월등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믿음의 힘보다는 지혜의 힘들이 훨씬 여러분들이 큽니다. 현상에 대한 지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또 완전한 확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믿음을 얘기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 부분이 여러분들에게는 훨씬 큽니다.

 

그래서 가끔씩 엉뚱한 생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수행이 안 되면 경전을 자꾸 본다든지 이렇게해서 보충할려고 하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경전들을 통해가지고 여러 가지들을 습득할려고 자꾸 노력들을 합니다. 그런 힘들은 한국 사람들은 누구든지 보통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부족한 것들이 아무래도 믿음의 힘들이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부분은 차후로 치고.

 

얼마 전에도 스님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잘 아는 분들이 저녁에 모여서 법담을 하고 있던 모양이라. 그래서 스님이 참가하셔서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그래? 거기는 뭐 하는 자리냐? 하니까, 그냥 일반 식당에서 방을 얻어가지고 얘기를 한대. 그럼 거기 술 먹는 자리 아니냐? 하니까, 술은 조금씩 먹고 있다고 그러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못가겠다 하니까, 그래도 와서 꼭 스님이 테라와다의 견해에 대한 것들, 그리고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에 대한 것들을 좀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기에, 그럼 하나 약속을 해라. 술 먹으란 소리는 하지 마라. 내가 거기 가더라도 술 못 먹으니까 술 먹으란 소리는 하지 마라. 그럼 내가 갈게 하니까 약속하겠대.

 

그 약속만 철썩같이 믿고 갔다. 한참 얘기하다가 보니까 자기들의 견해를 자꾸 스님이 “아니다” 하면서 얘길 하니까, 어느 학자가 좀 성이 났던 모양이라. 그래가지고 한다는 얘기가 “스님! 여기 다들 술 먹고 있는데 스님 혼자 술 안 먹고 있으면 그것도 좀 이상한 거 아닙니까? 술 잡수십시오” 그러는 거라. 원래 나한테 안 먹이기로 약속을 하고 내가 온 거 아니냐, 그런데 왜 약속을 안 지킬려고 하느냐 이러니까, 그래도 영 불편하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다 불편한데 스님이 그래서 되겠느냐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먹지 말라고 그랬는데 여러분들이 부처님보다도 뛰어나다고 증명만 해주면 난 당신들 말을 듣겠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술 먹으라면 술 먹을 거고 할테니까 그걸 증명을 해 봐라 하니까 되게 기분이 엄청 나빴던 모양이라. 어떻게 부처님보다도 뛰어나다는 걸 증명을 할 방법이 없잖아. 그렇게 뛰어날 수도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견해하고 배치가 될 때는 어떻게든지 그 견해를 깍아내릴려고 하고 또 자기들의 견해를 내세울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보통 어디서 얻어지냐 하면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얻고 있는 책이나 이런 걸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쪽으로 얻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 대부분은 지혜는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믿음이 만약에 있었을 거 같으면, 당연히 스님은 부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니까 그 믿음을 져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 같으면 그렇게 술을 권하지도 않았겠지. 어쨌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수행상에서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보면 집중하는 힘과 노력의 힘 발란스를 잘 맞춰주면 수행은 아주 잘 됩니다. 사띠는 어디에든지 항상 있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럼 발란스를 맞춰줄 것이냐?

좌선할 때 움직이게 합니까? 안 합니까? 일절 못 움직이게 하죠! '손끝 하나도 까딱하지 마라'고 그럽니다. 모든 것을 인제 알아차리고는 있고. 그런데 좌선을 하면 집중의 힘은 굉장히 커져 나갑니다. 그 대신에 노력의 힘들은 약간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력과 집중의 균형을 맞춰줘야 하는데

그러면 좌선할 때 이걸 어떻게 발란스를 맞출거라?

집중의 힘이 강하고 노력의 힘이 약할 경우 일어나는 현상들이 뭡니까?

대부분이 보면 대상에 얽매여 버립니다. 일반적으로는 명칭에 얽매이는 경우들,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들로 인해서 그 생각에 푹 빠져버리는 경우들, 이런 경우들이 보통 보면 집중이 강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과거의 일에 매여 있다든지, 그러니까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럴 때는 집중의 힘이 강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분들은 명칭에 매여서 실재적인 현상이 발견이 안 되나갈 때, 그럴 때는 통상적으로 보면 집중의 힘이 훨씬 더 강합니다. 노력의 힘보다.

또 어떤 경우들이 있습니까? 가끔은 앉아서 조불죠? 대상을 놓쳐버리니까 조붑니다. 심하게 졸고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깜빡깜빡 조는 경우, 그런 경우들을 보면 그 앞에 단계에서 집중의 힘이 노력의 힘보다 과도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이냐? 명칭에 얽매인다든지, 일어나는 생각에 탁 매여가지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생각을 계속 굴리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것에 생각에 계속 얽매여 있다든지, 또 가끔씩 조는 경우가 있다든지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럴 때 어떻게 그 장애들을 타파해 나갑니까? 스님이 분명히 노력보다는 집중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줘야 돼? 노력의 힘을 배가시켜줘야 되겠죠.

그런데 노력의 힘을 배가시킬려고 할 것 같으면 경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경행이 아니라 손끝 하나도 까딱 못하도록 하는데 어떻게 할 거라?

 

대상을 자주 바꿔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남 사라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 얘기하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대상을 더 많이 가져야 되겠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이라든지,

'닿음 포인트'를 갖다가 '오른쪽 눈꺼풀', '왼쪽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이런 식으로 명칭 포인트를 자꾸 늘려주어야 된다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1번',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2번' 이런 식으로 포인트를 자꾸 늘려줘가지고 마음을 보다 활기있게 만들어줘야 만이 노력의 힘들이 커져나갑니다. 그래야 집중의 힘과 발란스가 맞아진다는 겁니다.

단, 문제가 되는 것은 산란하게 될 때까지 하면 안된다는 거라.

 

닿음의 포인트가 너무 많아가지고 마음이 산란해져 버릴 것 같으면 집중조차도 깨어져 버린다는 거라. 집중이 깨져가지고는 오히려 노력의 힘이 더 강해져버리면 안 되는 거라. 발란스를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산란하지 않는 상태, 만약에 내가 '닿음 포인트'가 네 개 정도만 해도 충분히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그것을 해나간다 그러면,

예를 들면 '일어남 사라짐 앉음, 눈꺼풀 닿아있음', 다시 '일어남 사라짐 앉음, 입술 닿아있음', '일어남 사라짐 앉음, 손이 닿아있음', 요정도 세 개 해가지고 명확하게 마음이 거기에 따라가지고, 그다음 다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첫 번째 '눈꺼풀 닿아있음' 그다음에 다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입술 닿아있음' 하면서 닿아있는 느낌을 자꾸 알아차려나가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해나간다고 할 거 같으면 노력의 힘이 반드시 집중하는 힘과 균형을 맞춰주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될 때에야만이 현상을 보다 명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상에 집중을 하고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다시 '앉음, 닿음'을 떼어버리고 '일어남, 사라짐'만 해도 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거기서 현상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발견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지하에 주차장 공사한다고 좀 시끄러워. 어쩔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아마 주차하기가 좀 편해질거라.

 

또 앉아있을 때 좌선을 할 경우에 무슨 현상들이 있습니까? 가장 여러분들이 많이 하는 거, 망상 피우는 것들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 쫓아서- 자기는 그걸 알아차리고 있대. 막 따라가면서 망상 피우는데, 이럴 때는 뭐가 부족한 겁니까? 집중하는 힘이 부족해서, 노력하는 힘들은 있는데 집중하는 힘들이 떨어지고 있다는 거라.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따라가다가도 멈춰버리고 대상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만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들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이 자꾸 일어난다 하더라도 일단은 '아! 생각이 일어났음'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그걸 완전하게 못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주대상인 호흡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좌선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집중하는 힘과 노력의 힘이 반드시 균형을 맞춰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에 빠지든지, 아니면 졸음에 떨어지든지 이런 현상들로써 이어지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경행을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경행은 노력의 힘이 더 강화되는 현상입니다. 상대적으로 집중하는 힘이 약해지게끔 되는 거죠.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경행을 할 때 어떤 현상들이 있습니까? 생각 안 일어납니까? 생각 일어납니다! 그리고 경행하면서 대상 놓치는 거 허다하게 있습니다. 들어올리는 것은 알아차렸는데 나가는지도 모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잠자믐거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깜빡깜빡 조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내려놓는 건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들어올리는 건 또 모른다는 거라.

이와 같이 좌선할 때 깜빡깜빡 조부는 거와 마찬가지로, 경행에서도 알아차림이 없이 조부는 거와 같은 현상들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또 망상들도 항상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럴 때는 또 어떻게 이 두 가지를 균형을 맞춰주게 할 거라?

예를 들어서 걸어가다가 망상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생각이 많이 일어난다 하면 일단은 걸음을 멈추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음'하고 알아차려주고, 그러고 나서 다시 경행을 합니다.

그래도 다시 또 생각이 일어날 경우, 망상이 또 일어날 경우엔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을까? 아까 좌선에서 망상이 많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라 그랬어요? 대상을 단순화시켜라! 그러면은 망상은 좀 잠재된다 했습니다.

 

그럼 경행할 때도 마찬가지 대상을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떻게 대상을 단순화시킬 수 있어요? 노력의 힘은 있는데 집중의 힘들이 적기 때문에 균형을 못 맞춰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럼 집중하는 힘을 키워주어야 됩니다. 그럴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되도록이면 보폭(높낮이)을 크게(높게) 가져주는 게 좋습니다.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데 보통 여러분들 보면 땅바닥에서 한 10cm나 떨어지나? 어떤 경우들은 한 5cm도 안 떨어지는 경우들 거의 붙어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폭을 좀 크게 해줘라는 거라. 집중하는 힘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들을 얘기합니다. 들어올릴 때 조금 더 지속적으로 들어올려지는 걸 알아차리도록 하고,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고,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보폭을 조금 더 크게 해줄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이 커집니다. 그럴 거 같으면 생각하고 하는 망상들은 되도록 안 일어납니다. 왜? 그렇게 할려면 낮게 움직일 때보다 훨씬 더 집중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흔들려 버리니까.

 

그러면은 걸어가다가 대상을 자꾸 놓칠 땐 어떻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대상 자체에 그냥 맹목적으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러고 있고, 현상이 하나도 발견이 안 되고 할 땐 어떻게 해야 돼요? 아까 좌선에서는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뭐가 부족하다고 그랬어요? 노력하는 힘이 부족하다고 그랬죠!

그러면 경행도 꼭 마찬가집니다. 노력하는 힘을 키워주면 됩니다. 그리고 대상에 노력하는 힘을 자꾸 키울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 자체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면 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그런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되도록 경행하는 속도를 빨리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경행하는데, 10m를 왕복하는데 5분이 걸렸다 하면, 5분 걸리는 걸 1분으로 경행 속도를 빨리 해줘야 됩니다. 경행 속도를 빠르게 하면 할수록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날 여지가 적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집중하는 힘은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면서 노력의 힘들도 그대로 유지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경행하는 속도를 빨리해주므로 인해서 집중하는 힘만 계속 강화되는 것들을 갖다가 방어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대부분 경행을 하면서 문제가 되는 것들이 이 부분입니다.

생각들은 잘 안 일어나는데도 대상 자체를 놓쳐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앉아서 조부는 거와 마찬가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라. 그럴 경우에는 경행속도를 되도록이면 빨리하라. 빨리해서 집중하는 힘보다 노력의 힘들을 키워줘야 되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이게 균형이 맞아지는 거라. 반드시 그럴 때야 만이 대상 자체를 명확하게 파악을 해나갑니다.

 

한 번 예를 들어볼까요? 발을 통상적으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다시 또 다른 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반드시 노력의 힘보다 집중의 힘이 큽니다. 그다지 노력 안 해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좀 빨리해서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고 나서, 내려놓자마자 바로, 마음을 뒷발에다가 줘가지고 바로 들어올리는 두 개를 동시에 할 수는 없는 거거든. 한발이 완전히 닿기 전에 뒷발이 들려버리면 두 가지 현상은 동시에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건 안 되는 거라.

 

그럼 일단 발이 닿자마자 마음을 빨리 다른 대상-뒷발에다가 주어가지고 뒷발이 들어올려지고 내려놓고,

그다음에 다시 또 바로 다른 발에 들어올리는 데로 가서 알아차림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노력의 힘이 더 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집중은 그대로 있으면서 노력의 힘이 커지기 때문에 균형을 잡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현상 자체를 분명하게 파악을 해나갑니다. 그래야만이 본질적인 특성들을 알아차려나갈 수가 있게끔 되는 겁니다.

 

이렇게 좌선하고 경행을 할 때는 반드시 균형을 맞춰줘야 됩니다.

좌선에서는 '일어남' '사라짐'으로 하다가 한쪽의 균형이 안 맞으면 '앉음' '닿음'을 첨가해서 균형을 맞추도록 하고,

경행에서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는 것들이 균형이 안 맞아서 생기는 현상들이 일어나면 반드시 보폭을 좀 크게, 이 보폭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 높낮이를 좀 크게 하고, 그리고 경행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균형을 맞추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사마디, 위리야는 균형을 맞춰야 됩니다.

균형을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은 사띠(sati)입니다. 사띠는 어떤 경우든지 위리야에도 있어야 되고, 사마디에도 있어야 됩니다.

사띠는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더 좋습니다. 더욱 명확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마디하고 위리야는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된다! 요거는 하나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하나 균형을 맞춰야되는 게 뭐라 그랬어요? 삿다하고 빤냐라고 했죠!

그런데 여러분들한테 부족한 게 뭐라고요? 삿다 부분이라고 했죠! 지혜 부분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수행하러 와서는 다른 생각 일으키면 안 됩니다. 여분의 시간이 있다 해도 책을 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차라리 부처님 보면서 믿음을 더 키워주는 것이 낫습니다. 삿다 부분이 반드시 여러분들에게는 부족합니다. 내꺼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팔계 받았죠? 팔계 지킬려고 마음먹는 사람도 적습니다.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도 적다는 거라.

 

삿다는 바로 이겁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자체는 어떤 거냐 하면은 남에게 베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들, 도덕적인 행위들을 바르게 세울려고 하는 것들,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들, 이것으로 인해서 믿음으로 키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책으로써 키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식이지 반드시 믿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평상시 때라도 책을 자꾸 접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 넓게 쓰는 마음들, 자비로운 마음들을 가지고 자꾸 나누고 베풀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 그리고 만약에 오늘 팔계를 지키겠다 하면 하나라도 반드시 지킬려고 자꾸 노력하는 것들, 오계를 받았으면 오계를 반드시 지킬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수행하는 시간을 자꾸 늘리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믿음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뭐 나는 예외라는 것이 없습니다. 한국인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균형을 맞추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수행에서는 반드시 이 다섯 가지의 균형을 잡아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위리야와 사마디가 균형을 맞추도록 해야 된다.

두 번째는 삿다와 빤냐가 균형을 맞추도록 해야 된다.

그런데 이 균형을 맞추는데 반드시 자꾸 더 키워주어야 되는 것은 사띠이다 하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사띠와 사마디와 위리야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삿다와 빤냐는 따라오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꾸 자꾸 키워줘야 되는게 알아차림하고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들, 이 세 가지는 자꾸 키워줘야 됩니다. 키워야만이 그 힘으로 인해서 삿다도 따라오고 빤냐도 따라오고 그렇게 됩니다.

일반적인 빤냐보다는 현상에 대한 빤냐가 자꾸 따라오게끔 됩니다. 삿다도 그냥 맹목적인 삿다가 아니라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삿다가 따라오게끔 된다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자! 그리고 하나 더, 여러분들에게는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미나를 하면서 문제가 됐던 부분이 뭐냐하면,

테라와다의 기원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2차 결집부터 시작이다. 어떤 학자들은 3차 결집부터 시작이다 하는 그런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나중에 저녁에 회의를 통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정리를 해준 부분을, 여러분들은 우리 담마스쿨 교재에 보면 맨 처음에 「테라와다」라고 하는 부분이 나오죠. 그 부분을 읽어보면 명확하게 정리가 될 겁니다.

 

1차 결집 때 했던 담마와 위나야가, 2차 결집 때 담마와 위나야와 맞는가 다른가? 다른 겁니까? 똑같습니까?

그럼 3차 결집 때 했던 담마와 위나야가, 1차 결집 때와 다릅니까, 같습니까? 똑같습니까?

그럼 테라와다의 기원은 어디입니까? 그럼 정리가 됩니까?

왜? 1차 결집 때 분명하게 선언을 해놔 놓고, 각각의 결집의 마지막에 반드시 넣어야 되는 게송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부처님 말씀 하나라도 더하지도 말아라.

부처님 말씀 중에 하나라도 빼지도 말아라.

부처님 말씀은 변형도 시키지 말아라.

딱 세 가집니다.

 

테라와다란 용어를 언제 썼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테라와다의 기원이 어디냐 하는 것은 명확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테라와다는 부파불교가 될 수가 없는 것이고, 그 이후의 불교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왔던 것이고, 1차 결집으로써 확정되고 변경 불가한 것들이 돼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테라와다의 견해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견해들을 반드시 세울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학자가 이런 얘기한다 하면 거기 쏙 쏠렸다가, 또 어느 학자가 저런 얘기를 한다 하면 거기에 쏙 쏠렸다가 그렇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테라와다의 학자들은 이것은 토론의 논쟁거리가 안 됩니다. 다른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거 말고도 얼마든지 논쟁을 해야 되고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은 논쟁의 거리가 안 됩니다. 어떤 경우는 논쟁을 하더라도 테라와다의 견해에서 봤을 때 논쟁의 주제를 잡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대승불교적인 견해로써 논쟁거리를 잡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에 문제가 됐던 게 계맥의 문제.

계가 중간에 끊어졌다, 아니다 하는 부분에 대한 얘깁니다. 책을 통해서도 테라와다는 면밀하게 이어졌다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안 됐다는 거라. 스리랑카 같은 예를 들면 한참 동안 '마하 위하라파 - 대사파(大寺派)'가 쭉 내려오다가 '아누다라뿌라' 시대가 지나서 '뽈루나루와' 시대가 되고 이럴 것 같으면 그 계맥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계맥 '시암니까야'파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럼 단순하게 볼 것 같으면 계맥이 끊어진 겁니다. 그런데 왜 계맥이 끊어지는가? 한국방식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계맥이 끊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테라와다는 반드시 출가한 비구가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반드시 4인의 스님들, 상가가 구성이 돼야 만이 새로운 출가자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든지 사회적인 문제든지 아니면 외부적인 문제든지, 아니면 불교 자체적인 문제든지 문제가 있어 가지고 네 명의 스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 승단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습니까? 다른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스님들 초청해와가지고 그 법을 이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만약 내가 '마하 위하라파- 대사파' 인데 대사파로 있다가 우리는 지금 세 명밖에 없다고. 새로 스님들을 만들어가지고 이 승단을 유지해 나가야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태국에서 스님들을 초청해 온다는 거라. 그럼 그 태국의 승단은 뭡니까 '시암'파 입니다.

시암파가 와서 전할 것 같으면 시암파가 이어지는 거라. '마하 위하라'파는 이미 끊어져 버리는 거라. 끊어져 버리고 '시암 니까야'가 새로 창종을 하는 형태가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승단이 이어져 나가는 거라.

 

계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지만은 실제적으로는 그 스님들은, 그 세 분 스님이 그대로 다시 시암파의 스님으로서 활동을 하고 그대로 이어져 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 세 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까지 출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제 하나의 승단이 구성이 되는 거라. 그렇게 이어져 나가는 거라. 또 다른 나라에 그런 경우가 있을 거 같으면 여기서 또 나가고 해서 계를 이어주는 거라.

 

테라와다의 정신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계맥이 끊어지면 살릴 수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비구니 승단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만약에 세 비구니 스님이 있었는데 승단의 구성요건이 안 되면 다른 데서 스님을 초청해와 가지고 승단을 이어가야 되는데 다른 승단조차도 다 끊어져 버린 거라.

그럼 어떻게 돼요? 이 세 비구니 스님은 승단을 더 만들어나가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 세 스님이 있을 때는 비구니 스님 존재를 하는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승단이 완전히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비구니 승단은 만들 수가 없게끔 된 겁니다. 이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니까.

 

만약에 비구 승단이 그렇게 될 거 같으면 당연히 비구 승단도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립니다. 다행히 불교의 역사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는 거라. 스리랑카에서 그런 승단을 이을 조건이 안 되면 다른 나라에서 그런 조건이 돼가지고 거기서 이어오는 거고, 또 다른 나라에서 마찬가지로 그런 조건이 안 되면 또 스리랑카나 버마에서 또 와서 잇게 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면밀하게 보완관계를 가지면서 승단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거라.

그것이 테라와다의 견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는 비구니 승단을 만들 수도 없고, 또 비구 승단은 파는 다를지라도 승단 자체의 역사로 봤을 때는 하나의 승단이라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의 승단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는 그런 견해입니다.

역사적으로 계맥이 끊어졌다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그리고 용어의 사용의 문제에서는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 상좌부라 해서 부(部)라 할 것 같으면 부파불교(部派佛敎)라 해서 그 용어는 안 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앞으로는 상좌부라는 용어는 쓰면 안 됩니다.

(질문) 한글로 번역한 것을 '상좌'라고 하는데 테라와다(Theravāda) 라는 용어 자체는 상좌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되도록 초기불교, 상좌불교, 근본불교, 남방불교 이런 용어보다는 그냥 그대로

'테라와다(Theravāda)' 라고 쓰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수행 이름을 뭐라고 그럽니까? '위빳사나' 라고 그러죠! 그와 마찬가집니다. '테라와다'도 고유한 이름으로써 써주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논쟁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데 논쟁과 파상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논쟁을 통해서 테라와다는 그 순수성을 항상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견해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테라와다에서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이면 테라와다의 견해가 뭔지 정도는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이 부분에 대한 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담마스쿨 교재들을 자꾸 옛날 거라 해서 넘겨짚지 말고, 다시 한 번 꺼내서 읽고 되새기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