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6. 경행 방법 1 (20090623)

담마마-마까 2019. 11. 11. 23:36

https://youtu.be/YbH-Fmq95dw 

* 경행 방법 1 (20090623)

 

한참 공부들을 지어나가고 할 때 그런 마음들이 많이 듭니다.

'아! 조금만 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서 나는 수행을 좀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란 게 안 그렇거든. 수행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내 수행만 하는 게 아니고 좀 다른 사람들 하고 떠들 때도 있고 그렇단 말이라. 그런데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오롯이 수행만 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그러지를 못하니까 '아! 내가 여기에 머무를 데가 아니다' 해가지고 떠납니다. 그래서 이 선원 갔다가 또 저 선원 갔다가 이렇게들 합니다. 물론 떠나는 경우들이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해서 떠나는 경우는, 대부분 수행자의 경우에는 더 열심히 수행하고 싶은데 그런 환경조건이 안 돼서 떠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인제 좋은 데를 만났단 말이라.

특히 숲속 선원 같은 경우에는 '꾸띠'라 해서 스님들이 거주하는 조그마한 방이 있는데, 숲속에 하나씩 뚝 뚝 떨어뜨려가지고 지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구하고 얘기할 일도 없고 하니까 아주 수행하기 좋습니다. 그게 인제 선원일 거 같으면 문제가 다른데, 또 그 선원에서도 스님들끼리 그렇게 아무리 꾸띠가 떨어져 있어도 스님들끼리 만나서 얘기를 하게 되고 하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또 다른 곳으로 더 외진 곳으로 간다고.

그러다 보면 인제 아주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숲속은 문제가 뭐냐면 혼자서 조용하게 수행하기에는 그지없이 좋습니다. 누가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수행하고 싶으면 수행하고, 또 경행하고 싶으면 경행하고, 또 좌선하고 싶으면 좌선하고 이렇게 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스님들은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수가 없단 말이라.

 

그러니까 어떨 때는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는 거라. '아! 누가 나한테 공양만 올려줘도 참 좋겠는데'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갑니다. 아플 때 여러분들도 보통 그런 마음이 들죠? '누가 내 병시중 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하고 거의 비슷할 거라. 그것만 누가 해주면 나는 진짜 열심히 혼자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럴 때 문득 생각이 듭니다. '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조금 전에는 사람이 싫어가지고, 사람들이 수행을 잘 안 한다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좋은 도반이 아니다 해서 멀리 떠나오고 떠나오고 했는데, 인제는 또 옆에 누가 도반이 하나 있어가지고 내 시중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거라. 거참 희한한 마음이죠?

 

그러면서 느끼는 것들이 뭐냐면 아! 좋은 도반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좋은 도반이고 아니고 하는 것은 둘째 문제라. 내 마음에서 좋은 도반이고 아니고를 분별심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좋은 도반이 아니다 라고 내가 분별심을 냈으면 거기를 떠나겠다는 거라. 떠나서도 또 좋은 도반을 찾는 거라. 좋은 도반이 와서 밥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 도반하고 있으면 또 문제가 안 생기는가? 그럼 또 떠나게 된다는 거라.

 

바르다는 거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 사람이 아무리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가 오히려 바른 마음을 가지고 그걸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 바르지 못한 것들은 나에게 전혀 영향을 못 미쳐. 그럴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바르고 나쁘고 하는 것을 떠나버린, 시비를 떠나버린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죠? 누가 칭찬을 해주면 헤벌레 하고 좋아합니다. 누가 나쁜 소리 할 거 같으면 그냥 화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면서 핑계를 밖에서 찾는 거라. 핑계거리를 찾는다는 거라.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수행 못했다. 저 사람 때문에 뭐 어떻게 됐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죠! 내 마음 안에,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거라.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핑계거리를 밖에서 찾지 마라는 겁니다.

아! 오늘 차가 밀려서 늦었다, 아니면 오늘 내가 디게 피곤해가지고 수행을 못갔다, 아니면 다른 핑계거리를 대가지고, 그런데 그거는 핑계거리가 아니죠? 그거는 도피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뿐입니다.

수행을 해나가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해야 되는 겁니다. 찾아야 되는 것도 자신의 몸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찾아야 됩니다. 밖에서 핑계거리를 구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담마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진리를 찾을 때는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라 하는 겁니다.

 

오늘은 수행의 기본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저번 시간에는 아마 좀 어려웠을 거라요. 개략적인 사마타와 위빠사나 바와나에 대한 설명들을 하다보니 좀 어려워졌습니다. 오늘은 실제적인 수행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 경행의 단계

1) 모든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려라.

2) 그 움직임의 단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아라.

- 의도를 알아차려라.

3) 몸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려라.

4) 그 느낌에서 변화되는 것들을 알아차려라.

 

경행 할 때 네 단계로 하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려라 그랬죠.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랬어요?

그 움직임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아라.

그러고 나서는 몸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려라.

그러고 나서는 느낌이 변화되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경행 뿐 아니라 좌선도 꼭 마찬가지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먼저 첫 번째,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움직임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움직이는 걸.

움직이는 데에다 마음을 실어주면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움직임만 계속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움직이는 걸 사실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한 십 년 만에 한번 친구가 봤다. 어! 너 왜 이렇게 많이 늙었노? 그마만큼 움직여가지고 늙어갔다는 거라. 그런데 매일 같이 보는 사람은 이 사람이 늙어가는지, 그렇게 움직임이 있는 건지를 모릅니다.

움직임만 계속 있을 거 같으면 그 움직임을 잘 모른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움직임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멈추는게 있어야 된다는 거라. 멈추는 것이 있어야만 움직임을 알 수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저기 시계 보이죠? 열두 시가 딱 되고 나면 오후가 되고, 또 밤 열두 시가 되고 나면 오전으로 바뀝니다. 열두 시 띵! 띵! 띠잉!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바로 찰나 간에 바로 오후로 바뀌게 되는 거죠. 그 바뀔 때 어떻게 됩니까? 띵! 띵! 띠잉! 하고 탁 멈추고 나서 바뀌어지는 것이지, 띵띠잉 하면서 바로 착 넘어가는 법은 없다는 거라.

 

움직임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멈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서 멈춰야 만이 나아가지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나아가는 것이 멈춰야 만이 내려놓게 되는 것이지, 발이 나아가는데 그 끝에서 멈추는 게 없을 거 같으면 나아가는 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는 거라.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먼저 그 시작하는 것에 앞서서 일어나는 멈춤을 반드시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알려면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딱 서 있을 거 같으면 처음에 '서있음'하고 서있으면서 멈추어 있는 현재의 상태를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가고자함' 의도를 내고 발을 디디는 거라. 움직이게끔 된다는 거라.

움직이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그다음에 뒤로 돌아서서 또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다시 서야 됩니다. '멈춤' 하면서 멈추는 것을 알고, 그러고 나서 돌아서고 나서는 다시 멈추는 것을 알고. 멈춤 다음에는 그다음에 다시 또 움직임이 시작되는 거라.

그래서 그 멈추는 걸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부분이 마음에서 생각들이 많이 일어나고 방황하는 것은 언제 하느냐? 그냥 계속 걷기만 할 거 같으면 생각들도 잘 안 일어납니다. 아마 그런 경우들을 많이 경험해봤을 거라. 그런데 가다가 탁 멈춰서면 어떻게 돼요? 대부분 생각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자기가 일으키든지, 뭘 하든 대상을 찾아. 앞에 대상을 보려고 하든지, 움직거릴려고 하든지 하여튼 뭔가 대상을 찾는다는 거라.

 

그런데 모든 움직임에는 멈춤이 항상 있습니다. 발을 들어만 놓을 수는 없습니다. 들어올렸으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 들어올리고 나서는 멈춰야 만이 내려오는 것이지 멈추지 않으면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들어올려지고 나서 멈춰지고 내려오게끔 되어있다는 거라.

 

이 멈추는 짧은 찰나에 멈추는 사실을 모르면 바로 번뇌가 기어들어온다는 거라. 수행을 잘하려면 먼저 움직임을 마음으로 따라가라고 그랬습니다. 따라가는데 지속적으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되는 게 멈추는 현상을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그 움직임은 일시적으로 알았는데, 마지막 멈추는 데에서 멈춤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이 방황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마음이 다른 데로 튀어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그 사띠는 일회성으로 끝나버린다 하는 얘기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이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경행할 때 잘 하는 방법이 있죠?

들어올리는 듯하면서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가는 듯하면서 이미 발은 내려놓고 있고,

이렇게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는 거라.

왜? 이때까지 해왔기 때문에.

수행은 뭐라고 그랬어요? 일반적인 패턴하고는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죠! 그러니까 수행을 하면서 내가 습관되어진 것을 그냥 따라 해버리는 거라. 겉으로 보기에는 수행하는 거 같습니다. 그냥 바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명칭을 붙이면서 이미 들어올리면사 나아가고 있고, 나아가면서 이미 내려놓고 있는 거라. 그래갖고 실제로는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움직임의 끝에는 멈춤이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구분할 줄 알아야 그 움직임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대상에 가서 자꾸 달라붙습니다. 마음이 현재에 하고 있는 것에 달라붙지 않으면 항상 습관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는 안 되겠죠?

 

불교는 경전들을 합송으로 인해서 쭉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어느 경전 하나를 갖다가 내내 외웁니다. 빨리어 경전은 장음하고 단음이 구분이 돼있습니다. 장음 할 때는 길게 해야 되고 단음 할 때는 짧게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삼마 삼붓닷사(sammā sambuddhassa)' 이렇게 된다, 그러면 삼마 삼붓닷사 할 때 마지막 '사(sa)'는 단음이기 때문에 짧게 하고 그다음에 다른 단어로 넘어가야 되는데, 만약에 '닷사-' 하면서 길게 해버린다 할 거 같으면 발음이 틀리게 된다는 얘기라. 어쨌든 그 방법으로 인해서 스님들이 게송을 합송을 해가지고 처음에는 경전이 전해져 왔다는 거라. 그 방식을 지금도 스님들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빠띠목카'라 해서 계목을 외우는 건데 비구스님들은 227개의 계를 지닙니다. 그 계를 갖다가 하나도 틀리지 않게끔 쭉 다 외워야 돼! 그런데 스님들도 사람인지라 입을 모아가지고 합송을 하는데 어떤 스님들은 깜빡하고 긴 장음을 단음으로 하기도 하고 단음을 또 장음으로 발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말이 조금 틀리는 거라. 그러면 장로스님이 탁 지적을 합니다. “거 틀렸어!”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처음부터 다시 또 하는 거라. 한 십분 하면 이걸 다 외울 수 있는 것을 항상 보면 그 몇 사람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고, 또 처음부터 다시 하고 하니까 보통 사십 분에서 한 시간 아니면 어떨 경우는 한 시간 반이 걸리게 되는 거라. 그렇게 틀리는 사람은 만날 눈치를 보지. "거 좀 잘 해라" 어떡할 거야, 그러면. 계속 반복하는 거라. 그러면서 자꾸 외우게 되는 거라.

 

어느 스님이 수행을 해도 그와 같이 하거든.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려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니까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움직임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면 멈추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하니까 또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사띠를 가지고 계속 알아차려 나가는데, 습관적으로 들어올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라. 멈추는 게 없는 거라. 그러면 탁 멈추고 다시 여기서 저기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는 거라. 경행을 그리하는데 여기서 저기까지 하는데, 요만큼은 멈추고 하는 걸 알아차리면서 갔는데 여기부터는 또 깜빡 잊어먹었다, 그러면 쪼르륵 쫓아가서 다시 하는 거라.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까지를 한 번도 정상적으로 가는 법이 없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떻겠어? 저건 뭐 똥 밟은 사람도 아니고, 왜 저리 왔다리갔다리 짧게 자꾸 왔다리갔다리 하느냐, 뭐 잊어버려가지고 뭘 찾는 것도 아니고, 수행을 안 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고개는 푹 수그리고 있지, 자꾸 왔다리갔다리 해쌌지 하니까 “뭐 저렇게 산란하게 하는가” 하는 거라. 왜 그랬겠어요? 멈추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때는 다시 처음부터 하는 거라.

 

여담 같지만 어느 스님이 '내가 번뇌가 일어나면 절대 경행을 하지 않겠다.'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여러분은 여기서 저기까지 알아차리면서 경행을 하는데 번뇌 없이 여기서 저기까지 경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번뇌가 일어나면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럼 몇 발짝이나 디딜 것 같애요? 솔직히 얘기해 봐요. 몇 발이나 디딜 것 같애요? 한 발짝도 못 디딜 것 같애요? 다른 사람은? 그래도 한 발짝은 옮길려고 했네? 그 스님은 발도 못 들었어! 발도!

 

그 정도로 번뇌가 많다는 거라. 마음이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라.

저번에 그런 얘기했었죠? 몸의 움직임, 몸의 변화는 빛의 속도와 같다. 마음은 그거보다도 17배가 빠르다고 했습니다. 빛의 속도는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도는 거죠? 그 찰나 간에. 그거보다도 열일곱 배 빠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얼마만큼 빨리 움직이는 거라? 그 속에 번뇌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느냐는 거라.

이 스님이 발을 한 발짝 드는 거는 둘째 치고 아예 발을 올리지도 못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서 끙끙끙끙 합니다. “경행을 하는데 왜 그러고 있습니까?” “내가 번뇌가 안 일어나면 발을 뗄려고 했는데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반드시 멈추는 걸 자꾸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만약에 멈추었으면 따끔하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나무라야 됩니다. 멈추는 걸 모르고 그냥 지나쳤으니까. 그렇게 해야 만이 이 마음이 정신을 차리는 거라. 실제로 한번 해봐요. 한 발짝 뗄 동안에 '들어올림' 하고 멈추는 사실을 알고 나아가고, 멈추는 사실을 알고 내려놓고 해야 되는데, 만약에 그걸 안 하고 습관적으로 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또 한다고 생각해봐요. 여러분들도 아마 몇 발짝 못가서 다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고 할 겁니다.

나중에는 자꾸 그리하다 보면 귀찮아 죽겠어. 조금 걸어가고 싶은데 걸어가지도 못하니까 어떻게 돼? 그 귀찮은 게 싫어가지고 더 알아차리려고 하는 거라. 마음에 분발심을 일으키도록 자꾸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항상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갖다 두도록 해야 만이 모든 움직임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틀림없죠?

그 움직임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자꾸 멈추는 걸 알려고 자꾸 해라! 시작하고 끝나는 부분을 명확하게 자꾸 인식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버린다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해선 안 되겠죠?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때 몸과 마음이 딱 일치가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이로 당연히 번뇌가 들어오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수행도 안 되고, 번뇌는 번뇌대로 휩싸이고, “수행을 했는데 왜이리 몸이 더 찌뿌둥하고 이리 안 좋나?” 하게 됩니다. 자기가 수행을 잘못했다고는 생각 안 하고 그러고 있는 거라. “수행을 해도 나는 별로 좋은 줄 모르겠습니다.” 내보고 우째라고 그러면. 자기가 안 하는 걸 갖다가. 알겠죠? 반드시 마음을 그렇게 먹도록 해야 됩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갖다 붙이도록 해야 됩니다.

 

경행을 할 때 움직임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기가 가장 쉽습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는 자연적인 호흡이기 때문에 내가 인위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경행은 어떻습니까? 내가 인위적으로 할 수가 있죠? 빠르게도 할 수가 있고, 느리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 빠르게 하고 어떨 때 느리게 해야 되겠습니까? (대답)

그렇지. 또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고, 잠도 좀 오고 이럴 때, 그리고 경행 좀 안 하고 좌선 좀 했으면 하고 이런 마음이 무거운 느낌이 들고 할 때. 그럴 때는 조금 경쾌하게 빠르게 해주어야 됩니다. 왜 그렇겠어요? 마음에 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걸 북돋아줘야 되거든. 북돋아 줄려면 조금 빠르게 해야 만이, 빠르게 하면 내가 노력의 힘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균형을 잡아주게 되는 거라.

그런데 계속 빠르게만 해가지고 되겠습니까? 안 되죠? 계속 빠르게만 하면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대상에 가라앉고 고요해지는 데는 시간이 더디게 걸리겠죠? 그래서 일단은 내가 그러고 나서 그 무거움도 줄어들고 마음이 안정되어가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움직임을 좀 천천히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천천히 해줬는데, 그러다가 또다시 마음이 들뜨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다시 빠르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

경행시간을 한 시간을 잡았다. 처음에 좀 빠르게 했다. 그러다 다시 또 천천히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빠르게 한다. 그리고 또 천천히 한다. 이럴 거 같으면 마음이 산란해져버립니다. 그게 습관화 돼버리면 경행해서 큰 이익을 못 봐!

그래서 천천히 해서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 나갔으면 그 속도를 지속해줘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수행을 계속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그게 첫 번째 모든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라 그랬습니까?

까먹었어요? 맨 처음 시작할 때 가르쳐주었는데 또 까먹었어요?

그 움직임의 단계들을 분명하게 구분하라! 했어요? 이젠 기억하겠죠!

움직임의 단계를 구분하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할까?

예를 들어봅시다.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려지는 것을 아는 거고, 들어올릴 때 '내림'하고 알면 안 되겠죠! 발을 들어올리고 나서 들어올려지는 것이라고 알고 나아갈 때는 나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는 것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명확하게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인제는 이걸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들어올려지는 거하고 나아가는 거하고는 구분되는 겁니까, 아니면 같은 겁니까? 연장선상에 있는 겁니까? 당연히 구분되는 겁니다. 그러면 '들어올림'이라는 몸의 동작하고 '나아감'이라는 몸의 동작하고는 같은 게 아니죠!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들어올림을 알아차리는 마음하고 나아감을 아는 마음하고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당연히 다른 거라고 그렇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같은 거라고 인식을 할 거 같으면 내 마음이 들어올려지는 걸 알고 나아가는 걸 알고 내려놓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립니다. 내 몸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고 내려놓는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전혀 아니죠!

 

들어올릴 때의 마음하고, 나아갈 때의 마음은 분명히 다른 마음입니다. 나아갈 때의 마음하고 내려놓을 때의 마음은 분명히 다른 마음입니다.

하나의 과정과 그다음의 과정은 연속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엄밀하게 얘기하면 이렇게 각각 다 구분되게끔 됩니다. 하나의 과정. 또 그다음에 또 다른 과정 이렇게 구분이 됩니다.

들어올린다는 몸의 현상과 들어올린다는 것을 아는 마음하고는 또 구분이 되는 거라. 일치가 돼 있지만 분명히 구분할 수가 있죠? 몸의 현상하고 마음의 현상하고 분명히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아가는 발의 몸의 현상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현상하고는 또 구분이 되는 거라. 몸과 마음도 구분을 하게 되고 또 각각의 단계도 다 구분을 할 수 있게끔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제 두 번째 모든 움직임의 단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첫 번째 뭐라 그랬어요?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려라.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 움직임의 단계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라.

그다음에 세 번째 단계는 뭐라 그랬어요? 그거부터는 좀 어렵겠죠?

자! 그러면 오늘은 첫 번째하고 두 번째만 경행할 때 자꾸 해보도록 합시다이!

거기다가 하나 더 추가를 합시다. 아까 구분할 줄 알게 된다고 할 경우에, 몸의 현상 하고 마음의 현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이 몸은 지 혼자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마음이 시켜야 몸이 나아가집니다. 이 몸뚱아리는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도 몸이 있어야 시켜 먹을 수가 있습니다. 몸이 없으면 지 혼자서 시켜 먹을라고 해도 시켜 먹을 대상이 없습니다. 서로 그런 관계에 있단 말이라.

 

그리하더라도 이 몸이라는 것은 일단 마음이 먼저 시켜야 만이 몸이 따르게 됩니다.

의도하는 마음! 의도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그다음에 움직임이 있게 됩니다.

내가 경행을 할 때 '경행하고자 함' 아니면 '가고자 함' 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걸어갈 수가 없는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처음에 수행할 때 '걸어가고자 함' 하는 의도하는 마음을 먼저 내고 나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일치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움직임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나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되는 것은 몸이 먼저 앞서는 법은 없다는 거라. 마음이 항상 앞서고 있다는 거라.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은 항상 소가 앞서서 끌고 가는 것이지 수레 지혼자 먼저 앞서가고 소가 끌려가는 법은 없다는 거라. 몸이라는 것은 그와 같다는 거라.

 

마음이 앞서서 잡아당기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도 만약에 나쁜 행동들을 한다 할 거 같으면 그 마음을 내지 않으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끔 되겠죠. 나쁜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나쁜 말을 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나쁜 말을 하지 않게끔 되겠죠. 만약에 그런 것들이 탁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쁜 마음, 나쁜 의도를 내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행을 할 때 항상 알아차려야 되는 게 '의도를 알아차려라' 움직임을 완전하게 파악을 하고 나서, 그 움직임의 단계 단계를 구분하고 나면, 인제는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앞선다는 것, 그 의도된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도록 해라.

 

그럼 경행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맨 처음 탁 서 있으면 '가고자 함' 하고 의도를 내고 나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그렇게 해야 되겠죠!

그러고 나서 멈추면 '멈춤' 하고 나서, 그다음에 돌아야 될 때는 '돌고자 함' 하고 의도를 내고 나서 '돎' '돎' '돎' 하면서 돌고,

그러고 나서 다시 탁 멈춰서면 '멈춤'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나아가고자 함' 하는 의도를 내고 나서, '왼발' '오른발' 이렇게 하면서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이제는 경행의 단계가 조금씩 깊어집니다! 그 단계를 밟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처음에 움직임을 분명하게 파악을 하지 못하면 그 단계를 구분할 수도 없고, 단계를 구분할 수가 없을 거 같으면 의도가 앞선다는 것도 알아차리질 못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움직임을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경행을 먼저 하고 좌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