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09. 느낌관찰1 (20071109)

담마마-마까 2020. 1. 1. 16:19

https://youtu.be/ZLuhxppfN5o

 

* 기초수행09. 느낌관찰1 (20071109)

 

한번 물어볼게요.

너는 지금 살아있는 거야? 죽어있는 거야? 살아있는 거야? 죽은 사람 본 적 있어? (수행자 대답)

음! 그렇지. 죽은 사람보고 시체라고 그러지. 본 적 있어? 니하고 어떤 차이가 나디? (수행자 대답)

음! 호흡하지 않는다. (수행자 대답)

음! 사족은 붙이지 말고 차이점만 얘기해라. (수행자 대답)

음! 그거는 니가 겁나는 것뿐인 것이지 니하고 죽은 사람하고 차이는 아니잖아. (수행자 대답)

음! 너는 호흡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은 시체는 호흡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장이 멈춰져 있다. 멈춰져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확인할 수는 없지마는 어쨌든 호흡을 하지 않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람? 자기 자신과 죽은 시체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죽은 시체라도 오래된 시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패돼가지고 이렇게 된 거 말고 금방 죽은 사람이라 치자. (수행자 대답)

음!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수행자 대답)

음! 그럼 잠자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네? (수행자 대답)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물인간들은 의식이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얘기를 안 하거든. (수행자 대답)

금방 죽은 사람은 똑같이 생기가 넘칩니다. 뽀얗습니다. (수행자 대답)

몇 시간 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금 인제 누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피부, 물론 시간이 지나면 피부는 반점이 생기고 피부색이 변해나갑니다. 당연히 뭐 혈액순환도 안 되고 어떤 기관들도 활동을 안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되겠죠. 외관이든 내관이든 그건 아무 관계없어. (수행자 대답)

음! 스님이 지금 뭐 가지고 얘기를 하자고 합니까? (수행자 대답)

음! 음, 그거는 여러분들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여러분들도 그 길을 가게 돼있는 건데 그렇게 느낀다는 건 뭡니까? 어떤 감정들이 북받쳐가지고 '아!' 하는 생각 때문에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죽은 시체는 그런 감정이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 차이입니다! 다른 거 얘기할 게 뭐 있어. 죽은 놈 아무리 두드려 봐봐. 내가 아프다고 하는가. 뭐 여러 가지 호흡하지 않는다, 피부 변색이 온다, 차갑다, 어쩌다, 하는 거 다 맞습니다.

다 맞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감정입니다. 감정! 느낌입니다. 느낌!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느낌이 있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그로 인해서 성질도 내고, 욕심도 부리고, 또 슬프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죽은 사람은 절대 그거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점이 그와 같다고 할 거 같으면 수행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 느낌을-감정입니다.

느낌을 어떻게 잘 다스리냐 하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가장 관건입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어떻다고 얘기합니까? 좋고 싫은 느낌에 대해서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수행에서 다스려나가는 효과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이 그것만 다스려나가도 일단은 성공을 했다고 봐 질 겁니다.

 

음! 그래서 아직 여러분들이 시체와 자기 자신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딱 단정지어서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은 그러지를 못한 거 같애 이! 음, 수행에서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한 거 같애. 어쨌든 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통상적으로 몸에 대한 관찰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하는 것이 이 느낌에 대한 관찰입니다.

 

그런데 느낌에 대한 관찰은 나중에 지나다 보면 모든 수행하고 연관이 돼있습니다. 특히 여기 있는 스님 같은 경우에는 다른 것보다도 느낌에 대한 관찰을 많이 치중하게 합니다.

 

자! 여러분들 한번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수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호흡에서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어떤 느낌들이 있는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여러분과 똑같이 확실하게 눈도 있고 세포도 손상돼지 않았고 육체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아무리 불빛을 비춰봐도 움직이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귀도 마찬가집니다. 뇌가 망가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귓전에 소리가 들리더라도 어떤 큰소리라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여러 감각기관들이 있지만 반응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죽은 사람 앞에서 유머스럽게 말을 해도 웃지도 않고 웃지 않으니까 당연히 화내는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기뻐하고 있는지 화가 나 있는지 일부러 물어보지 않아도 얼굴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감정이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드러나지기 때문에!

 

이런 것이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들인데 그러한 감정을 잘 정리를 해보면 질투한다든지, 미움이라든지, 보호하고 싶은 기분이라든지, 침체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이 감정들입니다. 돈을 갖고 싶다. 맛난 음식을 먹고 싶다. 성적인 욕망이 있다. 이런 욕구라고 말하는 것들, 이런 것도 감정이 없으면 절대 생겨나질 않습니다.

이러한 감정들, 질투하고 증오하고 낙담하고 이런 모든 감정들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고 여러 가지 마음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에서든지 이 마음을 뽑아버리면 죽은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특정한 무엇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단언적으로 얘기해서 마음은 기능일 뿐입니다.

특정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 어디 있는지 물으면 누구든지 똑같은 대답을 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스님 설법 듣는데 있고, 다리가 아픈 걸 알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픕니다. 마음이 그쪽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등이 아플 때는 등에 기능하고 있는 것이고, 소리가 들릴 때는 귀에 기능하고 있는 겁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일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것은 특정하게 머무는 장소가 없습니다. 단지 기능만 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기능에 대해서 연구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육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여러분들은 육체를 먹여 살리고 하는데 많은 투자를 했지만 불교에서는 그 육체에 대한 연구는 그냥 경전을 보라고 그럽니다. 그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오히려 소중한 테마로써 취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겁니다. 말하는 것도 마음이고 질투하고 화내는 것도 마음이고 괴로워하는 것도 마음일 뿐 아니라 하물며 꽃을 심는 것이나 무엇을 만드는 것도 마음이고 실패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을 한마디로 딱 정리를 해놨습니다.

"깨끗이 해야 한다고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된다.

기를려고 한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을 길러야 된다.

이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유일한 살아있는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이런 오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보를 취하고 있습니다. 육체도 여러 가지 것들을 느낍니다.

아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여러 가지들을 느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명령을 내립니다.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라 하고 마음이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의 마음의 인식이라는 것은 이렇게 육체를 평온하고 잘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서 적당하게 인식할려고 하지, 그 특성들이나 진리를 알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마음을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꽃이 깨끗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습니까?" 하면 대부분 "아름답다"고 대답을 합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편이 적당하니까 아무 주저 없이 꽃이 아름답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꽃은 자신이 아름답기 위해서 태어난 적은 없습니다. 꽃의 각각의 형태도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그 형태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취한다는 거라.

왜? 자신의 마음을 그 꽃이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고 하는 그 특성들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인식은 자신의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쁨을 주는 것인지만 받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개구리를 보고 귀엽다 기분 나쁘다, 안 그러면 작다 크다 하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뱀은 개구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한 먹이, 좋은 먹잇감이로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이렇게 자신의 형편에 따라서 인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인식하는 것이 이렇게 제각각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화내는 것이나 미움이나 질투라고 하는 것들도 그렇게 제각각 인식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기 때문에!

화내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하는 모든 것들은 감정입니다.

그 감정은 느낌으로써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이 그마만큼 소중합니다. 바르게 현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이 느낌이 소중하고, 느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취하고 배척하고 하는 마음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느낌에 대해서 관찰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딱 한 가지로써 정립이 됩니다.

밖에서 오는 대상들을 몸에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서로 부딪쳐서 접촉될 때 일어나는 느낌들, 그 느낌들을 내가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접촉을, 밖에 대상과 안에 대상이 부딪쳐서 접촉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 느낌으로 끝나버리는데,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당연히 그다음 단계로 집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지속적으로 몇 회에 걸쳐서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되어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