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6.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7. 필수품1 (20080313)

담마마-마까 2020. 1. 21. 12:32

https://youtu.be/fiaUhxgBrdg

16.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7. 필수품1 (20080313)

 

 (3) 「실천·수행」으로 없어지는 번뇌(asava paṭisevana pahatabba)

 

저번 시간에 이어서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입니다.

세 번째 빠띠세와나(paṭisevan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실천하고 수행하고 그리고 따라함으로 인해서 없어지는 번뇌입니다.

뭔가 알아야 따라할 거 아니라. 그래서 그것이 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간단하게 스님이 네 부분으로 정리를 해서 해놓았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과 쓸데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판단해가지고, 어떤 면에서는 잘 선택하는 지혜가 또 하나의 보물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을 판단해두지 않으면 설혹 내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가치관을 판단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하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 빠띠세와나(paṭisevana)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아주 내용은 심플한데 이것을 잘 기억해두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또 여러 가지 문제들, 트러블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 사라져버립니다. 당연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지니까 지혜가 계발되어 나가게 돼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기 밑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차를 대기가 불편하게 차를 대는 분이 있어요. 고급 외제차를 가지고 있어가지고 꼭 뒤에 안 넣습니다. 꼭 맨 앞에 있으면서 뒤에 차도 들어가지도 못하게끔 이렇게 하거든. 몇 번 얘기했는데, 여기는 공용이니까 먼저 왔으면 뒤로 좀 빼주라. 그럼 뒤에 오는 차들이 댈 수 있다고. 몇 번 얘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왜? 차 부서질까 봐! 우선 그게 먼저거든. 그게 우선이거든.

남에 대한 배려는 둘째고 우선 내 차가 망가지지 않고 또 좋은 나라비(위치)에 왔다갔다 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들 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만약에 그분이 티코 같은 똥차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아무데나 대놓을 거라 아마. 그런데 좋은 차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이 기본을 알아놔 놓으면 문제는 간단해져 버리는데 그런데 그런 기본들을 우리들은 보통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꼭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이 빠띠세와나에 들어갑니다.

 

"반드시 없어선 안 되는 것 네 가지"라고 해서,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 그다음에 약품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살아가기 위한 네 가지 기둥입니다. 이것이 있어야만이 살아가진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재가인 뿐만아니라 출가자도 꼭 마찬가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출가자도 이것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용어는 다릅니다. 출가자는 여기 밑에 얘기했지만 '삔다빠따'라고 그렇게 돼있지만, 재가자는 '아하라' 해서 그냥 음식이라고 얘기를 하고, 용어들은 다르지만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맨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찌와라(civara)'라 해서 여러분 같은 경우에는 의복이고, 출가자는 가사.

 

그다음에 두 번째가 '삔다빠따(piṇḍapāta)'라고 해서 출가자는 탁발해서 얻은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바리때 안으로 사람들이 시주 올리는 것들 그것으로써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일반인들은 그냥 음식입니다.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제거하고 수행을 위해서 몸을 유지하는 도구로써 쓰여지는 '아하라(āhāra)' 음식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세나사나(senasana)'라고 하는 사는 곳, 살 곳이라는 얘깁니다. 살 곳이라고 하는 경우는 출가자 같은 경우는 화려한 사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밤에 머무는 숙소를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큰 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일상적인 활동을 했다가 저녁에 들어가서 편하게 몸을 뉘울 수 있는 곳들을 얘기합니다.

낮에는 어디에 있어도 경제적인 활동을 하든 어디에 있어도 관계가 없지만 밤에 지낼 곳이 없으면 굉장히 위험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곤란을 겪는 것들도 많고 움직일 수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나사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밤에 당신은 어디서 머뭅니까 하는 얘기입니다. 스님들한테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태종사에 있다 아니면 뭐 어디에 있다 하고 얘기할 땐 뭐냐 하면 이 세나사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뿐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수행의 좌복(nisīdana)을 통칭해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이 또 좌복입니다. 좌복이 없으면 더러운 것에 바로 노출되고 하기 때문에 좌복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수행하는 곳이 어디냐 하는 것이 같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길라나빳자야'(gilana paccaya)라고 해가지고 약입니다. 이 길라나(gilana)라고 하는 말은 빨리어 용어에서 병이 들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길라나빳자야 라고 할 거 같으면 병이 들었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 병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죠.

약이라는 단어는 다른 빨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인데, 이 네 가지는 출가자에게 해당이 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재가자가 해당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먼저 수계식을 하고 나면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뭐냐 하면 기본적인 계율, 사미면 사미 10계, 비구면 비구 227계, 그것을 배우고 그와 더불어서 배우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네 가지 의지할 대상입니다.

그마만큼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배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미들을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 만이 그것이 바른 용도로 쓰여지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번뇌가 되는 것들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배우느냐 하면, -가사다.

가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다 떨어진 헝겊 주워와가지고 기워가지고 입는 게 가사입니다. 그럼 지금 스님이 입고 있는 이렇게 시중에서 만든 것들 이거는 뭐냐? 안 그러면 누가 나에게 옷을 한 벌 보시해가지고 입고 있는 거는 뭐냐?

이거는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가사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뭐라고 스님들은 판단하냐면 '이건 덤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덤! 내가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덤이라고 판단을 하는 거라. 가사는 직접 내가 헝겊쪼가리를 주워 와가지고 그걸 깁고 해가지고 만든 것들을 가사라고 얘기합니다.

 

처음에 내가 1987년도에 태국가서 출가를 했는데, 대승불교 말고 테라와다 불교를 얘기합니다. 그때들만 해도 가사들을 스님들이 직접 만들어 입었습니다. 결제가 끝나고 나서 해제하고 나면 해제 다음날 하루 동안에 뭘 하느냐 하면 어떤 스님들은 물 끓이고, 어떤 스님들은 약품 구해 온 것 뭐 돌이면 돌 같은 데서 아니면 목초면 목초 같은 데서 약품 구해온 것들을 갈아가지고 만듭니다. 그렇게 분류를 하고.

어떤 스님들은 천을 가져온 것들을 전부 재단하고 자르고 해가지고 하는 사람, 또 어떤 스님들은 내내 재봉질하는 사람, 어떤 스님들은 재봉질해가지고 만들어진 가사를 갖다가 가져가가지고 염색하는 스님, 또 염색한 걸 갖다가 펄럭펄럭하면서 바람을 쐬어야되니까 펄럭펄럭하면서 저쪽 양지바른 곳으로 가져가는 스님, 그걸 또 다시 가져와가지고 또 염색하고 이런 과정들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 해제 때가 다가오면 분담을 해줍니다. 너는 이번에 가사 할 때 뭐해라, 뭐 맡아라, 뭐 맡아라,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열심히 며칠 동안 그거 구합니다. 만약에 내가 염색약 붉은색이 드는 염색약을 구해야 된다 할 거 같으면 그거 찾고 그럽니다. 안 그러면 검은색 염색약 구해야 된다 그러면 돌로 가지고 구하든지 아니면 커피 같은 걸 빻아가지고 한다든지 어쨌든 만들어내야 됩니다. 그렇게 분담들을 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해제 다음 날은 그 상가에 있으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날 중에 하납니다. 축제! 축제입니다. 스님들이 다 직접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뭐라 그러느냐 하면 가사라고 한다 하는 겁니다. 가사!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닐 경우에는 그거는 그냥 여벌옷이구나 하고 판단들을 하는 형태들을 띱니다. 그런 정신들을 가지지 않으면 옷에 대해서 항상 번뇌를 가지게 돼있습니다.

지금도 스님 옷은 좀 틱틱하니 좀 탁한 색입니다. 그런데 도심지에 있는 스님들 옷은 삐까뻔쩍 합니다. 그런데다가 법랍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재질이 고와집니다. 실크로도 되고, 하여튼 우리는 불편해서 도저히 못 입겠든데, 입으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그거 왜 그렇게 되는 현상들 같습니까? 옷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는 걸 깜빡 잊어버리는 거라. 스님들 예를 들지만 여러분들도 똑같습니다.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지.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먹는 것들입니다.

탁발나가면 바리때 속에다가 누가 공양물을 올려줍니다. 그런데 가끔씩 스님들 공양청을 받아나가거든요. 그것도 그렇게 먹는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 스승들이 가르치냐면 '그거는 특별서비스다.' 공양청 받아가지고 그것을 공양하는 거는 특별서비스지 그게 일상화되면 안된다는 거라. 탁발이 주지 특별서비스가 주가 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상가에서도 순번제를 정해가지고 돌아갑니다. 번호표대로. 만약에 오늘은 저쪽에서 다섯 명 스님을 초청을, 했다 그러면 1번부터 5번, 만약에 내일은 또 저쪽에서 네 분 스님을 초청했다, 그러면 6번부터 9번까지 또 가고 이렇게 순번으로 쭉 돌아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나가는 횟수가 많아봐야 세 번을 넘지 않도록 합니다. 그게 넘어버릴 거 같으면 밖에 특별서비스 나가는 걸 사원에서 중단시켜 버립니다.

왜? 밖에 나가서 자꾸 좋은 것들을 먹다 보면 탁발할려는 마음이 안 듭니다. 그래서 특별서비스를 나가는 날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탁발을 나가게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거동이 불편한 스님들도 꼭 마찬가지로 탁발을 나갑니다. 왜? 그거는 기본이기 때문에! 그 정신을 잊어버리지 마라 해가지고 탁발을 나갑니다. 그날은 자기가 못 먹습니다. 특별서비스를 나가야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그 공양물을 다른 스님들에게 나눠주는 거라. 그리해도 그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을려고 반드시 탁발을 나간다는 겁니다.

 

먹는 것은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탁발해 온 음식들을 여러분들 아마 잘 못볼 경우들도 있는데요. 굉장히 풍족하고 맛있을 거 같죠? 한번 해보십시오. 섞여있고 다 식어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먹을 때 어떠냐, 사실은 그렇게 맛난 거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면 어머 참 맛있겠다, 뭐 많이도 받았다 하는데 많이 받으면 뭐 할 거라? 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먹을 수 있는 것은 딱 정해져 있는 건데. 배가 정해져 있는 건데, 그리고 같이들 나눠 먹기 때문에 많이 먹지도 못합니다. 알아차리면서 이렇게 먹어야 되는데 지 먹고 싶다고 양껏 푹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그러면 당연히 장로 스님들이 뭐라 합니다. 어디서 먹는 걸 그렇게 먹느냐고. 그래서 적당하게 먹었다 하는 데에서 보통 세 숟가락을 빼라 그럽니다.

여러분들 보통 적당하게 먹었다가 아니고 배불리 먹었다 그렇게 얘기하죠. 배불이 먹었다고 할 거 같으면 이미 두 배, 두 배는 먹은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그거만 먹나? 배불리 먹고 나서 디저트 해가 뭘 또 먹고 그러죠. 그걸 또 안 먹으면 이상할 정도가 되는데 어쨌든 이 먹는 것을 그런 경우로써 한정을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같은 경우입니다.

약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소의 오줌입니다. 소의 오줌을 약이라고 합니다. 발효된 오줌! 여러분들도 옛날에 아프고 했을 때 자연에서 채취들을 한 약을 썼습니다. 그런 것들을 약으로써 알고 있고 사용하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빈약한 것들을 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의사가 조제한 약 같은 걸 먹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병을 낫게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터무니없이 호강을 하는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라고 그럽니다. 터무니없이 호강한다는 거라.

 

수행으로 다스리는 게 첫 번째인데 그걸 놓쳐버렸지. 그것도 수행으로 다스리지 못한 거는 그렇다 치자. 그럴 거 같으면 경전을 통해서 환희심을 일으켜가지고 병을 몰아내야 되는데 그것도 못했지. 그것도 그렇다 치자. 그런데도 가장 미약한 약품들, 진짜 꼭 필요한 약품들만 먹어야 되는데, 만약에 두통이 있었다. 두통 같은 거는 약을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드는 겁니다. 만약에 두통이 있었다. 타이레놀 반알만 한번 먹어가지고 다스려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 뒤에 또 두통이 일어나는데 또 먹었다. 그러면 인제 장로 스님들한테 혼이 나는 거라. 약을 뭐라고 했느냐? 약조차도 이렇게 하는 거라. 왜?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호강하지 마라라는 거라. 호강하지 마라.

 

그다음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는 장소입니다.

보통 나무 그늘 아래나 나무 아래들, 그다음에 움푹 파인 굴들 뭐 이런 데서 지내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인제 지붕이 있는 곳들에서 부처님 당시 때부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거기서 지내고, 내일도 또 거기서 지냅니다. 지붕 있는 방에서.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사치스러운 길이다' 하고 판단을 하라. 사치스러운 길이라고.

 

스님들 방의 규격을 정해놨습니다.

자는 방의 규격을 그걸 넘기면 안 된다 하고 율장에서 아예 규정을 해놨습니다. 얼마 정도 될 거 같습니까? 지붕 있는 방을 얘기합니다.

1m하고 3분의 1 그러니까 1m하고 반이 좀 못 되는 거지. 1m30정도 되는 (가로) 사이즈에, 길이로 칠 거 같으면 한 2m정도 나가집니다. 그 정도 규격을 벗어나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한 사람 딱 누워서, 두 사람 누울려고 할 것 같으면 좁은 듯한 그런 공간들을 얘기합니다. 그 공간을 넘지 말아라 하고 규정을 해놨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스님들 개인 방 가지고 있는 거는 전부 그 규격에 다 어긋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단지 그 규격이 넘을 경우에는 그 규격을 넘는 규정을 다른 것으로 채워야 된다 하는 겁니다. 다른 스님들이 머물게 한다든지 아니면 책을 볼 수 있는, 혼자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율장을 어겨버리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붕이 있는 곳에 그렇게 있더라도 저녁에 스님들이 들어가서 항상 독송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수하좌(樹下坐)라고 하는 게송입니다. 이것만 하는 게 아니라 네 가지를 다합니다. 방사의 의미를 회상하는 게송을 반드시 독송하게끔 합니다.

 

이런 것이 최소규정으로서 부처님이 얘길 해놓은 겁니다.

이 최소규정이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으면, 물론 일반적으로 그 이상들을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브레이크가 안 잡히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최소규정을 항상 기억을 하라 하는 뜻이지, 만날 가난하게 살아라 하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최소규정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을 공부하지 않을 거 같으면 욕망이 끝없이 일어나서 번뇌가 끝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걸 것들을 사실은 부처님이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필요한지 하는 것들을 최소한으로 생각하게끔 부처님이 만든 것이 뭐냐 하면 이 네 가지 의지할 것들입니다.

아, 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거지. 쉽게 말하면 빚을 내는 것도 안 되지마는 그렇다고 호화롭게 살아가는 것도 안 되게끔 아, 내 처지에서 요정도면 최소한으로는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갔을 때 번뇌만 일으키지 않고 욕심부리지만 않으면 '아! 이렇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 참 좋다' 하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최소한의 규정을 스스로가 알고 만들어 두어버리면 욕구가 적어지고 그로 인해서 마음이 편해진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 충실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들을 잘 파악을 해야 됩니다.

 

교재 맨 첫 번째 ''라고 돼있습니다. 옷이란 뜻입니다.

게송을 한번 읽어 드릴께요. (빨리어 게송 생략)

 

"내가 사용한 의복 또는 가사에 대해서 지체 없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

다만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가지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몸을 가리고 수행 정진하기 위해서 이 옷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이 옷을 사용하였구나 하는 걸 알고 '이 옷을 사용하였습니다.' 하고 관찰하게 돼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래서 스님들이 아침에 예불할 때 '사용하겠습니다' 하고 독송을 하고, 저녁 예불 아니면 저녁에 자기 전에는 방안에서 '아, 이렇게 사용하였습니다' 하고 회상하게끔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도록 돼있습니다. 옷만 그런 게 아니고 네 가지를 다 합니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동물은 옷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런 애완동물들 말고 그냥 야생으로 살아가는 동물들. 그거는 애완동물에게 옷을 입혀놓은 것은 동물 지한테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좋다고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사실은 동물들에게는 그건 괴로운 겁니다. 동물은 스스로 털의 색깔도 변하고 털의 길이나 털의 두께도 스스로 환경조건에 맞게끔 변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인위적으로 해놓은 것입니다. 어쨌든 옷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은 필요하지 않다는 거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는 거라.

 

사람은 왜 그렇게 옷이 필요합니까?

일단은 기후변화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에 약하기 때문에 더위나 추위로부터 그것을 보호할 보호장치가 없으면 안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여기에도 바른 생각으로 관찰해보니까 ' 아! 이 옷은 추위와 더위로부터 내 몸을 보호해주는 것이구나' 하고 판단을 합니다. 기후변동에 약하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털이 지맘대로 변해가지고 내 몸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옷으로써 바꿀 수밖에 없다는 거라.

 

스님들은 세 벌입니다. 세 벌을 가지게끔 돼있습니다. 왜 세 벌입니까? 더울 때는 한 벌, 그다음에 추울 때는 두 벌, 아주 추울 때는 세 벌 껴입으라는 거라.

스님이 지금 쉐타 같은 걸 입고 있죠? 태국에도 이런 쉐타가 있습니다. 더운 나라 같지만 추울 때는 조금 춥습니다. 세 벌 가사로도 안될 때 안에 입는 이 '앙사'라고 하는 안에 입는 옷이 있습니다. 윗도리에, 이걸 쉐타를 입습니다.

그런데 규정을 어길 수가 없으니까 태국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냐 하면 왼쪽 어깨는 이 쉐타가 덮혀있는데 오른쪽 어깨는 드러나집니다. 요렇게 파여져갖고 쉐타가 나옵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해도 그거 하나만 입는 것도 굉장히 보온이 됩니다. 물론 빵모자 같은 게 있어서 쓰고 그렇게 하죠. 양말 같은 것도 신고.

 

그런데 이 추운 지방에는 그것 때문에 이 상가에서도 고민들이 많았습니다. 이 오른쪽 어깨를 가리면 안되는데 그러니까 예불을 한다든지 이럴 때. 아, 추우니까 안 가릴 수가 없단 말이라. 그래서 대안으로 처음에 나온 게 뭔지 아세요? 오른쪽 어깨는 똑딱이로 만들었습니다. 이 똑딱이로 만들어가지고 예불하고 아니면 스님들께 인사하고 무슨 큰 행사할 때는 이 똑딱이를 탁 풀어가지고 요쪽 것은 드러내버립니다. 오른쪽 어깨는 드러나지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요 똑딱이를 채워가지고 보호하고 입고. 맨 처음에는 서양으로 나갔든 아니면 이런 데로 나왔던 스님들이 그렇게 사용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요즘은 쉐타 입는 것은 아예 허용을 합니다. 안에 껴입는 것들 허용을 해버리고. 그리 하더라도 그 의미 자체를 변질시키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거는 기후변동에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거라. 그거는 이해한다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가 왜 또 옷을 입습니까? 피부 문제입니다. 피부가 약합니다.

피부가 굉장히 약합니다. 이 동물들 같은 경우에는 피부에 뭐가 묻고 하더라도 그것이 몸을 손상시키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인간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뭐 독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화장품을 얼굴에 바른다. 어떻게 돼요? 그대로 스며들어버리죠! 동물은 이게 스며들질 않습니다. 피부가 굉장히 약한 겁니다. 그러니까 태양에 노출되면 그냥 그대로 다 타버리고 벌개지고 합니다. 이렇게 약하니까 어떻게 돼? 그런 태양열이나 뱀이나 벌레 같은 거에 닿으면 그대로 그냥 물려버리는 거라.

특히 뱀 같은 경우에는 뱀이 어떻게 무는지 아십니까? 혈액 쪽으로 뭅니다. 혈액 쪽으로 해서 독이 피와 같이 돌게끔 해서 마비를 시키고 죽이고 이렇게 합니다. 이 혈액은 피부 가까이 있거든. 그러니까 탁 물면 어쨌든 대부분이 혈액 있는 쪽으로 물게 돼있다는 거라. 아무리 독이라고 하더라도 입에 머금고 있든지 아니면 위속에서 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그곳에 상처가 난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런데 혈액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니거든. 그냥 그대로 마비시켜버리는 형태를 띱니다.

그마만큼 인간의 피부는 약해져 있다 하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음에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가지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입는 거라. 그 의미를 잘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사회제도에서 몸을 숨기는 것(가리는 것)이 대부분 결정이 돼있습니다.

물론 알몸으로 있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건 뭐 어릴 때, 철 모를 때 얘기지 사회제도내로 탁 나와버릴 거 같으면 알몸으로 있을 거 같으면 안됩니다. 옛날부터 성인이 되면 몸을 숨기게끔 돼있습니다.

지금도 스리랑카 같은 시기리야 벽화에 보면 옛날에 귀부인들을 보면 젖가슴을 다 가렸습니다. 그런데 귀부인이 아닌 하층민들은 젖가슴을 드러내있습니다. 그거 봤죠? 그거 왜 그런지 아세요? 사회적인 관습이 일단은 가리는 것이 표준으로 돼있기 때문에.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그걸 가릴 수가 없기 때문에 드러나 있는 것뿐이었다는 거라. 옛날부터 이렇게 옷이라고 하는 것은 가리도록 돼있습니다. 몸을 가리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기에 대한 번뇌들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옷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도 어떻게 합니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는 거라. 몸을 지키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게 아니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입는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추워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는 짧은 거 입어야 되고 드러나는 거 입어야 되고 그런 형태들을 띤다는 거라. 그런데 옷이라는 거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거는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경쟁을 하는 목적으로 옷을 입습니다. 사람끼리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경쟁할 목적으로 옷을 입습니다. 누구 하나 뭘 입어 봐봐. 그럼 나도 그걸 입어야 돼. 넥타이 만약에 검은색을 했다. 나는 뭐 코디하는 법을 몰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럴 거 같으면 양복도 검은 거 입어야 되고, 양복을 검은 거 입었으면 구두도 빨간 구두 안되고 검은 구두 신어야 되고 그런 형태들을 띤다는 거라.

그런데 사실은 검은 구두를 신든 빨간 구두를 신든 몸을 보호하고 그다음에 몸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피하고 몸을 감추고 또 여러 가지 날벌레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충분하거든.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라. 거 왜 그래요?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경쟁 때문에 그렇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검은 게 없으면 번뇌가 일어나고 갖춰야 되고 그렇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건 전부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라고 하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 입는다. 옷 허줄그레하게 입으면 남이 나를 잘 안 봐주니까. 좀 잘 입어야 만이 내가 좀 뻐기기도 해야 되는데. 자기 자신의 아만을 오히려 강화시키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리고 그런 욕구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어떻게 옷을 입느냐 하면 다른 사람을 자극하기 위해서. 요리 입으면 섹시하니까, 요렇게 입으면 내 근육을 탁 드러나게 하니까. 옷으로 인해서 사람이 타락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들 때문에 그렇다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만 그렇게 타락시키는 게 아니고 남도 똑같이 타락을 시킵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옷의 의미를 잘 파악을 해야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수행 정진하기 위해서 옷을 사용해야 되고, 몸을 가리기 위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비바람이나 태양열,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사용해야 되고, 추위나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어야 됩니다. 이 몸이 있어야 만이 수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수행의 대상인 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많은 옷도 필요가 없고 꼭 필요한 옷들을 갖추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메이커 있는 것, 값비싼 것,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여러분들 같은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멀리해야 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더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이고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바르게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옷차림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참 좋지마는 훌륭한 재능을 갖췄지마는 옷을 잘 못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옷도 잘 못차려 입고 성격이나 마음도 별로 안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의 경우도 있죠. 아무것도 마음도 별로 좋지도 않으면서 옷만 삐까뻔쩍하게 잘 차려입는 사람도 있고, 또 마음 씀씀이도 영 엉망이고 옷도 잘 못차려 입는 경우도 있고. 옷을 잘 차려입는 사람도 두 부류이고, 옷을 못 차려입는 사람도 두 부류라는 거라. 그 두 부류에 꼭 같이 마음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안 좋은 사람도 있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옷으로써 가치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거라.

 

또 하나 경계를 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옷차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쉽게 얘기하면 허울뿐인 것들,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라. 자기의 내면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특히 자이나교 같은 경우에는 옷을 아예 안 입습니다. 나형외도(裸刑外道)들이 대부분입니다. 인도에 가면 가끔씩 그런 모습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종교가들이나 이런 분들이 이런 사고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부정해버리고 정신이 맑고 깨끗하면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런 분들도 실제로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추구하는 것은 이름만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외형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옷이라고 하는 외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뭐 의식을 중시한다든지 아니면 경전을 중시한다든지 뭐 아니면 뭐 어떤 의식을 중시한다든지 이런 것들, 그런 것들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데는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것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를 것 같으면 외형적인 것들이라는 거라.

자기 자신은 외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또한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볼 때 뭐로 가지고 판단합니까? 외형으로써 보고 판단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옷이 아예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런 이런 이유로 해서 옷이 필요하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아예 없어서도 안 되고, 또 너무 많아도 안 되는 것들이라. 그러니까 재가자든 출가자든 필수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뭐냐면 이 옷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나형외도나 이런 다른 종교가들하고는 조금 다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食」식' 부분, 아! 시간이 너무 많이 됐습니까?

오늘 이 네 가지 다 할려고 했는데 하나만 하고 끝나네. 다음시간부터는 좀 간단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다음시간에 「食」부터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