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기능 (20090908)
저번 시간에 <마음의 법칙>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마음은 항상 나쁜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 피우기가 쉬워지고, 또 화내고,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기가 쉽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마음의 법칙이다 하는 것들을 설명을 하면서 마음의 법칙을 이해했으면 그 마음의 법칙 따라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우선 그런 것이 일어나면 '멈춤'이라는 기능을 사용을 해서, 그 마음을 법칙 따라가지 말고 우선 그 마음을 정지하도록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마음의 법칙에 이어서 <마음의 기능>에 대한 부분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마음은 과연 어떤 기능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나눠드린 프린트물에 보면 나와 있듯이 더러워진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로인해서 둑카(dukkha)-괴로움, 근심이 뒤따른다 하는 얘기 부분입니다.
이 게송은 짝꾸빨라라고 하는 스님에게 한 게송입니다.
그 스님으로 인해서 일어난 건데, 부처님이 안거를 지낸 곳 중 가장 오래도록 있은 곳이 어디냐 하면 사위성 이었습니다. 사위성에서 얼마나 있었느냐 하면은 녹자모 강당에서 5년,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기원정사에서 19년, 그러니까 24년간을 있었죠.
부처님이 44안거를 지내셨는데, 거기서 24년간 안거를 거기서 지냈으니까 거의 반 이상을 사위성에 있었습니다. 사위성에서 일어났던 것들이 경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다시피 하는데 어쨌든 이것도 사위성에서 일어났던 거라.
아주 부유한 분이 자식이 없어서 늦게서야 자식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빨라'라고 하는 자식입니다. '빨라'라고 하는 의미가 뭐냐면 '애지중지 하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늦게 태어났으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했겠어요? 그런데 한번 태어나니까 또 동생이 또하나 태어나네. 그래서 큰 애는 마하빨라라고 그러고, 동생은 작은 애라 해서 쭐라빨라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살았는데, 부모가 죽고 나서 가업을 이 빨라 형제 둘이서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하빨라가 보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분주하게 절로 가거든. 절로 갈 때 보니까 음료수도 들고 가고, 약품들도 들고 가고 이런다고. 그래서 “거, 어디 가는데 그렇게 들고 가느냐?” 하니까 “아! 우리 부처님하고 제자 분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올릴 공양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진데 테라와다 불교 전통 중에 하나가 뭐냐면 재가인들은 오전에는 스님들에게 음식물을 공양 올릴 의무가 있고, 오후가 되면 마실 것들 그리고 약품들, 이런 것들을 공양 올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선원에 오전에 가느냐, 오후에 가느냐에 따라서 가져가는 물품이 달라집니다. 오후에는 음식을 가져갈 수가 없잖아요. 스님들이 잡숫지를 않으니까! 그러니까 오후에는 음식물을 가져가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오전에 가나 오후에 가나 과일 가져가고 부처님한테 올리고 그러는데 테라와다에서 볼 것 같으면 잘못된 부분이죠. 어쨌든 오전에는 음식물들이고, 오후에는 마실 것들 위주로 이렇게 하는데, 그래서 자기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마실 것들을 준비해가지고 스님들한테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 법을 들었어요.
부처님이 그때 법을 설하는 대부분의 형태들이 어땠냐면 개차법이라는 형태들을 띱니다.
개차법(開遮法)이라는 게 뭐냐면 재가인들을 대상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출가인들을 대상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서 법을 설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재가인들을 대상으로 할 거 같으면 보통 혼자 그렇게 가지고 있지 말고 자꾸 나누도록 하라, 그리고 계를 잘 지키고 도덕적인 행위들을 갖다가 잘 이어나가라, 그러고 나면 너희들은 틀림없이 다음세상에서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이럴 것이다 하는 그런 사후의 이익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을 위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출가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경우가 달라집니다. 쉽게 말하면 욕심을 버리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또 수행을 할 때는 화를 다스릴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이런 위주로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이어져서 마무리하는 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이익들이 있다 하는 것, 열반의 이익이라든지 아니면 내가 그런 욕심을 버림으로 인해서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이익이 있다든지 이런 형태들로 법을 설하게 됩니다. 그걸 이름하여서 부처님의 개차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들이 많았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당연히 부처님이 보시·지계·생천이라는 이걸 주제로 해서 법을 설하는데, 법을 설하는게 이 마하빨라가 듣기에는 아주 귀에 쏙쏙 들어오거든. 이거 내 혼자 내가 부자라 해서 내 것만 자꾸 가지려 했다가는 오히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가 있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거든. 보시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쉽게 말하면 내가 돈이 많아서 큰 집을 지었다. 지었는데 이것이 아까워가지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다.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안에서는 내 혼자 생활해야 하는 거라. 외롭게 살아가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서 이 집을 지었더라도 다른 사람들 초청해서 같이 밥도 먹고 이 속에서 떠들고 놀고 할 것 같으면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거라.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갖다가 보시·지계·생천의 예를 들어가지고 이렇게 조목조목 얘기를 해주거든.
빨라가 그 법문을 듣고 '아! 저거다. 저게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다른 종교의 지도자도 그런 식으로 법을 설해주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보시를 설명할 것 같으면 “무조건 스님들한테 많이 베풀어라. 다른 사람들한테 무조건 많이 베풀어라” 이렇게 얘기하지 그게 어떤 이익이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잘못이 있는가에 대한 것들은 설명을 해주지 않는데 부처님은 아주 그걸 자세하게 해주거든. 비유를 들어가지고. 그래서 마음이 동해가지고 출가를 할려고 그럽니다. 동생은 물론 많이 반대를 하죠. 그래도 어쨌든 출가를 합니다.
원래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5년간은 은사스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도 꼭 마찬가집니다. 만약에 은사스님이 있는 데가 불편하다 할 것 같으면 그다음에 차선책으로써 있도록 허락을 해주는 데가 어디냐면 지율자(持律者)가 있는 데에서. 계율에 대해서 해박하게 잘 알고 있는 스님이 있는데, 밑에 가서 시자노릇을 하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스님들 승려증에는 보면 여러분들 같은 주민등록증 같은 형태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거기에는 내가 언제 계를 받았고, 계사스님은 누구고, 다른 스님들은 누구가 참석했고 하는 걸 조목조목 다 적어놓습니다. 한 페이지가 그걸로 다 있어요. 그러고 나서 계를 받고 나서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사찰이 어디다 하는 것까지 다 한쪽에는 또 적어놓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주지스님 싸인까지 받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안거가 한해 지나면 안거가 지났다고 그것도 또 거기다가 기록을 하고 그래서 책 같습니다. 스님들 승려증이.
만약에 다른 사찰에 갈 경우에는 여기 있는 사찰 스님이 이 스님이 거기 가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좀 지도해 주시오 하면서 싸인을 또 해주고, 그럼 그 절에 가서는 이번 결제는 이 스님이 여기서 머문다 하는 걸 또 싸인을 해주고 이런 게 승려증입니다. 그러니까 낱낱이 자기의 행적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것들이죠.
어쨌든 5년간 그렇게 지내가지고 이 마하빨라가 지내고나서 부처님한테 와서 수행법에 대해서 물어봐서 수행을 할려고 합니다.
그게 인제 대부분 테라와다 스님들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처음부터 수행을 바로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또 처음부터 경전 공부해라 해가지고고 경전만 공부시키지도 않습니다. 우선 계율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도록 시키고 나서 그다음 순차적으로 시킵니다.
그래서 마하빨라 스님이 부처님한테 수행법에 대해서 잘 듣고 나서 수행하러 떠납니다. 다른 스님들 하고 같이 수행을 하러 가는데 어느 마을에 가니까 일반인들이 물어봅니다.
“스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우리는 수행하러 가는데 수행하기 적당한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스님! 이번 안거는 여기서 머무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이 스님들을 잘 시봉하겠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스님들이 60명 스님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머물게 됩니다.
스님들이 머물려고 할 것 같으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스님들이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꾸띠(kuṭi)'입니다. '스님들이 잘 공간' 이 마련되어야 됩니다. 요즘 같이 이렇게 거창하고 좋은 것들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꾸띠의 규정은 뭐냐면 가로 세로 크기가 열두 뼘, 일곱 뼘. 부처님 손바닥에 보면 이 손가락을 검지라 그럽니까? 검지의 둘째마디 여기부터 시작 해가지고 여기 중지라 그러죠? 중지의 둘째마디 여기까지를 쫙 폈을 때의 길이를 갖다가 보통 한뼘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뼘의 길이가 일반인들의 배가 된다고 그럽니다. 그마만큼 손발이 컸다고 그래요. 우리가 이 길이를 재보면 보통 한 12cm, 13cm정도 됩니다. 보통 그렇게 됩니다. 부처님 뼘으로 할 것 같으면 24cm, 25cm 그 정도 되겠죠. 12뼘, 7뼘이니까 대충 계산을 해보면 2m70cm에 이쪽은 한 2m 정도 되나 하여튼 그렇게 됩니다. 그 정도 규격입니다. 스님들 머무는 방이.
그보다 클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 허용이 되느냐면 스님들이 원해서 지은 게 아니고 재가인들이 신심이 나가지고 그렇게 지어줄 경우에는 그런 규정에 저촉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자기들이 원해가지고 지었을 경우에는 그 규정을 반드시 받아야 되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이 머무는 방은 절대 호화스러운 게 없습니다. 그 방에 딱 필요한 것들은 뭐냐면 쉽게 말하면 누는 이부자리 그리고 베개.
대부분 승원에는 더운 곳이기 때문에 그걸 구분만 해둡니다. 만약에 이게 돌로 깔려져 있다면 평평하다가 요만큼 조금만 높아져가지고 요렇게 스님이 누울 자리가 있고, 그리고 머리 부분은 돌을 조금 더 높게 만들고, 그렇게 돼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어쨌든 그런 형태들로 아주 단순하게 돼있습니다. 그 안에는 화장실도 없고, 차 마시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마하빨라 스님하고 다른 스님들이 거기서 머무르게 됩니다. 그렇게 꾸띠가 지어지고.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같이 수행할 공간, 그걸 '위하라(vihāra)'라고 그럽니다. 그 공간이 필요합니다. 다 모여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는 스님도 수행하고 일반인도 수행하고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스님 따로 일반인 따로 이런 것이 아니고 그런 공간입니다.
반드시 갖춰져야 되는 게 그 두 가지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우뽀사타(Uposatha)'라 해가지고 스님들이 계를 설하고 참회하고 또 새로운 스님들을 만들어내고 하는 '포살당'이 있어야 됩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이 이 세 가지는 반드시 갖춰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절을 만들 경우 그것이 주가 됩니다.
이 신도들도 마찬가지 스님을 청해가지고 스님들이 허락 했으니까 그걸 다 지어가지고 한 거라.
그래가지고 결제가 됐는데 스님들이 앉아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몇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가 하고 토론이 붙었어요. 여러분들 몇 가지 방법으로 수행합니까?
네 가지 방법으로 하죠! 걸어가면서 하는 수행, 앉아서 하는 수행, 서서 하는 수행, 누워서 하는 수행. 그래서 행주좌와 네 가지 몸의 형태-포지션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러면 몇 가지 방법으로 그런 포지션에 맞게끔 수행을 합니까? 그러니까 앉아있을 때는 한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하느냐는 거라. 아니다.
그것도 네 가지다! 그게 뭐냐면 신수심법! 몸에 대한 관찰, 느낌에 대한 관찰, 마음에 대한 관찰, 법에 대한 관찰입니다. 앉아있을 때도 네 가지 방법, 서 있을 때도 네 가지 방법, 걸어갈 때도 네 가지 방법, 누워있을 때도 네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렇게 결론이 났어. "그럼 이번 결제는 반드시 네 가지 포지션으로, 네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하자" 하고 스님들이 다짐을 합니다.
그때 이 마하빨라 스님이 “아니다. 나는 세 가지 포지션으로 하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세 가지 포지션이란 건 뭐냐면 눕지 않겠다는 얘기라. 눕지 않고, 앉고, 경행을 하고, 서고, 하는 포지션으로 네 가지 방법으로- 신수심법으로써 수행을 하는데, 세 달 동안 눕지는 않겠다. 그것은 자기가 결정을 한 거니까, 결제 날에는 스님들이 그것을 대중에게 공고를 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빨리어 게송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번 결제 세 달 동안에는 어느 구역 내에서 내가 머물겠습니다. 아니면 이번 결제 내에는 이 사원 구역 내에서 머물겠습니다. 이번 결제 기간 내에는 나는 어떻게 수행하면서 어디에서 머물겠습니다." 하고 게송을 외우는 것이 쉽게 말하면 결제의 시작입니다.
이게 전통적으로 쭉 내려오는 건데, 그렇게 해서 마하빨라 스님은 결제를 하게 되거든. 세 달 동안 눕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눕지 않는다는 거는 자지 않는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수행이 무르익었으면 모르는데, 마하빨라 스님은 인제 겨우 5년이 지난 스님입니다. 그러니까 병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거라. 자지 않으니까 뭔 병이 최고 먼저 들어오겠어요? 눈! 자지 않는다는 건 눈을 감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러니까 눈이 계속 따가워 오면서 눈에 눈병이 생긴 거라.
그런데 아까 재가인들이 오후에 사원에 갈 때는 뭘 시주물로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약하고 음료수거든. 그래서 신도들도 결제날에는 뭐라고 대중들에게 고하느냐 하면 "이번 결제기간 동안에는 약품을 내가 조달하겠습니다. 이번 결제기간 동안에는 뭘 하겠습니다." 하고 자기들이 약속들을 해요.
그런 의식들이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이번 결제기간 동안에는 스님들 약품을 내가 다 조달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거든. 그 마하빨라 스님을 보니까 눈이 충혈되고 안 좋거든. “스님! 그러면 제가 약을 하나 드릴테니까 이 약을 코에다 넣으십시오.”
그 인도의 의약은 우리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아픈 데를 직접적으로 치료를 하는데, 인도의학은 그런 방법을 안 씁니다. 부대적인 것들을 다스려가지고 그것을 치료하도록 하는 것이 인도의학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립니다. 그 대신에 근원을 해결합니다. 어쨌든 이 약도 마찬가지 코로 넣는 거라.
코로 넣어야 되는데 눕지 않는데 어떻게 코로 넣을 거라? 코로 넣으면 약은 흘러버리고, 시간이 자꾸 지나도 눈이 안 낫거든. 그래서 이 재가자가 물어봅니다. “스님! 약을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용하고 있다.” 사용은 하고 있거든. “그래요? 그럼 어떻게 사용합니까? 누워서 사용합니까, 앉아서 사용합니까?”
이 스님이 대답을 안 하는 거라. 앉아서 사용한다고 할 거 같으면 재가인이 뭐라고 하겠어요? ‘스님! 그래하면 안됩니다. 누워서 해야 만이 코로 약이 들어가서 눈에 효과가 있는 것이지 앉아서 하면 안 됩니다.’ 하게 되겠지.
누워야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자기가 처음 결제할 때 한 약속을 어겨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말을 못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눈이 계속 약해지니까 재가인이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다가 나중에 재가인이 지쳐버립니다. 저 스님은 틀림없이 약을 안 쓴다. 인제는 약을 줄 필요가 없다 싶어가지고 “스님! 인제 저는 모르겠습니다. 스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그래도 이 스님은 생각이 뭐였냐면 '내가 처음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 그 약속의 의미는 뭔가? '이 결제기간 동안에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들을 해결해야 되겠다.' 나는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다는 거라. 이 늙음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찾아야 된다는 거라. 병들어가고 있는데 이 방법도 찾아야 되고, 죽어가고 있는데 이 방법도 찾아야 된다는 거라.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방법을 나는 어쨌든 찾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더욱더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마음이 더욱더 깊어집니다. 그러다가 눈이 딱 실명할 때가 되어서 깨달음을 탁 이룹니다.
실명을 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아무리 깨달음을 이뤘지만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결제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은 거기 있는 스님들이 참 수행 잘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진짜 열심히들 했거든. 그런데 수행 전통은, 테라와다의 전통은 뭐냐 하면 결제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부처님한테 가서 인사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의 점검을 받는 거거든. 인제 떠나야 되거든. 그래서 스님들이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하빨라 스님은 먼저 가라고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하고 같이 갈 거 같으면 느려진다는 거라. 앞을 못 보기 때문에. 그리고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거라. 숲을 지나갈거 같으면 위험도 있고 여러 가지 야생동물들이나 아니면 도둑이나 이런 위험도 있고 하는데 내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 싶어 전부다 먼저 가라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부탁을 하기를 내 동생이 있는데 내 동생한테 가서 그 형님 되는 스님이 여기 있으니까 나를 데리러 와달라 하고 부탁을 해라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스님들이 부처님한테 인사드리러 가면서 이 스님의 동생한테 가서 얘기합니다. 동생이 갈 형편이 못되니까 조카를 보냅니다. 그런데 조카를 보내면서 출가를 시켜 사미를 만들어가지고 보냅니다.
그래서 이 마하빨라 스님이 조카의 인도하에서 부처님을 뵈러 갑니다. 지팡이가 있으니까 지팡이 한쪽 끝을 줘가지고 조카가 잡고 가게 되죠. 그러다가 조카가 마음에 욕망들이 일어나고 해가지고 도저히 자기는 출가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삼촌 때문에 출가를 하게 됐으니까 고마 가는 길에 그 마음이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세속 옷을 갈아입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마하빨라 스님이 “너 같이 그렇게 마음이 자주 바뀌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그러한 사람하고 내가 같이 머물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 보내버립니다. 숲에서 그 눈먼 스님이 혼자서 있을 것 같으면 얼마나 큰 위험이 있겠어요?
어쨌든 가까스로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오게 됩니다.
부처님한테 오게 되기는 됐는데 계속 수행하던 버릇이 있기 때문에, 거주처에서 내일 아침되면 부처님한테 가서 인사를 드려야 돼. 그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가지고 경행을 열심히 합니다.
수행처에는 뭘 갖추어져야 되냐면 '꾸띠'라고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 앞에 반드시 갖춰야 되는 게 '경행대'입니다. 그래서 경행대를 일직선으로 쭉 표시를 해놓습니다. 스님들은 반드시 그 길로만 경행을 합니다. 다른 데를 경행을 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꾸띠 앞에는 반드시 경행대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고 나와서 그 경행대에서 경행을 합니다. 새벽이니까 벌레들이 많다는 거라. 경행을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벌레를 죽이게 되는 거라. 먼저 갔던 다른 스님들이 마하빨라 스님이 부처님 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갖고 이 마하빨라 스님을 뵈러 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벌레들이 막 죽어 있거든. 그래서 야! 이거 이런 일이 있어. 아라한이 깨달은 분이 생명을 죽였다는 거라.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이 마하빨라가 거짓말 한 죄가 있다는 거라. 눈병을 치료해 주는 사람에게 '내가 이 눈병을 치료하고 나면 내 자식하고 마누라를 당신이 종으로 삼도록 해주겠다. 이것만 빨리 치료해도!' 치료가 다 됐는데 치료가 다 되면 어떻게 돼요? 자기 자식하고 마누라를 종으로 줘야 되는데 그게 겁나가지고 치료가 안 됐다고 안 보인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의사가 화가 나가지고, 약속을 안 지킬려고 거짓말 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눈을 더 멀게 해버립니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이생에서 스님이 돼서 깨달음을 이뤘지만 눈이 멀게 되었다는 거라. 어쨌든 그런 행위로 인해서 일어났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게송을 한 것이 뭐냐면 지금 이 게송입니다.
[ 더러워진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로 인해서 괴로움이 따른다.
모든 행위는 마음이 앞서있고, 마음이 주인이고,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할 것 같으면 즐거움이 따른다. ]
이 게송을 해줍니다.
이 게송을 해주면서 마하빨라가 아니라 눈이 멀었다 해가지고 짝꾸빨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짝꾸빨라에게는 잘못이 없다." 벌레를 죽인 것에 대한 잘못이 없다는 거라. 모르고 한 것들이기 때문에, 모르고 한 것들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나오는 게 뭐냐면 「마음의 기능」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행위를 하면 괴로움이 따르고, 좋은 마음으로 행하면 즐거움이 따른다는 거라. 마음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보통 쩨따나(cetanā)라 해가지고 의지를 말합니다. 의지! 뭐 '어떤 것,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 하는 그런 기분, 그걸 쩨따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지가 앞서야 만이 행위가 있게끔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수행을 할 때 걷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걷는 행위가 있게끔 되는 거고,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들을 수 있게끔 되는 거고.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말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의지가 앞서야 만이 행동과 말이 따른다.
그게 <마음의 법칙>이라는 거라. 마음이 항상 앞서는 것이지 행위나 말이 앞서지는 않는다는 거라. 항상 마음이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기능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느냐하면 즐거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괴로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게 <마음의 기능>이라는 거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즐거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괴로움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거라.
몸이라는 걸 여러분이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마음으로 알면서 행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들 걸을 때 내가 알지 못하면 걷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내가 시키지 않으면. 쉽게 말하면 걷고 있는 것을 내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몸으로 하는 기능을 갖다가. 그런데 말하고 듣고 냄새 맡고 밥 먹고 하는 거의 모든 대부분 일상 생활들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하는 기능들입니다. 몸이 하는 거지만.
그런데 몸이 하는 것 중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또 있어요. 뭐를 모릅니까? 숨 쉬는 것! 내가 몰라도 숨은 죽기 전에는 자동으로 쉬어집니다. 또 눈을 깜빡이는 것! 내가 그걸 몰라도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몇 초마다 한 번씩 눈은 반드시 깜빡 깜빡거리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몰라도 밤에 자다가 뒤치닥거리기를 한다든지 이런 거를 한단 말이라. 이렇게 몸에도 아는 기능이 있고 모르는 기능이 있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마음의 기능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부처님이 보기엔.
즐거움을 가져오는 기능이 있고 또 괴로움을 가져오는 기능이 있다는 거라. 마음도 이와 같이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떨 때 마음이 즐거움을 가져올 수 있고, 어떨 때 괴로움을 가져오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거기에는 뭐라고 돼 있어요? 어떨 때 즐거움을 가져온다고 돼 있습니까? 여러분들 프린트물에 뭐라고 돼 있어요? 예. 깨끗한 마음으로! 더러워진 마음이 아니라 깨끗해진 마음으로 바른 마음, 선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고 더러워진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것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거라. 그게 이 <마음의 기능> 부분에 속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명체라도 행복하고 즐겁길 바라지, 괴롭고 불행하길 바라는 것이 있겠느냐는 거라. 안 그래요? 그런데 왜 모든 중생들 모든 생명체들은 다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고 괴로움도 있느냐는 거라. 왜 그러느냐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보기에는 <마음의 법칙>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마음은 항상 게을러지게 돼있고, 마음은 항상 욕심을 내게 돼있고, 마음은 항상 성질을, 화를 내는 것들을 가지고 있고, 마음은 항상 남을 질투하는 것들이 있게끔 돼있고, 그리고 마음은 항상 인색한 것들이 있게끔 돼있고, 이런 마음의 법칙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 기능을 하는 것 중에 즐겁고 행복한 것 쪽으로만 가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내가 의도하는 대로, 가라 할 것 같으면 내가 가는 걸 분명히 알고, 이런 것만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반드시 행복해지고 하겠지. 그런데 마음은 어땠어요? 몸의 기능에서도 내가 모르고 하는 것들이 있었거든. 자동적으로 해지는 거라. 숨 쉬는 거라든지.
마찬가지로 마음도 습관이 그렇게 들여져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일어나진다는 거라. 나쁜, 더러운 마음들이 일어나진다는 거라. 더러운 마음이 일어나니까 어떻게 돼요? 불행하게 된다는 거라.
'수카 까마 부따니(sukha kāma bhūtāni)'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존재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 어떤 존재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복하고 싶지, 행복하고 싶지 않은 부류는 없다는 거라. 해침을 당하지 않고 항상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거라.
그런데 안 되는 것은 <마음의 법칙> 때문에!
그게 인제 부처님이 보기에는 먼저 맨 처음에 게으름, '알라시양(ālasiyaṁ)'이라 해가지고 게으름 부리는 것. 여러분들도 그렇죠? 마음이 어떻습니까? 편안하고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지 쎄가 빠지게 노력할려고 하는 마음들은, 그런 마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면 좋은 거, 이걸 찾게 돼 있다는 거라. 그게 인제 부처님이 보기에는 게으름이라는 거라.
지금은 당장 베짱이 같이 행복할지 몰라도 겨울 되면 당연히 불행하게 돼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편안하길 바라고 하는 그런 것들도 게으름의 일종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왜? 괴로움으로 연결되니까!
그래서 그런 게으름이 일어나면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만약에 내가 하기 싫어지고 이럴 것 같으면 여러분들 어떻게 그 하기 싫어지는 마음들을 벗어나게 됩니까? '에잇! 그럼 안 돼!' 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게으름을 몰아내는 데는 '위리야(vīriya)'라는 거라.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게으름들, 쉽게 말해서 습관화된 게으름들 이게 인제 문젠 거라. 그러니까 그게 게으름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하는 거라. 지금 행복하고 편안하고 좋으니까, 그 생각만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어떤 것이든 변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편안하고 하는 것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게을러지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내가 지금 수행 잘되고 있다. 수행 잘되고 있으니까 '아! 편안하고 좋다' 해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거라. 발전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그거 편안한 거 그냥 항상 있으면 좋은데 그거 탁 깨지거든. 수행 안 하게 되면! 그러면 고마 오만 생각들에 시달리기도 하고 괴로움이 따라온다는 거라.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조용하고 편안하고 고요하기만 바래가지고는 절대 부처님이 말한 방법대로 즐거움을 계속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게 마음의 기능이라는 거라. '아! 이게 내가 게으름이 일어났구나' 하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게 마음의 하나의 기능입니다. 게으름이라는 것.
그다음에 또 마음의 법칙 중에 또 뭐가 있다고 그랬어요? 화내는 것, 성내는 것! 얘기했죠! 성내는 것들이 항상 있습니다. 성내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은 '아!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알고 있다는 거라. 그러죠? 그런데 왜 그걸 멈추지를 못합니까? 화를 낸다는 걸. 왜 안 멈춰져요? 화가 일어났을 때? 화 속에서 계속 있다 보면 화가 증폭되니까 화가 안 멈춰지는 거라.
만약에 화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화가 일어날 때라든지 하더라도 마음이, 자비로운 마음이 탁 생겨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화가 일어나다가도 탁 가라앉아 버린다는 거라.
자애로운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불이 나가 있는데 찬물을 딱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항상 자비로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들. 남녀 간에 한번 봐봐. 사랑하는데 언제 싸우고 화내고 할 시간이 있어? 사랑할 때는 전혀 몰라. 그러니까 사랑만 있으면 절대 화내고 싸우지를 않는다는 거라.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라. 화내면서 싸우고 하는 거는 사랑하는 마음이 그때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래서 화가 일어나는 마음은 마음의 법칙이니까 어쩔 수 없이 화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돼? 마음의 기능을 어떻게 잡아야 돼? 바른쪽으로 인도할려면? 마음의 기능은 즐거운 기능도 있고, 괴로운 기능도 있는데 괴로운 기능으로 안 가고 즐거운 기능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자애를 자꾸 키우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화가 일어날 때는 자비라고 하는, 자애라고 하는 것들을 만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냐 하면 그 일어나는 대상-대상이 싫다는 거라. 싫기 때문에 이걸 그냥 안 보고 싶다는 거라. 벗어나고 싶다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는 게 화라.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그 대상을 안 보고 싶다 해가 안 봐집니까? 원수 같은 놈 있다 해가지고 그거 안 보고 살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안 보고 살 수 있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우연이라도 안 만난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거는 모른다는 거라. 자신이 만나기 싫은 대상이라고 느낀다 해가지고, 배척한다고 해가지고 배척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극단적인 경우도 그러는데 가족들 중에 싫은 놈 있다 해가지고 안 보고 살 수 있나? 가족을 안 할 수가 있나? 그러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화를 다스릴 때는 다른 것이 없다는 거라. 자비! 사랑하는 마음을 자꾸 키워주라는 거라.
왜? 분노라는 것은 파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기능이 자꾸 커지면 문제가 더 커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 기능이 일어나기 전에 마음의 기능에서 반드시 키워줘야 되는 게 멧따바와나! 자애로운 마음들, 자비로운, 사랑하는 마음들을 자꾸 키워주라는 거라. 그게 마음의 바른 기능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능을 키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괴로움으로 빠진다는 거라. 나쁜, 더렵혀진 마음으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은, 싫은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는 거라. 더러워진 마음으로 할 거 같으면 괴로움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쉬운 것 같아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 같은 다원화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굉장히 힘든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슬람 분리주의라든지 이렇게 원리주의, 원칙주의를 잘 아는 부류들을 보면 대부분 보면 분노의 성격들이 강합니다. 화내는 성격들.
왜? 이것은 맞고 이것은 틀리기 때문에 틀린 것은 싫다는 거라. 싫기 때문에 배척한다는 거라. 자꾸 문제가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그런 것들에 원인이 큽니다. 우리도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했어. 우리도 그렇게 했어요. “니는 틀렸다!” 틀렸으니까 배척하고 투쟁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틀린 것들을 바른 것으로 개혁하자" 이렇게 부르짖는 거라.
그런데 그게 실상을 엄밀하게 보면 자기 자신의 분노-분노에 사로잡히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감정들이 더 많았다는 거라.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그런 부분들이 더 많아집니다. 많아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리해도 어떻게 해? 그게 일어나면 내가 불행해지는데, 내뿐아니라 사회가 불행해지는데 어떡할 거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키워야 되는 것이, 그래서 자애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마음의 법칙 중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뭐라 그랬어요? 게으름과 분노-화냄 말고, 질투하는 것이라고 했죠. 잇사(Issā), 질투하는 것.
질투는 쉽게 얘기하면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거라.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내가 쇼크를 받는다는 거라. 그것입니다. 질투한다는 건. 그런데 요즘은 현대사회가 되면서 더 도가 지나쳐서, 특히 요즘 여자들 보면 '야! 참 저런 형태의 질투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오늘 뭐 백화점에 가서 큰맘 먹고 옷을 하나 샀는데 탁 여기 선원에 와보니까 내하고 똑같은 옷을 누가 하나 입었거든. 그러면 여자들은 질투합니다. 자기보다 우월해서만 질투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자기하고 동등해도 질투가 일어난다는 거라. 옛날엔 그러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간에 질투라고 하는 것은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얘기합니다. 그렇게 질투가 일어나면 어떻게 돼? 당장 뭐 '에잇! 이 옷 안 입어' 하면서 옷을 찢어버리든지 안 그러면 집에 가서 다시 안 보게끔 어디 쳐박아 넣어버리든지 그러면서 화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든지 이렇게 된다는 거라. 질투가 일어나도 마찬가지 거참, 고치기가 힘이 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뻐해 주는 것! 함께 기뻐해 주는 것. 방법은! 내하고 똑같은 옷을 입었으면 “야! 이거 우리 쌍둥이 같이 얼마나 좋냐” 이렇게 같이 기뻐해 주는 마음만 있으면 질투는 안 일어난다는 거라. 그걸 무디따(muditā 喜)라고 그럽니다. 함께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런 질투하는 마음- 잇사라는 감정이 나오면 반드시 무디따로써 대처를 해줘야 됩니다. 그런 마음의 기능이 나와야지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지 안 그러면 마음이 더러워져서 불행하게끔 됩니다. 괴로움이 일어나게끔 된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다음에 또 마음의 법칙 중에 일어나는 것들이 맛차리야(macchariya), 인색한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두쇠라, 구두쇠. 안 줄라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물론 안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비유를 했지만 안 준다 해가지고 안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점점 더 고립됩니다. “이것은 내 것이니까 아무도 가져가지 마!” 탁 할 거 같으면 그럼 그것은 지혼자 사용해야 된다는 거죠.
물건이면 괜찮은데 그게 만약에 사회라고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친구가 안 만들어지는 거라. 그러면 내가 필요할 때 그쪽에 가서 도움을 청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내가 외로울 때도 그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거라. 인색할 것 같으면. 쉽게 말하면 '이건 내 것이니까 여기에 들어오지마'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느냐는 거라. 그럼 지 혼자 방안에서 어떻게 할 건데? 사회생활 안 하고 그러면 거기서 가만히 있을 건가? 사회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 교류가 되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사회라고 부르질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인색해가지고는 지 혼자서는 잘 살지 몰라도, 사회생활을 할 때는 절대 바르게 살아가지지를 못한다는 거라.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또 버림을 받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공유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서로 분담하고 나누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인색한 것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누도록 하라. 나누는 것들을 즐겨하라 그럽니다. 그래서 공유할려고 하고 분담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내가 아무리 뛰어나가지고 잘났다 해가지고, 예를 들어서 모든 걸 다 내 혼자 할 것 같으면 일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한량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지가 스트레스 좀 안 받고, 여유롭게 지내고, 행복하게 지낼려면 그걸 나누는 수밖에 없는 거라. 일도 나누어야 되듯이, 마찬가지로 자기가 가진 것들도 나누어야 되는 거고, 자기의 지식도 같이 나눠야 되는 거고, 모든 것들을 자꾸 나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걸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사회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걸 인제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공동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법칙 중에 또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나」라고 하는 것, 마나(māna), 아만이라 그러죠! 내가 최고다. 나라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꾸 배척을 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혼자 자꾸 고립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기능들은 되도록이면 죽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 대신에 어떤 마음들을 가져야 되겠어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자꾸 일어나면?
나, 나의 것, 나의 가족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평등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걸 '우뻭카(upekkhā)'라고 그럽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 사람도 똑같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고, 나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고. 똑같이 나도 해침을 받지 않기를 바라고, 그 부류도 해침을 받지 않기를 바라고, 그래서 모든 부류들을 평등하게 자꾸 대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질려고 해야 되는 거고, 내 자식이 귀엽다고 남의 자식이 안 귀여워야 되는 법이 없다는 거라. 똑같이 자꾸 대할려고 하는 마음들, 그렇게 해야 만이 나라고 하는 아만을 누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마음의 법칙 중에서 일어나기 쉬운 것이 뭐냐하면 꾹꿋짜(kukkucca), 후회하는 것! '아, 이래선 안 되는데' 후회라는 것은 뭡니까? 과거로 자꾸 돌아가는 겁니다.
물론 후회하고 참회하고는 다릅니다. 참회라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해서 돌이켜 가지고 반성해서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나아간다는 의미인 것이고, 후회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계속 곱씹으면서 거기에 대해서 침체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살을 하기도 하고 비관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이런 후회가 일어날 것 같으면 전혀 나에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후회가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자꾸 긍정적으로 밝게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키우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때 부정적인 거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자꾸 가지라 하는 거고, 그리고 어두운 것보다는 밝게 마음을 가져라 하고, 그 꾹꿋짜(kukkucca)라고 하는 후회 부분들을 드러내 주는 방법들입니다.
그게 마음의 법칙이고, 그 마음의 법칙에 따라서 마음이 좋은 기능도 하고, 나쁜 기능도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차피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좋은 기능을 자꾸 더 계발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나쁜 기능을 할 거 같으면 왜? 내가 불행해지니까!
그게 부처님이 여기 첫 번째 게송과 두 번째 게송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왜? 물질적인 것들, 행동하고 말하고 하는 것은 마음이 먼저 앞서야 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 마음을 그 마음의 기능 중에서 불행으로 연결되는 마음의 기능을 일으킬려고 하지 말고, 행복으로 연결되는 마음의 기능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자꾸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또 남에게 같이 공유하고 베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사랑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고,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정립해놓은 것이 뭐냐면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내 자신이 괴로움이 없기를, 다른 사람이 괴로움이 없기를"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내 자신이 지혜롭기를, 다른 사람이 지혜롭기를"
이런 '네 가지 마음' 그걸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그럽니다.
사무량심을 자꾸 가지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기능하는 방법이다 하는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모든 물질적인 것들 이런 것들은 마노(māno)-마음이 앞서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 되기도 한다는 거라. 마음 나름이라는 거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거라. 왜? 우리도 같은 중생인데, 중생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불행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행복해라는 거라. 행복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게 인제 사무량심을 닦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 사무량심을 닦고 하면서 그것만으로써는 또 존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쉽게 말하면 내가 행동하면서 '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항상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행동할 때는 행동을 해야 되는 거라. 내가 밥 먹을 때는 밥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밥 먹으면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라?
가만히 멈추어 있을 때 사무량심을 닦아야 되는 거라. 사무량심은 움직이면서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경행하면서 사무량심을 닦을 수 있습니까? 못 닦죠! 그럼 언제 사무량심을 닦을 수 있습니까?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서 있을 때 이럴 때는 사무량심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 있을 때는 서 있는 것은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사무량심을 오래도록 닦을 수가 없습니다. 누워있을 때는 편안함이 강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사무량심을 닦기에는 부적합합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마음이 편안하고 이미 고요해져있기 때문에 사무량심보다는 수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 대신에 앉아있을 때는 대부분 우리는 앉아있으면 30분 아니면 한 시간씩은 앉아 있는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맨 처음 해야 되는 것은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일상적인 사마타든 위빠사나 수행이든 수행으로 들어가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수행 지도하는 스님들이 처음에 초심자가 올 거 같으면, 뒤에는 그렇게 안 시킵니다. 뒤에는 이미 사무량심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고 왔기 때문에 항상 닦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안 시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앉아가지고 1분 아니면 2분을 사무량심을 수행하라고 그럽니다. 앉아가지고 '아! 행복하기를'하는 마음을 지극정성으로 내고, 그다음에 또 '다른 대상에게 행복하기를'하는 마음을 내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내고, 이런 수행을 자꾸 닦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도 반드시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 따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염불하는데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행복하기를' 한다고 해가지고 행복해집니까? 그건 아니죠.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누구든지 죽게 돼있습니다.
그럼 죽음에 대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나는 반드시 죽는다.'하고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죽음, 죽음, 죽음...' 하면서 수행을 합니다.
그 수행 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럽니까?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마지막 임종의식, 그로 인해서 그다음에 새로운 죽음의 의식이 생겨납니다. 그 새로운 죽음 의식을 쭈띠 찟따(cuti citta, 死心) 라고 합니다.
그 새로운 죽음의 의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환청이 들린다든지, 아니면 죽은 친지가 보인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행복한 음악소리가 들린다든지 이런 것들이 보인다는 거라. 그런 것으로 해가지고 그다음에 새로운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거라. 순차적으로 이렇게 일어나지게 되는 거라. 아주 짧은 찰나 동안에.
죽음에 대해서 명상을 하는 자는 이것을 수행을 하도록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죽음, 죽음, 죽음' 한다고 해서 그 명칭에 붙잡혀 있으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죽음에서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 이걸 관찰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애수행을 한다. 멧따바와나 한다.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수행을 해야 되겠어요? 행복한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관찰대상으로 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명칭을 잡고 수행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거라.
행복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의식이 일어나는가? 그 의식은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것들을 반드시 수행대상으로 잡아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수행대상 자체가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도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사무량심을 닦을 때는 최종적으로 가야 되는 것이 '우뻭카(upekkhā)'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행복하기를'하는 거기에만 붙잡혀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내가 행복해지지도 않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간혹은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다 보면 그 행복해지는 명칭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마음은 진짜 행복한 의식에 잡혀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마음이 방사가 됩니다. 그거는 명칭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런 경우가 아닐 것 같으면 자애수행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처음 수행을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1분 아니면 2분만 하라 그럽니다. 왜? 그 상태까지 넘어가지지를 않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명심해야 되는 것은 1분 2분 이상을 넘기면 안 된다는 거라. 왜? 어차피 여러분들은 위빳사나수행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자애수행을 한다. 그러면 자애수행은 대상에 대해서 함몰을 해야 됩니다. 깊이 있게 들어가야 된다는 거라. 깊이 있게 들어간다는 것은 찰나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삼매를 계발하게끔 됩니다. 선정도 초선정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선정으로 넘어가야 된다는 거라.
최종적으로 계발해야 되는 것은 그거라. (사마타 수행자는) 사선정까지 가는 것! 그리고 깊은 삼매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그 대상을 오롯이 할 것 같으면 그 대상이 변하지 않고 오롯이 그 대상 하나만 있는 그걸 관찰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만약에 행복하기를 한다면 그 행복이라는 대상에 그대로 붙잡혀있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일주일도 좋고 이렇게 삼매에 쭉 빠지게 되거든. 그 순간은 좋은데 깨어나고 나면은 큰 이익은 없다는 거라.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반드시 본삼매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선정도 일선정 이상으로 넘어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라.
찰나 간에 자꾸 삼매가 연결돼야 되는 것이고, 그런 자나(jhāna, 선정)도 항상 네 가지가 동시에 다 있어야 됩니다. 위딱까(vitakka, 尋), 위짜라(vicāra, 伺)라고 하는 것, 삐띠(pīti, 喜)라고 하는 것 수카(sukha, 樂)라고 하는 것, 에깍가따(ekaggatā, 一境性)라고 하는 것, 이 다섯 가지 요소는 항상 나타나야 만이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거라.
그럴려면 초선정에 있어야 돼! 초선정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사선정까지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라. 이게 바로 네 가지 사무량심의 위험성이라는 거라.
그래서 처음의 초심자들에게는 이 수행법을 가르쳐줍니다.
가르쳐줘가지고 의도적으로라도 자꾸 자애의 마음들을 펼치게 하고, 남과 같이 더불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또 인색한 것들을 자꾸 몰아낼려고 하고, 후회하는 마음들을 없앨려고 하고, 이렇게 자꾸 방향을 틀어줍니다. 틀어주는데 그것도 일정 부분까지만 하라는 겁니다. 일정부분이 넘어가버리면 함몰되기 때문에, 함몰되기 때문에!
그래서 어느 정도 수행이 지나고 나면 이 수행의 예비단계 네 가지는 하지마라고 그럽니다. 하지 말고 바로 위빳사나를 하라 그럽니다. 그것을 하면 할수록 위빳사나로 전환하기가 자꾸 힘들어진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평소에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앉아서 자애수행을 하고, '내가 행복하기를,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이런 마음들을 어느 정도 가지다가도,
명칭에 붙잡혀있지 말고 그때 일어나는 의식에 자꾸 두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때 마음에! 마음에 두려고 해야 되고,
그러고 나서는 그것을 1분, 2분하고 나서는 중단을 딱 해야 된다는 거라.
중단하고 나서 그 마음으로 인해서 이미 찰나 삼매가 계발이 돼 있어버리면 그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이 자꾸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바로 위빳사나로 뛰어들게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상태를 관찰할려고 하고, 또 앉아있을 때는 일어나는 현상들, 가장 두드러진 현상들, 내 앞에서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하라고 그러는 거라. 그렇게 자꾸 만들어주는 것이 '바른 수행이다'하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인제는 이 게송을 통해서 마음의 기능에 대한 것들은 이해가 됐을 겁니다.
마음은 항상 나쁜쪽으로 빠지기도 하고, 바른쪽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정해져 있습니다. 마음은 바른쪽으로 빠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걸 일상 습관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일상 습관화되도록 할 때는 그 방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할 때는 그 방법을 오래도록 쓰지 말아라. 그 방법을 쓰더라도 그것의 명칭에 붙잡혀 있으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그때의 의식에 마음이 가도록 자꾸 하라.
그것도 1분, 2분만 하고 바로 지금 현재에 일어나는 대상- 호흡이면 호흡, 아니면 생각이면 생각, 그다음에 행동이면 행동 이런 것에다가 마음이 자꾸 가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왜?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을 것 같으면 명칭을 붙잡고 있어도 되고, 일상생활을 할 때 오로지 그런 마음만 계속 가져도 됩니다. 쉽게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것, '無, 無'하고 거기 붙잡혀 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거라.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는 거라. 한시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수행은 자명하게 되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 변해가는 대상을 수행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머잖아서 여러분들도 '아! 이게 바른 수행이구나'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오늘은 수행에서 저번 시간 마음의 법칙에 이어서 마음의 기능에 대한 부분들을 얘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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