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육근_육문(六門)_감각기관 / 닿음포인트, 주대상(20080902)

담마마-마까 2020. 1. 12. 10:13

https://youtu.be/WVqaNJDrlVM

https://youtu.be/nXoNtzaipHA

 

* 육근_육문(六門)_감각기관 (20080902)

 

저번 시간에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리를 똑바로 펴서 등골이 올곧도록 해야 된다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지면 수행을 잘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노력의 힘들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상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다음에 기초적인 수행에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육근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 소리가 귀를 통해서 들어오죠. 어떤 사람은 지금 눈을 떠서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귀로 듣고 있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눈을 감고 귀로만 소리를 듣는 경우보다 훨씬 이해하는 폭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되도록 법문을 들을 때는 듣는 것만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눈을 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법문을 듣도록 하라. 볼 때도 마찬가지로 보는 것만 하라.

 

좌선을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잘되면 좋은데 잘 안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앉아서 좌선을 할 경우에 주된 알아차림은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의 '일어남' '사라짐'입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닿아서 느껴지는 느낌, 닿는 포인트를 중시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몸이 닿아있는 부위를 알아차릴 때, 특히나 망상을 하고 있다든지 생각이 많다든지 마음이 방황하고 있을 때, 그때는 닿아있는 부위를 알아차리면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을 하는데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재적인 현상을 관찰하지 못하고, 아니면 습관적으로 관찰을 하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앉음' '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이 안 될 때 '일어남' '사라짐'이란 것을 버려버리고,

'앉음'이라고 하면서 관찰하면서 몸의 전체적인 앉아있는 모습을 관찰합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앉아있는 모습을 '아! 내가 지금 앉아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앉음' 하면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다음에 '닿음' 하면서 몸이 닿아있는 부위를 관찰합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는 닿아있는 부위는 오른쪽 눈꺼풀이 닿아있고, 왼쪽 눈꺼풀이 닿아있고, 입술이 닿아있고, 이 마주쳐서 닿아있고,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있습니다.

크게 보면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세밀하게 보면 스물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지만은 지금은 여러분들은 초심자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로 나누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을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일어남' 할 동안에 '앉음' 하면서 관찰을 하고, '사라짐' 할 동안에 오른쪽 눈꺼풀 닿아있는 걸 관찰을 하고,

그다음에 다시 '일어남'을 관찰할 동안에 '앉음'하고 앉아있는 상태를 관찰하고 나서, 그다음에 '닿음' 하면서 닿음의 두 번째 포인트 왼쪽 눈꺼풀이 닿아있는 걸 관찰하고,

그다음에 다시 '앉음' 하면서 앉아있는 것을 관찰하고, '닿음' 하면서 세 번째 포인트 입술이 닿아있는 걸 관찰하고,

그다음에 다시 '앉음' 하면서 관찰하고, '닿음' 하면서 네 번째 손이 맞닿아 있는 것을 관찰하고,

그다음에 다시 '앉음' 하면서 관찰하고, '닿음' 하면서 다섯 번째 엉덩이가 땅에 닿아있는 감촉을 느끼도록 해보십시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이 잘되면 좋은데 그게 잘 안 될 때는 그것을 버려버리라.

그것을 버려버리고 '앉음, 닿음1번' '앉음, 닿음2번' '앉음, 닿음3번' 하면서 닿음 포인트 다섯 가지를 관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앉음' '오른쪽 눈꺼풀 닿아있음'

'앉음' '왼쪽 눈꺼풀 닿아있음'

'앉음' '입술이 닿아있음'

'앉음' '손이 닿아있음'

'앉음' '엉덩이가 닿아있음' 하고

다시 '앉음'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른쪽 눈꺼풀 닿아있음'

'앉음' '왼쪽 눈꺼풀 닿아있음' '앉음' '입술이 닿아있음' 이렇게 반복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이 잘 될 때는 이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이렇게 하므로 인해서 마음에 활력이 생깁니다.

대상이 '앉음' '닿음'보다는 훨씬 많아지기 때문에 지루함도 덜어지고 또 마음이 방황하는 마음을 대상에 붙잡아둘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관찰을 해나가도록 하면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할 때도 그것이 주대상입니다.

주대상일 뿐이지 다른 것을 다 놓쳐버리고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앉음' '닿음'을 관찰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게 주대상일 뿐인 것이지 다른 육근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들을 무시하고 알아차리지 말아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수행을 하다가 집에 들어가면 편안함을 느낄 겁니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주대상과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집에만 있지 않고 수행하러 온다든지 아니면 사회활동을 한다든지 시장을 보러 간다든지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해야 됩니다. 어차피.

 

주대상을 관찰하고 있을 때 우리 주위에는 항상 다른 대상이 나타나게 돼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타났을 때는 그런 것을 관찰대상으로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런 대상이 나타났을 때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리가 아파온다. 그러면 다리가 아픔도 주대상이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다리가 아파오면 일어남 사라짐을 즉시 멈추고 다리 아픈 부위에다가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픔' '아픔' '무거움' '무거움' '통증' '통증' '쑤심' '쑤심' 하면서 아픔의 정도에 따라서 적당한 명칭을 붙여서 관찰을 해나가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을 해나가는데 아픔이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럴 거 같으면 되도록이면 그 아픔을 무시하고 주대상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래서 주대상 '일어남' '사라짐'을 더욱더 명확하게 관찰하면 이 아픔은 관계가 없어지기 때문에 아픔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이 아픔이 금방 사라져버린다 할 경우에는 이 아픔이 명확하게 사라지는 걸 보고 다시 주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또 보이는 대상이 있다. 아니면 수행을 하고 있는데 들리는 대상이 있다, 그럴 거 같으면 '봄' '봄' 하면서 관찰을 하고, '들림' '들림' 하면서 그것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것이 주대상이 돼야 됩니다. 그때는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단 놓아버린 상태에서 '봄' '봄' '들림' '들림' 하고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들리는 것이 '들림' '들림' 하고 관찰을 해나가다 보면 그 들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즉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오는데,

그 들리는 게 지속적으로 들린다. 외부적인 자극이 계속 오게 되는데 '들림' '들림'으로 관찰을 하는데도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놓아버리고 다시 주대상인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그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릴 경우에는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소리를 냈을 경우가 있고, 또 다른 것은 내가 그 소리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소리가 들리지 말아야 될 것도 내가 예민하게 반응을 해서 들리는 경우들이나, 아니면 내가 스스로 환청들을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들리게끔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관념적인 것에 빠지기가 쉽기 때문에 즉시 다시 주대상인 배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이 있고, 또 생각이 일어나고 맛보고 하는 그런 것들은 그것을 할 때마다 그것을 주대상으로 우선해야 됩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무시해버리고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면 틀림없이 대상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에 몰입해가지고 대상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대상은 그것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대상으로 바꿔야 됩니다. 그것을 주대상으로 관찰하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즉시 다시 배라고 하는 주대상으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주대상으로 바꾼, 육근을 대상으로 하는 대상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이 통증이든 들리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그것이 너무나 강하다. 알아차리는데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할 거 같으면 이미 내가 거기에 끄달려들어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끄달려 들어가면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서 다른 이차적인 작용들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대상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다시 배라고 하는 주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됩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는 것이 주대상입니다. 주대상을 관찰하다가 앞에 보이는 대상이 있으면 들어 올린 상태가 됐을 거 같으면 들어 올린 상태에서 '멈춤' 하고 나서는 다시 그 보이는 대상을 향해서 '봄' '봄' 하면서 관찰을 해야 되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은 다시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걷는 동작이라는 주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보이든 들리든 냄새 맡든 어떤 것이든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처음에는 주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것이 나타났을 경우에!

 

그래서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 주대상은 1차적인 대상은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고,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주대상이지만,

육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들은 나타나면 즉각 그것을 주대상으로 해서 잡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주대상이 지속적으로 계속 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을 놓아버리든지 아니면 자세를 바꾸든지 해서 전환을 시켜줘야 됩니다. 통증이 너무나 오래도록 갈 거 같으면 '통증' '통증' 해서 관찰이 안 될 때는 다리를 약간이라도 움직여가지고 통증을 완화시켜줘야 만이 내가 그것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주대상이 돼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관찰을 하는데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거 같으면 이미 그 대상 자체에 휘말려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주대상으로 돌아와버리도록 해서 그렇게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어쨌든 수행을 해나가는 주대상은 확실하게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보이는 대상, 들리는 소리, 냄새, 맛, 피부에 느껴지는 감촉,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 이러한 육근을 통해서 나타나는 대상은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 육근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되느냐 하면,

알아차리는 1차적인 목표는 탐욕과 분노라는 것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탐진치를 제거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탐욕과 분노는 오온을 쉽게 침입하기 때문에 매순간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현상을 알아차림으로써만이, 이 길만이 탐욕과 분노가 약화되고 제거된다' 라고 얘기합니다. 이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중에 여러분들이 어리석음에 대한 것은 자세하게 아직 잘 모를 겁니다.

크게 와 닿는 탐욕과 분노라고 하는 것들은 반드시 육근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육근을 통하지 않으면 들어오질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드와라(dvāra)'라고 그럽니다. 문(門)이다. 그 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 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오게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집에 들어갈 때도 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나에게 들어오게끔 돼있습니다. 탐욕과 분노라고 하는 것은! 그 문을 잘 지킬 것 같으면 탐욕과 분노라고 하는 것을 방어를 해내고 그것을 밀쳐버릴 수가 있고, 제거해낼 수가 있습니다. 문이 닫혀지지 않고 문을 허술하게 해놓으면 도둑이 드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이 문을 통해서 탐욕과 분노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 문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당연히 탐욕에 휩싸이게 되고 분노에 휩싸이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라. 그것이 뭡니까?

소리 들릴 때는 귀라고 하는 곳을 통해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귀에다가 마음을 집중하면서 '소리들림' '소리들림' 하면서 알아차려야 되고, 보이는 대상은 눈을 통해서 들어오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눈에다 마음을 집중하고 '보임' '보임' 하면서 관찰해야 되고, 이렇게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육근에 마음을 집중해서 그 대상에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탐치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나쁜 작용들, 나쁜 불선업을 방어해낼 수가 있습니다.

코를 통해서 들어오는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은 향기는 탐욕을 가지게 되고, 악취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먹을 때도 꼭 마찬가지로 맛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맛있는 맛은 욕심을 부려서 일어나는, 탐욕이 생기게 하고, 맛없는 것은, 나쁜 맛들은 밀어낼려고 하는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편식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편식은 이런 불선업이 원인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불선업은 몸과 말로 하는 불건전한 행동의 원인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화를 내게 되고 나쁜 행동들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한 탐욕과 분노라고 하는 것을 치료할려고 할 거 같으면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제 가을이 되고 날씨가 바뀌면 금방 감기에 걸립니다. 감기에 안 걸리려면 그 날씨의 변화를 갖다가 최소화시켜야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예방주사를 맞아야 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나은 일입니다. 병이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육근을 통해서 들어왔을 때 이미 그 병에 걸렸을 때는 치료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지킴으로 인해서 예방을 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보는 대상을 보는 순간에 알아차리면 아무런 느낌이나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는 대상만 존재하게 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딧테딧타 맛땅 바윗사띠(Diṭṭhe diṭṭha mattaṃ bhavissati)' 그렇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보는 대상 뿐아니라 듣는 대상, 냄새 맡는 대상, 감촉하는 대상, 이런 모든 여섯 가지 대상은 꼭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갈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만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 대상을 알아차리면 그 대상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육문-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때 육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대상을 즉각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경행할 때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 그것이 대상에 밀착되지 않을 때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들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뽓틸라라고 하는 큰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은 경전을 가르치는 강사스님인데 500명을 거느린 큰 강백이었거든. 그런데도 부처님은 이 뽓틸라 보고 '골빈 뽓틸라'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골빈 뽓틸라야 이리 오너라. 골빈 뽓틸라야 저리 가거라. 골빈 뽓틸라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그럽니다. 이 뽓틸라 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골이 빈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부처님은 그러게 얘기하거든. 경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부처님이 보기엔 실천수행이 안되었기 때문에 골비었다고 그럽니다.

 

경전을 공부하려면 책을 보든지 스승이 말을 듣든지 그렇게 가르치는 곳에 가서 배우면 됩니다. 근데 수행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을 지도해줄 만한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되고, 집중수행에 도움이 되는 그런 장소가 있어야 돼고, 또 그런 수행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곳에 가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직접 수행을 해야 되는데 뽓틸라는 그런 것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걸 갖다 골빘다고 그러는 거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진짜 골이 비었거든.

이해는 하고 부처님 말씀을 잘 알고는 있었지마는, 그것에 대해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거라. 그래서 결국 수행하는 곳인 수행처소로 갑니다. 지금까지는 경을 배우는 곳에 있었지마는 인제는 수행하는 처소로 가게 됩니다.

 

수행하는 처소에 가면 다른 것은 안합니다. 수행만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런 것을 일절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만 있고 수행만 있게 되는 거라. 가서 배울라하니까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몰라. 여러 스님들이 뽓틸라 스님 같은 뛰어난 강백 스님에게 내가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다들 거절합니다. 결국에는 맨 마지막 일곱 살짜리 사미 스님에게까지 옵니다.

왜 그 스님들이 그렇게 했느냐 하면 뽓틸라 스님이 가지고 있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내가 그래도 경을 가르치는 큰 스승인데' 하는 자만심이 있기 때문에 자만심을 누그러뜨릴려고! 그래서 결국에는 일곱 살짜리 사미 스님에게 갔을 때 사미 스님도 거절하다가 인제는 뽓틸라 스님을 가르쳐줄려고 그럽니다.

 

뽓틸라 스님! 당신이 진정으로 나에게 수행 방법을 배워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을 증명을 해봐야 되겠다 하면서 앞에 있는 연못에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그럽니다. 당연히 연못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은 옷이 흠뻑 젖고 더러워집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고귀하고 좋았던 옷이 금방 그렇게 더러워져 버립니다. 마음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방어하지 못하면 금방 더러워져 버립니다. 지키지 못하면 금방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수행은 이와 마찬가집니다.

 

오소리가 굴에 들어갈 때는 오소리라는 놈은 자기가 도망칠 구멍을 항상 여러 군데를 파놓습니다. 들어갈 때는 한 구멍으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그 구멍으로 나오지 않고 여러 구멍으로 빠져나옵니다. 그 오소리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른 구멍들은 다 막아버리고 한 구멍만 딱 바라보고 있으면 그 한 구멍을 통해서 연기를 피우든 어떤 방법을 통해가지고 그 오소리가 그 굴속에 있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다른 구멍은 다 막혀있기 때문에 그 한 구멍을 통해서만 나오게끔 됩니다. 그래서 다른 구멍은 다 닫아버리고 그 한 구멍만 바라보고 있을 거 같으면 오소리는 반드시 그리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잡을 수가 있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수행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다른 구멍들은 전부 다 닫아버리라는 거라. 마음의 문만 열어놔 놓고 알아차려라.

눈 귀 코 혀 몸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육체적인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현상들은 알아차리라는 거라. 닫아버리라는 것은 그것이 들어올 때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도록 하라.

육문 중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문만 열어놔 놓고 눈 귀 코 혀 몸이라고 하는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모든 현상들을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 모든 현상은 두 가지가 동시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귀를 통해서 소리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리를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지 소리들리면서 눈으로 보면서 할 수는 없다는 거라. 두 문을 동시에 열어놓지 말아라는 거라. 두 문을 동시에 열어놔 놓으면 오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는 거라. 그러면 알아차림을 못하게 된다는 거라. 대상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 중에 꼭 하나만 알아차리도록! 소리 들릴 때는 소리들리는 것만 알아차려야 되고, 보일 때는 보이는 것만 알아차려야 되고, 그래서 그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주대상으로 돌아오라는 거라.

그것이 일반적인 수행방법입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주대상은 좌선할 때는 일어남 사라짐, 또 경행을 할 때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지만, 육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이 나타날 때는 그것을 주대상으로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다른 것은 다 닫아버려야 됩니다. 그 대상만 마음으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지고 그것을 예방해서 그것을 제거하게끔 됩니다. 그렇게들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