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7.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8. 필수품2 (20080403)

담마마-마까 2020. 1. 21. 18:53

https://youtu.be/eGS5l3rxvJQ

17.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8. 필수품2 (20080403)

 

옷에 대한 거하고 그 뒷부분을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죠!

처음에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 옷차림을 정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옷을 잘 정돈하고 하는 습관이 들면 마음을 바르게 잡아서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옷의 희생자가 돼서는 안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목적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지 옷으로 인해서 마음이 더렵혀져서는 안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특히 태국 같은데, 스님이 수행했던 왓람쁭 같은 경우에는 북부지역을 관장하는 그런 사찰이었습니다.

수행센터로써 워낙 또 걸출한 스님들이 거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결제가 끝나고 나면 꼭 왕이 오든지 아니면 공주나 왕자가 와서 스님들에게 가사 공양을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왕족이 가사 공양을 하다 보니까 비단옷으로 아주 예쁜 옷으로 그렇게 해줍니다.

그러면 그날 저녁에는 각 꾸띠에서, 스님들 방에서 경 외우는 소리들이 온데서 들립니다. "이 아랫가사를 나의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윗가사를 나의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대가사를 나의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 하면서 이렇게 점찍는 게 있습니다. 그 방안에서 가사 새로 받으면 그거 의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데서 그런 소리가 들립니다.

그다음날 되면 우리말로 하면 종무소, 종무소에 나이 드신 스님들이 가서 "이 가사는 내가 버립니다. 이 가사를 상가소유물로 합니다." "이 안가사를 내가 버리니까 상가소유물로 합니다." 그다음날 되면 나이 드신 스님들은 종무소 가서 그거 한다고 또 막 시끄럽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후가 되어가지고 큰스님 법문하는 시간에 가보면 젊은 스님들은 삐까뻔쩍한 그 왕족이 준 가사 착 다 입고 오고, 나이 좀 드신 스님들은 보면 전에 입던 가사 그대로 입고 옵니다. 큰스님이 이리 보면서 그렇다고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하는 것보다 싱긋이 웃고 맙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옷은 단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입니다. 너무 옷에 신경써서 하다 보면 내용이 텅 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옷으로 인한 희생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잘 이해를 해서 여러분들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밑에 ''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오늘도 탁발이 있어서 탁발하고 나서 스님들이 앉아서 하는 게송을 들었을 겁니다. (빨리어 게송 생략)

 

"제가 공양 받은 음식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합니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보기 좋게 가꾸고자 함도 아니니,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수행을 돕기 위함입니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수행하기 위해 이 공양을 받겠습니다."

 

항상 스님들이 공양을 하기 전에 그 게송을 먼저 외웁니다. 이 공양을 왜 내가 하게 되는가? 이 음식을 내가 왜 먹게 되는가 하는 이유를 빨리어로 찬팅을 하고 나서 공양을 합니다. 대부분 짓궂은 스님들이 이 음식물 가지고 조절을 못하는 사람들이 오면 가르쳐주는 게송이 이 게송을 먼저 가르쳐줍니다.

'아!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이 단순히 맛있게 먹고 이 몸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구나. 배고픈 느낌만 살짝 제거하도록 해서, 이 몸을 유지해서, 수행하기 위해서 이 음식을 먹는구나' 하는 걸 항상 밥 먹기 전에 독송하도록 그렇게 시킵니다. 그러고 나서 거짓말 같이 일주일 뒤에 오면요 살이 쪽 빠져가 옵니다. 밥 먹을 때마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안 그러면 그것도 안 되는 사람에게는 딱 먹는 양에서 숟가락으로 다섯 숟가락 빼라고 그럽니다. 그럼 보통 다섯 숟가락 하면 일반적으로 밥에 한 반 가까이가 됩니다. 반 가까이 먹지 마라 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는 양은 각각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물론 성인이 하루 섭취할 권장량 해가지고 WHO라고 하는 데서 기호를 써가지고 얼마 칼로리 먹어야 된다 하는 그런 게 있는데 그거는 별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차를 뺐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모는 것에 따라서 기름을 먹는 것은 다 다릅니다. 똑같은 연비에 똑같은 차를 한날 한시에 뺐다고 하더라도 다 다르게 돼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기름을 썼다 할 거 같으면 더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내가 그날 어떤 활동량을 했느냐에 따라서 먹는 양도 달라지고 할 겁니다. 개인이 스스로 먹는 양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생활에서 스스로가 먹는 것으로 인해서 발란스를 맞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일반적으로 내가 먹는 패턴들을 먼저 이해를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먹는가? 먹을 때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수행에서 먹을 때 관찰하는 방법에 대해서 대부분의 수행 교재에 구구절절하게 써져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가장 관찰하기가 쉬울 뿐아니라 수행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는 것에 대한 것들이!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욕심부리고 하는 것들도 떨어지고, 성욕에 대한 것들도 떨어지고, 탐진치가 서서히 엷어지는 것을 스스로가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수행이 무르익게 되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발란스를 취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먹는 것에 인해서 내가 아무리 영양실조가 된다고 하더라도 굶고 말지, 나쁜 방법으로 먹는 것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사회는 대부분이 보면 먹는 것으로 인해서 전쟁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가족 먹여살리기 위해서 뼈빠지게 노력들을 할 겁니다. 심지어 부정을 써가면서까지.

특히 이번에 스님이 호주를 좀 갖다 왔는데 외국의 경우에 대부분 더 그렇습니다. 속된 말로 사람을 등쳐먹는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죠. 한국 사람 만나는 것이 겁난다고 그럽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등쳐먹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아는 것이 없고 능력이 안 되니까, 한국 사람을 쉽게 말하면 속이고 이용해가지고 자기 밥 먹는 걸 챙긴다는 얘깁니다. 그걸 등쳐먹는다고 그럽니다. 비일비재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아니죠!

아무리 돈이 없어도 차라리 부처님이 뭐라 그럽니까? 굶으라는 거라. 굶을지언정 남의 것을 그렇게 빼앗는 것은, 그런 권리는 없다는 거라. 주는 자가 베푸는 것들은 있을지 몰라도 반대편에서는 그것을 빼앗을 권리는 절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생활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먹는 것을 해결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법을 실천해나가다 보면 굶지는 않습니다.

그걸 '삿담마(saddhamma)'라 그러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법에 인해서 그 사람을 보호해준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바르게 실천해나갈 거 같으면 그 진리가 그 사람을 보호해주게 돼있습니다. 그걸 삿담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가르친 진리다.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도덕적인 길이고 죄를 범하지 않는 그런 방식이고, 그 보편적인 진리라는 그런 뜻으로써 삿담마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 담마가 여러분들을 보호해준다 하는 뜻입니다.

태국이나 인도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들을 비난할 때 가장 욕이 되는 비난이 뭐냐 하면 "당신 담마적이지 않다"하는 얘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굉장한 모욕을 느낍니다. 바른 것이냐 아니면 그른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 담마로써 이해하게 됩니다. 그걸 삿담마라고 그럽니다.

 

먹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담마에 따라서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벗어날 거 같으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한번 보십시오. 반찬들 많이 합니다. 무슨 회식, 어디 모임 있으면 맛있는데 가서 먹고. 그걸 하지 말라는 얘긴 아닙니다. 한번 반문을 해보십시오. 내가 그거 안 먹으면 죽는가? 그건 아니죠! 특히 여자분들은 여자분들끼리 만나서 어디 식사하러 가고 나면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콧바람도 쐬어야 된다 해갖고 커피점 가서 커피도 한잔 먹고 케이크 같은 거 디저트도 좀 먹고 이렇게 합니다. 굉장히 기쁨을 가져온다고 그럽니다.

그리해도 그것은 어쨌든 안먹는다 해가지고 죽을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이걸 부처님은 뭐라고 그러느냐면 '음식에 대해서 탈선을 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처음부터 부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잘못했소'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얘기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방법이 옳은 것이요, 틀린 것이요?" 합니다. “틀렸습니다”하고 그럽니다.

그러면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게 바른 것이냐, 그른 것이냐?" 좋은 길이냐, 나쁜 길이냐? 바르게 걸어가는 길이냐 나쁘게 걸어가는 길이냐? “나쁘게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럼 "나쁘게 걸어간다면 그거는 밋차딧티(micchādiṭṭhi)-나쁜 방향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나쁜 방향으로 인도할 거 같으면 좋은 결과가 일어납니까, 나쁜 결과가 나타납니까?" “나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그거를 왜 합니까?"

경전들 한번 보십시오. 부처님이 전부 그런 방식으로 인도들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먹는 것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내가 탈선한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 탈선은 사람을 타락시키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본래 마음에 있는 감정들, 번뇌라고 하는 것에 자극을 줘가지고 그 번뇌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기능들을 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번뇌를 자극하고 그것을 강화시키는 일들은 일단은 먹는 것에서 한쪽 옆으로 이탈했다고 판단들을 내려야 됩니다. 강하게 기쁨을 느끼고, 강하게 즐거움을 느끼고, 또 강하게 괴로움을 느끼고 이럴 거 같으면 한쪽으로 이탈했다고 스스로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하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런 감정들, 좋고 싫은 감정들에서 져버릴 거 같으면 괴로움을 당하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분노에 지면 괴롭고, 또 욕구에 지면 살아가는 것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또 질투 같은 이런 것에 정복되고 나면 정신적으로 병이 생겨버립니다. 먹는 것에 대해서 욕구를 가지는 것을 그것을 콘트롤 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먹는 것에 점점 지출은 많아지게 되고, 소비하게 되고 또 남들에게 잘 보일려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엉망이 돼버리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먹는 것으로 내가 이탈했기 때문에 오히려 번뇌를 강화시켜서 내가 더 무지하게 만들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자꾸 더 두껍게 쌓이다 보면 점점 더 수행하기도 싫어지고, 그런 방향으로만 하다 보면 계속 안 좋은 방향으로 넘어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것을 부처님이 하지 마라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눈앞에 자극적인 즐거움을 쫓다가 보면, 혀의 자극적인 것이든 이런 것을 쫓다가 보면 장기적인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것을 번뇌로써 다스려나가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건강도 해치게 되고, 성인병들도 생겨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약도 안 통하게 되고, 이렇게 계속 악순환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먹는 것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면서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필요할 경우에 합니다. 아이 생일파티가 있다. 그럼 어떨 때는 그걸 해줍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으로 인해서 허세를 부린다든지 아니면 내 아이에게만 좋은 거 맛있는 걸 먹이고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겠다 하는 이런 생각들을 갖다가 아예 버려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파티를 해주도록 해줘야 되고. 그런 것들은 충분히 부처님도 용인을 했던 부분입니다. 그 속에서 이 음식에 대해서 노예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만 판단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또 가끔씩 손님들 오고, 좋은 사람들 만나면 어디 가서 외식도 하기도 합니다. 살아가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그럴 기회가 아니면 또 밖에 나가서 먹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자기 자신은 항상 겸손하라, 겸허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먹는 것에 대해서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서 음식으로부터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먹는 경우는 맛을 즐기기 위해서나 배부르게 먹어서 잘 먹었다고 포만감에 취하기 위해서 먹어서는 안된다.

또 하나 더 미용을 위해서, 또 남자들을 정력용으로,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서, 아니면 헬스, 몸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런 용으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예 음식을 먹지 않고 단식을 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도 틀린 부분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고행과 수행은 틀림없이 다른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체의 안정이 반드시 필수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육년 고행의 마지막 끝에 음식을 절제하는 고행을 버려버리고 수자따로부터 유미죽을 받아먹게 된 겁니다. 그걸 사치하기 위해서 먹은 것이 아니라 몸에 안정을 가져와서 수행을 돕기 위해서 먹는 겁니다.

 

부처님이 한때 알라비카 지방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거의 삼개월을 여행을 해서 그 지방에 갑니다. 그 지방에 가니까 지방 사람들이 인제 부처님이 왔으니까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립니다. 공양을 하고 나면 대부분은 공양 끝나고 나서 신도들에게 법문을 합니다.

지금도 그런 풍습이 있는데, 만약에 초청한 신도가 이번에는 어느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싶다 할 거 같으면 스님들이 공양이 끝나고 나면 그 스님의 바리때를 받습니다. 받아가지고 씻어갖고 자기 앞에 놓습니다. 그럼 다른 스님들이 다 이해를 합니다. '아! 오늘 법문은 저 스님한테 해주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른 스님들은 뭐 돌아가든지 안 그러면 그 법문을 같이 듣든지 이렇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초청했는데 이 초청한 분이 부처님한테 법문을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바리때를 받아가지고 딱 있거든. 그런데 부처님이 법문을 안 하는 거라.

 

어느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할려고 했는데 그날 마침 소가 집을 뛰쳐나가 버렸어.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지금 저기에 법문들으러 가야되느냐 아니면 저기 소 찾으러 가야되느냐?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처님이 오셨는데!

이 사람은 소를 찾으러 갑니다. 그게 맞는 것입니다. 소를 잃어버리면 생계를 위협받게 됩니다. 소를 찾지 않고 부처님 법문을 들을 거 같으면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는 있겠지마는 속세에 살 거 같으면 살아가는데 아마 굉장히 곤란을 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일 거 같으면 당연히 빨리 소를 찾아가지고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러 가겠다 하고 판단들을 하게 돼있습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반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데 그날 법회가 있고 법문이 있는 날이다 해서 팽개치고 와가지고, 일이 꼬여가지고 고생을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은, 어쨌든 그분은 소를 찾아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정오가 훨씬 넘어버린 상태라. 아침에 소를 찾으러 갔으니까 아침도 굶었고 점심도 굶었고, 소를 찾아다 놓고 부처님 있는데 가니까 그때까지 부처님이 법문을 안 하고 있거든. 그렇다고 누구 하나 부처님 왜 법문 안합니까? 하는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거라. 그 사람이 도착하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밥 남은 게 있느냐? 저 사람에게 밥을 먹여라."

같이 있던 비구스님들은 깜짝 놀랩니다. 스님들에게 공양 올린, 그러니까 상가에게 다나(보시)한 음식들은 재가자들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그게 불교적인 룰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사람에게 줬거든.

 

줄 수 있는 경우가 물론 있습니다.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몸이 안 되어있는 사람들, 지체부자유라든지 아니면 아주 못 사는 거지라든지, 이런 경우들은 나눠줍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가 스스로 밥을 해먹을 수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음식물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더 게을러지고 오히려 불교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예 원천적으로 금지를 해버립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짐승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경우가 아닌데 밥을 먹였거든.

그러고 나서 밥을 다 먹기를 기다리고 나서 이 사람이 안정되고 나니까 그때서야 법문을 시작합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겁니다. 몇 개월간을 아라비카 지방으로 여행해서 온 것은 이 한 사람을 제도하기 위해서 온 거라.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부처님의 지혜로 보니까 이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침부터 쫄딱 굶고 소를 찾아다니다가 공복으로 인해서 허기도 지고 또 그렇게 되니까 마음의 안정도 가져오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까 부처님 법문을 아무리 들을려고 해도 들을 형편이 못되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한 게 뭐냐면 "공복감이라고 하는 것, 배고픔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병보다도 큰 것이다. 가장 큰 질병이다." 하고 그때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육체가 지치고 그러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흐트러진 마음으로는 설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는 그런 얘기를 뒤에 비구스님들에게 합니다.

어쨌든 그마만큼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 다른 어떤 이유들도 그것을 비껴가게끔 되어있다는 겁니다.

 

어쨌든 먹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소중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음식은 어떨 때는 독이 될 수 있지만 어떨 때는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음식에 대해서 반드시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밥을 먹기 전에 저 예불문에도 보면 그 게송이 있습니다. 그 게송들을 마음속으로 잘 외워가지고 그러고 나서 공양을 하도록 해서 먹는 것으로 인해서 노예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먹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못해서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그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깨달음-지혜라고 하는 것이 음식이 되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먹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일 것 같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그 밑에 '' 거주하는 것입니다.

옷하고는 다르게, 동물도 거주하는 곳이 있죠? 옷은 동물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지만, 거주하는 곳은 동물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을 두는 장소,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어떤 경우든 어디에서든지 그 몸을 편히 쉴만한 장소를 구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주라고 하는 것들도 부처님이 번뇌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 둔 게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기후의 변동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거주처를 사용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쁜 것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면에서는 적이지.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래서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밤에 문 닫고들 자죠?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여름이나 이럴 때 날파리들 아니면 밖에서 들어오는 외부의 적, 도둑이든지 아니면 맹수든지 이런 것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결혼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거주처가 필요합니다.

 

그 세 가지를 채우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벗어났을 경우에는 탈선하는 경우가 돼버린다는 거라.

자기 자신의 욕구충족이나 아니면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주처를 만드는 경우들이 많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물들게 되면 번뇌가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지 않고 그런 타락의 세계에 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거주처는 거주처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져 살아가면 괴로울 뿐 아니라 살아가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네 번째가, 시간이 없어서 빨리 좀 하겠습니다.

네 번째가 '' 입니다.

약은 언제 씁니까? 병이 들었을 때 쓰죠! 신체를 건강한 상태로 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약입니다. 병이 들었을 때 병을 무시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병이라도 아주 사소한 병이라도 방치를 해버리면 죽습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낫는 경우도 있지만 방치를 하면 악화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약은 기본적인 것들을 잘 기억을 해야 됩니다.

먼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약을 먹어라.

그다음에 신체를 정상적으로 하기위해서 약을 먹어라.

약을 먹는 경우는 이 두 가지입니다. 죽음을 피하고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고 약을 먹는 경우들 많죠? 조금만 감기에 걸려도 감기약부터 사러 갑니다. 어디 뭐 두통이 있다 할 거 같으면 이걸 극복할 생각은 안 하고 먼저 약부터 찾는다는 거라.

수행처에 가면 물론 구급약을 갖추어 놓습니다. 그런데 바로 약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느냐?" 도저히 못 참겠다. "몸이 아주 엉망이 되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오라. 그러면 약을 주겠다." 보통 보면 아주 심한 병에 걸려가지고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들을 보면 대부분 먹는 것을 잘못 먹어가지고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은 어떤 면에서는 음식으로 오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음식들을 잘 조절할 거 같으면 병도 그렇게 큰 병을 갖다가 오지 않게끔 만들 수가 있습니다. 병이 오더라도 내가 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치료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약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어떤 경우냐면, 특히 여자분들 같은 경우에 보면 미용을 위해가지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또 살 빼기 위해서, 야위기 위해서 약을 복용합니다. 안 그러면 이 피부 반들반들하게 만들려고 약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오래 살려고, 안 그러면 체력을 강하게 만들려고 보통 정력을 강하게 한다는, 어쨌든 그게 체력이라. 그럴려고 약들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약의 사용은 번뇌를 자극하게 됩니다. 반드시 금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 외에도 필요한 것들이 많죠!

뭐 생활하다 보면 부엌칼 같은 것도 필요할 거고, 부엌칼은 뭐 약에도 포함이 안 되고, 거주처에도 포함이 안 되고, 먹을 것에도 포함이 안 되고 다 포함이 안 되죠! 그래도 그게 필요하죠? 그래도 부엌칼이 없다 해가지고 음식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죠? 뭐 어떻게 숟가락 가지고 만들든 뭐를 가지고 만들든 뭐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뭐라 그럽니까?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악세서리 같은 부속품이다 하는 것들을 반드시 기억을 해두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필요해서 쓰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몸에 집착을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보면 대부분 몸에 집니다. 몸이 하고자 하는 대로 이렇게 해나가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몸이라는 것은 어차피 괴로움밖에 만들 수 없는 겁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몸뚱아리를 아무리 여러분들이 네 가지를 가지고 약으로 다스려가지고 몸을 건강하게 하고, 이 몸을 위해서 좋은 옷을 입고, 먹는 거 먹고, 이 몸 보호하기 위해서 좋은 거주처에 있고 하더라도 이 몸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을 빼고 나서 몸이라고 하는 걸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괴로움을 만드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까지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네 가지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이 몸의 노예가 되지 마라'라는 거라.

몸이 병이 들고 부자유스럽다고 하더라도 마음만은 병들지 말고, 부자유스럽지 말아라.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몸이 병들더라도 마음은 병들지 마라. 몸이 괴롭더라도 마음은 괴롭지 말아라는 거라. 몸의 노예가 되지 말아라는 겁니다. 몸은 점점 더 나이를 먹어 갑니다.

마음은 나이를 먹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목표로 하는 것이 있으면 그에 따라서 변해갑니다. 지혜라든지 아니면 안정이라든지 편안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음으로 만들어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몸이 병들고 늙고 하더라도 마음은 병들고 늙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이 네 가지를 잘 활용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이 네 가지를 끊어버려도 어떻게 됩니까? 번뇌는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먹는 거 끊어버린다 해서 번뇌가 없습니까? 또 나형외도 같이 옷을 입지 않는다 해가지고 번뇌가 나에게 침투하지 않느냐 하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이 네 가지는 사용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다 해서 부처님이 그것을 뭐라 했냐면 빳자웩카나(Paccavekkhana, 반조) 네 가지 함께 의지해야 될 것들, 그런 것들을 잘 관찰을 하라는 거라. 관찰만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번뇌에는 물들지 않는다 하는 거라.

어차피 의·식·주·약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를 사용하는데 기준을 뭐라고 잡았는가 하면,

첫 번째 기준이 살아가는데 이게 필요한가, 아닌가?

옷이 어쨌든 필요하다. 그런데 나이키 옷을 입을 것이냐 아니면 그냥 메이커도 없는 시장 옷을 입을 것이냐? 필요한데 입는 경우는 그 나이키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가 아닌가만 먼저 판단을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필요한 것이라서 하는데 그것이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밥을 필요로 인해서 먹는다. 그런데 수행하는데 장애가 있다. 그럼 밥 양을 줄여야 돼. 맛난 거 찾아먹다 보니까 마음이 오히려 번뇌에 더 물들게 된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마음을 증장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 번째 기준점으로 삼아야 된다하는 거라.

처음에는 생활에 필요한가 아닌가? 두 번째는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도덕적으로 바른 길인가, 나쁜 길인가?

이것을 내가 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 참 잘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가. 도덕적으로 바른 길인가, 나쁜 길인가?

 

네 번째가 뭐냐 하면 나에게 아니면 주변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인가, 아닌가?

평화롭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평화롭지 않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거라.

 

평화롭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고, 마음을 향상시키지도 않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할 것 같으면 하지 말고, 선택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이 네 가지를 기준점으로 잡아야 된다 하는 거라.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이 네 가지 필요한 물품들에 대해서 절제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알면 살아가는데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는 것이 이 부처님의 방법입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잘 실천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번뇌와 대결하는 방법 네 번째 부분 아디와사나(adhivāsanā) 라고 하는 것들, 참는 것입니다. 참는 것에 대한 얘기들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