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0.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1 (20071220)

담마마-마까 2020. 1. 17. 18:58

https://youtu.be/FkYpr3x8P0g

10.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1 (20071220)

 

『위빳사나 수행입문』교재_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6.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오늘 할 부분 한번 봅시다.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이해, 분명한 알아차림 부분입니다.

지금 스님이 쭉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이 부분만 해도 지금 최대한 줄이고 있는 중인데도 한 삼사십 페이지 넘어 될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전부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꼭 사면초가에 있는 경우,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육해공군 전체다 해서 공격받고 있는 게 번뇌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모든 것들, 번뇌가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나중에 스님 말 들어보니까 그게 번뇌였구나 하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들도 허다할 겁니다. 그마만큼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페이지수를 좀 많이 해가지고 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 방식으로 한 것은 아직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아! 또 주의 깊게 들어라 하니까 바짝 땡겨가지고 그러는데, 잘 듣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봅시다. 프린트물. '번뇌의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자.'

보통 감정이라고 하는 것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들 그걸 불교 용어로 할 거 같으면 번뇌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 이런 것들을 번뇌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뭡니까? 성내고 질투하고 게으름 피우고 들뜨고 후회하고 하는 것들, 그런 감정들을 통틀어 가지고 번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들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됩니까? 제어할 수 있습니까? 한참 성났을 때 알아차린다, '화가 일어남' '화가 일어남' '화가 일어남' 됩니까? 잘 안되죠. 사띠를 해도 안 되는데 안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다 하고 나서, 성낸 거 가라앉고 나서 아이고! 잘못했구나 하고 후회를 하고, 그것도 어쨌든 그것도 번뇌란 말이라.

 

번뇌라고 하는 것들은 통상적으로 불교 용어로써 어떻게 쓰냐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쓸 때 '아! 번뇌구나' 하고 얘기합니다.

일어나면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통하지 않는다는 거라. 아무리 할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하는 거라. 질투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화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되고, 후회를 해도 그것도 나중에 끝나고 나서 또 잘못된 걸 알게 되고. 이렇게 감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들은 끝나고 나서 아! 그게 잘못됐구나 하고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이 통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칭해서 번뇌라고 합니다.

 

여기서 번뇌라고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감정들은 어떤 감정들입니까? 나쁜 감정, 나쁜 영향을 미치는 감정들입니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감정들도 틀림없이 있죠?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뭡니까? 멧따라고 하는 자애,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이런 사무량심 이런 거는 좋은 감정입니다. 그런 것들은 번뇌라고 안 하죠? 그거는 한량없는 마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쁜 감정들을 번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투하고 미워하고 게으름피우고 이렇게 살아가면 행복합니까? 행복하지는 않죠? 틀림없이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번뇌의 기본적인 기능은 사람의 행복이나 평온함을 부수는 일이다. 그래서 괴로움을 늘리는 일을 하는 것이 번뇌이다.'

번뇌의 기능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야됩니다.

 

망상할 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망상을 막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차적으로 밖에 있는 외부세계들을 차단을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망상을 못합니다. 아무리 저 앞에 대상을 보고 있어도 망상을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 대상 안 보이죠? 그거를 차단해야 만이 망상을 합니다. 외부의 세계들을 철저하게 차단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망상을 하게 됩니다. 분노를 일으킬 때도 마찬가지고 욕심을 부릴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밖의 것들을 차단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 번뇌라고 하는 거는!

예를 들어서 눈을 한번 감아보십시오. 눈을 인위적으로 차단을 했다, 잠깐 동안이라도 차단을 했다가 눈을 뜨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밝은데 비춰주면 눈이 따갑다든지, 눈의 시력이 밖에 있는 대상이 처음엔 잘 안 보입니다. 한참 적응하기 전까지는.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우리들의 일상적인 것들을 갖다가 퇴화시켜버리는 거하고 마찬가지다 하는 거라.

이게 습관화돼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굉장히 나쁜 영향들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반응들을 하게 됩니다. 뭔 대상을 보고 화가 일어난다 하면 처음부터 즉각적으로 반응하진 않았을 거 아니라. 그렇죠?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그러한 비슷한 유형들만 보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거라. 통상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러냐면 그마만큼 그 기능들을 스스로 퇴화시켜버리는 경우가 된다 하는 거라. 안 쓰면 어떻게 됩니까? 퇴화돼버립니다. 이성적인 것들을 자꾸 없애버리고 감정적인 것들을 자꾸 계발시켜 놓으니까 이게 발란스가 어느 정도 맞아야 뭐가 좀 콘트롤 돼나갈 건데 콘트롤 되는 게 전혀 없다는 거라. 그대로 그냥 튀어나와 버린다는 거라.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을 때 그렇게 힘드는 줄 알면서, 번뇌라고 하는 것들은 쉽게 말하면 가려버리는 겁니다. 가려버리는 상태를 계속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왔다고 할 거 같으면 얼마나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

그래서 이 번뇌를 뭐라고 하느냐면 수행자들은 '암덩어리다' 하고 얘기합니다. 암덩어리! 그거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이놈이 온데를 다 퍼져나가서 결국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암덩어리라고 생각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뭘 먹으면 먹는 걸 맛을 잘 모른다. 아니면 이렇게 냄새를 맡는데 냄새 맡는 걸 다른 사람들보다도 잘 못 맡는다. 이런 사람들이 좀 있죠? 그런 감각기능들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 물론 그 감각기능만 떨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큰 문제는 안 됩니다. 하나의 감각기능이 떨어지면 다른 것들도 더불어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잘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 기능을 발달을 못 시켰기 때문에 떨어진 건지, 아니면 그 기능이 애초부터 좀 잘못돼가지고 제 기능을 못서 다른 사람들보다 기능이 떨어지는 건지.

만약에 전자의 경우라고 할 거 같으면 그 기능을 발달을 못 시켜가지고 기능이 떨어졌다고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항상 번뇌에 의해서 휩싸여져 와가지고 그러한 기능이 떨어졌다고 판단을 내려도 괜찮습니다.

 

왜? 번뇌라고 하는 기능은 그렇게 감각기능들을 전부 감퇴시키는 역할들을 해줍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얼굴이 아무리 화장을 해도 화장발이 잘 안 먹힌다. 어떨 때 화장발이 잘 안 먹힙니까? 잠을 못 잤다든지, 안 그러면 성질 버럭버럭 냈다든지, 감정이 격해졌을 때 화장발이 잘 안 먹히는 겁니다. 잘 자고 일어났는데 화장발이 잘 안 먹힙니까? 그렇진 않죠! 나는 그런 구르므도 안 바르니까 그런 걸 잘 몰라도 그거는 상식적인 부분이라. 누구 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쌌대. 화장발 안 먹히니 어쩌니.

그것뿐 아니라 여기는 부부가 많으니까 툭 하면 부부가 싸운다, 감정적인 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하여튼 두 사람은 둘이만 만났다 하면 싸운다는 거라. 거 왜 그러는 거라? 만날 번뇌에 그렇게 휩싸여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아니면 툭하면 내가 병이 잘 든다, 잔병치레를 많이 한다.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니면 우리 애들은 내 말은 죽어라고 안 듣는다. 똑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기능들이 퇴화돼있고 그런 번뇌에 휩싸여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지는 겁니다.

 

나에게 어두운 에너지가 많이 있는가, 밝은 에너지가 많이 있는가 하는 것들은 잘 판단해 봐야 됩니다.

탐진치라고 하는 어두운 에너지가 많을 거 같으면 항상 번뇌에 많이 휩싸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불교도라고 할 거 같으면 더 무서워해야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어두운 마음이나 더러운 에너지로 자기 자신이 죽어가는 것들은 버려둘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번뇌에 인해서 죽어가는 것들을!

 

부처님이 참 이런 것들은 냉정하게 비판을 합니다.

참 잘못됐다 하면서 세세하게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한번 경전을 한번 잘 보십시오. 누가 죽었다. "부처님! 부처님 우리 애 죽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부처님이 뭐라 그럽니까? 딱 한마디로 끝내버립니다. "누구든지 죽는다. 이놈아. 뭘 그걸 가지고 슬퍼하느냐. 니 과거 생에부터 먼 옛날부터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끊임없이 죽음을 봐왔고 니가 또 죽어왔고, 그런데 뭐 새삼스럽다고 그 죽음을 가지고 슬피 울고 질질 짜쌌고 난리치느냐?"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그 말이라. 딱 그 한마디로 끝내버립니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해야 되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이러한 번뇌에 물드는 것들을 갖다가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 불교도입니다.

그래서 '더러워진 마음으로 번뇌에 물든 마음으로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줄 더 내려가서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번뇌가 사람의 행위에 맞추어서 아군으로 위장한다는 기능이다.'

번뇌가 우리들을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아군은 내편입니다. 내 편인 줄 아니까 당연히 그거하고는 싸우지를 않는단 말이라. 그러니까 당연히 그 번뇌에 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엄마가 옆에서 "야! 오늘 한 시간 동안 영어공부해" 하고 공부를 시킵니다. 한 시간 동안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 사십오 분 정도 지났다. 그런데 삼촌이 와서 "야! 내하고 같이 놀러가자" 이럴 거 같으면 애가 어떻게 합니까? 놀러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단 말이라. 그런데 엄마는 "공부해" 이러고 탁 윽박질르면 애 마음은 어떻겠어? 삼촌이 이뻐 보이겠어? 엄마가 이뻐 보이겠어? 삼촌이 이뻐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삼촌하고 같이 갈까?

'엄마는 내 적군이다' 하고 판단을 합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위장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 고마 핑계거리만 되면 삼촌 따라서 나가서 놀아버리는 거라. 공부 못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번뇌라고 하는 기능입니다. 언제라도 아군으로써 위장을 해서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번뇌에 쉽게 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번뇌의 역할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한 아이는 어떻게 됩니까? 성적 당연히 떨어지게 돼 있죠?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거라.

번뇌의 역할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내가 예뻐지고 싶은데 예뻐지지 않는다.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마음에 나쁜 에너지들, 나쁜 감정들이 많았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번뇌의 역할은 딱 정해져 있으니까.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밑에 '애인이 찾아왔을 때 청소 안 하고 있다가 몇 개월 만에 용기 내어 청소하게 하는 것.'

이 용기도 어떻게 보면 '위장된 아군'입니다. 적군인데 욕망이라는 것이 위장을 해서 온 것입니다. 잘 살고 싶다는 희망! 희망은 나쁜 게 아닌데 그 생각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욕구 욕망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또 잘될 때는 잘되는 대로 더 하고 싶고, 안될 때는 또 게을러지고 싶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일으키고 이런 결과들을 낳기 때문에 그걸 위장된 아군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뜻 이 말을 이해를 못 할 겁니다.

잘살기 위해서 필요한 정신력은 욕구하고 다른 겁니다.

욕구하고는 어떤 면에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 저 사람에 대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뭐지?' 하고 생각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마음 상태로 인해서 뭔가를 해나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욕구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들을 한번 잘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장사를 못 하는 사람들은 내가 백 원을 가지고 인테리어를 합니다. 내가 돈을 얼마 벌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인테리어를 열심히 해놓습니다. 그런데 백 원어치 인테리어를 해놔도 일 년이 가도 그 백 원 원전을 못 버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타당성 조사를 안 했거든. 다른 사람들이 이 음식을 여기서 얼마나 많이 먹는지, 아니면 유동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이런 것들을 전부 종합해서 판단 안 하고, 무조건 많이 벌겠다는 생각 때문에 잘해놓으면, 여기 와서 사람들이 먹을거란 욕심만 가득했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어떨 때는 잘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욕구가 생겨나는 거라.

 

그런 것은 욕구라 그러는 것이지, 잘살기 위해서 필요한 거는 뭐냐 하면 정신력입니다. 마음입니다.

장사가 잘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익되게 할 것이냐, 아니면 이런 여러 가지 조사들을 해가지고 그에 맞게끔 할 거 같으면 백 원을 들이지 않고, 만약에 여기는 십 원의 인테리어를 하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도록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준다고 할 거 같으면 사람들이 자꾸 오게 돼있다는 거라. 돈을 벌게 돼있다는 거라. 그거는 욕구하고는 다른 겁니다.

 

인생에서 참 많은 문제점들 하고 부딪칩니다. 번뇌하고 싸우게 됩니다.

그걸 파도를 잘 넘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이 뭐냐 할 것 같으면 이성적일 것! 그다음에 침착할 것!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그럽니다.

아울러서 꼭 하나 불교도들은 더욱 필요한 것들이 뭐냐 하면 남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들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번뇌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돈을 벌고 싶다 할 거 같으면 돈을 벌게끔 하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나중에 보면 쫄딱 망하게 한다든지, 건강하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보니까 반대 방향으로 더 병들게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번뇌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 번뇌라고 하는 것의 목적은 뭐냐면 생사람 잡아버리는 경웁니다. 사람을 갖다가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번뇌입니다. 이걸 잘 이해할 것 같으면 번뇌를 틀림없이 물리쳐나가고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해서 거기 올가미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보통 보면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 영양소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들 말하듯 공기도 필요할 거고, 음식물들도 필요할 거고, 뭐도 필요할 거고, 불교에서 네 가지로 얘기들을 한 부분이 있지만은 어쨌든 간에 그냥 단편적으로 얘기를 해봅시다.

몸이 필요한 거는 음식물이란 말입니다. 음식물이 있어야 이 몸을 유지를 합니다. 그런데 번뇌도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에 마음에 영양분이 가득할 거 같으면 번뇌를 조금 더 늦출 수도 있고 피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서 필요한 영양소들도 같이 있습니다.

그 영양소를, 음식을 뭐라 그래요? '아하라(āhāra)'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먼저 '팟사 아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팟사(phassa) 뭡니까? 접촉하는 거죠! 신체와 마음이 끊임없이 정보를 접하는 기능입니다. 어떤 것들이 접촉하는 겁니까? 소리도 접하고, 빛도 접하고, 공기도 접하고 뭐 이런 여러 가지들을 접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다 영양소입니다. 마음의 영양소입니다.

그다음에 뭐가 또 마음에서 영양소가 되느냐면 '마노와 쩨따나' '마노 짜 쩨따나 아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노(māno)는 뭡니까? 의식이죠! 쩨따나(cetanā)는 의도! 뭐 하고 싶다 한다든지, 뭐 좀 알고 싶다 하는 그런 마음들, 이런 것들도 영양분입니다. 그러니까 아! 내가 뭐 걸어가고 싶다. 아니면 뭐 먹고 싶다. 아니면 살아가고 싶다, 뭐 어떻게 하고 싶다 하는 그런 것들, 요런 것들을 보통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뭐가 영양소냐 하면, '윈냐나(viññāa)'입니다. '윈냐나 아하라' 해가지고 인식하는 것! 경험하고 하는 이런 것들. 그다음에 명확하게 내가 알게 되는 것. 지식으로써 알게 되든지 이런 것들을 얘길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마음의 영양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양소는 참 많이 있죠? 여러분들 주위에! 여기 광안리 바닷가에 있는 물고기들은 영양소가 뭡니까? 바닷물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닷물로 인해서 모든 게 생겨나갑니다. 저게 영양소입니다. 천지에 널려져 있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이런 영양소는 천지에 널려있습니다. 안 널려있는 데가 없습니다.

이게 마음의 기능들입니다.

 

그래서 이 번뇌로 인해서 불행하게 되고 또 행복하게 되는 것들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번뇌가 만약에 들어온다고 할 거 같으면 들어오는 걸 갖다가 잘 관찰할 거 같으면 쉽게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도둑놈이 이 주위에 많이 우글거린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항상 도둑놈이 안 들어오게끔 지켜볼 거 같으면 도둑놈이 여기 못 들어옵니다. 문단속 잘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런데 그걸 못하기 때문에 도둑놈이 집에와서 털어가는 거라.

 

그와 마찬가집니다. 이 번뇌가 불행이 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번뇌를 없앨려고 자꾸 노력을 하면 안 됩니다. 번뇌는 없앤다고 해서 없애지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면 됩니다. 그거 외에 다른 거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도둑놈이 오는가 안 오는가 관찰하고 알아차리듯이 몸과 마음에서 알아차리면 그 번뇌는 나에게 관계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번뇌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군이 되어서 나에게 들어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게 어떤 겁니까? 좋은 경험 했을 때, 그게 진짠 줄 알고, 좋은 건 줄 알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여러분들 수행할 때 어떤 경험들이 있습니까?

'아! 부처님 봤다. 빛을 봤다.' 가장 많이 하는 것들이죠? 그래서 수행하다가 흥분이 돼가지고 몸이 떨리고 막 기쁨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 아니면 수행 잘 돼나가고 있는데 뭔가 사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된다. 별로 하지도 못하면서. 뭔가 고요하고 안정되고 하면서 뭐 삼매에 빠지는 것 같이 이렇게 느낌이 든다. 하여튼 그런 것들이 전부 아군으로 둔갑한 겁니다.

그걸 열 가지를 부처님이 얘기를 해놨습니다.

이런 것들이 아군으로 위장돼가지고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사실은 조심해야 됩니다.

이 장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가지고 전체를 다 통틀어서 얘기를 할 겁니다.

 

그 밑에 '중부경전, 모든 번뇌의 경(Sabbasava sutta)에 보면 "나는 단지 알아차리는 것, 시작과 끝을 보는 것만으로도 번뇌는 소멸할 수 있다. 소멸한다고 말한다."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뭐 한다. 나는 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나는 고하노라'하고 이 구절을 넣는 것이거든요. 쉽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판할 사람은 비판하고, 아니면 확인할 사람은 확인해가지고 그게 맞을 거 같으면 받아들이라. 당당하게 얘기할 때 '나는 뭐라고 얘기한다' 하고 경전에는 분명히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은 진실이다" 할 때 부처님이 쓰는 어투입니다.

 

그게 뭡니까? 번뇌는 단지 알아차리는 것으로써 소멸한다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딱 정리하면! "번뇌를 다스리는 것은 알아차림으로써 다스려나가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만이 진실이다." 하고 부처님이 단언을 내리는 겁니다.

 

그 밑에, '이런 번뇌와 대결할 때의 키(key)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라고 하는 겁니다.

요니소는 뭡니까? 마나시까라는 저번에 한번 아비담마 할 때 했죠! 그때 요니소 마나시까라 부분을 얘기를 했을 겁니다.

'요니소(yoniso)' 라는 것은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뜻입니다. 원인부터 철저하게 검증한다 하는 겁니다. 누가 죽었다, 저놈이 왜 죽었을까? 뭔 원인으로 죽었는가? 뭘 잘못 먹었다, 그걸 니가 왜 그 음식을 어디서 사왔느냐, 꼭 수사관이 수사를 하듯이 이렇게 다 하는 것을 쉽게 말하면 요니소라고 그럽니다. 철저하게 검증한다, 분석하고 하는 기능들 이런 것들을 요니소라고 그럽니다.

 

'마나시까라(manasikāra)' 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겁니까? 공통심소죠! 접촉, 느낌, 지각, 의지, 심경일성, 생명력 이런 거와 마찬가지로 일곱 가지 공통심소죠! 마음이 일어났다 하면 함께 일어나는 것! 그러니까 이것을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뭔가 생각한다. 아니면 듣고 있다. 이 마나시까라가 분명히 있다는 얘기죠! 공통심소니까! 그런 것들입니다.

이 마나시까라의 뜻이 '주의를 기울인다.' "주목!" 하고 할 때 그 주목하고 똑같은 건 아니고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계속적으로 남아있다. 지금 여러분들이 스님 법문을 듣고 있죠? 그 법문 듣는 걸 이해하게 된 상황, 뭔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이럴 땐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지속적으로 대상에 주목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마나시까라가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사띠만 있을 때는 절대 이해를 못 하죠!

주목하는 힘이 이 마나시까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란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조사 관찰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적절하고 현명하게 기억하고 마음새기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에 한사람이 교실에서 총을 난사해가 사람을 쏴 죽여버렸단 말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그랬죠. 그런데 그거 분석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막 신문지상에 여러 가지 나옵니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총을 쐈느냐 해가지고, 여자친구 때문에 그랬다, 아니면 집에 무슨 문제가 있다, 여러 가지 분석해가지고 막 그렇게 하죠.

그와 마찬가집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 라고 하는 것은 원인부터 결과까지를 뿌리채 송두리채 전체를 고구마를 엮듯이 다 드러내는 경우들을 얘기합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번뇌를 객관적으로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고 본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번뇌를 알지 않을 거 같으면 뿌리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 요니소마나시까라는 수다원에 이르게 되면 바른 견해가 생기도록 하는 것 중에 하나에 들어간다고 얘기합니다. 적어도 이 마나시까라만 있어도 바른 견해가 항상 일어나게 되게끔 돼있습니다.

 

그 밑에 부분부터 이제는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을 차례대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앞뒤는 다 똑같죠? 아사와(asava)하고 빠하땁바(pahatabba)는 똑같습니다. 가운데 있는 거 닷사나(dassana), 상와라(saṃvara) 하는 이런 부분들을 일곱 가지로 쭉 얘기를 해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닷사나(dassana) 관찰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 닷사나는 이해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해하는 장부터 설명을 다시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