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8. 경행방법 3 (20090705)

담마마-마까 2019. 11. 13. 17:37

https://youtu.be/7x542zFUi2k 

* 경행방법 3 (20090705)

 

저번 시간까지 경행의 3단계에 대한 얘기를 쭉 했습니다.

어디까지 했죠? 경행의 3단계 할 때? 움직임을 알고, 그 움직임을 명확하게 파악을 하고, 그래서 구분할 수 있게끔 하고, 그래서 멈추는 걸 알면 구분할 수 있게끔 된다고 했죠! 그러고 나서 경행하면서 일어나는 느낌, 4대 요소에 대한 것들을 갖다가 실재적으로 관찰을 하라. 그리고 그 사대요소도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라는 그 부분까지 얘기를 했습니다.

 

왜 그게 기본이 돼야 되느냐 하면, 서로 손 한번 잡아봐요. 자기 왼손하고 오른손을 한번 잡아 봐요. 탁 잡으면서 느낀 것들이 뭐라? 알아차린 것이? 따뜻함,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손이 거칠다든지 이런 인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따뜻하다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이 거칠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손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명칭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것은 '손'이라고 하자 약속하고 이름을 붙여 놓은 거라. '손'이라고 안 하고 '발'이라고 이름을 붙여놨으면 당연히 인식할 때 '발'이 거칠다 하고 인식을 하겠지.

 

그런데 '거칠다' 하고 인식을 했을 거 같으면 거친 성품을 인식했으니까 실재적인 것을 인식하는 건데, 대부분 사람들은 보면 '손이 거칠다' 아니면 물렁물렁 하면 '살이 많다' 이렇게 인식을 한단 말이라. '손'이나 '살'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여 놓은 거 뿐인거라.

그래서 이것들을 먼저 내가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빤냣띠(paññatti), 개념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딱딱하다' '따뜻하다' 아니면 '부드럽다' 하고 인식하는 것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해서 '빠라맛타(paramattha)'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을 할 때는 항상 실재적인 것을 인식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실재적인 걸 인식을 잘 못합니다. 습관지어 왔기 때문에!

 

(수행자 질문)

간단하게 할게요. 공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이 뭐냐하면 스님 법문이나 아니면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이 그렇게 해서 보고 듣고 한 것을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고, 그다음에 세 번째 방법이 뭐냐면 자기 스스로 체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불교수행이라는 것은 마지막 세 번째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체험되지 않은 것은 일단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부정을 합니다. 그게 기본인데 서양 철학이나 아니면 일상적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대부분 첫 번째하고 두 번째에 다 해당이 됩니다. 세 번째로는 절대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도 어떤 곳에서는 처음에 '명칭을 붙여라'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명칭이라는 것은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두 번째에 해당이 되는 거죠. 그것을 보고 듣고 하는 것도 실재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게 아니고 그것을 내가 개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지금 스님이 법문을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이해하는 겁니다. 개념으로 받아서 두 번째 이해하게 되고, 이렇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라. 소리는 파장이니까 귀에서 들리는 음파, 음파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 어떤 소리에서도 무상․고․무아라는 성품, 실재하는 성품으로써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개념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아예 떼어버리는 상태가 되버립니다.

어쨌든 명칭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왜 그걸 쓰라고, 명칭을 붙이라고 얘기를 하느냐면 마음을 대상에 갖다 붙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갖다 붙일려면 그 명칭을 써가지고 갖다 붙이라는 거라.

 

그런데 여기서 인제 문제가 생기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이 명칭을 써서 붙이다 보니까 명칭이 우선이 돼버리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우선이 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배가 불러오면 그냥 '일어남' '사라짐'하고 명칭이 우선 돼버리는 거고, 실제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서 일어나는 내가 알아차려야 하는 세 번째, 실재적인 것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명칭에 폐해가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쉐우민' 같은 경우에는 마음을 관찰할 경우에는 명칭을 아예 떨어뜨려버리고 시작을 하게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몸에 대한 관찰이나, 느낌에 대한 관찰이나 이런 것들을 할 때는 명칭을 되도록이면 붙이라고 얘기하는데,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할 때는 명칭을 사용 못하게 합니다.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하는 수행법에서 명칭을 붙여서 하는 수행법과 지금 위빳사나 수행에서 명칭을 붙여서 수행하는 방법을 똑같이 봐버릴 거 같으면 다른 게 하나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왜 명칭을 붙이라고 하느냐 하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수행법들은 그 명칭 자체에 붙들리기 위해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인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 대상을 명확하게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 단지 도구로써 명칭을 사용한다는 거라. 그런데 명확하게 그 실재하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명칭을 쓰지 말아야 되는 거라.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라. 명칭은 붙일 때는 붙이더라도 붙이지 않아야 될 때는 붙이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생각해낸 게 뭐냐면, 처음에는 명칭을 붙이지 말아라!

먼저 움직임을 파악을 하고, 그 움직임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명확하게 이거 하고 저거 하고를 구분해지는 상태가 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실재하는 것, 움직임도 실재하는 것 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인 그 성품들을 보게 되고, 보게 되는 것에서 변화되는 상태를 보면서 명칭을 붙여라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처음부터 명칭을 붙이면 자연스럽게 그 명칭에다 마음을 갖다 붙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그 방법을 쓰지마라는 거라.

이해가 되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되는가 하면, 대부분 보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몸으로 짓는 행위로 인해서 그렇게 됩니다.

몸으로 짓는다는 거는 뭐냐면 화가 일어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럼 대부분 몸은 뜨거워진다든지 거칠어져 버립니다. 아니면 내가 즐거우면 어떻게 됩니까? 수행을 해가지고 내가 즐거운 경험을 했다. 경험은 그때 했는데 그 뒤에도 계속 몸은 어떻습니까?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는 거라. 즐거운 거하고 몸이 가벼워진 것은 틀림없이 연속된 것은 아니단 말이라. 다른 과정인데 즐거우면 몸이 가벼워져 버린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나는 거하고 몸이 거칠어지는 거하고는 분명히 다른 건데 몸이 거칠어져 버린다는 거라. 이걸 갖다가 우리는 한 덩어리로 파악을 해버린다는 거라. 행위 자체에서 이미 관념적으로 습관되어 왔다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가 뭐냐면 음식들 때문에! 수행할 때 뭐라고 그랬어요? 되도록이면 먹고 오지 말라고 그러죠! 그리고 저녁에도 되도록 적게 먹고 안 그러면 먹지 말라 그럽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속이 더부룩하고 거북해진다는 거라. 음식 많이 먹는 거하고 더부룩한 거하고는 또 다른 겁니다. 특히 여름 같은 때는 음식을 잘못 먹으면 어떻게 돼요? 상한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돼요? 몸에 열이 나는 거라. 통증도 오고. 분명히 다른 거거든. 다른 건데도 이걸 한 덩어리로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음식으로 인해서 오는 경우도 있고, 그게 습관되어 왔다는 말이라.

 

날씨! 지금 에어컨 틀어놨으니 쾌적하니까 쾌적하다고 느낀단 말이라. 실재하는 거하고 쾌적한 거하고는 다르다는 거라. 그리고 텁텁한 날씨로 인해서 내가 불쾌한 마음을 가진다는 거라. 불쾌한 마음하고 더운 날씨 하고는 다르다는 거라. 더운 날씨가 나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일 뿐인데 불쾌감이라는 거하고 더운 날씨 하고 같이 연결돼버리는 거라. 뭐 일이 잘못됐다, 그러면 '너 때문에 잘못됐다' 하게 된다는 거라. 이렇게 연결을 시켜버립니다. 분명히 그거는 다른 부분인데 날씨 하고도 그렇게 되지.

 

그다음에 마음하고도 관계됩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몸도 같이 불편해져 버리는 거라. 그리고 마음이 불편하면 어떻게 돼요? 수행하다가도 마음이 불편하면 어떻게 돼요? 통증으로 인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거라. 다리를 어쨌든 펴야 되는 거라. 발을 펴는 실재하는 행위 하고, 마음이 불편하다는 실재하는 행위 하고는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이걸 자꾸 연결을 시켜버린다는 거라.

 

이렇게 우리는 네 가지로 인해가지고 습관화되어져 와졌다는 거라.

보통 첫 번째가 업이라고 그럽니다. 짓는 행위들. 내가 짓는 모든 행위들로 인해서 습관화되어왔고 관념화되어왔고, 음식으로도 그래왔고, 또 날씨로도 그랬고, 마음으로도 그렇게 해왔다는 거라.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대부분 서로 손을 이렇게 잡으면, 자기 손을 잡고나서 '가볍다' '무겁다' 이런 느낌으로 바로 탁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손을 잡았다'부터 먼저 인식을 한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어! 아니지' 하고 판단할 거 같으면 '아! 스님이 거기서 오는 현상을 관찰하랬지' '아! 뜨거움이 있구나' 하고 '뜨거움'... 알아차리고 나서 그 '뜨거움'을 안다는 거라. 알아차림이 없으면 계속적으로 '내가 손을 잡고 있구나' 한다는 거라.

그리고 손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따뜻함이. 그럼 따뜻함도 변해가야 되는데 항상 따뜻한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을 떼도 그 따뜻한 것을 항상 마음에 가지고 있는 거라. 이렇게 돼버린다는 거라.

관념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실재하지 않고 나는 이미 여기 가 있는데도 그 관념을 쥐고 있게 된다는 거라.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해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이라는 것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몸은 몸으로 알아차려라!

느낌은 느낌으로 알아차려라!

마음은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몸은 몸인 것으로 알아라는 거라. 몸은 뭐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까? 사대요소! 실재하는 사대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대요소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느낌은 거기서 일어나는 각각의 느낌들, 그것 느낌으로만 알아차려라는 거라. '내가 일으키는' 느낌, 즐거운 느낌이라든가, 괴로운 느낌, 이렇게 알아차리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 당시에 꼬시까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수행을 하는 데도 수행이 잘 안 되거든. 그래서 결국 자기의 목을 긋습니다. 요즘 말로 자살을 하는 거죠. 목을 딱 긋는 순간에 알아차리는 거라. 그전에는 아무리 알아차릴려고 해도 관념적으로 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지금 수행을 하면 명칭에 붙잡혀가지고 명칭을 가지고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로. 물론 그 중간중간에 실재하는 것들도 가끔씩 알아차립니다. 손을 잡으면 '내가 손을 잡았다'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있지만, 가끔씩 '따뜻하다'고 알아차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따뜻하다'고 일시적으로 알아차려도 그것이 '지속하는 것으로 알고 계속 따뜻하다'고 해버린다는 거라. 그니까 또 개념으로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이 꼬시까 스님도 개념에 휩싸여가지고 살아왔다는 거라. '안 되겠다. 도저히' 그래서 자기 목을 긋습니다. 목을 그으니까 어떻게 돼요? 일어나는 통증, 통증을 개념으로 아프다 하고 느끼는 게 아니고, 그 통증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각각의 느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다리가 지금 구부러져 있습니다. 다리의 통증은 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쑤시는 느낌도 있고, 묵직한 느낌도 있고, 또 감각이 없는 느낌도 있고, 또 아픈 느낌도 있고, 또 그냥 바위덩어리 같이 누르는 느낌도 있고, 각각의 느낌들이 있는데, 이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이렇게 구분할 수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아프다' 이것밖에 모른다는 거라. 아프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왜? 느낌들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그 변하는 것에 마음이 따라가지를 못하니까 그냥 아픈 거 뿐인 거라.

처음에는 아프다는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런데 뒤에 바뀌는 느낌들로 가지 않고 그 마음이 그냥 거기에 붙잡혀버리고 있는 거라, 관념에다가. 그러니까 아프다 하니까 어떻게 돼요? 그 관념이 스스로 자꾸 아프다고 돼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리를 펴야 되는 거라. 못 견디겠으니까. 실재 이 통증에 못 견디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못 견디는 거라.

 

마음은 어디든지 하나의 대상에 붙잡혀 있으면, 붙잡혀 있을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에 붙잡혀있고 싶어도 찰나, 1초도 못 붙어있습니다.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다리도 펴지게 되는 거라. 거기 못 버티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아까 얘기했듯이 낱낱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라. 그러면 그 마음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그다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런 사실을 안다는 거라.

그럼 이 통증은, 내가 이 통증을 분명하게 알아차려가지고 극복해 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꼬시까도 그랬거든. 탁 목을 그으면서 자기가 그렇게 관찰을 했거든. 이렇게 지금 지금 알아차리는 느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몸이라든지, 아니면 아프다라는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조차도 없다는 거라. 아프다는 느낌도 있었지만은 그다음에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변했다는 거라. 그러니까 단지 순간순간 일어나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딱 알아차린 거라. 집착할 것도 없이. 그 느낌도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안 거라.

성품에 대해서 알게 되면 참 재밌는 게, 이 자연적인 현상의 성품을 알아차리면 굉장히 재미가 납니다. 왜? 그 성품은 내가 일부러 콘트롤 할려고 하지도 않는데도 지가 혼자서 바뀌어나가는 게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거라. 그것에 마음이 따라가면 마음이 굉장히 즐겁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따라가지게 되니까.

 

이 꼬시까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느낌이 굉장히 빠르게 변화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안 거라. '아! 내 몸이라는 것이 없구나.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사실을 탁 알게 됩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 이게 참 고통스러운 거구나. 내가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돼야 하는 거구나. 참 고통스럽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구나.'

삼법인에 대해서 탁 목을 그으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면서 삼법인에 대해서 탁 통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품을 바로 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개념은 일단 떼어내라는 거라! 일단 떼어내고 모양이나 형태들은 떼어내고, 먼저 그 움직임, 움직임이 변하는 것들, 끝이 있고 시작이 있고 멈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다음 단계 단계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 그 현상들도 변하는 것들을 보도록 하라는 거라.

 

부처님이 말하는 삼법인의 특성이라는 것은 하나를 알게 되면 나머지 두 개는 동시에 같이 알아집니다. 고통의 성품에 대해서 알 때도 무상과 무아를 알게 되는 거고, 무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때도 고와 무아에 대해서 알게끔 되는 거라. 이 꼬시까 스님은 무아에 대해서 먼저 이해를 하면서 고와 무상에 대해서 더불어 알게 됐다는 거라.

이런 싸이클을 가지고 있는 게 부처님의 삼법인이라는 거라.

 

그래서 관념을 보지 않고 실재적인 것을 볼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절대 대상과 함께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함께 움직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상과 함께 움직일 거 같으면, 볼려고 할 거 같으면 나를 봐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대상에게 움직여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수행 못합니다.

볼려고 할 거 같으면 내 마음은 대상과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과 함께 있습니다.

마음은 어디 있어요? 이 육근에 있습니다. 육근에 머물게 돼있습니다. 육근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마음도 이 몸이라고 하는 육근이 있어야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마음은, 마음과 함께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몸이라고 하는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대상을 따라서 움직일려고 하면 안된다는 거라. 항상 마음과 함께 머물도록!

 

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대상에 고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대상에 고정할려고 할거 같으면 사마타 쪽으로 빠져버립니다. 단지 마음이 무엇을 알아차리는지만 관찰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마음이 '어떤 것을 내가 지금 알고 있는가' 하는 것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항시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있고. 그 관찰하는 것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관찰하는 것을 내가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내가 관찰하는 것을 내가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찰하는 것을 아는 마음은 관찰하는 마음 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관찰하는 마음'에서 '관찰하는 걸 아는 마음'으로 마음이 이동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마음부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좋은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싫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화가 일어났다가도 고요하게 되고, 이렇게 자꾸 변한다는 거라. 마음도.

꼭 마찬가지로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 관찰하는 마음이 있고, 그걸 관찰하는(아는) 마음이 있고, 이렇게 마음은 두 가지로 항상 쌍을 이루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에 고정되어 버리면 '관찰하는 마음'만 있게 되는 거라.

관찰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떻게 돼요? 내가 대상에 계속 머물게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숨을 들이쉬고 있으면 숨을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여기에만 고정되어 버리는 거라. 그러면 그걸 관찰하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대상에 고정하면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이 무엇을 알아차리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수행을 해나갈 때, 경행을 할 때,

 

발을 들어올리는 움직임이 있을 때 그 '들어올리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발이 들어올려질 때 지 발 혼자서 들어올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 할 거 같으면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일어났는데 내가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발이 들어올려질 때는 들어올려지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발이 들어올려졌다고 아는 겁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돼요? 대상에다가 마음이 착 달라붙어야 됩니다. 마음의 움직임을 내가 아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발을 들어올리는 게 있으면 발을 들어올린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고 나서, 발이 나아가는 게 있으면 발이 나아간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발을 들어올리는 마음하고 발이 나아가는 마음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발을 들어올린다는 마음이 있고 나서 발이 나아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라.

마음은 연속하는 거 같지만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 구분돼 있다는 거라. 실재 움직임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도 구분이 되듯이 마음도 이와 같이 구분되게끔 돼 있다는 거라.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줄 모르면 수행을 깊이 있게 들어가지지를 못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또한 알지 못하면 깊이 있게 들어가지지를 못한다는 거라.

 

순간순간 일어나는 물질적인 현상, 순간순간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 이것도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인 현상도 연속하는 것으로 보게 되고, 정신적인 현상도 연속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는 거라.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그냥 계속 연속하는 현상으로 본다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계속 연속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거라.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도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물질과 마음의 관계를 먼저 이해하게끔 돼야 된다는 거라.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거라. 정신적인 것도 마찬가지고 물질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먼저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렇게 하기 위해서 움직임을 알고, 움직임을 구분할 줄 알게 돼야 합니다. 물질적인 겁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아는 마음이 있게 되고, 그 아는 마음도 연속하는 게 아니고 계속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구분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라는 거라.

 

그게 먼저 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조금 더 세밀하게 볼려고 할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 실재하는 현상들을 자꾸 볼려고 하라는 거라. 가볍고 무겁고 하는 현상들, 그 가볍고 무겁고 하는 현상들도 구분된다는, 변해간다는 사실을 또한 알도록 하라.

그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의도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의도의 역할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모든 행위는 의도가 앞섭니다. 의도가 있지 않으면 행위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또한 움직이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의도입니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범하지 못할 악행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농담일지라도 내가 의도를 내가지고 거짓말하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라훌라! 너는 지금 수행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그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하라.”

의도를 알아차리면 의도가 앞서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내가 경행을 할 때에도 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나서 발이 움직입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또한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일어나게끔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의도가 항상 앞서게끔 된다는 거라.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모든 움직임의 전에 의도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의도라고 하는 원인이 있어서 그다음에 움직인다고 하는 결과가 있다는 거라.

움직인다는 결과는 의도가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졌다 하는 거라. 모든 움직임, 모든 생각, 모든 말에는 이렇게 원인·결과로써 이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여러분들 잘 아는 얘기 있죠! 나쁜 짓 했으면 나쁜 결과 받고, 좋은 일 했으면 좋은 결과 받는다는 거라.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게 원인 결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원인·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왜 그런가 하면은 '나'라고 하는 생각을 먼저 떨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움직인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어뜨릴 수가 있고, 또 더 나아가서 나보다 더 높은 존재, 신에 의해서 이렇게 됐다 하는 것들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런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단지 원인·결과로써 일어나는 일이라.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원인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인과의 법칙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거기에 대한 의심을 가지지 않게끔 되어야 되는 거라.

 

그것을 불교에서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쭐라 소따빤나'라고 얘기합니다.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라. 어떤 절대 신이나, 아니면 나라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이것이 존재하고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는 거라. 모든 것은 원인·결과, 원인·결과의 연속이다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경행을 하면서 바로 이 '소따빤나'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들어올리려는 의도로 인해서 들어올려지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고, 들어올려지는 물질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게 되고, 그 알아차리는 마음을 내가 다시 아는 마음이 있게 되고, 그 원인·결과로써 이어집니다.

그다음에 다시 또 나아가려는 의도가 있음으로 인해서 나아가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게 되고, 나아가는 물질적인 현상을 또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게 되고, 그 알아차리는 마음을 갖다가 내가 다시 또 관찰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다시 발을 내려놓을려고 하는 의도가 있고 나서 발이 내려가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게 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있는 것이지 거기에는 어떤 절대자도, 어떤 나라고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게끔 됩니다.

 

경행을 하면서 이렇게 이해를 해야 만이 그다음에는 무상한 성품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 의도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라. 그 의도가 한 번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발을 들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가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의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그러고 나서 물질적인 현상인 발이 들려지는 현상이 있고, 그 들려지는 현상도 끊임없이 들려지는 것이 끝나고 다시 또 새로 일어나지고 새로 일어나지고 하는 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거라.

마음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걸 알게끔 되고, 무상한 성품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도 한 번 일어나지지 않고, 물질적인 현상도 한 번 일어나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구나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내가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고 항상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하는 사실을 또 알게끔 되고, 그렇게 생멸하는 것들 반복되는 것에서 도저히 내가 콘트롤 할 수 없고,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어떤 신도 조정하지 못하고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끔 돼서 '아! 이게 무아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끔 됩니다.

 

무상무아의 성품을 통찰할려고 할 거 같으면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가 있어야 되고, 그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도 의도가 있고, 다시 또 그로 인해서 결과가 있고, 원인·결과 원인·결과의 반복이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원인·결과가 반복되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고, 그래서 다시는 '나',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들을, 그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다고 믿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성품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끔 되면서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아! 모든 현상은, 모든 조건지워진 것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에는 지속되는 것이 없이 변하고 있다' 하는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게끔 됩니다.

스님도 수행을 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진짜 부처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참! 부처님 말씀이 맞구나' 누가 절을 하라 하지 않아도 내 스스로 절을 하는 거라. 진짜 존경스러워서!

 

경행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자꾸 마음에 가져야 되는 것들은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모양이나 형태들을 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명칭을 먼저 붙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거라. 명칭도 모양과 형태에 들어가집니다. 관념에 들어가진다는 거라.

우선 먼저 움직임을 알아차려라.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 움직임이 구분되도록 자꾸 하라. 하나의 움직임이 끝나고 나서 그다음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이 두 개가 우선되지 않으면 자꾸 관념적으로 빠진다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경행의 3단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3단계에 이와 같이 많은 사실들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지금은 다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열심히 자꾸 알아차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자꾸 수행하려고 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이 초보수행자들이 일주일에 두 번 오고 있습니다. 와서 한 세 시간 넘게 수행을 한다고. 법문까지 포함을 해가지고. 오는 게 부담스럽거든. 마음을 내어가지고 어쨌든 와야 되는 거라.

 

단언을 하는데 쭐라 소따빤나(Cūḷa Sotāpanna)에 들어가 버리면 그런 것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연스러워져 버립니다. 이왕 시작을 했는데 부처님에 대한 확신들은 가질 수 있도록 해야 안 되겠어요? '아! 이게 맞구나' 스님과 마찬가지로 진짜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서 절을 할 수 있게끔은 돼야 안 되겠겠습니까? 그때가 되어야 여러분 오지마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와집니다. 지금은 뭘 할려고 하더라도 마음을 내어서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하려고 해도 마음을 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지금 뭐 밥을 먹을라 해도 마음을 내어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쭐라 소따빤나(Cūḷa Sotāpanna)에 이르를 것 같으면 그런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도 행위 자체에서 불선업을 짓는 행위는 짓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나쁘게 되지를 않는다는 거라. 이생에서도 나쁘게 되지 않고, 다음 생이 있으면 당연히 다음 생도 나쁘게 되지 않겠지.

 

그래서 쭐라 소따빤나에 이를 것 같으면 네 가지 나쁜 형태, 나쁜 악처에는 떨어지지를 않는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살아가면서 화를 내고, 아니면 욕심을 부리고 하는 것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악처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는 거라. 또 죽고 나서도 화만 자꾸 내고 욕심 자꾸 부리는 그런 형태의 부류, 아귀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아니면 동물이라든지 아수라라든지 이런 네 가지 나쁜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단언을 합니다. 부처님이.

 

경행 하나,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데에서도 분명하게 그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스님 법문을 들었고 그것을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은 뭐가 필요하다구요? 실천하는 것! 수행하는 것! 그것만 남아있는 겁니다.

부처님도 그것은 어쩌지를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부처님도 그걸 못하는 거라. 소를 물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물을 먹이지는 못한다는 거라. 먹는 거는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라.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자연스럽게 수행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여기 와서 법문을 들어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거라. 끊임없이 내가 아무 생각 일으키지 말고 그냥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안되면 안 되는대로, 되면 되는대로. 처음부터 다 잘될 거 같으면 뭐가 걱정이 되겠어요?

 

수행을 실천하는 이유를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이생에서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고, 다음 생에도 이익과 행복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을 실천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천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실천하면서 이루어지는 행복은 다른 데서 오는 행복보다도 더 훨씬 크기 때문에 그걸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세 가지(問思修)로써 나눠놓은 겁니다. 배우는 것도 있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있지만은 불교만의 독특한 것, 스스로 실천하는 것!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실천하는 것 이상 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