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수행하는 이유, 예비수행 네 가지 (20090609)
먼저, 왜 수행합니까?
수행을 왜 하려고 하고, 부처님이 왜 수행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부처님은 6년 수행 해가지고 깨달음을 이뤘지만, 여러분들은 6년 해가지고 되겠습니까? 한 60년 해야 될 것 같아요?
수행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하는 이유들을 들어보면 그것을 이유로 수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가 복잡하고 그러니까 이 복잡한 것들을 벗어나려고 수행하는 경우들이나,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면 화가 많이 일어나는데 화가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좀 잠재워서 평온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 뭐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수행의 기본은 그게 아닙니다.
먼저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은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먼저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수행했던 이유는 '생로병사에 대한 괴로움'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그 괴로움을 소멸하려고 수행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생로병사라고 하는 괴로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괴로움을 싫어합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그런 노력들의 일환으로 여러분들이 위빳사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수행을 할 경우에는 '아! 수행에 대해서 내가 이런 마음으로 해야 되겠다'하고 먼저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소멸되는 길은 부처님이 6년 수행을 해서 가르쳐주신 이 위빳사나 수행이다'하는 생각을 먼저 내야 됩니다. 많은 '탐‧진‧치라고 하는 정신적인 번뇌, 그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그 번뇌를 완전하게 파괴하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
부처님이 그런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가르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계‧정‧혜(戒定慧) 세 가지죠!
그러니까 팔만사천 경전이 있지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빼고는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실라 시카' '계학' 도덕적인 훈련」 처음 배워야 될 게 도덕적인 훈련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법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뭐부터 합니까? 삼귀의‧오계부터 받죠! 그냥 단순히 따라 읽으라는 게 아니고, '계'라고 하는 것은 '받아지닌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서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그래서 일반 신도들은 오계나 팔계 이런 것들을 받아지니게끔 돼있습니다. 어떤 법회에 가더라도 계학을 먼저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도록, 그리고 계를 떠올려서 그런 잘못들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실라시카'라고 하는 '계학'입니다.
그다음에 「'사마디 시카' '정학' 집중훈련」이라는 겁니다.
집중이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집중시키려고 일부러 아주 훈련들을 많이 하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배에다가 집중하게 하고, 아니면 코끝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데 집중하기도 하고, 발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데 집중하기도 하고, 안 그러면 그것조차도 못하는 사람들은 손가락을 맞대도록 하면서 자꾸 집중하도록 합니다. 집중하는 훈련들을 합니다.
그 집중하는 훈련들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게 뭡니까? '사마타와 위빳사나 두 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인해서 집중하는 훈련들을 하게끔 합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대부분 하는 방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사마타도 호흡을 관찰하게끔 하고 위빳사나도 주대상으로 호흡을 관찰하게 하기도 하고 이리 하니까 내가 지금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는 건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경우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차이가 있죠!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은 목적이 분명하게 다릅니다.
사마타 수행은 보다 높은 집중을 키우고 기르는 데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다른 대상들을 다 잊게끔 한다는 겁니다. 내가 머리가 아프다 그러면 다른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머리 아픈 걸 잊어버리고 벗어나 버리고 머리 아픈 걸 해소시키는 겁니다. 몸이 어디가 아프다, 그러면 또 어떤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가지고 몸의 아픈 부위들도 치유를 해나가게끔 하고, 이런 것들이 사마타 수행의 목적입니다. 그런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굉장히 높은 진보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집중은 집중일 뿐이라는 거라. 집중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는 거라. 왜? 집중하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더라도 정신적인 대상과 육체적인 대상은 끊임없이 바뀌어나가고 변해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는 결코 모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 수가 없고 지혜를 완전하게 계발할 수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당연히 지혜롭게 살아가지지 못한다는 거라. 내가 화가 일어나면 '아! 이게 원인이 돼서 화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야 만이 그 화를 다스려 나갈 수가 있는데 화가 일어나는 건 놔둬 버리고 거기에다가 집중함으로 인해가지고 그때그때 마다 화는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예 안 일어나게끔 만들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알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화가 일어나기 전에 화의 원인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다스려버립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은 보다 높은 집중은 가져오게 할지 몰라도 완전한 지혜를 열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에 비해서 위빳사나 수행은 집중을 키우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키우죠. 뭐를 가지고 키웁니까? '아닛짜, 둑카, 아낫따' '삼법인'을 가지고 합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꿰뚫어 봄으로 인해서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 지게끔 하는 것! 그리하더라도 그것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일정 부분 집중이 필요하죠! 집중을 하지 못하면 꿰뚫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또 꿰뚫어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보완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꿰뚫어 볼 수 있게끔, 삼법인을 통찰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필요한 집중은 보다 깊은 집중은 아니라는 거라. 웬만한 집중만 있으면 그걸 꿰뚫어 보는 데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집중하는 것도 찰나적인 집중들, 근접된 집중들만 해도 충분하게 이 대상을 꿰뚫어 볼 수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은 보다 높은 집중을 얻기 위해서 찰나적인 거나 근접된 집중보다도 그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완전하게 집중하는 것들을 요구합니다. 완전한 집중을 요구하다 보니까 주변적인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다 무시해버리고 지금 집중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에만 오로지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집중은 찰나적인 집중만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대상이 일어나면 그걸 또 찰나적으로 집중을 하면 되는 거라. 그래서 집중하는 대상이 여러 가지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일어나는 것마다 다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마타 수행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지고 마음을 오롯하게 모으는 데는 좋은데, 위빳사나 수행은 집중이라도 대상이 일어나는 대상마다 자꾸 바뀔 수가 있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좀 산란하다는 거라. 산란하니까 '아! 내가 지금 수행을 잘하고 있나 못 하고 있나'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완전한 집중으로는 삼법인을 통찰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내가 필요한 것은 완전한 집중보다는 찰나적인 집중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 찰나적인 집중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더불어서 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가끔씩 얘기했던 사띠-알아차림도 있어야 되고, 그것을 완전하게 아는 삼빠자나도 있어야 되고, 주의 집중하는 것들도 있어야 되고, 또 그 대상에 대해서 겨냥하는 것들도 있어야 되고 이런 여러 가지들이 복합적으로 서로 잘 작용을 해야 만이 이 위빳사나 수행이 잘 무르익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사마타 수행보다도 위빳사나 수행이 훨씬 어렵다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보면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더라도 위빳사나로 안 하고 사마타로 해버리는 거라. 사마타는 쉬우니까, 무조건 거기에 빨려 들어가 버리면 되니까. 그러니까 배를 관찰한다 하더라도 배의 특성을 관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기에다가 집중하는 거라. 코끝에 숨이 들이쉼 내쉼 이것만 자꾸 집중하는 거라.
그러니까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면서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왜? 단순하니까! 인간은 복잡한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복잡하게 할 거 같으면 그걸 귀찮아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수행이라. 여러분들이 높은 집중을 키울려고 하는 것이 아닐 거 같으면 그렇게 수행해선 안 된다 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거라. 이와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이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이 뭐냐면 대상의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수행하는 방법에 차이가 납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뭡니까? 오직 하나의 대상이죠. 두 개의 대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숙고를 한다 그러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면서 이 석가모니불 하나만 하면 됩니다. 생각이 떠올라도 그거 다 끊어버리고 석가모니불 하나만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더라도 안 보기 위해서 눈을 감아버립니다. 오로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리고 내가 집중해야 되는 것은 석가모니불 하나라는 것만 아는 거라. 그것만 하나만 하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나 다른 건 전부 끊어버린다는 거라. 하나의 대상만 한다는 거라.
또 여러분들이 호흡을 할 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들이라든지 아니면 변화되는 거라든지 이런 거 전부 다 끊어버린다는 거라. 전부 다 무시해버리고 그냥 오로지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이거만 하는 거라. 석가모니불 할 때도 들이쉴 때 '석가' 하고 내쉴 때 '모니불'하고 오로지 그것만 하는 거라. 하나의 대상 외에는 취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 하나의 대상에만 뚜렷하게 마음을 모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렇진 않죠! '석가모니불' 하고 있을 동안에도 마음이 다른 생각 하고 있으면 그 생각이 일어나는 걸 대상으로 합니다. 석가모니불은 그냥 놓아버리고 그거는 또 잊어버리고,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함' 하면서 그것을 대상으로 하고, 눈에 보이면 생각한다는 건 또 놓아버리고 '보임'하면서 대상으로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은 바로 대상으로 삼는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오로지 하나이다. 만약에 석가모니불 하고 있으면, 석가모니불 하나만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만 대상으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다른 대상들이 나타나면 석가모니불을 놔버리고 그 대상을 잡고, 그 대상이 사라지고 다른 대상이 또 나타나면 요걸 또 놔버리고 요걸 또 대상으로 하고, 대상이 바뀔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은 무시하지도 않고 그것을 또 취하지도 않는다는 거라. 일어나는 즉시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라. 그게 대상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절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려고 마음을 모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씩 수행할 때 코끝에 숨이 '들이쉼' '내쉼'이 안되면 의도적으로 다른 건 다 무시해버리고 '들이쉼' '내쉼' 이것만 자꾸 합니다. 안되는 거라! 그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게 아닌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하다가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고, 가렵고 해도 다 무시해버리고 '아! 안돼. 수행해야 돼' 하면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이것만 합니다. 그거는 안된다는 얘기라.
단, 될 경우엔 언제 되느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쉼' '내쉼'하고 관찰할 때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 변화되는 것들, 변화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요때의 변화와 이때의 변화는 다릅니다. 그러면 대상이 지금 현재 요게 일어났으면 요걸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게 일어났으면 이게 대상이 되이야 되는 거고. 숨을 들이쉴 때도 이렇게 대상 대상이 현재 일어나는 것에 따라서 자꾸 마음이 바뀌어서 그것을 주대상으로 했을 때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도 숨을 '들이쉼' '내쉼'하고 관찰할려고 하지 말고 들이쉴 때 일어나는 느낌들, 내쉴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라는 게 그런 이유들입니다.
왜? 마음은 항상 현재에 머물도록 해야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도 '일어남' '사라짐'하고 관찰할 때 '일어남' 하면서 관찰하고 '사라짐'하고 관찰하면서 일어날 때의 일어나는 느낌들, 일어날 때의 느낌은 처음에 일어날 때의 느낌과 마지막에 일어날 때의 느낌들은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 일어난 느낌 그다음에 중간에 일어난 느낌 그리고 마지막에 일어난 느낌을 낱낱이 자꾸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래서 느낌을 자꾸 관찰하라.
왜? '일어남' '사라짐' 아니면 '들이쉼' '내쉼'이라고 하는 것은 명칭이기 때문에 명칭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느낌은 항상 변화돼나갑니다.
왜? 위빳사나 수행은 그곳에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삼법인을 꿰뚫어 알아야 되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 알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느낌에서 변화되는 것들, 그것의 영원하지 않은 속성들, 그것의 불만족성들을 거기서 발견해내라는 거라. 그런데 명칭에다가 그것을 발견할려고 할 거 같으면 절대 명칭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명칭 자체에는 그 어떤 명칭에도 무상 고 무아가 포함이 안 됩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명칭 자체에 붙잡힐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수행이 안 될 때는 처음에는 명칭을 사용해서 마음을 대상에 일치시켜주기만 할 뿐이지 그 명칭을 가지고 계속 수행을 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런 차이점이 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수행을 할 때 그 점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런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은 분명하게 드러나집니다.
사마타 수행은 앞으로 계속해서 토요일날 법회 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설명들을 할 겁니다. 왜? 어차피 예비적인 단계에서의 수행은 사마타 수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할 때는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은 위빳사나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위빳사나를 할 때 먼저 조심해야 될 것,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까 위빳사나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지금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 어떤 현상이든 그것이 정신적인 현상이든 육체적인 현상이든 어떤 현상이든 즉각적으로 알아차려나가라.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수행법이 아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 대상은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일어남' '사라짐'만 하고 있다면, 그럼 내가 하나의 대상에 빠져버렸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빨리 바로 잡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는 뭐냐면 수행을 할 때 완전하게 밀착하도록 하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수행대상을 바로 잡지를 못하고 있다는 거라.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 가려움이 일어나면 '가려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을 수행대상으로 반드시 하라.
그다음에 세 번째, 그런 현재 일어난 것들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그 현상에서 일어나는 감각‧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이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이걸 무시해버리면 위빳사나 수행을 못해나갑니다.
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먼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수행을 시작하려고 할 것 같으면 머릿속에 있는 잡다한 생각들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아, 내가 수행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수행해가지고 삼매를 체험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어디 아픈 부위가 있으니까 그것을 치료해보고 싶다. 화가 잘 일어나니까 화가 좀 안 일어나도록 다스리겠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 이걸 '잡동사니'라고 그럽니다. 이것들을 일으키지 않아야 됩니다.
머릿속에 생각을 먼저 해버릴 것 같으면 수행대상에서 그게 장애가 됩니다. 그것이 언제든지 다시 또 튀어나온다는 거라.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그것이 치료가 안 되면 내가 이거 해갖고 될까 하는 생각을 또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러면 수행에 대해서 흥미도 떨어지고. '수행이 왜 이리 안 될까? 에이, 그만둬버려야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행을 하는 데도 진척이 없다, 이거 뭔가 방법이 잘못된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자꾸 연결이 돼버린다는 거라.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끊어버리고 시작을 하라는 거라.
희망하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이런 것들은 일단 접어둬라. 접어두고 아주 자유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면 즉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합니다. 그것이 유연한 마음입니다. 순진하다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것이 설혹 손을 데이는 게 있더라도 생각하면 그대로 또 하는 거라. 그런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자꾸 잡을려고 해야지 내가 먼저 일으키지는 말아라. 그래서 '먼저 머릿속에 있는 잡동사니를 완전하게 제거하라.' 아예 그런 것들을 가지지 말아라.
그다음 두 번째는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야 됩니다.'
수행을 하려면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을 하면 안 되는 거라.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은 '내 몸과 마음' 입니다. 그것이 자신입니다. '내 몸과 마음 외에 일어나는 것은 하지 마라'라는 거라. 멀리 있는 것들을 지금 내가 생각한다 해가지고 지금 현재 자신의 세계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수행은 오로지 자신의 세계입니다.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지금 현재 하고 있는 동작, 행동, 느낌들을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면서 마음이 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수행한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들, 아니면 비난하는 것들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도 자기 자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내가 내세우려고 하는 것들 그런 것도 자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의 세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물결에 자꾸 휩싸이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기억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자! 그렇게 하는 것이 위빳사나 입니다.
위빳사나를 하고, 또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정학을 익혀나갑니다.
그다음에는 해야 되는 게 뭡니까? 혜학이죠. 「혜학. '뺜냐시카'」
사마타 수행에서는 지혜의 단계가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여러 단계로 구분을 해놔놨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부분을 익히려고 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더 나아가면 되는 것이고.
이것이 계‧정‧혜라고 하는 삼학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제자일 것 같으면 반드시 배워야 되는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정학과 혜학을 익힐 수 있고, 정학과 혜학이 익혀지면 당연히 계학이 또 따라와 지게끔 됩니다. 삼학을 두루 익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위빳사나 수행밖에 없다. 사마타 수행은 정학은 명확하게 익힐 수가 있습니다. 계학도 일정 부분은 잠재하게 해 둘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학을 완전하게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혜학은 애초부터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불교 고유의 수행은 다른 어떤 수행이 아니고 위빳사나 수행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다른 수행법과 부처님의 수행법이 차이 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는 거라. 다른 수행법은 거의 대부분이 사마타 수행이라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하는 곳은 이 지구상에 오직 불교수행법 뿐이라는 거라. 그것도 참 테라와다불교에서 하고 있는 수행법 밖에는!
자! 그런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은 망아지 같이 날뜁니다. 그래서 '바로 수행을 시작하라' 할 것 같으면 앉아가지고 마음이 헐떡거려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선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됩니다. 안 그러면 헐떡거리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다 보면 수행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시간 내내 그냥 헐떡거리다가 끝나버립니다. 그러면 이익이 없겠죠!
그래서 예비적인 단계를 설정을 해둡니다.
그 예비적인 단계들은 사마타 수행들을 병행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 사마타 수행은 어떤 겁니까?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다른 거 다 끊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헐떡거리는 마음이나 헐떡거리는 몸을 가장 빨리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위빳사나도 아니고, 물론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은 바로 위빳사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 사마타 수행 방법으로 헐떡거림을 가라앉혀라는 거라.
- 예비 수행 (사마타 수행) -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부처님의 속성에 대한 숙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석가머니불, 부처님의 명호는 몇 개가 있습니까? 열 개죠!
여래십호 중에 하나를 먼저 선택을 하는 거라. 먼저 여래십호에 대한 것들은 토요일 날 계속 줄기차게 해줄 겁니다. 우선 대표적인 거 하나만 해봅시다.
아라항! 아라한이 뭡니까? 모든 번뇌를 여의신 분, 모든 번뇌를 떠나신 분이죠. 그게 아라한이라는 뜻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그 번뇌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아라한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망상 많이 피우고 각각의 번뇌를 일으키는데 그거하고는 차별되는 거죠? 부처님이라는게. 그 번뇌를 떠난 상태를 한번 상정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한참 고민을 하면서 번뇌에 휩싸여 있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떻습니까? 시원하죠! 그게 아라한이라는 거라. 그 시원한 상태가 항상 유지되는 것.
저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그걸 염두에 두라는 거라. '아! 저렇게 완전하게 번뇌를 떠나신 분, 저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라. '아라항' 하면서 그 생각을 일으키는 거라. 그래서 '아! 저렇게 청명하고 깨끗하고 고요하신 분이구나'하는 생각을 탁 일으키면서 마음에서는 환희심을 일으키는 거라. 또 '그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이, 그리고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른 길이 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내가 그 위빳사나 수행을 하므로 해서 나도 아라한이 된다'는 생각을 또 일으키라는 거라.
내가 아라한이 되면 나도 저와 같이 확 트이고 깨끗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느낌들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 같으면 또 얼마나 기쁜 일이라! 부처님의 속성에 대해서 숙고하라는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숙고하면
첫 번째, 마음이 점진적으로 대상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것들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그런 기쁨을 가져온다는 거라.
'아, 똑같은 수행을 해나가고 있다'는 그런 기쁨! 그리고 그런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부처님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거라. 어떤 경우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이 없고 그 대상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그런 부처님을 의지처로 하고 또 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거라. 내가 조그마한 고통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적어진다는 거라. 나쁜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그 상황에 대해서 급격하게 반응하는 그런 두려움이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의 특성에 대해서 숙고하면 이런 이익들이 있다는 거라.
내가 만약에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면서 이런 이익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냥 명칭을 가지고 하고 있는 거라. 석가모니불에 대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만약에 아라한이면 아라항 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런 번뇌를 여읜 맑고 깨끗한 느낌이 확 다가와져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집중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명칭 자체에만 매달려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석가모니불'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특히 여러분들 정근할 때 오만 신경 다 쓰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도 없고 하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 특성에 숙고를 안 하고 있다는 얘기라.
반드시 부처님에 대해서 그 특성에 대해서 숙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명확한 특성들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걸 이해를 해야 됩니다.
우리 지금 홈페이지에 부처님의 열 가지 특성에 대한 것들이 올려져 있는가요? 있죠! 그것을 참고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 이렇게 하지 말고, 하나의 특성 아라한이면 아라한, 삼마삼붓다면 삼마삼붓다 거기에 대한 것들을 명확하게 하나씩 잡는 것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인해서 마음을 집중하게끔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서 바로 수행에 뛰어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예비적인 단계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두 번째는 <멧따 바와나> 자애를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자애는 어떻게 수행합니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괴로움 없기를...' 이런 것이 자애수행이죠! 자애수행은 '나'라고 하는 특정인, 아니면 나 말고 또 다른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불특정 다수 '모든 이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죠!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자애수행을 원칙적으로 하려면 그 단계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단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수행하기 위한 예비단계라는 얘깁니다. 그럼 이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특정인을 대상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죠? 모든 존재! 모든 존재에 대해서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기를, 당신이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이렇게 하지 말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으니까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괴로움이 없기를' 그것이 자애수행입니다.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괴로움이 없는 단계, 어떤 단계가 될까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해봤들을 겁니다. 다리를 구부리고 있다가 한참 괴로워서 죽을 지경에 다리를 쫙 펴고 나면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마음으로 '괴로움이 없기를'하고 해야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아니면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진짜 내가 행복에 넘쳤을 때, 법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걸 여러분들이 경험해야 되는데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법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우선 세속에서라도 진짜 행복한 것들! 욕심으로 인해서 욕심이 해결됐을 때 행복한 것 말고, 모든 것들을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들! 그러니까 뭘 취하려고 막 욕심부리고 하다가 '아이고, 이게 다 쓸데없는 것이다' 하고 탁 놓아버렸을 때 그 번뇌가 탁사라짐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 이걸 떠올리라는 거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 그런 마음으로 '행복하기를' 하라는 거라. '모든 이들이 괴로움이 없기를' 할 때 그런 마음으로' 괴로움이 없기'를 하라는 거라. 그리해야 만이 내가, 이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멧따 수행' 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몸의 혐오성에 대한 숙고> 입니다.
'이 몸은 부정하고 이 몸은 더럽다' 하는 것! 좀 끔찍할 것 같죠? 이때까지는 좋은 방향으로 했는데 부처님에 대해서 떠올리고 또 자애수행을 하고 참 좋은 방향이었는데 인제는 정반대 방향이라.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 부정한 것이다.' 창자, 고름, 피, 이런 부정한 것들을 떠올림으로 인해서 얼마나 더럽고 부정한 것인가, 그래서 그 부정하고 더러운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탁 떨쳐버려라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버려라는 거라. 마음도 온갖 부정한 것들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그것들을 떨쳐버려라는 거라.
살아있는 중생들의 가장 큰 짐이 뭐냐면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그 집착하는 것들을 끊기 쉬운 가장 좋은 방법이 '혐오성'입니다. 그것을 일으키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몸의 혐오성에 대해서 숙고할 때는 '반드시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특성들을 조사를 해서 그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떨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것이 세 번째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는 <죽음에 대한 숙고> 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 살아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 누구도 모릅니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아니면 당장 조금 있다가 죽을지 누구도 모른다는 거라. 어느 순간이든지 나는 죽을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지만 삶이란 것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거라.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지도 모르고 또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거라. 살아있는 것은 불안한 거라. 그런데 죽음은 확실하다는 거라. 그 죽음에 대해서 숙고를 하라 하는 거라.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를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더욱더 노력해서 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얼마 전에 ooo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느냐는 거라. 나는 그렇게 안 된다는 보장을 누가 하느냐는 거라. 죽고 나서 뭐할 건데? 내가 천국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다른 존재가 천국에 가는 것인데, 내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지금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 그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대로 천국에 간다고 할 거 같으면 죽고 나서 이 몸도 다 같이 없어져 버려야 돼. 들려서 올라가야 돼. 그런데 몸은 그대로 있단 말이라.
다른 형체로, 뭐 다른 종교에서 얘기하듯이 영혼이 거기 간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은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 지금 몸을 받아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 영혼조차도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천국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내하고는 지금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라는 거라. 그런 죽음에 대해서 자꾸 숙고를 하라는 거라. 그래서 하루빨리 수행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라. 그것이 수행의 예비단계들입니다.
먼저 수행을 할 때 이런 것들을 자꾸 떠올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떠올려서 마음을 수행하려는 마음, 그리고 빨리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훈련들을, 그것을 수행의 예비적인 단계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수행을 먼저 딱 시작을 하면 그 예비적인 단계를 약 5분 정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5분 정도 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보통 통상적으로 한 세 가지로 나눕니다.
앉아서 하는 수행, 걸으면서 하는 수행, 서서 하는 수행. 초보 단계에선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그다음에는 뭐가 있습니까? 일상적으로 하는 수행, 그렇게 나눠집니다.
좌선수행 하면서 좌선수행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인제 좌선수행에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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