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1.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2 (20080117)

담마마-마까 2020. 1. 18. 13:10

https://youtu.be/82oRbzyuEHc

11.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2 (20080117)

 

자! 오늘 계속해봅시다.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 예 오늘 부분까지는 없습니다. 프린트물 저번 시간에 내준 거 가져왔습니까? (···) 일곱 가지 구분해놓은 거까지 프린트물 나갔죠? (···) 기본적인 기능 설명한 것까지는 했잖습니까? 그렇죠! 하나도 안 받았으면 결석한 거지, 그걸 내보고 물어보면 어떡하라고. (···) 그건 담마스쿨이고, 됐습니다. 그냥 하십시요. 교재가 짬뽕이 돼가지고 어디...

 

자! 기본적인 번뇌의 기능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죠!

기본적인 기능은 뭡니까? 거기 써놨지만 사람의 행복, 평온함을 부수는 일을 하는 것이 번뇌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그래서 이 번뇌가 있으면 괴로운 일이 늘어난다 하는 얘기를 했고, 번뇌가 아군으로 위장해서 오는 기능이 있다, 사람이 하는 행위에 맞춰가지고 적이 아니라, 나쁜 낄레사(kilesā)로 오는 게 아니고 아주 착한 아군으로써 위장해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 번뇌의 기능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원하는 결과는 기대할 수가 없다 하는 것까지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번뇌에 물들지 않고 인생에 문제없이 넘어가고 싶으면, 살아가고 싶으면 필요한 것은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어야 되고, 그다음에 침착한 것이 요구된다 하는 부분까지 했습니다. 맞죠!

 

자! 이 번뇌의 기본적인 기능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능을 알아야 만이 번뇌와 맞서 싸울 수 있고, 번뇌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번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부처님은 일곱 가지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일곱 가지를 다 사용을 해야 만이 번뇌와 맞설 수 있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일상생활을 할 때, 알아차림 없이 살아갈 때는 거의 모든 것이 번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차피 마음으로서 압니다. 이렇게 '아는 기능'이라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라고 불교는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의 모든 것이 번뇌이다시피 하는가 하는 부분이 참 난제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 고통은 모든 것이 고통은 아니죠? 그렇죠? 그런데 번뇌는 왜 그럴까? 알아차림이 없는 경우에 말하는 겁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이 번뇌에 해당된다 시피하고 있습니다.

왜?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자기 죽고 싶은 사람 없고, 나라고 하는 집착이 없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라. 번뇌는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그런 '나'라고 하는 것하고의 메카니즘(mechanism)이 번뇌를 오히려 더 성숙시키고, 더 바이러스 같이 퍼뜨리는 역할들을 한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아는 기능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으로 뭔가 알았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걸 인제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확인을 했든 어쨌든 간에 '그것이 올바르다' 하고, '있는 그대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눈으로 보고 안·이·비·설·신·의를 통해가지고 여러 가지 색·성·향·미·촉·법을 접함으로 인해서 그런 정보들을 받아가지고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알았다는 걸 가지고 그건 '니 마음이 알았다'하고 얘기를 안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똑같은 저기 꽃을 봤다. 나도 보고 여러분들도 봤습니다.

저 꽃을 보고 꽃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할 거 같으면 각각이 다 다릅니다. 똑같은 걸 봤는데! 똑같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을 본 거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았단 말이라. 아는 기능이 마음이거든.

그런데 내가 안 기능하고 여러분들이 안 기능하고 또 다른 사람이 안 기능하고 왜 이렇게 다르느냐 하는 거라.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각자의 성향, 각자의 판단에 따라서, 이런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섯 가지의 경계들 이런 것들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게 돼있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경우에 저걸 보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버릴 거 같으면 참 문제가 없어져 버리는데 보통 그렇게 안 하죠?

저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분노하든지 미워하든지 하는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안 그러면 비슷한 성향이고 좋은 것이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욕구를 가지게 되죠. 욕구, 집착하는 번뇌를 만들어나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알았다'하고 얘기합니다. '아는 기능'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만드는 환상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환상하고, 여러분들이 만든 환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만든 환상이 똑같은 걸 보는데도 다 다르게 봐진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이런 번뇌들이 생겨나겠느냐 하는 거라.

그렇진 않겠죠? 그런데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 어떻게 됩니까? 더욱더 번뇌를 부채질해나갑니다. 왜? 좋은 거는 좋은 거 대로 더 가질려 그러고, 싫은 건 싫은 거 대로 자꾸 배척할려 그러고 이렇게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음의 기능이, 아는 기능이 마음의 기능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실은 그 아는 기능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얘기할 거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절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하에서 아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확립됐기 때문에 다른 것하고 구분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기에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아는 것에 인해가지고 번뇌라고 하는 덩어리가 생겨나갑니다.

그런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봐 버릴 거 같으면 이 문제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딱 해결돼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봐버릴 거 같으면! 자기가 판단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살피고 관찰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 속에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번뇌가 일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끊임없이 일어남과 사라짐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갈망하는 것이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게 어쨌든 여러분들 윤회하게 만드는 거잖아.

 

윤회를 일반적으로 여러분들 인식의 기준에서 생각할 거 같으면 윤회를 끊는다는 거는 불가능합니다. 왜? 일단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작용을 할 거 같으면 일단은 번뇌가 물들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번뇌에 물들 거 같으면 그건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거는 끊임없이. 그런데 부처님은 그 윤회의 고리를 탁 끊었다고 그랬거든. 뭘 놓아버렸기 때문에 끊어진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놓아버린 상태라는 거라!

 

어리석다, 어리석지 않다 하는 걸 윗자(vijjā), 아윗자(Avijjā) 하고 얘기합니다. 아윗자(Avijjā)를 뭐라 그럽니까? '어리석다'하고 그럽니다. 윗자(vijjā)는 '어리석지 않다.'

윗자(vijjā)를 풀이해 놓은 걸 뭐라고 해놨습니까? '해석하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붙잡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갖다가 윗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밝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그걸 자기 나름대로 가치판단하고 해석하고 하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또 그걸 갖다가 자기 나름대로 공식화 환상화하게 되는 거라. 그걸 아윗자(vijjā)라 하고, 어리석다 하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보니까 '아! 어리석음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인식하는 문제에 따라서 갈려진다'하는 사실을 딱 안겁니다.

 

다시 한번 간추려 보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기능입니다. 아는 기능!

아는 기능인데 마음은 ''라고 하는 것으로 덮여져 있다는 거라. 뭔가 덮여져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각자마다 판단하는 것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마음으로 판단한 걸 우리는 '인식했다'고 그럽니다.

그럼 우리가 인식한 것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지 보편적인 진리는 아니다 하는 거라. 내가 인식한 것, 니가 인식한 것 그래서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런데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것들이 옳다고 여겨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 그래서 충돌이 생기는 거라.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게 되고, 그다음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거는 뭡니까?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거라. 그럴려면 가장 우선해야 되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것' '내가 알았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로부터 분리시켜 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번뇌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고, 내가 이해하고 있고, 그다음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 바른가 그른가 하는 것부터 먼저 정리를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 정리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게 아군으로 위장한 번뇌인지 아닌지조차도 모르게 된다는 거라. 대부분 여러분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번뇌이다 하고 생각을 해버리면 거의 맞습니다.

 

무수한 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윤회를 했는데, 그랬는데 윤회하는 그 작자를 찾았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작자가 누굽니까? 오온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 윤회하는 겁니다.

그런데 탁 찾고 보니까 그게 반복해서 이렇게 윤회해왔던 그 작자, 태어나고 괴로워하고 하는 그 원인을 찾았다는데, 그 원인이 뭡니까? 오온이라는 거라! 딱 찾고 보니까!

그래서 찾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놔버려야만, 그러니까 마음을 전환을 시켜야 됩니다. 전환시키고 보니까 "대들보는 무너지고, 서까래는 부서져버렸다." 하고 인제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깨달은 게송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대들보는 무너져버렸다." 마음의 번뇌, 더러워지는 번뇌들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번뇌를 가장한 몸과 마음의 오온에 대한 것들을, 오온의 환상을 내가 확연하게 알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거라. 번뇌가 무너져버렸다는 거라.

그다음에 "서까래는 부서져버렸다." 그렇게 번뇌에 물들지 않으니까 당연히 무명-어리석음에 물들지 않는 거라. 그래서 마음으로 일으키는 형성작용들, '나'라고 하는 개념들, 주관적인 개념들은 이미 떨어져나가버렸다는 거라. 그래서 "갈애, 갈망하는 것들은 멸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 생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누가 낳았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누가 생명을 낳았습니까?

엄마가 낳았어요? 갈애가 낳은 겁니다. 갈애가 여러분들을 낳은 겁니다. 엄마가 낳은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갈애가 생명을 낳게 하는 겁니다. 윤회하는 것이 누구냐는 거라. 그 갈애라는 거라. 갈애!

갈애·갈망을 가지기 때문에 생명이 되는 거고, 그게 윤회하는 거고!

 

갈애·갈망-딴하(tanhā)를 우리말로 딱 한마디로 얘기할 거 같으면 뭡니까?

만족하지 않는 겁니다! 만족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 자꾸 붙잡으려 하고 갈망하고 원하게 되는 거고. 뭐든지 만족해봐. 애가 십점 받아와도 '음! 나 만족해'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애하고 싸울 일도 없고 뭐 문제 될 거 있어? 내가 만족하는데. 공부 못하는 애가 뭐 만족을 안 하겠어? 엄마가 만족하면 자기도 만족하는 거지. 딴하(tanhā)라고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족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사실은 마음에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영양분이 필요하듯이, 마음에도 필요한 영양분들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팟사, 그다음 마노 쩨따나, 마노하고 쩨따나 같이 붙여서, '팟사'하고 '마노 쩨따나' 그다음에 '윈냐나' 이렇게 이 세 가지를 갖다가 보통 '마음이 영양분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팟사(phassa) 접촉하는 거 있죠? 모든 접촉하는 것들은, 공기 소리 빛 이런 거 전부 접촉입니다. 접촉하는 거 이런 것들은, 신체가 정보를 접하는 이런 것들, 모든 것들은 사실은 마음을 키워주고 마음을 더욱 증장시켜주는 영양분입니다. 접촉이 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마음은 훨씬 성장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마노와 쩨따나(māno ca cetanā), 의도하고 뭐 하고 싶다 하는 거 있죠? 그다음에 인식하고 싶다 하는 그런 것들, 그다음에 걸어가고 싶다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것도 마음에 영양분이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 윈냐나(viññāa), 윈냐나는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인식하는 것, 다음 개념을 위해서 축적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경험들 그런 것들이죠. 그런 것들은 마음을 키워주는 영양분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을 잘 알 거 같으면 번뇌를 극복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런데 번뇌 또한 항상 있는 건 아니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똑같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망상도 마찬가지고 번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그럼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은 뭡니까? 일어난 걸 관찰해버리면 끝나버립니다. 사라지는 걸 관찰해버리면 끝나버립니다. 번뇌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일어났을 때 그걸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려고 자꾸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 많이 했죠? 오소리 잡을려고 할 거 같으면 오소리 굴 앞에서 다른 문은 다 막고 지켜서 관찰하라.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거라. 번뇌도 어차피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오소리가 굴에 들어갔으면 나오게 돼있는 거라. 내가 일어난 걸, 들어간 걸 갖다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일어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 그 오소리가 들어간 건 알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나오는 걸 지키고 살피고 관찰할 거 같으면 잡을 수 있게 돼있다 하는 거라.

 

그런데 보통 나쁜 것들 나쁜 번뇌,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쉽게 알아차립니다. 화가 일어난다든지 욕심이 일어난다든지 누구 미워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금방 알아차리는데,

좋은 것들은 아군으로 위장해서 들어오는 번뇌는 잘 모릅니다.

그런 것들은 어떤 게 있습니까? 특히 수행할 때! 강한 빛을 경험했다든지, 경전을 보니까 그 의미가 확연하게 눈에 확 들어온다든지, 꿰뚫어 보듯이 이해하게 된다든지, 수행을 하다 보니까 삐띠(piti)가 일어나서 몸이 전율할 듯이 희열감이 일어난다든지, 안 그러면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고 고요해지는 그런 거라든지.

그러한 즐거움, 몸이 즐겁고 마음이 즐겁고 그래서 '아! 내가 오직 이 길만이 최고다' 그래서 강한 확신에 의해서 신심 같은 것들이 일어나지고, 그러죠? 그래서 더욱더 노력할려 그러고, 사띠가 점점 더 향상되는 것처럼 보여버리고,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고요하게 평온하게 나한테 와닿게 되고,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번뇌입니다. 번뇌! 그거 다 경험들 할려고 그러죠? 그런데 번뇌를 뭐 하러 경험할려고 그래? 그거 다 미세한 번뇌들입니다.

현상은, 자연적인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고요함도 즐거움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좋은 경험들을 할 때 '아! 이것은 아군으로 위장한 번뇌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밑에 스님이 뭐라고 적어놨습니까?

'중부경전 [모든 번뇌의 경. 삽바사와숫따(Sabbasava sutta)]에 "나는 단지 알아차리는 것, 시작과 끝을 보는 것만으로 번뇌는 멸한다고 말한다" 하는 구절이 있다.' 하고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알아차리는 것,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그것만 보는 것으로 인해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번뇌는 소멸해버린다는 겁니다. '나는 뭐라고 말한다. 나는 뭐다' 하고 얘기할 때, 부처님은 그거는 가정법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확신을 할 때, "이것이 진실이다" 하고 얘기할 때, 단언을 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진실이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번뇌는 소멸한다." 하고 진실이라고 확정해서 얘기를 해놨다 하는 것입니다.

 

그 밑에 보면, 번뇌와 대결하는 키(key) 그게 뭡니까?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 얘기 많이 들어봤죠? 전에 공통심소 할 때 요니소마나시까라 부분 한번 했죠!

요니소(yoniso) 뭡니까? 교재 한번 보십시오. 원인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것을 요니소라고 그럽니다. 어설프게 하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요 뿌리가 뭔가? 하는 것까지를 철저하게 잡아 캐는 것.

마나시까라(manasikāra) 알아차림, 주의를 기울인다 하는 그런 겁니다.

 

만약에 올바르게 이치가 맞다. 그 얘기하는 거 보니까 진짜 맞는 걸 얘기를 한다. 그럴 거 같으면 보통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번뇌는 일어나지 않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거 원래 저런 거 아닌데 하고 그것에 동의를 하지 않게 될 때 어떻게 돼? 번뇌는 일어나게 됩니다.

원인을 안 것이면 새로운 번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뿐아니라 일어난 번뇌도 사라져버립니다. 왜? 새롭게 일어난 마음으로 인해서 먼저 일어났던 번뇌들은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말하는 번뇌라고 하는 것을 일으키는 원인은, 통상적으로 보면 '안다' '본다'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는 것, 보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 그것이 내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철저하게 분석을 해보니까 '아니다'하고 판단되기 때문에, 그래서 번뇌들은 일어나는 겁니다.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관찰을 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걸 '요니소마나시까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객관적으로 조사·관찰하는 것, 적절하고 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들이 '요니소마나시까라' 입니다.

이건 보통 수다원에 이르면 바른 견해가 생겨납니다. 그 바른견해가 생겨나는 조건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이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을 부처님은 일곱 가지로써 얘기를 했습니다.

이 모든 번뇌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일곱 가지를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느 하나만 해가지고는 완전하게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한, 요즘 말로 하면 엄밀하게, 정밀하게 분석해놓은 청사진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뭡니까? 닷사나(dassana), 닷사나-견해!

견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 그런 것들을 관찰하고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바른 견해인지 아니면 틀린 견해인지 알고. 바른 견해를 가졌을 때 얻어지는 결과가 뭔지, 틀린 견해를 가졌을 때 얻는 결과가 뭔지 내가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바른 견해를 가질 거 같으면 조금 전에 얘기했죠? 수다원에서 일어나는 게 바른 견해라고. 그럼 수다원이 될 수 있는 거라. 그걸 인제 닷사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먼저 견해를 확립하라. 바른 견해를 확립하고.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인식한다는 것들은 대부분 바른 견해가 아니고 틀린 견해입니다. 왜? 번뇌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안다고, 본다고 하는 것들,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번뇌가 시작된다고 분명히 스님이 얘길 했잖습니까. 그럼 바른 견해를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이 먼저 번뇌를 제거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가 상와라(saṃvara), 번뇌가 들어오지 않게끔 보호벽을 치는 겁니다.

방어하는 것. 번뇌가 아무리 들어올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번뇌가 못 들어옵니다.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하면 방어벽을 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두 번째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빠띠세와나(paṭisevana)라고 해서 실천하는 것으로써!

여기에서 실천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본격적인 수행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는 것! 어떻게 하면 이 번뇌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여러분 번뇌 없이 살아갈 수 있죠? 정신없이 자기 일을 한번 해보세요. 번뇌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할 수는 없죠? 일상적으로. 그럼 어떤 식으로 실천을 해야 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다음에 아디와사나(adhivāsanā)라고 해서 집중하는 것! 집중하면 번뇌는 줄어들고, 번뇌는 침투하지 않습니다. 그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다음에 빠리왓자나(parivajjana)라 해서 피해버리는 것! 아, 이게 번뇌다 하고 알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게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데 왜 그거하고 더불어 동무하고 있을 거라. 피해버려야 되는 거지.

그다음에 위노다나(vinodana)라 해가지고 끊어버리는 것! 그게 인제 번뇌인 줄 아니까 어떻게 해? 끊어버리는 거라. 필요 없는 거니까 끊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바와나(bhāvanā)라 해서 끊임없는 수행의 방법!

 

여섯 번째까지는 실제적인 수행하고는 관계없이 점진적으로 번뇌를 확인해서 그것을 방어를 해나가고, 그래도 들어오는 거는 집중을 하고 피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다가 점점 더 번뇌에 물들지 않게 되니까, 아, 요런 게 번뇌다 할 거 같으면 다신 일어나지 않게끔 자꾸 손을 놓아버리는 거라.

그리해도 완전히 놓아지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다가 끊임없이 수행을 해서 반복을 해서 완전하게 없애버리도록 하는 것 이런 일곱 가지 방법을 부처님이 제시를 해놔놨습니다.

다음 시간에 닷사나(dassana) 관찰하는 장부터 시작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