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10. 괴로운 느낌 (20090714)

담마마-마까 2019. 11. 19. 17:40

https://youtu.be/O_jUHkruxe4 

* 괴로운 느낌 (20090714)

 

괴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곳은 어떤 게 있을까요?

어디라고요? 여섯 개의 감각기관 이외에는 받아들이는 곳이 없습니까?

피부도 물론 내 몸에 해당이 되겠죠. 또, 그거 말고는 없을 거 같아요?

그럼 감각기관을 닫아버리면 외부적인 자극으로부터는 자유롭게 되겠네? 꼭 식물인간이 안 되더라도 내가 보기 싫으면 고개를 돌려버리면 되잖아. 그럼 그것으로부터 피해지잖아. 그럼 그것으로부터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지 않겠네?

(문답...)

 

불교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여러분들 손톱이나 발톱 깎아보죠? 그거 깎아내버린다고 해가지고 아픔을 느낍니까? 안 느끼죠. 그런데 그거 말고 내 살점이 떨어져나가면 아픔을 느끼죠! 이빨도 아픔을 느낍니까? 이빨 자체는 아픔을 느끼는 게 아닌데 그 안에, 위에 있는 신경 자체가 아픔을 느끼는 거죠.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죠. 머리카락을 아무리 꼬집어봐도 아픈 걸 모릅니다.

그래서 몸이라 하더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게 있고, 아픔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손톱 발톱, 이빨 같은 걸 제외한 모든 몸의 기관, 피부를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문을 닫아버린다 해가지고 그 자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일단은 한번 탁 봤다 그러면 그뒤에 그걸 안 본다 하더라도 그 자극은 남아있게 되는 거죠. 그게 왜 그러냐면 단순히 감각기관만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거 같으면 당연히 감각기관을 닫아버리면 그게 없어져야 되는데 그거는 아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기 전에, 그걸 아비담마에서는 투명한 요소라고 그럽니다.

 

투명한 요소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에,

투명한 요소는 쉽게 얘기하면 눈의 망막이 있으면 그 망막 맨 첫 부분을 얘기합니다. 첫 부분에 일단 닿기만 하면 일단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거라. 안 봐졌을 거 같으면 문제가 다른데 일단은 눈을 감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투명한 요소에 영향을 미친 상태에서는 그거는 자극을 받게끔 된다는 거라. 그건 인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다 보면 그 투명한 요소에 대한 것들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어쨌든 크게 나누면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감각기관이라 하더라도 감각기관에 앞선 투명한 요소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밖에 감각대상들이 원인이 돼서 괴로움을 받습니다.

 

또 어떤 게 있을까요?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건? (수행자 대답)

그렇지! 마음에서 불만이 있다든지, 화가 난다든지, 마음속에서 좌절 같은 것이 있다든지 이럴 거 같으면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괴로운 느낌은 꼭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만 오는 건 아니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만족이라든지 화라든지 슬픔이라든지 좌절 같은 이런 것들이 있으면 당연히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후회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 얘기는 뭐냐면 괴로운 느낌을 완전히 제거할려고 할 거 같으면 우선 가장 먼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게 화내는 것들, 불만족이라든지 좌절이라든지 이런 것도 화내는 것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화내는 것들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면 괴로운 느낌을 사실은 종식시키기가 힘이 든다 하고 얘기합니다.

 

괴로운 느낌은 아비담마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성냄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얘기합니다. 즐거운 느낌은 뭐라고 그럽니까?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모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간혹 수행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할 건데, 그게 내가 평균적으로 봐서 괴로운 느낌이 좀 많은 편이다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화를 내는 성품이 강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성품들을 먼저 자꾸 다스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은 안거 · 왓사 중입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가장 먼저 와 닿는 것이 뭐냐면 괴로운 느낌들이 가장 먼저 와 닿습니다.

괴로운 느낌도 통상적으로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가벼운 괴로운 느낌이 있고, 또 굉장히 무거운 진짜 고통스러운 그런 괴로운 느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나을까?

여러분들 몸을 가끔씩 움직이죠? 왜 움직이는 거 같애요? 가벼운 괴로움이 있는데 그 괴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몸이 움직여지는 겁니다. 그렇게 떨치기 위해서 움직여도 조금 있으면 또 일어납니다. 그럼 또 움직이게 됩니다.

수행할 때, 좌선하고 있을 때 움직이라고 합니까, 안 합니까? 하지 마라고 그러죠. 왜 그런지 아세요? 습관화되니까! 작은 괴로운 느낌들을 알아차리는 힘들을 키우지 못하고 그냥 스쳐버린다는 거라. 일어난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거하고 있다는 거라.

 

나무를 하다가 손가락에 조그만 가시가 하나 살짝 베겼다, 별로 그렇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그냥 놔둔 채 계속 일을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 아픔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이 가시가 자꾸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서 나중에는 가시 뺄 때 처음에 그냥 살짝 베겼을 때 집게로 살짝 뽑았으면 될 거를 갖다가, 안으로 박혀버리면 살을 갖다 파내야 돼.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을 무시하게 됨으로 인해서 진짜 고통스러운 무거운 괴로운 느낌으로 변했을 때는 그걸 또 잡으면 되는데 그걸 잡을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수행을 할 때 움직이지 마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움직일 때는 반드시 그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수행을 해나갈 때 이와 같이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데 유의해야 되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게 있는 그대로의 괴로운 느낌, 통증이라고 하는 괴로운 느낌을 자연적인 성품으로써 알아야 됩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지 그게 무슨 별나라에서 툭 떨어지듯이 나에게 온 것은 아니라고 먼저 인식을 해야 됩니다. 손이 굽어져있으니까 당연히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는 거라. 자연적인 거라. 그래서 우리는 이걸 피하기 위해서 손을 펴는 거라. 자연적인 성품인 것이지 이것만 특별하게 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숨은 여러분들이 목숨 붙어있는 한은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이거는 자연적인 성품이라고 다들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가오는 괴로운 느낌은 자연적인 성품으로써 받아들이질 않는다는 거라. 똑같은 자연적인 성품이라는 거라. 그렇게 먼저 그 괴로운 느낌들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오는 괴로운 느낌들은 다양한 원인으로 해서 와집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들,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들, 그다음에 우울한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 또 내가 불만족한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 이렇게 다양한 것들로 와진다는 거라.그 다양한 것도 외부적인 자극이 사라져버리면 그 괴로움도 사라지는 거고, 불만 같은 것도 내가 없을 거 같으면 괴로운 느낌도 사라지는 거라.

 

자연적인 느낌의 한 형태라고 봐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항상 지속하는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느낌은 항상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느낌을 갖다가 자연적인 성품인데 그걸 관찰하려다 보면 대부분 보면 원인으로 인해서 왔다가 원인이 사라지면 그 괴로운 느낌도 사라진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는 거라.

이미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사라졌는데도 괴로운 느낌을 항상 가지고 있는 거라. 왜 그렇게 되느냐는 거라. 내가 괴롭다고 생각하니까! '나'라는 것이 탁 개입이 돼버리면 이게 상존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원인이 사라지면 그것도 같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서 온 겁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사라졌는데도 결과가 남아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어떻게 판단해야 됩니까? 여러분들이 붙잡고 있는 것밖에 안 되는 거라. 붙잡는 새로운 원인을 만든 것뿐이라. 그래서 '내가 괴롭다, 내가 아프다' 하는 그런 것들로 연결시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더 내가 괴로워집니다. 더욱 고통스러워집니다.

 

여기에 불이 났다고 해봅시다. 여러분들은 그 불을 끌려고 굉장히 노력을 할 겁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괴로운 느낌이 들 겁니다. 당사자일 때 '아이고, 저거 어떡하나?' 그런데 제삼자들은 이걸 봤을 때 어떻게 볼까? 우리하고는 다르겠죠! 똑같은 불인데 괴롭다고 느끼질 않습니다. 그냥 그 불난 것만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항상 괴로운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 불이 다 꺼지고 나도 괴로운 거고, 불이 붙고 있을 때도 괴로운 거고, 그런데 그것이 아닐 경우에는 어떻게 돼요? 그렇게 괴로운 것이 오래 지속이 안 된다는 거라. 더 큰 고통을 초래하지 않도록 자꾸 '''괴로운 느낌'은 분리를 해야 됩니다. 그걸 분리시키지 못하면 괴로움에 자꾸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또 하나 유념해야 되는 거는, 수행을 해나갈 때 나쁜 의도로 인해서 일어나집니다. 특히 수행처소에서 그러거든요. 이 괴로운 느낌을 관찰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시간 세 시간, 아니면 좌선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괴로운 느낌을 완전하게 통찰해서, 그 괴로운 느낌에 영향을 안 받게끔 할 수 있을까요? 누구 그렇게 해 본 사람 한번 얘기해 봐요. 되든가요? 선등님 저번에 한 번 해봤죠! (수행자 대답)

그리했는데 다시 또 그런 괴로움이 안 나타납니까? (수행자 대답)

 

스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해봤거든요. 일주일 동안 요놈을 안 움직이고 이걸 내가 몸을 다스려보자 해가지고 묶어놔 놓고 해봤어요. 나중에 지나면 고통스런 느낌은 해소가 됩니다. 해소가 되긴 되는데, 내가 알아차려서 해소를 한 게 아니고, 자연적인 성품으로 지가 왔다가 가게 되는 거라.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물론 조금 더 좌선하기는 편해지죠. 오래도록 그렇게 자꾸 습관을 쌓아왔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자연적인 성품을 관찰하는 거하고는 별개의 문제라는 거라.

 

불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걸 관찰할려고 할 거 같으면 안 돼!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여러분들도 의도를 갖다가 불선한 의도, 성내는 의도를 가지고 이 괴로운 느낌을 관찰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수행에서 어떻게 해야 돼요? '요시! 괴롭다 이놈 내가 한번 관찰해보자' 하고 마음을 먹으면 절대 안 된다는 거라. 왜? 이미 성낸다는 마음이 일어난 상태고, 또 이걸 관찰하는 걸 자연적인 성품을 관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싸워갖고 내가 이길려고 하는 것들을 우선 관찰하게 되는 거라. 불선한 의도가 되버리는 거라. 수행에서 그것을 완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걸 극복해내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의도도 불선한 것들을 내지 말고, 성냄도 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 오래도록 앉아서 좌선할려고 하지 말고 정해진 시간만. 정해진 시간 한 시간 한 시간 했으면 한시간 하고 나면, 수행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 잘되는 걸 갖다가 '내가 조금 더 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가버리면 이미 집착해버립니다. 그럼 똑같은 현상만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정해진 시간 하고 나서 경행하고, 경행하다가 다시 좌선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수행에는 훨씬 이롭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위축되면 안 됩니다. '아! 이것을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일어나버리면 이미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없어져버립니다. 물론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위축되는 마음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내가 지금 할 것은 그냥 바른 노력으로써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 뿐이라고 자꾸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상에다 자꾸 갖다 붙일려고 해야 되지 '아! 이거 해보니까 내가 도저히 못 참드라' 이런 마음이 앞서버리면 십 분 정도 알아차림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을 갖다가 몇 분 못하고 한 오 분 하다가 그냥 포기해버린다는 거라. 위축될 필요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관찰해 나갈 때

가벼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질 때를 놓치지 말도록 해야 됩니다. 가벼운 느낌들은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소소하게 일어나는 것들, 매일 매일 일어나집니다. 그것을 자꾸 놓치면 안 됩니다. 가벼운 느낌을 놓쳐버리면 무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도저히 내가 잡아나가지를 못해. 가벼운 느낌부터 하나씩 하나씩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가벼운 느낌들을 자꾸 내가 편안하게 만들려고, 변경을 하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 좌선할 때 탁 한 시간 앉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럽니까?

한 시간 동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말고 관찰하라. 거기서 일어나는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이 수행 대상인데 그걸 자꾸 움직여줌으로 해서 그 대상을 내가 피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내가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호흡이 관찰이 되겠느냐는 거라. 안 된다는 거라.

 

가볍게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들 이것을 항상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나가라. 느낌이 있으면 느낌이 있음을 탁 알아차리고, 그것을 완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그것 자체를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다른 대상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고 그걸 무시해버리는 습관들을 자꾸 들여놓으면 나도 모르게 그게 습관화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괴로운 느낌 가벼운 느낌들을 피하는 것이 즐겁다 행복하다 하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면 안 됩니다. 다리를 폄으로 인해서 고요해지고 또 편안해지니까 그것이 좋다는 생각을 일어나면 자꾸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거 절대 즐거운 거 아닙니다. 대상을 내가 피해버린 것이지, 수행하는 사람이 대상을 피해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편안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 편안한 느낌이 항상 하든가? 또 그거는 괴로운 느낌으로 안 바뀌나? 바뀌게 돼있다는 거라. 대상자체를 그냥 대상으로써 인식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오래도록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관찰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특히 여름철이니까 수행하기 좋은 때입니다. 그런 가벼운 괴로운 느낌은 언제 그렇습니까? 모기에게 물렸을 때! 모기에게 물렸다. 모기에게 물린 것은 사실은 가벼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습관이 되놓으니까 어떻게 되요? 요놈을 긁어버리는 거라. 그냥 그 가벼운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로 알아차리면 그 가벼운 괴로운 느낌은 감소됩니다. 감소되고 나중에는 영향을 못 미치게 됩니다. 그러면 긁지 않아도 되고, 조금 뭐 붉으레하게 지가 자연적으로 올라왔다가 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상처도 덧나지 않고 하는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먼저 긁어버린다는 거라.

 

이런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을 수행대상으로 자꾸 삼도록 해야 됩니다.

또 좌선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 다리가 구부러져 있을 때 오는 괴로운 느낌들이라든지, 손에서 서로 부딪쳐서 오는 가벼운 괴로운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꾸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스님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소리가 이렇게 들립니다. 우리 태국에 있는 스승님이 가르치는 방법인데, 소리가 들리면 소리에서 일어나는 자극들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은 가벼운 괴로운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모든 느낌은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맨 처음에는 괴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집니다. 절대 즐거운 느낌으로는 안 다가와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하더라도 자극을 받았을 때는 괴로운 느낌으로 들립니다. 이걸 먼저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다른 거 다 무시하고 이것만 일단 했어요.

 

이거 하다 보니까 이 자극이 굉장히 큰 괴로운 느낌으로 다가와집니다. 그래서 그 똑같은 소리인데도 그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립니다. 그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거기서부터 그걸 조금 더 명확하게 파악을 하도록 하라. 그래서 그 소리가, 굉장히 큰 자극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을 갖다가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게 또 재미를 붙여놔 놓으면 그 소리들을 가지고 괴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그 괴로운 느낌이 큰 자극으로 와 닿았다, 그러면 그걸 갖다가 변한다는 사실은 놔버리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 버립니다. 그러면 작은 자극에서 큰 자극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면 재미가 있으니까 계속 그걸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귀가 아파요. 아무 소리도 아닌데도 굉장히 큰 자극으로 내가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가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대개 혼을 내더라고.

 

'모든 느낌들은 괴로운 느낌인데 그 괴로운 느낌을 이미 너는 즐거운 느낌으로써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라. '괴로운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괴로운 느낌은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왜 자꾸 잊어먹느냐.'

그때 정신을 퍼뜩 차렸어요. 그러고 나서는 조그맣게 오는 자극들도 놓치지 않을려고 하고, 그 자극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려서 빨리 이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아차려나가는 거라. 모든 걸 이렇게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 때 탁발을 나가서 공양물을 받아왔는데 그 공양물에 좀 나쁜 성분들이 있었던 모양이라. 그 공양을 받았던 스님들은 모두 복통으로 다 쓰러졌어요. 그런데 그 복통이 일어나자마자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다른 스님들은 그렇게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안 해왔으니까,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그 느낌이 왔을 때 못 알아차리는 거라. 그게 조금 크게 왔을 때 알아차리니까 이미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배를 붙잡고 그냥 뒹구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그 느낌을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나가니까 이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실제로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더라도 내가 정신적인 고통으로까지는 발전이 안 되는 거라. 고통스럽기는 하더라도 내가 뒹굴 이유는 전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거라. 똑같이 탁발 받은 사람들은 다 병원에 실려갔는데 스님은 왜 안 가느냐? 하는 거라. 나도 병원에는 가. 그런데 실려가지고 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내 발로 걸어간다는 거라. 그런 경험들을 참 많이 합니다.

 

태종사에 있을 때도 그랬거든. 누가 위에서 일을 하다 잘못해서 유리가 탁 떨어졌어. 밑에 있는 내가 유리 떨어지는 걸 신통력이 있어서 보지는 못하니까, 그냥 유리가 와서 다리에다가 착 쳐버렸어. 여기 보면 44바늘이나 꿰맨 적이 있어. 이게 치면서 다행히 다리를 부러뜨리지는 않고 살을 다 파 없애버렸어. 그러니까 뼈가 이렇게 싹 드러나 버리게 됐는데, 그러니까 피고 뭐고 계속 흘러나오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갖고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거라.

그 순간에도 이 괴로운 느낌을 관찰을 하는 거라. 그렇게 병원에 갔는데 저녁때가 되어가지고 담당의사가 없어. 아침에 수술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워낙 이 상처 입은 부위가 크기 때문에 진통제를 놓으면 그다음날 수술하는데 이게 장애가 된다고 그러네. 그래서 못하는 건 아니지만 바로 수술하기가 힘이 든다, 어떡하겠느냐, 아침에 수술을 바로 할 거 같으면 그 진통제를 놓지 말고 견디라고 그럽니다. 그럼 그리하겠다고.

 

이 아픔이 오는 순간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거라. 일어난 것은 사라지고, 사라지고 나서 다시 또 일어나고, 그 순간순간만 계속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보니까 아픔이 없어. 아픈 게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이건 그냥 놔버려도 되는 거라. 놓아버리고 그냥 호흡을 하고, 밤이 되다보니까 그냥 호흡하다가 잠이 들어버렸어. 주변에서 간호하는 사람들은 피범벅이 돼가지고 이렇게 돼있는데도 스님은 옆에서 쌔근쌔근쌔근 자고 있고, 자기들은 근심이 돼가지고 그걸 그냥 계속 밤새 지키고 있는 거라.

그런 거는 있더라고. 도저히 못 참을 정도가 됐을 때는 신음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아' 하면서. 그런데 '아'하는 그것도 알아차릴 대상인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또 고통을 관찰합니다. 왜 이렇게 될 수 있느냐 하면 가벼운 괴로운 느낌들을 항상 놓치지 않을려고 해왔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인데, 어느 스님이 굉장히 몸이 괴로웠어요.

위장장애로 인해서,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위암 같은 그런 형태를 띠었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가서 그 스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스님은 출가자가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스님은 수행하는 수행자가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스님이 딱 한 마디만 합니다. “수행자는 인내하는 자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스님은 가버렸어요.

이 아픈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그 아픔을 참아내지 못했다는 거라.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거라. 퍼뜩 정신이 드는 거라. 그래가지고 관찰해가지고 그 위암을 다스립니다.

위암이 안 나을 거 같죠? 낫습니다. 암 덩어리 자체는 어떤 겁니까? 딱딱하게 굳은 겁니다. 이게 쉽게 말하면 유동성이 있을 거 같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유동성이 없어져서 수분이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이게 굳어져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거라.

이 굳어진 것도 운동을 안 합니까?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운동작용이 있는데 이 암덩어리는 안 그럴 거 같애요? 끊임없이 운동작용이 있는 거라. 그걸 있는 그대로 그냥 관찰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이게 그냥 터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이 스님은 암을 다스려가지고 나았어.

실제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괴로운 느낌, 그게 어떤 대상이든지 그걸 관찰해가지고 다스려 나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안 되는 법이 없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그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리는 마음을 갖다가 아는 마음도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됩니다.

괴로운 느낌의 종식은 반드시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 괴로운 것을 아는 마음도 종식이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종식이 있다는 사실이라.

이 세 가지를 빨리 이해를 해야 만이 가벼운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 그것을 다스려 나갈 수가 있는 거라.

 

일어나는 현상은 반드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만 끝나는 게 아니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도 끝나는 거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끝나는 거고, 그거 끝나고 나면 어떻게 돼요? 알아차리는 마음은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 거라. 여기가 끝났으니까 호흡으로 돌아오는 거고, 느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느낌은 계속하여 변합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빠른 속도로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괴롭지 않은 느낌은 사실은 없습니다. ? 우리는 즐겁기를 바라는데 느낌은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 나에게 다가와지는 것은 괴로움으로만 다가와지는 거라. 그래서 '아! 여기에 어느 것에서도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만 느낌도 없구나.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성품을 그 작은 괴로운 느낌에서 빨리 발견을 해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놓치기 쉬운 것들을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든지 일어나는 즉시 바르게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도 여러분들 귀에는 끊임없이 그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또 다른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손을 가지고 피부를 문질러 보면 '띠디디디'한 느낌들이 있습니다. 피부에 와 닿는 것들도 전부 그런 느낌들이 있습니다. 바람으로 인해서든지.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무시한다는 거라.

자꾸 예리하게 깨어있을려고 하고 그중에서 조금 크게 다가와지는 괴로운 느낌들을 빨리 알아차려나가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