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4. 수행과 업 (20090623)

담마마-마까 2019. 11. 9. 17:33

https://youtu.be/33Sqbb6wJWo 

 

* 수행과 업(業) (20090623)

 

부처님의 경전 중 중부경전 중의 한 경에 나온 얘기인데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의 흉내를 내고 개의 습관을 닮으면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그런 것들을 믿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꼭 그 구절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불을 믿고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극락왕생한다. 천상에 태어난다.' 뭐 별반 다른 건 없습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거든.

부처님이 그걸 보고 뭐라고 답을 했겠습니까? '개의 습관을 가지고 개가 하는 것들을 실천을 할 거 같으면 개밖에 더 되겠느냐? 그러고 나서 만약에 그것도 실천을 못하면 죽고 나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밖에 더 하겠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을 믿음으로 인해서 그걸 갖다가 몸으로 실천하고 흉내낸다 해가지고 다음 생에서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라. 그것이 부처님의 논지입니다. 그러면서 인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나쁜 행위가 있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좋은 행위가 있고, 행위라는 건 업(業)을 얘기합니다.

나쁘거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나쁘거나 좋은 업이 있고,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나쁜 행위는 뭡니까?

살생 도둑질 거짓말 이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그건 뭐 불을 보듯 뻔한 거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좋은 행위는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보시하고 계율 지키고 하는 그런 여러 가지 좋은 행위들을 얘기할 겁니다.

 

그다음 세 번째,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나쁘거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나쁘거나 좋은) 행위들, 그거는 뭘까? 가끔씩 나는 좋은 일을 했는데 나쁜 결과를 받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화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재판관이었는데 재판관은 판결을 하는 그런 사람인데, 하필 내한테 배당된 사람이 내하고 원수지간이라. 그래서 내가 좋은 재판을 탁 할 수가 없는 거라. 그 사람은 죄가 없는데 '너는 죄가 있다'하고 결국 판결을 때린 거라. 판결을 때리고 나니까 내가 마음이 좀 안 좋거든. 그래서 이 사람이 가는데, 경전에는 망고나무라고 돼있습니다. 어쨌든 맛있는 걸 하나 줬어. “이걸 잡수게” 하면서 줬어.

이 재판관이 죽고 나서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면 낮에는 천신으로 있다가 밤만 되면 아귀로 태어나는 거라. 낮밤이 바뀌는 거라. 낮에는 아주 행복하고 즐겁게 있는데 밤만 되면 그냥 그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을 겁니다. 나쁜 일들을 하고 나서 마음에 좀 찔리는 게 있어 갖고 뭐 좀 좋은 일을 하기도 하고. 애한테 실컷 뭐라 하고 나서, 그것도 나쁜 행위에 대해서 뭐라 하면 되는데 자기가 성질을 부려가지고 화를 내면서 하는 것은 자기가 나쁜 행위를 짓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끔 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흥분해가지고 막 뭐라 하고 나서 애한테 미안하니까 뭐 사과라도 깍아 가지고 먹어라 하면서 갖다 주고 그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대부분 여러분들이 하는 행위들은 아마 여기에 해당이 될 겁니다. 그렇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사람, 아니면 나쁜 일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잘 없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의 법대로 할 거 같으면 이 사람은 좋은 결과가 오기도 하고 나쁜 결과가 오기도 한다는 거라. 나는 왜 좋은 일을 했는데 이렇게 나쁜 결과가 오는가? 하고 자책할 이유가 전혀 없어진다는 거라.

 

그다음 네 번째,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행위들, 그거는 뭘까? 여기서 부처님이 단언적으로 얘기합니다. 실천수행하라!

사띠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는 행위이다 하는 거라.

 

수행은 뭡니까? 좋은 것을 취하려하지 않고 싫은 것도 배척하려 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 나가라 하는 거라. 그러니까 나쁘지도 좋지도 않는 결과라는 것은 뭡니까? 받을 업이 없어진다는 거라! 닙바나라고 하는 것은 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겁니다. 수행을 하면 그런 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라.

 

이것이 부처님이 얘기하는 네 가지 업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느낌은 사람들마다 각각 다 다릅니다. 같은 빵을 먹어도 어떤 사람은 아주 달고 맛있는데, 어떤 사람은 쓰고 맛이 없습니다. 똑같은 느낌이라면 똑같은 결과들이 나타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갖다가 업으로 해석 합니다.

'네가 지은 업으로 인해서 그렇다.' 예를 들면 내가 봉사로 태어났다. 그럼 '니가 과거전생에 나쁜 행위로 인해서 봉사로 태어났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봉사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안에 있는 시신경이 죽어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라. 시신경은 죽어있었겠지. 그렇지만 내가 시신경으로 가는 신경계가 죽어있는 것은 아니라면 이 시신경을 살려버릴 거 같으면 눈은 뜨게 되는 거라. 세월이 지나고 눈이 많이 흐려졌다, 보는 것들이 힘들어진다, 그러면 안경을 쓰면 보이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 것인데 사람들은 이걸 갖다가 그냥 업으로써 치부를 해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은 그건 아니라 하는 거라.

 

'업이라는 것은 단지 행위만을 의미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업을 그렇게 이해했고, 업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 '행위' 이것이 업인 것이지, 업이 다른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 자체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분명히 말하건데 업은 단지 의도일 뿐이다."

내가 지을려고 하는 행위일 뿐이다, 지으려고 마음을 먹는 것 그것일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으로 인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내린 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해진 업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지금 현재의 의도,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바로 내 업이라는 거라. 그것은 뭐냐면 내가 지금 매순간 순간 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거라. 왜? 살아있는 것은 의도를 내야만이 살아있게 돼있습니다. 숨을 쉴려고 마음을 내야 되는 거고, 생각할려고 마음을 내야 되는 거고, 모든 것이 의도로써 이루어진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업은 가장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또 생각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거라, 정신적인 반응들이라는 거라. 그 상카라들이 업을 만든다 하는 얘기라. 마음으로써 시작이 되는 것.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은 결코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라. 나쁜 업이든 좋은 업이든 그 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가지고 내가 알아차리지 않으면 절대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것을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업을 짓는 것은 마음에 의해서 짓게끔 되어있습니다. 그 마음은 수행을 하는데 영향을 받게끔 됩니다. 수행을 할 것 같으면 항상 마음은 맑고 깨끗하고 평온하게 돼있다는 거라.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행위를 하게끔 되고 그래서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는 결과, 그런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결과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업은 내가 지금 일으키고 있는 의도가 바로 업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업을 짓는 곳은 어디입니까? 육근이라는 거라!

안이비설신의 여기가 업을 짓는 곳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 할 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업을 짓는 곳을 잘 관찰하라!" 하는 거라. 업을 짓는 곳만 잘 관찰할 거 같으면, 아까도 업의 4종류를 얘기했지만 마지막 네번째 종류, 업을 짓지 않는 결과를 낫게 된다는 거라. 업을 짓지 않으면 당연히 내가 지금 행위를 하고 있지만, 행위를 하기 때문에 업은 짓고 있지만 받을 결과는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이나 깨달은 분들이 살아가는 것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먹고 자고 하는 것은 똑같은데 그분들은 왜 업의 결과를 받지 않습니까? 업을 짓는 곳들을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받아야 될 결과들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감각으로 살아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빵을 먹고 맛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맛없다고 한다는 거라. 업의 결과를 받았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은 빵을 먹을 때 단지 빵을 먹는 것만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업의 결과가 없다는 거라.

빵을 먹는 것은 똑같은데 어떤 사람은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맛있다는 사람은 더 먹을려고 집착을 일으키게 되고. 맛이 없다는 사람은 싫어하는 마음 화내는 마음이 또 일어나게 되고. 그런데 수행을 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 하는 행위를 그게 업을 짓는 장소라고 알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함으로 인해서 받아야 할 결과는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이 몸을 버릴 때 자취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업의 결과를 받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생중계하는 것.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왜? 그렇지 않고 과거를 회상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내가 업을 만드는 결과를 낳는 거라. 또 미래를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도 업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거라. 왜?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들은 항상 업의 결과를 받게 되는 거라. 그런데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업은 짓고 있지만 업의 결과는 받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거라. 그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형태를 띠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은 항상 생중계하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면 탐·진·치라고 하는 것들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설한 업(業)입니다.

 

업을 자꾸 확대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행하는 것이 업의 결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수행하는 자만이 그런 업의 결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럼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은 어찌할 것이냐?”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 희망은 있습니다. 소금이 여기 이만큼 똑같은 양으로 있다고 칩시다. 요 소금을 그냥 내가 먹었을 경우 굉장히 짭니다. 그런데 이 소금을 한 다라이 되는 물에다가 타가지고 그 물을 먹으면 별로 짠 줄을 모릅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세요? 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져서 그 힘이 넓혀질 거 같으면 이것은 영향을 못 받게 되는 거라. 그렇다고 업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앙굴리말라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99명이나 죽였는데 얼마나 큰 업이라? 업의 결과를 반드시 크게 받아야 될 거라. 그런데 업의 결과를 안 받았던 이유가 뭐냐는 거라. 지금 현재 알아차림을 지속해 나가는 것.

그래서 산고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나 아픔이 있는 사람들,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앙굴리말라 게송을 독송하라고 그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고통이 많은 것들을 상쇄시켜주는 것이 이 앙굴리말라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죄는 많이 지었지만 그 결과를 안 받고 바르게 살아간 분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많이 지었단 말이라. 고통이 많단 말이라. 그 고통을 안 받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앙굴리말라 같은 형태를 띠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고통이 많은 자들은 앙굴리말라 게송을 하라" 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앙굴리말라와 같은 행위를 실천하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지은 행위 그건 어쩌지를 못합니다. 그 결과를 안 받을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업이 지어지는 장소,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여섯 군데를 알아차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지은 행위들이 희석되도록 만들어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해나갈 거 같으면 훌륭한 수행자가 되어나가고, 또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훌륭한 제자가 되어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