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3. 수행 개념정리, <사마타, 사마디, 에깍가따, 자나> 용어구분 (20090621)

담마마-마까 2019. 11. 8. 19:31

* 수행 개념정리 (20090621)

https://youtu.be/JqBWRKSukhA 

* 수행 개념정리, <사마타, 사마디, 에깍가따, 자나>용어구분 (20090621)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것들을 두 번에 걸쳐서 대충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것에 이어서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얘기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개념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좀 있습니다.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수행을 했던 분들도 있고, 또 그렇지 않고 여기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도 있고 할 겁니다.

대부분 이 지구상에 있는 수행 체계는 불교수행이라 할 것 같으면 통상적으로는 사마타수행과 위빳사나 수행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구분들을 분명하게 할 줄 알고 서로의 이로운 장점들을 서로 활용할 줄 알아야 만이 수행에 진척이 있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얘기들을 정리를 좀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부분 혼동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지혜를 가져오게 되고, 또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위빳사나로 전환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똑같은 거 아닙니까?” 하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위빳사나 수행으로 배를 관찰할 때 배가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데, 사마타 수행을 할 때도 그걸 가지고 대상으로 하거든. 코끝을 예로 들면 코끝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위빳사나 수행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가지고 하고, 사마타 수행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가지고 하니까 이것을 같은 것으로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사마타 수행하는 법으로써의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방법이 있고,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걸 구분을 할 줄 모른다는 거라. 그걸 똑같은 것으로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사마타 수행을 하다 보면 당연히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이 될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거든. 그런데 자기가 의도적으로 전환을 해주기 전에는 계속 사마타 수행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 -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나누는 방법을 보통 네 가지로 크게 얘기합니다.

첫 번째, 수행대상이 차이가 납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분명하게 수행의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어떤 게 있습니까?

사마타 수행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이죠.

위빳사나 수행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 실제 일어나는 어떤 대상이든 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상이 분명하게 차이가 나죠.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를 할 거 같으면 어릴 때 그런 일화들을 다 잘 알 겁니다. 누가 “실재하는 고구마를 표현해오라” 하고 선생님이 과제를 줬는데 학생들은 각각의 과제들을 해옵니다. 어떤 사람은 고구마를 그려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구마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설명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구마 자체를 가져오기도 하고. 고구마를 그려온 것은 그 학생의 입장에서의 고구마인 것이지 공통적인 것은 아니죠? 고구마에 대해서 설명한 것도 객관적인 것은 아니고 주관적인 부분이죠. 또 실재하는 고구마를 가져온 것은 누가 봐도 그거는 고구마라고 한다는 거라. 실재하는 것은 있고, 실재하지 않고 개념적으로 하는 고구마도 있다는 거라.

 

수행대상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대상이 있고, 그렇지 않고 실재하는 대상이 있고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어떤 걸 대상으로 하겠습니까? 사마타 수행은 관념적인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실재하는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숨이 들이쉬면 '들이쉼'하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쉼' 하면서 알아차리고. 오로지 들이쉼과 내쉼이라는 명칭을 대상으로 합니다.

 

실제 들이쉬고 내쉬는 숨하고 명칭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나죠? 아까 고구마를 표현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 명칭이라고 하는 개념, 관념적인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이나 이런 거는 아예 관찰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그것도 관찰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오로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에서 어떤 변하지 않는 현상들이 딱 나타난다. 아주 뚜렷해지기 전까지는 그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개념이 되기 전에는 그것은 실제 움직이고 변화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호흡이나 색깔이 변해나가는 거라든지 아니면 호흡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면 이런 것들이 나타나도 그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그럽니다. 변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데 그런 실재하는 것은 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러다가 그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아주 투명한 색깔로 해서 그것이 변하지 않고 오롯이 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걸 대상으로 하라 그럽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흔히 투명하다 하면 투명함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는 거라. 그래서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됐을 때 그것은 대상으로 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서 그 변하는 것들은 대상으로 하면 안 되고, 변하지 않는 대상이 될 때까지 놔둬 버리라는 거라. 변하지 않게 됐을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거라. 니밋따가 나타나든 아니면 다른 대상, 경계가 나타나든 그렇게 변하지 않는 대상이 돼서 그걸 개념화시키고, 움직이지 않는 대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것을 개념화시켜서 대상으로 잡아야 되는 거라. 그게 인제 사마타 수행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할 때 사마타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체 다른 것은 알아차리지 말아라. 오로지 '일어남' '사라짐'만 하라. 들이쉬고 내쉬고만 하라고 그럽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아파도 아프다는 것도 생각도 하지 말고 떨쳐버리고, 그냥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이것만 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어떤 대상들이 나타난다. 부처님이 나타난다든지 아니면 빛이 확 비친다든지 그럴 거 같으면 그것도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사마타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은 그걸 또 대상으로 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걸 정확하게 개념을 못 잡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대상으로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변하는 대상이니까 사마타 집중하는 것은 깨져버리는 거라. 깨져버리니까 빛이 확 나타나다가도 빛이 스르르 사라져버린다든지 아니면 그 빛이 변하는 것들을 따라가다가도 또 따라가지 못하고 깨져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집중하는 고요한 것들이 또 깨져버리고 그럼 다시 또 '들이쉼' '내쉼' 하라고 그러고. 사마타를 하려면 정확하게 사마타를 하도록 해야 되고, 위빳사나를 하려면 위빳사나를 하도록 해야 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엉뚱하게 이렇게 자꾸 하는 거라.

 

그런데 정확하게 사마타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은 그런 대상이 나타나도 그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고 그럽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변하지 않는 대상이 돼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이 호흡을 대체할 '들이쉼' '내쉼'이라는 명칭을 대체할 만한 대상이 됐을 때 그걸 명칭 붙여가지고 관찰하라고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엄밀하게 얘기할 거 같으면 관념적인 실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적인 거, 개념적인 것들을 갖다가 대상으로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습니까? 그런 개념적인 실체가 아니고 궁극적인 실재를 보라고 합니다. 궁극적인 것을!

궁극적인 실재는 어떤 겁니까? 여기 활을 대면 따갑다든지 아니면 아프다든지 이건 실재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아픔'이라는 명칭을 붙이기 전에 이미 아픔을 알고 있는 거라. 이런 실재하는 것들을 하라는 거라. 그러니까 숨을 할 때도 '들이쉼' '내쉼'하고 명칭을 붙이기 전에 실제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실재하는 것을 관찰하라는 거라.

그러니까 들이쉴 때는 실재하는 것을 보니까 어떻게 돼요? 바람의 요소가 느껴진다든지 아니면 딱딱함의 요소가 느껴진다든지 아니면 시원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느껴진다는 거라. 그러니까 실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라는 거라. 그러다가 실재하는 대상이,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도 실재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관찰하는 거고. 아니면 내가 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실재하는 대상을 갖다가 관찰하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상은 항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개념화시켜버릴 것 같으면 그건 사마타 쪽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명상대상은 이렇게 관념적인 대상과 실재하는 대상으로 구분이 됩니다. 관념적인 대상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실재하는 대상은 우리 마음이 바뀔 때마다 실재하는 대상은 자꾸 바뀌게 됩니다. 마음 따라서 자꾸 바뀌고 또 변화되니까 물질적인 것에 따라서 또 자꾸 바뀌게 됩니다. 대상은 자꾸 바뀔 수밖에 없는 거라, 실재하는 대상은.

그렇지만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그걸 수행을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죠? 실재하는 걸 그냥 그대로 자기 스스로 체험하고 경험하고 알아야 되는 거라. 이 위빳사나 수행은 스스로 경험하고 알지 못하면 위빳사나 수행은 되지 못하는 거라. 아무리 스승이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그걸 체험하지 못하면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렇게 대상의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관념적인 실재가 있고, 더 궁극적인 실재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적인 것이든 실재하는 것이든 그것이 건전한 마음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고, 불건전한 마음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수행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건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 되겠죠. 아무리 관념적이라 하더라도 건전하지 않은 것이라 할 거 같으면 그걸 대상으로 하면 안 되겠죠. 왜?

 

관념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건전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킬 것 같으면 마음은 맹목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야! 우리 같이 술 한 잔 하자.” 이렇게 얘기를 했다. 오늘 마치고 나면 술 한잔하러 갈지도 모르지. 찔리는 사람들 있지. 어쨌든 술 한잔하자 그러면 술 한잔하면 마음도 좀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고 그렇다. 그렇게 예를 들어 봅시다. 술 한잔하자는 건 진짜 지금 술 먹는 건 아니죠?

개념적으로 술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떠올리는 술 하고 이 사람이 떠올리는 술 하고는 분명히 다를 거란 말이라. 어쨌든 개념이기 때문에, 개념이라 하더라도 불건전한 것, 술을 먹고 나서 뭐 어떻게 되고 하는 그런 생각보다는 술을 먹으면 어쨌든 좋아진다는 개념을 또 만듭니다. 실제 좋아지는 거하고 좋아진다는 개념하고는 또 다르단 말이라.

그러니까 어쨌든 옛날에 좋았던 실재하는 경험이 있으니까 맹목적으로 따르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냥 “술 한잔하자” 그래가지고 술을 먹고. 불건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도 맹목적인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거라. 개념이라 하더라도, 개념적인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맹목적으로 따르는 효과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어떤 게 있냐면 맹목적인 것들은 불쾌함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누가 “야, 술 먹는 거 그거 안 좋은 거야. 먹지 마”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실제 술을 먹고 안 먹고 하고는 관계없이 개념적인 말이었지만 이 사람은 내가 술 먹어가지고 기분 좋아질라고 하는데 먹지 마라 하니까 기분 나쁘거든. 불쾌해지는 거라. 개념이라 하더라도 불쾌함을 가져오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있고, 불쾌함을 가져오는 것도 있습니다. 개념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대상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궁극적인 대상도, 실재하는 대상도 꼭 마찬가집니다. 술을 갖다가, 실재하는 술을 먹어서 기분이 좋아지니까 더 술을 먹을려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거라. 실재하는 술을 먹고 또 실재하는 술을 못 마시게 함으로 인해서 또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기도 하고, 궁극적인 것이든 개념적인 것이든 이렇게 나쁜 방향으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신에 또 건전한 마음을 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인 것이든 실재하는 것이든. 어떤 것들입니까?

개념이라 하더라도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뭡니까? “아! 우리 선원에 선풍기가 없으니까 우리 선풍기 하나 사자” 실제 선풍기를 사는 것은 아닌데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아니면 적십자라든지 이런데 기부한다 그럴 것 같으면 적십자만 떠올리더라도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렇죠?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또 실재하는 것들은 어떤 겁니까? 실제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이래서 일으키는 좋은 마음들. 궁극적인 대상이든 또 실재하는 대상이든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고 나쁜 마음을 일으키게 하도록도 합니다.

대상은 그래서 똑같습니다.

 

그렇지만은 궁극적인 것을 대상으로 해야 될 때가 있고 또 실재하는 대상을 해야 될 때가 있다는 거라. 분명히 그걸 구분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러겠어요? 왜 그걸 구분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이 바른 수행방법인가?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하고 있는가?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하고 있는가를 갖다가 자기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알아야 만이 그 방법이 아닐 거 같으면 빨리 전환을 시킬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그걸 모를 경우에는 그냥 따라간다는 거라. 그것이 궁극적인 것인지 실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따라가 버리게 되고. 아무리 좋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좋은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대상의 차이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나쁜 마음을 일으키는 대상 그것이 그게 궁극적인 것이든 실재하는 것이든 그것을 대상으로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수행해가지고 내가 좋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내가 고집만 세지고 남을 더 배타적으로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좋은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거라.

 

그러면 일단 수행이라 할 거 같으면 좋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궁극적인 대상이든 실재하는 대상이든 개념적인 대상이든 해야 된다는 거라.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중에 개념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만약에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면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은 뭡니까? 개념이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진짜 내가 행복해지는 거라. 개념을 가지고 하더라도 내가 행복해지는 거라.

그런데 그걸 개념으로 하지 않고 실재하는 것으로 한다, 내가 이렇게 수행하다 보니까 아주 예리해져서 잘 알아차려져서 내가 진짜 행복해지고, 실재하는 것을 했다 그럴 거 같으면 내가 진짜 실제 행복한 게 이어지는 거라. 실재하는 것들을 하는 방법에서 대상의 차이가 분명하게 있을 수가 있다 하는 거라.

 

어쨌든 사마타 수행의 수행대상은 개념입니다. 하나의 대상인 개념적인 대상입니다. 화두참구하고 있다, '이뭣고' 하고 있다, 그것도 개념이거든. 그것도 하나의 대상이라. 이것들은 어디에 해당 된다고? 이것들도 사마타 수행이라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렇게 하라고는 얘기 안 하죠.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 구분이 분명히 수행대상의 차이에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집중하는 데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어떻게 하라고 그럽니까? 오롯이 그 대상에 몰입되기 전까지는 무조건 그 대상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삼매가 계발될 때까지 무조건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삼매는 어떻게 계발되어집니까? 처음에 대상을 향해서 집중하는 힘이 있어야 되고, 그 대상이 또 나에게 탁 달라붙듯이 그렇게 되도록 돼야 되고, 그리고 그 대상이 변하지 않고 오롯이 될 때가 있고, 그것을 보통 삼매를 나눠가지고 보통 찰나삼매, 근접삼매, 본삼매 이렇게 얘기합니다.

 

찰나삼매라는 것은 어떤 거냐면, 마음을 대상에다 기울이는 거라. 예를 들어 스님을 본다 스님을 보려고 하는 마음을 내야만이 보입니다. 보려는 마음을 찰나 간에 탁 내는 것, 이것을 찰나삼매라고 그럽니다.

근접삼매라는 것은 스님을 본다고 하더라도 밖의 대상을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스님만 보고 있는 거라. 그 스님이 보이는 것은 찰나 간에 변해가는 것인데도 오롯이 스님만 보고 있는 것 이것을 근접삼매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딱 달라붙었다는 거라.

본삼매라는 것은 그렇게 오롯이 스님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스님이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굳건하게 탁 다가와서 내가 눈을 감아도 스님이 그대로 그냥 보이는 거라. 이것을 본삼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그 방법을 씁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대상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건 위빳사나 아니죠! 그럼 본삼매는 변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수행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근접삼매, 오롯이 그 대상만 계속 관찰해야 됩니다. 그 대상을 관찰할 동안에는 다른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무시를 해버린다,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죠?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그러면 근접삼매도 위빳사나 수행에서 수행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계발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합니까? 찰나 삼매! 오로지 순간순간 대상을 착칵 착칵 알아차리는 것, 마음을 거기에다가 갖다 붙니는 것.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집중력의 깊이에 차이가 있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은 오로지 찰나삼매로써만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고, 사마타 수행에서는 찰나삼매부터 근접삼매 본삼매까지 전부 다 해야 되는 거라. 그런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본삼매도 계발할 수가 없고 근접삼매도 계발할 수가 없는가? 이렇게 물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능해집니다. 왜? 순간순간 알아차림이 지속돼 나갈 것 같으면 그것은 근접삼매입니다. 마음이 벗어나질 않으니까. 그런 마음이 지속돼 나가는 것이 오롯하게 그 대상에 붙잡혀서 변하지 않게 될 때 그것은 본삼매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찰나삼매로써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근접삼매와 본삼매로 연결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으로 인해서 찰나삼매, 근접삼매, 본삼매를 다 계발하는 사마타 수행법이 아니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힘이 들겠죠? 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그 변하는 것을 전체를 다 끊어짐 없이 면밀하게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그 방법은 하지 마라 라고 합니다. 오로지 찰나삼매만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차이가 집중력의 차이에서 분명히 납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지혜의 종류에서 차이가 납니다.

사마타 수행은 오로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탁 붙잡아둬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탁 붙잡혀 있을 때는 절대 번뇌가 안 일어납니다. 그렇죠?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합니까?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번뇌가 일어나면 그 번뇌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번뇌가 또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번뇌도 확실하게 알아차리면 번뇌가 사라져버립니다. 또 다른 대상을 하게 되고.

 

그런데 사마타 수행에서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므로 인해서 번뇌가 못 일어나게끔 만들어주기는 하더라도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잠재되고 눌려지는 것입니다.

큰 바위를 여기 풀 있는 데다 놓아버리면 바위 밑에 있는 풀은 못 자랍니다. 어떤 경우는 죽어버리죠. 그렇지만 바위를 들어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풀은 다시 올라옵니다. 번뇌를 누르고 잠재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을 완전하게 없애버리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는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뿌리채 뽑아가지고 그걸 산산이 쪼개어 버립니다. 쪼개가지고 불에다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다시는 자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위빳사나 입니다.

 

그러니까 지혜에도 이런 깊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버립니다. 알아차릴 대상을 어떤 것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예를 들어봅시다. 화가 일어난다, 화를 누를 수는 있습니다. '화를 내면 안 돼지' 하면서 다른 대상을 관찰하므로 인해서 화가 못 일어나게끔 누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대상을 만나면 화가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진다는 거라. 그게 사마타 수행법이라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화가 일어나면 마음을 다른 대상에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화가 일어난 데를 관찰하는 거라. 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그것이 변하는 속성을 알 것 같으면 집착함이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 화 자체가 다시는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대상을 만나더라도 화가 일어날 때는 이런 마음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또 마음으로 관찰하면 화가 안 일어나는 거라. 아예 화 자체가 안 일어나게끔 만들어니는 거라.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되는 것에도 차이가 납니다. 지혜의 방법에도, 종류에도.

 

그다음에는 다른 효과들을 가져오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마타 수행은 잠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위빳사나는 짤라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과면에서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대상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서 이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용어 구분 (사마타, 사마디, 에깍가따, 자나)-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용어들은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samatha)', 어떤 경우에는 '사마디(samādhi)', 어떤 경우에는 '에깍가따(ekaggatā)', 어떤 경우에는 '자나(jhāna)' 하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한덩어리로써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됩니다. 구분할 줄 알아야 만이 위빳사나와 연계를 시켜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위빳사나 하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타(samatha)'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겁니까?

'고요하다' '맞다' '평온하다'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고요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많은 노력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을 보통 '사마타'라고 얘기합니다.

많은 노력을 해서 고요하게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불건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되겠죠. 그래서 해로운 상태를 가져오는 것들은 가라앉혀 버린다는 거라. 그만 일어나게끔 그치게 만든다는 거라. 그치게끔 정지하게끔 만든다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를 중국에서는 뭐라고 표현했느냐면 '정지'라고 '지(止)'라고 했습니다. 가끔씩 책에 보면 지관(止觀)수행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止)'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위빳사나'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정지한다' '그것이 오는 것을 탁 막아서 정지하게끔 만든다' 그게 사마타의 의미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그 대상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게 되고, 그래서 움직임이 없게 돼서 고요한 상태를 '사마타'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사마디(samādhi)'는 어떤 것을 사마디라고 하겠습니까?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대상에 모으는 방법'뿐 아니라, '마음이 대상에 깊이 있게 모아진 상태''사마디'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내 스스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기쁨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즐거움이라든지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합니다. 이런 전체적인 것을 '사마디'라고 합니다.

 

경전에 가끔씩 <집중하는 것들이 위빳사나 수행을 도와준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마타가 위빳사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사마디라고 하는 집중이 위빳사나를 도와준다고 돼있습니다. '사마디'라고 하는 대상에 집중된 상태, 그 상태가 위빳사나를, 그러니까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끔 만들어 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걸 구분 못 할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으로도 위빳사나를 한다 하고 얘기를 한다는 거라.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사마타가 아니고 사마디! 그 '집중된 상태' 그 집중된 상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오롯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도 있고, 그다음에 기쁨이 있는 상태가 있을 수도 있고, 즐거움이 있는 상태가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상태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디는 아주 포괄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마타 보다도 사마디라는 개념이 훨씬 광범위합니다.

그런 상태들은 집중돼있는 상태도 위빳사나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기쁨이 일어났으면 기쁨이 일어난 상태도 위빳사나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즐거운 상태도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거라.

사마디가 분명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데는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이것을 구분 안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분명히 '사마타'하고 '사마디'하고는 다릅니다.

 

그다음에 '사마디'하고 집중된 '에깍가따'하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까 사마디는 여러 가지 상태를 나타내는데,

'에깍까따(ekaggatā)'는 그냥 집중된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동의어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는 것들은 수행을 안 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면 거기서 나를 볼 때 집중된 마음으로 탁 보지 않으면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마음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집중된 상태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요소(心所)' 중에서 '공통되는 일곱 가지 요소'로써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디는 공통된 요소는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다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집중된 마음의 상태도 있고, 일선정에 드는 상태도 있고, 기쁨의 상태도 있고, 즐거움의 상태도 있고 여러 가지 상태가 있다는 거라.

 

사마디는 집중된 상태라고 하는 에깍가따를 포괄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지 이것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사마타 수행을 하면 사마디가 계발되도록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느냐면 오로지 집중만 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그러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을 바르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 사마디의 상태는 분명히 여러 가지 상태들이 있다는 거라. 그 상태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져야 되는데, 오로지 모든 걸 집중만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된다는 거라.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그래서 사마디를 계발하는 수행자라 할 거 같으면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틀려버렸다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하고 에깍가따라고 하는 집중된 마음의 상태하고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 사마타 수행과 '자나'라고 하는 '선정' 하고 어떤 경우는 그것도 동의어로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분명히 다릅니다.

'자나(jhāna)'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인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얻어지는 상태이고 그것을 '선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에 들뜬다든지,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든지, 의심을 하는 것이 있다든지, 아니면 화를 내는 것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이 극복이 돼나가서 그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탁 들게 되는 것을 '자나'라고 그럽니다.

사마타 하고는 다르죠! '자나'라고 하는 것은 이런 다섯 가지 장애가 점차적으로 딱 중지된 것들을 '자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중지되지 않았을 거 같으면 자나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가끔씩 '스님 이것이 일선정에 해당이 안 됩니까?' 하고 얘기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일선정에 있는데도 앞에서 얘기한 들뜸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이 다른 현상에서 나타난다고 할 것 같으면 선정에 들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타 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봐야 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하고 자나라고 하는 선정하고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것을 구분시켜주지 못하면, 사마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자칫 잘못하면 "아! 당신 일선정에 들었다, 이선정에 들었다" 이렇게 잘못 판단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선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으로 일으키는 말이 첫 번째로 정지돼버리고, 그다음에 몸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정지가 되어나갑니다. 기쁨도 정지가 되어나가고, 즐거움도 정지가 되어나가고, 이런 상태가 자꾸 지속되어나가고. 그러고 나서는 의식조차도 정지되어버리고, 그다음에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조차도 정지되어 나가고, 이런 상태가 각각의 상태에 따라서 일선정이다, 이선정이다, 삼선정이다, 사선정이다 하고 구분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일선정의 구분은 어떻게 됩니까? 맨 처음에 사유하는 것들이 먼저 정지가 되고, 사유하는 것이 정지가 돼가지고 언어적으로 사유들이 다 끊어진 상태가 되어야 일선정에 든 것입니다. 그 상태가 안 됐을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선정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하는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사마디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되고, 또 사마디와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들도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다음에 사마타와 자나라고 하는 것들도 구분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은 어떻게 쓰냐면 '사마타'라 할 것 같으면 '마음집중' '삼매' 아니면 '선정' 이렇게 용어 구분 없이 그냥 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분 없이 사용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 사마디의 상태 -

 

어쨌든 사마타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사마디의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마디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감각적인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되고, 그래서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내 자신을 보호해야 됩니다. 욕망, 화내는 것 이런 것들은 감각적인 것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내 마음이 보호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 사마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뭡니까?

'사띠(sati)''삼빠자나(sampajāna)'!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어야 만이 사마디를 지속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러한 상태에 대해서,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고 '아! 참 잘하고 있다'하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또 하나가 장애들, 아까 얘기한 다섯 가지 장애들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

그러고 나서 일어나는 것이 네 가지 선정!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이라고 하는 것.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행위 자체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행위 자체가 사마디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선정이라고 하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인 것이고, 또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인 것이고, 또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감각적인 것들을 못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이고,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하고 만족하고 살도록 만드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사마타수행을 하더라도 사마디를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은 사마디 중에서 찰나삼매가 필요합니다. 카니까 사마디(khanika-samādhi). 찰나적으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사마디를 계발하더라도 집중되고 그걸 변하지 않게끔 하는 사마타 수행으로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서 어떤 현상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쭉 그 대상만 나타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집중할 수 있는 사마타 수행방법을 40가지로 나눠놓았습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외운다든지, 아니면 흰 쟁반을 한다든지, 아니면 코끝에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이것을 관찰한다든지 여러 가지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상적으로 40가지로 나눠놓았습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렇게 구분을 안 해놓았죠? 오로지 하나입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그거 하나만 대상으로 하게끔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대상에서 그것이 변하는 속성이라든지, 그것에 대해서 '아! 조금 천천히 했으면, 조금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또 '아! 이것이 너무 빨라서 감히 내가 내 것이라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 아니면 이것은 내 것이라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게 되는 거라.

 

왜? 대상은 어떤 경우든 공통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상은 반드시 변합니다. 변하는 것에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변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어서 콘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라.

어떤 대상이든 이 세 가지 특성은 공통된 특성으로 나타나게끔 돼있습니다. 당연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면 어떤 대상이든지 이 세 가지 공통된 특성이 드러나져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반드시 이런 기본적인 공통된 특성이 드러나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크게 구분해서 이것이 위빳사나 바와나와 사마타 바와나를 구분하는 겁니다.

 

아직은 수행을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잘 안 해봤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러 왔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그 일어나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덧없고 실체가 없고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갖다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갈망하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야 만이 위빳사나 수행으로 대상을 더욱더 있는 그대로, 집착하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게끔 된다는 거라.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특성들을 자꾸 발견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좌선수행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호흡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그리고 호흡은 언제든지 변하게 돼있습니다. 들이쉬었으면 내쉬게 돼있고, 가장 수행하기 좋은 대상이 뭡니까? 호흡이라는 거라. 변하고 있죠. 그리고 그 변하는 것은 분명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다릅니다. 다르게 돼 있죠. 그리고 그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한번 들이쉬었으니까 한 오 분 정도 내쉬지도 않고 들이쉬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다고 있을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된다는 거라. 그런 특성들을 가장 발견하기 쉬운 게 호흡이라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호흡을 관찰할 때 주의할 점은

인위적으로 숨을 쉬지 말아라. 그다음에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할려고 애쓰지도 말아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고, 그러니까 들어오고 나가고 할 때 공기의 흐름에 따라서, 공기는 뭡니까? 바람의 요솝니다.

그 바람의 요소가 어떻게 느껴지는가? 숨을 들이쉬니까 차가운 느낌이 들고 내쉴 때는 텁텁한 느낌이 듭니다. 바람의 요소의 현상들입니다. 실재하는 텁텁하고 차갑고 하는 그런 현상들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서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라든지, 아니면 딱딱함의 요소라든지, 아니면 뜨거움의 요소라든지, 움직임의 요소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꾸 관찰을 하도록 하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은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이 우선이 돼야 한다" 라고 얘기합니다.

사대요소에 대해서 관찰해야 만이 그 대상에서 삼법인의 특성들을 발견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경행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발바닥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발이 움직이려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먼저 움직이려는 의도를 내서 발이 움직이게 됩니다. 발바닥이 움직이면서 들어 올려지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 실재하는 현상들, 가벼운 실재하는 현상이든 무거운 실재하는 현상이든 그런 실재하는 현상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릴 것 같으 그것은 사마타 수행으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더라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명칭에 붙잡혀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관념적인 대상을 하고 있는 거라. 관념적인 대상은 사마타 수행이라고 그랬죠? 그렇게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호흡을 관찰할 때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실재하는 대상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들이쉼' '내쉼' 하는 관념적인 명칭에 마음이 묶여 있으면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다음 시간에는 사마타 종류의 40가지 중에서 하나씩 하나씩 구분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도 위빳사나 수행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호흡을 관찰할 때의 방법에 대한 것들부터 해서 위빳사나 수행 하나하나 구분해서 하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짧은 호흡을 들이쉴 때, 긴 숨을 들이쉴 때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차차 구분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