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4.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5. 바른 견해2 (20080214)

담마마-마까 2020. 1. 20. 11:07

https://youtu.be/qhJflxCWniI

14.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5. 바른 견해2 (20080214)

 

통상적으로 보면 여러분들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하면, 통상적으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게 보통 뭡니까?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들, 이런 것들도 바른 견해에 들어갑니다.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게 돼있다. 그리고 그렇게 짓는 업은 자기가 상속자고 자기가 소유하게 돼있다 하는 것들을 보통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써 바른 행위를 지었을 때 얻어지는 결과, 나쁜 행위를 지었을 때 얻어지는 결과 그런 것들도 알고 있습니다. 좋은 행위 지었으면 좋은 결과 받게 돼있는 거고, 나쁜 행위 지었으면 악도에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그거는 대부분 이해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화내고 욕심부리고 또 어리석고 원한을 가지고 이런 것들은 선행이냐 아니면 불선행이냐 하고 얘기하면 불선행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그런 화내고 하는 여러 가지들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더러워지는 것이냐 하고 할 것 같으면 맑고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들을 다 안다는 거라.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것들이 올바른 것이냐 잘못돼있는 것이냐 하고 물어봐도 잘못돼있다고 한다는 거라. 또 그러한 불선행들의 상태로써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비난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비난하니까 어떻게 돼요? 괴로움을 받느냐 안 받느냐? 괴로움을 받는 거라. 확실히 괴로움을 맛보는 거라. 이런 이해들은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것들을 스스로 바르게 이해한 것이지,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라든지 아니면 경전에 이렇게 써져있어서 그렇다든지 아니면 사리분별이 맞기 때문에 그렇다든지 해가지고 믿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이해하는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스스로 '아! 이런 행위를 지으니까 좋은 사람들로부터 넌 나쁜 놈이다 하고 욕을 들어 먹는 거고, 그러니까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고 스스로 이해를 한다는 거라.

스스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반대로 욕심이 없는 상태,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건 다 대부분 좋은 상태라고 이해를 한단 말이라. 욕심도 부리지 않고 넘의 것 훔치지도 않고 악행도 저지르지 않고 하는 것들은 바른 행동이라고 알고 있다는 거라. 이해하고 있다는 거라. 그럼 바른 행동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온다 하는 거를 아는 거라.

분노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 분노가 없는 마음은 자애로운 마음이지. 누구에게든지 자애롭게 대하는 마음은 좋은 마음인 줄 다 알고 있다는 거라. 훌륭한 마음인 줄 알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훌륭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거짓말도 하지 않고 살생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꼬지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답이 딱 정해져있다는 거라.

 

마음이 견실하고 곧고 선명하게 되어서 사물을 바르게 판단해서 또 활기차게 행동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상태, 이런 상태들을 다 좋은 상태라고 그럽니다. 훌륭한 상태라고.

그런 사람들은 서로서로 도와주고 또 남을 해치지도 않고 제대로 살아간다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고 가르쳐주고 그 삶의 방법은 올바르다고 이해한다는 거라. 원한을 가지지도 않고 나쁜 일을 당해도 곧 잊어버리고, 누가 자기에게 힘든 말을 하더라도 화내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냥 싱긋 웃으면서 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다 좋은 상태라고 합니다. 좋은 일이라고, 훌륭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행복하다. 확실하게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한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바른 행위이고 바른 삶의 방법이라는 거라.

 

이것은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지 경전에서 얘기해서, 아니면 스님이 얘기한다 해서 그렇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적어도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것 정도는 대부분 안다는 거라. 어떤 것이 바르고 어떤 것이 그르다 하는 것을.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세간적인 바른 이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법을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면 바르게 이해를 해야 되느냐? 출세간이라 해서 꼭 출가자들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법을,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해나가는, 수행해나가는 사람들을 얘기합니다. 그 수행은 이렇게 법수행자들도 해당이 되는 겁니다. 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자들.

 

저번 시간까지 스님이 세 부분으로 나눠가지고 얘기를 풀어나갔었습니다. 뭡니까?

사성제에 대한 이해, 그다음에 삼법인에 대한 이해, 또 하나는 뭡니까? 인과에 대한 이해-연기. 이 세 가지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들을 얘기한다 하는 겁니다.

 

괴로움이 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괴로움의 발생의 원인을 당연히 끊어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괴로움의 소멸은 내가 증득해야 되는 것이라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당연히 내가 닦아나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는 것.

이런 것이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그럽니다.

 

실체하는 것들이 완전하게 만족스러운 상태라고 하면 변화하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몸을 봤을 때, 몸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하는 것은 불안정한 것이다 하는 거라. 불안정 하기 때문에 불만이 일어난다 하는 거라. 그런데 완전하게 만족한 상태라고 하면 안정된 상태입니다. 안정된 상태라면 변화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하는 것 자체는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족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불만족하다는 거라. 그래서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사성제의 첫 번째 ()에 대한 것입니다.

 

실체하는 것들을 한번 보십시오. 안정되어있는 것이 있는가.

어떤 것이든 두려움을 가지게 돼있고, 어떤 것이든 변화하게 돼있다는 거라. 변화하게 돼있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에 안정될 순 없다는 거라. 그렇다는 걸 스스로 이해한다는 거라.

왜 그러면 존재하는 것들이 괴로운가 하면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안정되길 바라기 때문에! 집착하기 때문에! 안정되길 바라는 거는 뭔가 못 가게 붙잡는다는 거라. 변화해나가는 거를 갖다가 변화하지 말라고 붙잡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 집착하는 것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 바라지 않는 것들, 혐오감을 가지는 것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게 사성제의 두 번째 ()! 집이라는 거라.

 

그렇게 고와 집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이해할 거 같으면 자기가 가지는 견해도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버려버릴 줄 안다는 거라.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기가 실제 경험한 것을 통해서 속박하고 있을 때 가지는 부자유함, 그리고 속박된 것들을 놓아버렸을 때 가지는 자유로움, 이런 것들을 스스로 경험한다는 거라. 그걸 뭐라 그럽니까? 이렇게 속박된 걸 탁 놓아버리는 것, 이 족쇄를 갖다가 탁 풀어버리는 것, 이것이 소멸이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그()!

 

그렇게 소멸해나가는 것은 뭡니까? 부처님이 가르친 건 어떤 겁니까? 스스로 이해해서 깨달아라 하는 겁니다. 스스로 이해해서 깨달아라. 그래서 그 길을 갖다가 여덟 가지로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런 속박으로부터, 번뇌의 속박-자물쇠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들입니다. ().

이것이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 바른 이해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번째 삼법인에 대한 바른 이해

삼법인은 뭡니까? 무상(無常) () 무아(無我)에 대한 이해죠!

어떤 무상··무아입니까? 오온입니다! 내 몸과 마음!

이 오온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 어디를 둘러봐도 순간순간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그거는 무상한 거라.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는 거라. 이것이 무상(無常)이구나 하고, 이것이 진리라고 이해한다는 거라.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럽구나! 인간은 절대 만족이라는 것을 가져올 수 없다는 거라. 아, 이것이 불만족이고 고()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해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하는 것들, 이 모든 것들, 이 몸 자체와 마음 자체 이것들은 전부 다 변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이 변하는 것에 이것이구나 하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어딨느냐는 거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사실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거라.(無我)

이게 인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겁니다.

오온,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들이 삼법인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현상은 원인·결과로써 이뤄져있죠!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져 있다 하고 이해한다는 거라.

A가 있기 때문에 B도 있다.

A가 생길 때 B도 생긴다.

A가 없어질 때 B도 없어지고,

A가 소멸할 때 B도 소멸한다.

이 네 가지! 이 네 가지 방정식!

 

모든 현상은 마찬가집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앉아있는데 다리가 아프다.

자신에게 아픔이 있다. 그럼 아픔이 일어났다. A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아프다고 내가 알죠! B가 일어나는 거라.

아프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아프니까 A가 생겼으니까 어떻게 돼요?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벗어날려고 한다는 거라. 그럼 또 B가 생겨난다는 거라.

아! 이거 아닌데 하고 생겨난다는 거라. A가 있으므로 B가 있게 되고, A가 일어나면 B도 일어나게 되고.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모든 게 마찬가지라는 거라. 춥다든지 하는 것을 느낄 때, 덥다는 것을 느낄 때, 이런 느낌들이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이렇게 다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져있다는 거라. 안 그러면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가지고 혼란스러울 때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전부 이 네 가지 방정식 안에 다 있습니다.

그것이 사라질 때는 또 사라지는 방정식이 있습니다. A가 없을 때 B가 없게 되고 A가 소멸되면 B도 자동적으로 소멸된다는 거라. 그와 같은 이치구나 하는 것들을 갖다가 이해한다는 거라. 그렇게 또 이해해야 만이 바른 이해라.

그래서 이걸 연기에 대한 이해다 하고 애기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카테고리에 대한 이해들을 해야 됩니다. 사성제와 삼법인과 연기에 대한 이해.

다른 것 같죠? 그런데 이 사성제, 삼법인, 연기라고 하는 것은 한 카테고리입니다. 전부 똑같은 겁니다. 저번 시간에 그런 얘기 했죠? 연기와 고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는 얘길 했습니다. 아! 연기와 고는 얘기 안 하고, 연기와 무상에 대한 것은 분리된 게 아니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어쨌든 마찬가지 얘기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서 체험하는 것은 삼법인을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탐·진·치에 대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 오온을 무상·고·무아로 보기 때문에 '오온이 나다' 하는 견해는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최고다' 하는 상견(常見), 아니면 단견(斷見)이라고 하는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 삿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 적어도 부처님이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들이 가져야 되는 바른 견해라고 얘기합니다.

 

이렇게 바르게 고찰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뭐냐 하는 것이 네 번째 적어놓은

'세 가지 번뇌는 격퇴된다.'

그 세 가지 번뇌는 뭡니까?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이런 거죠!

 

어떤 것이든 대상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몇 가지가 됩니까? 통상적으로 열 가지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게 물질적인 대상이든 정신적인 대상이든 어떤 대상이든 현재 생겨난 대상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통상적으로 열 가지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많이 들어봤죠? 오상분결, 오하분결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하분결은 좀 거친 번뇌들을 얘기합니다.

오상분결은 조금 미세한 번뇌들, 다스리기 힘든 번뇌들.

그중에서 거친 번뇌들 중에 세 가지!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이라고 하는 세 가지는 완전하게 격퇴된다. 무엇으로?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고찰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한번 오하분결, 오상분결을 봅시다.

오하분결에서 첫 번째 유신견(sakkāyadiṭṭhi)이 뭡니까? '나'가 있다는 견해죠! 이 몸과 마음 이것이 '나'다!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그런 견해들이죠. 열 가지는 다들 삿된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라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라고 집착하지 않는 거지.

 

두 번째가 뭡니까?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이죠.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는 것. 계율이나 의식이나 이런 걸 이걸 지켜야만이 해탈할 수 있다 하고 집착하는 것. 이런 삿된 견해 이걸 계금취견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의심(vicikicchā)은 뭡니까? 삼보에 대한 의심, 연기에 대한 의심, 계율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을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 '나쁜 짓 해도 벌 안 받는다. 좋은 일 해봐야 좋은 일 안 일어난다. 부처님 믿어봐야 뭐 할끼고? 부처님이 나한테 두꺼비나 툭 떨어뜨려주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래 쌌노? 내가 죄지어도 나쁜 결과 안 받더라. 원인·결과 없더라.' 이런 것들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것. 이걸 인제 의심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감각적인 욕망(kāma-rāga).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을 원합니다. 싫은 것들은 배척할려고 하는 거고, 이걸 인제 감각적인 욕망이라 그럽니다. 즐거운 것들, 즐길만한 대상을 찾는 것. 다리 구부리고 좌선하고 앉아있으니까 다리 아프니까 어떻게 돼? 지도 모르게 다리를 펴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서 그렇습니다. 편한 것을 찾기 때문에. 꼭 뭐 술 먹고 뭐 이상한 짓하고 이런 감각적인 것을 찾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하고 좋은 것들을 찾고 그렇게 행하는 것들인 감각적인 욕망 이것도 삿된 견해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악의(byāpāda)입니다. 악의! 분노하고 또 남을 증오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또 반감을 가지고 하는 것들,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전부 악의에 해당이 됩니다. 이것도 삿된 견해입니다.

 

그다음에 오상분결이라고 하면 조금 미세한 번뇌죠.

앞에 오하분결은 욕계에 태어나는 족쇄가 되고, 이 오상분결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족쇄가 된다고 얘기들을 하는데,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오상분결의 첫 번째가 뭡니까? 색계에 대한 욕망(rūpa-rāga)입니다. 내가 이런 감각적인 욕망을 벗어났을 때 그때 나타나는 느낌들 그런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이렇게 해보니까 다이어트도 되고 몸도 좋아지고 좋거든.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들도 다 여기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색계에 대한 욕망을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욕망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한 물질의 세계, 그것도 느낌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보통 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이 가지고 있는 천상에 태어나길 바라는 것, 이게 바로 색계욕망입니다. 좋은 공덕 많이 지었으니까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바라고, 천상세계에 태어나길 바라고, 그게 인제 색계욕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엔 무색계욕(arūpa-rāga) 입니다. 그런 색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정신세계,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기쁨이나 행복감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런 데에 집착하는 것 같으면 색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고, 기쁨이나 행복감이나 희열이나 뭐 이런 것들도 다 벗어나고 나서 그냥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만 일어나는 상태들, 거기에 딱 집착하는 것들이 이 무색계에 대한 집착이라는 겁니다. 산냐(saññā)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아만(māna)입니다. 아만이 오하분결에 속하지 않고 오상분결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마만큼 더 끊기가 힘든 것이란 것입니다. '내가 낫다. 니가 못하다. 우린 동등하다.' 우짜고 하는 것, 나와 남을 비교하는 것들.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뭐냐 하면 들뜸(uddacca)입니다. 들뜸! 현재의 대상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들을 통상적으로 다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생각은 과거니 미래로 왔다리갔다리 헤맵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약간의 들뜸이 있어야 만이 대상을 관찰하기가 수월합니다. 맞습니까? 스님이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죠?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과정이 있을 때까지는 사실은 이 들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왔다갔다 할 것 같으면 안 되는 거고. 그 들뜸으로 인해서 노력하는 힘들을 지속시켜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이게 좋은 면으로 작용을 합니다. 색계, 무색계, 아만 이것도 수행에서는 상승작용을 일정 부분은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것들도 나중에는 다 끊어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가 뭐냐 하면 어리석음, 무명(avijjā)! 근본 뿌리죠!

사성제와 삼법인과 연기를 모르는 것들을 무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바른 견해를 가지면 얻어지는 이익 세 가지가 뭐라 그랬습니까?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그럼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사성제와 삼법인과 연기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죠! 그럼 그런 사람은 무명이 완전히 떨어져 나갑니까? 그렇진 않죠! 그래서 왔다갔다 합니다.

오상분결과 오하분결은 어떤 면에서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욕계 색계 무색계 그렇게 구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수다원에서는 오하분결 중에 세 가지를 완전하게 뿌리를 뽑아버리게 되는 것, 족쇄를 풀어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오하분결 중에 두 가지, 그 감각적인 욕망과 악의는 남아있는데 거친 것만 없어지고, 아주 미세한 것들은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수다원에 이른 사람이 감각적인 욕망이 강하고, 악의를 항상 가지고 있고, 성도 내쌌고 이런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그런 것들이 남아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건 수다원 뿐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일래과에 가도 이 부분은 남아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일곱 가지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 일곱 가지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감각적인 욕망과 악의는 가지고 있더라도 악한 마음을 먹어가지고 살인을 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 아내를 가지고 범한다든지 이런 것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 마음을 잠깐 품었다가도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돼? 나쁜 행위를 짓는 것들은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거라. 줄어들고 하니까 어떻게 돼? 나쁜 결과를 받을 일이 없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이 예류과에 들면 얻어지는 공덕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되는데, 적어도 부처님 법을 바르게 관찰하고 이해하고 또 법을 듣는 자들은 이런 바른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 바른 이해가 시작되면 번뇌가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번뇌가 순간적으로 탁 소멸합니다.

그 삼법인에 대한 것들만 이해를 하고, 아니면 사성제에 대해서 아, 이것이 불만족이구나. 이것이 집착이구나 하는 것들만 이해하더라도 번뇌가 순간적으로 탁 소멸하는 것들을 압니다. 꼭 번갯불이 탁 치듯이.

여러분들 하늘에 번개 치는 것 봤습니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그 번개 치는 걸 잘 못 봅니다. 그런데 그 아주 순간적이지만 그렇게 탁 소멸하는 것들을 자기가 알아!

 

그런데 이제 그러고 나서 그쳐버릴 것 같으면 안 되죠. 그게 인제 지속적으로 이어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바른 이해는 지속적으로 자꾸 듣고, 지속적으로 자꾸 책을 보든지 아니면 스님 법문을 듣던지, 아니면 스스로 이런 체험을 통해서 이해를 하든지 해가지고 지속적으로 자꾸 이어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탁 소멸하는 것들이 점점 더 굵기가 굵어져버리는 거라.

 

순간적인 것들이 점차적으로 일시적으로 탁 소멸하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게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가끔씩 여러분들 그런 경전들을 읽었을 겁니다. 경전을 읽다 보면 '부처님 말씀을 듣다가 바르게 이해해가지고 예류과에 이르렀다' 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게 뭡니까? 순간적으로 탁 '아! 이게 진짜구나' 하는 것을 탁 알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해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 일시적으로 그런 것들이 소멸돼버리는 거라.

 

가장 대표적인 게 사리불 존자가 불교에 출가하기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첫 다섯 제자 중에 앗사지 존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아! 참 저렇게 성스러운 분이 있구나. 저게 도(道)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서 그분을 따라가죠. 그분을 따라가서 법에 대해서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때 앗사지 존자가 첫마디를 탁 던집니다.

"어떤 것이든 조건지워진 것은 일어났으면..." 하는 얘기를 처음 시작하자마자 이 사리불 존자는 그걸 이해를 하는 거라. 탁 '아! 이게 진리다' 하고 이해를 하는 거라. 어떻게 돼? 자기 스스로 조건지워진 것은 또한 조건에 인해서 사라지게 되어있다는 걸 갖다가 이해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게 순간적으로 탁 소멸된 것이 일시적으로 더 두껍게 소멸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적으로 쭉 일어나다 보면 한번 이해한 번뇌를 이해한 것이 또 다른 번뇌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서 줄기차게 이어질 거 같으면, 그것이 완전하게 탁 이해되고 나면 그러한 세 가지 번뇌는 탁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아! 이런 것이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구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이 법에 대한 의심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이런 것이 최고의 길이지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견해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거라. 계금취견.

그런 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뭐가 떨어져나가야 가능합니까? 유신견!

''라고 하는 견해가 탁 떨어져나가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자동적으로 떨어져나가는 거라.

 

이렇게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인 소멸을 경험하고, 그다음에 일시적인 소멸을 경험하고 나서, 그다음에 쭉 이어져서 마지막 완전한 소멸까지를,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하는 거라.

 

그렇게 이해하더라도 어떻게 됩니까?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죠!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것 말고 번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다시는 이런 번뇌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게 되는 거라.

'! 내가 이 길로 들어섰으니까 다시는 헤매지 않기를'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거는 뭡니까? 그거는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집착인 거라. 견해에 대한 집착이고. 그건 탐욕에 인한 번뇌라. 욕심을 가지는 거라.

 

그래서 세 가지 번뇌가 다 떨어지더라도 감각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번뇌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그런 이유들입니다. ? 바라기 때문에! 그게 좋은 줄은 알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도 놓아버릴 줄 알아야만이 더욱더 나아가지게 됩니다.

 

밑에 사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유신견 보십시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번뇌는 굉장히 무섭습니다. 이것이 떨어져나간다 하는 겁니다.

위찌낏차(vicikicchā)-의심이라고 하는 것, 거기에는 시간과 존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착각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도 변하는 것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없다 하는 사실을 갖다가 알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 의식 허례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고 효과가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예류과에 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뭡니까?

내 마음속에 뭔가 영구적인 것, 영원한 것이, 확실한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것을 믿고 싶어 하는 것들 그겁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뭔가 중요한 실체가 있다고 하는 생각, 설혹 내가 죽고 나더라도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뭔가 영혼이라는 것이 있으면 하고, 그것이라도 있으면 하고 마음속에서 믿고 바라는 것들, 이겁니다.

예류과를 못 들어가게 막는 가장 큰 이유가 요겁니다. 요것만 딱 떨어져 나가버리고 나면 세 가지는 다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차례차례로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실제 그런 것들은 뭡니까? 실재하는 건 아니죠!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어서 나타나는 단순한 개념일 뿐입니다. 개념일 뿐!

 

살아가면 여러 가지 괴로움들을 체험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하는 것들입니다.

왜? 나는 괴로울지라도 영혼은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영혼불멸 할 거 같으면 영혼은 괴롭지 않을 거 아니라. 내가 중병에 걸려가지고 죽기 일보 직전이라도 나는 죽더라도 영혼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들, 그건 뭡니까?

도망치는 겁니다. 진실을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망치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문제에 부딪치면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망치는 것으로 인해서, 그런 습관으로 인해서 이뤄지는 것들입니다.

마음속에서 이렇게 영구하는, 영구적인 것들, 영구적인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는 생각만 떨쳐버리고 나면 나머지 의심, 계금취견이라고 하는 것들도 사라져버립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예류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짐 중에 하납니다.

가장 큰 번뇌입니다. 그것만 한번 자꾸 떨어뜨려 볼려고 한번 해보십시오.

그걸 순간적으로 떨어뜨리든 아니면 일시적으로 떨어뜨리든 아니면 영구히 떨어뜨리든 그건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이해를 점점 더 깊게 하느냐에 따라서 있게 되는 겁니다.

 

이상의 세 가지 번뇌를 격퇴하여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스스로 이해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바로 그런 겁니다. 스스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들입니다.

 

밑에 네 번째 깨닫는 경지에 보면, 이 세 가지 번뇌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서 끊어지는 번뇌,

어떻게 보면 하잘 것 없는 것 같죠? 수많은 번뇌 중에 세 가지, 꼴랑 세 개.

그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번뇌는 전부 다 삿된 견해와 관계된 것들입니다. 삿된 견해를 끊어버리고 바른 견해를 가지면 이 세 가지는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뭐 그런 바른 견해를 가지더라도 욕구도 있고, 분노도 사라지지 않고, 신경질적인 성격도 있고, 욕심도 부리고 거의 변하는 것은 많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모든 것들, 모든 실재하는 것들은 무상하다고 아는 것. 무상하다고 아는 것! 무상하다고 알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 급격하게 줄어들어버립니다. 급격하게.

 

그래서 '세 가지 번뇌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번뇌가 많이 없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 밑에 예를 들어서 공포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예를 들어놓았습니다. 두려움이 없다.

유신견이 떨어져나갔으니까 두려워하는 것이 없지. 병이 들든 아니면 내 재산이 없어지든 아니면 천재지변을 당하든지 간에 두려워하는 것들이 없는 거라. 어떤 경우에든지. 여러 가지 번뇌도 같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진리를 관찰하는 공부만으로도 이런 경지에 이릅니다. 특별하게 수행을 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예류과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른 견해를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면 더욱 좋습니다. 그것은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게 됩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꾸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스스로가 만들어야 됩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행자 대답)

당연히 그렇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 하는 것들을 자꾸 이해해야 됩니다.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무상한 것에 집착할 것이 뭐 있어?

강물이 흘러가고 있는데 요건 내꺼다 하고 찜한다 해가지고 강물이 안 흘러가고 있습니까? 꼭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무상한데 집착할 것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자꾸 그렇게 보도록 노력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 두 번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상와라 빠하땁바(saṃvara pahatabba)라고 하는 것. 방어하는 것, 제어하는 것으로 인해서 대치되는 번뇌 부분을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