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9.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느낌3 (20071206)

담마마-마까 2020. 1. 17. 13:40

https://youtu.be/CQjrqoefvUI

9.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느낌3 (20071206)

 

오늘 할 부분 한번 봅시다.

어제까지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즐거운 느낌 부분, 즐거운 느낌은 사실은 그렇게 많이 할 것은 없습니다.

 

경행의 예를 들어봅시다.

경행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경행을 한다 하면, 경행을 쭉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경행 하는 사람들의 패턴이 어떻느냐 하면, 경행을 하면서 누가 주변에 부딪친다 할 거 같으면 씨익 웃기도 하고, 아니면 경행을 하면서 한쪽으로만 계속 왔다갔다 해야 되는데 내 좋아하는 데로 가. 요리 갔다가 또 요렇게 했다가 또 오늘 같은 경우는 카페트가 뜨거운 게 깔려있으니까 뜨거운 게 좋거든. 요기서만 왔다갔다 왔다갔다. 이리 안 나와 인제. 그러죠?

경행대는 여러분들이 죽을 자리입니다. '짱까마'라고 그럽니다.

짱까마(caṅkama)!

 

스님이 인도 가서 참 충격적인 부분이 언제였느냐 하면 그 부처님의 경행대를 보고 그랬습니다. 경행대가 이렇게 좌선하는 데가 있으면 앞으로 일직선으로 딱 15m정도 요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 딱 하나 다닐 정도.

다른 남방 불교국가에 가더라도 경행대는 깨끗합니다. 깨끗할 뿐아니라 그 경행대를 보면 서슬이 퍼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그 경행대를 보면서 아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이 경행대 위에서 경행을 하면서 발이 까지고 피가 나도록 저렇게 노력을 해가지고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경행대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다가 거기서 까무러칠 자리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짱까마입니다. 짱까마(caṅkama)! 경행대를 그냥 빨리어로 짱까마라고 붙여놓은 줄 아십니까?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 따라서 수행들을 하는 거라? 무슨 수행을 할려고 그래? 싫은 것들은 싫은 느낌대로 피할라고 난리고, 좋은 느낌은 좋은 느낌대로 더 따를려고 난리고, 무슨 수행을 한다고들 그러는 거라.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이 괴로운 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려나가라 하고 그럽니다. 괴로운 건데 그걸 뭘 좋다고 집착할게 있느냐는 거라.

 

보통 즐거움이라고 하면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는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또 하고 싶은 거하고, 또 오늘 지암님하고 마야님 같이 파티 있어서 파티 가서 즐겁게 놀고, 그렇게 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또 다른 하나는 뭐냐 하면 불교적인 것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기다리는 것들입니다. 수행을 하다 보니까 일어나는 기쁨이라든지 즐거움이라든지 편안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분명히 두 개는 다른 부분인데 두 개 다 극복을 해야 될 부분입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즐거움은 극복하기가 좀 수월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즐거움을 누릴려 해도 돈 떨어지면 못하는 것들이라. 마음 한번 바꿔버리면 그만인데, 그런데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참 잘 안 바뀌어집니다. 그것을 뭘 체험을 했다고 착각을 하고 깨달았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만심이 높아지고, 또 오히려 더 즐거운 걸 더 탐닉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에 했던 그거, 선정 한 번만 더 해봤으면, 그 즐거움 한 번 더 누려봤으면...' 괴로운 느낌과 마찬가지로 이 즐거운 느낌도 똑같이 잠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그런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물결에 비유가 됩니다. 여기 앞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틀림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일어났으면 또 사라지고 일어났으면 또 사라지고 잔물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느낌을 알아차려라고 하는 것은 그 기복을 없애라 하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팽팽한 수평선과 같이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러니 꼭 감정적으로 즐거운 느낌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행에서 일어나는 기쁨이나 즐거움들도 반드시 팽팽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잔물결 이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가 됩니다.

 

평온함과 침착함이 있어야 만이 감정의 잔물결들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평온함과 침착함마저도 나중에는 다 떨쳐버려야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수행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이나 기쁨의 느낌을 집착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바른 수행을 하는 경우가 아니게 됩니다.

 

그 교재를 한번 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가 열심히 정진하여 고통의 느낌을 극복하여 더욱 정진해나가면, 고통스런 느낌들은 알아차리자마자 사라져버리고, 그로 인해서 몸과 마음에서 기쁨과 즐거움이나 고요함이라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쾌적해지고 유연해지고 적절해지게 된다.'

이게 수행에서 얻어지는 즐거운 느낌들입니다. 즐거움을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느낄 겁니다. 기쁨을 느끼든, 느끼면서 그 느낌을 알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탐욕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해탈을 얻지 못하게 돼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나 즐거운 느낌도 변하는 것은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죠! 그럼 변하는 것에 뭘 그리 집착할 게 있어?

 

여기 초가 타고 있다. 초 심지가 있고 파라핀이 있고 또 이렇게 불이 있다.

파라핀이나 초심지는 생멸하는 겁니다. 저거는 다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저 불만큼은 영원하라 이럴 거 같으면 저게 영원할 수 있습니까? 초심지나 파라핀의 조건이 없어지면 불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꼈다 해서 그 기쁨이나 즐거움이 영원하라 하면 그게 그대로 있을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 조건이 없는데! 내가 수행을 해나가서 이정도 좋은 상태를 만들고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도 조건 따라서 일어난 건데, 그 조건이 똑같은 조건이 없는데 어떻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바라냐는 거라. 초심지나 파라핀이 없어도 저 등불은 영원하라 하는 거하고 뭐가 다를 게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즐거움을 자꾸 집착한다고 하는 것은 그 즐거움의 잠재적인 성향들, 고질적인 성향들을 자꾸 드러내게끔 돼있습니다. 그것이 더 축적되어서 견고하게 오히려 '나'라고 하는 것을 더 만들어나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느낌은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즐거운 느낌은 우리들에게 뭔가 가시를 줍니다. 맛있는 걸 준다는 말입니다. 달콤한 걸,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걸. 거기에 빠져놓으면 이 느낌들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거라. 괴로운 거는 아! 뜨겁다 하면 피할 수가 있는데 즐거운 거는 그래서 더더구나 조심하고 조심해야 되는 것이다 하는 거라.

 

수행이 무르익으면서 기쁨이나 즐거움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바로 그래서 그렇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들이 왜 장애가 되겠어요? 집착하지 않을 거 같으면 장애는 안 되지. 그런데 집착을 하면서 잠재적인 성향들로 발전되니까 그게 장애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느낌이 변해가는 것들을 모르고 이 느낌에 대해서, 특히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벗어나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이때 우리는 이 느낌에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이 느낌들은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즐거운 느낌은.

똑같이 접촉에 인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접촉에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 자체만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 느낌들은 발전해나가지를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 느낌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이 즐거운 느낌이 기쁨이나 즐거움이라고 하는 달콤한 유혹을 하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사또 삼빠자노(sato sampajāno)'라고 그럽니다.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분명히 알아차려나가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라.' 사띠를 가지고.

사띠-알아차림으로써, 삼빠자노-분명하게 알아차려라.

사띠(sati)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삼빠자나(sampajāna)가 같이 겸해지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띠 사띠가 계속적으로 연결이 되면 삼빠자나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사띠가 삼빠자나로 연결될려면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면, 분명하게 정지가 있고 나서 또 다른 새로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된다는 겁니다.

즐거움이나 기쁨도 연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기쁨의 느낌이나 즐거움의 느낌도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연속하는 것뿐입니다. 그 사실을 '사또 삼빠자노'라고 그럽니다.

'사띠로써 삼빠자나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다 보면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나서 한 시간 두 시간 자연스럽게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수행이 저절로 되는 것 같습니다.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알아차려지고,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딱 정확하게 대상에 마음이 맞아 들어가집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것이 이 삐띠(pīti)라고 하는 거라.

 

책에 보십시오. '이 삐띠(pīti)-기쁨으로 인해서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라고 하는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즐기게 된다. 이 즐거운 느낌에 머물러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끔 되어있다.'

이럴 때 반드시 이러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는 사띠 사띠만 계속적으로 연결되어나가다 보면 굉장히 잘되어나가는 것 같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삼빠자나가 계발되지 않으면 그 속에서 무상한 걸 잘 모릅니다. 대상은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대상은 알아차리는 데 사띠와 삼빠자나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몸의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그로 인해서 마음의 현상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 또 다른 현상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걸 갖다가 알게 되는 것이 삼빠자나라는 거라. 정지하는 것이 있다, 멈추는 것이 있다 하는 거라.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 할 때 스님이 가끔씩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어남'이 그냥 한 번에 쭉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일어남'으로써 연결된다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삼빠자나로써 보는 것입니다. 사띠 사띠로 와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어남'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사띠만으로 볼 거 같으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정지하는 부분을 모릅니다.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는 압니다. 정지하는 부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일정 부분에서는 앞에 일어나는 부분을 모르고 뒤에 사라지는 부분만 알게 되기도 하고. 자동적으로 돼는 것 같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정지하는 부분은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수카웨다나를 명확하게 잡아나갈려고 할 거 같으면 하나의 대상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을 해야 됩니다.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이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하는 사실을 이해를 할 수 있고, 그것을 사띠와 삼빠자나로써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밑에 내려가 보면 '육체적인 편안함이 뚜렷하면 꿰뚫어 보듯이 주의 깊게 육체적인 편안함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각각 따로따로 알아차림 하며 관찰해야 됩니다.'

이게 뭐냐면 편안함과 편안함 사이에 '멈춤'이 있다는 것을 알아라 하는 겁니다.

하나의 편안한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후에 또 다른 새로운 편안한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속되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런데 그걸 잘 모릅니다. 어렴풋하게 알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스님 말을 사띠로써만 들을 거 같으면 단음절 단음절로써 들려버립니다. 그 의미파악은 전혀 안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의미파악은 안 되기 때문에 이 내용을 모른다는 겁니다. 단지 그것이 단락 단락으로 들려서 연속해서 이렇게 들립니다. 분명히 다르고 다른 것으로써 들리기는 들립니다.

그런데 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은 이 사띠라고 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기능들을 어느 정도는 합니다. 연속되는 것들이 이어졌다가 사라지고 이어졌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원인·결과로써 이어주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삼빠자나로써 말을 들을 거 같으면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틀림없이 끊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것들이 연속되는 것으로는 알지만 그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사띠로써만 알아차림 할 거 같으면, 물론 사띠라는 개념 정립하는 것들도 문제인데, 사띠를 그냥 일반적으로 위빳사나라고 통칭해서 얘기할 때는 이 속에는 삼빠자나가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크게 문제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띠와 삼빠자나로 나누었을 때는 그런 차이가 분명하게 난다는 겁니다.

 

수행이 잘돼나가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수행에서 무상·고·무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수행은 잘되는데 왜 그 삼법인이 드러나지지 않느냐는 거라. 분명히 대상은 놓치지 않았는데!

 

(수행자 질문)

한순간이라도 완벽하게 볼 거 같으면 이것이 드러나집니다. 그게 사띠로써 만 봤을 경우에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알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분명히 봤기는 봤는데 그걸 내가 인식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명확하게.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우리 생각들이나 행동들이나 이런 것들은 연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은 그걸 연속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럼 이걸 어떤 식으로 볼 것이냐 하는 거라. 내가! 그 차이가 사띠와 삼빠자나의 차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예! 완전하게 보면 그렇게 되는데 보통 그렇게 잘 안 봐집니다. 대상만 자꾸 알아차려 나갈려고 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이 위빳사나가 다른 거하고 좀 차이점이 뭐냐 하면, 숙고하는 부분들이 없을 거 같으면 나중에 지나서 그게 뭔지를 갖다가 나중에야 압니다. 수행을 하면서는 직접적으로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능들을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사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 밑으로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연속하지 않고 새로운 일어남과 새로운 사라짐이 이어지는 것뿐이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인제는 대상을 볼 때 이 대상이 엄청 빨리 알아집니다. 대상 자체를!

대상을 관찰만 하면 대상은 즉각적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만 계속 연속해서 와지게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즐거운 느낌은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와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스님이 즐거운 느낌은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봐라 하고 하는 것이 이런 이유들입니다.

그러니까 순차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이렇게 이렇게 바뀌어져 나가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랬을 때만이 그 느낌,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떨어뜨려 버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즐거운 것들은 집착 안 해버리면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들은 참 떨어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그 즐거운 느낌을 뿌리까지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뿌리가 뭡니까? 고통스럽게 다가와집니다. 그 즐거운 느낌들이! 기쁨이든 즐거움이든 몸을 주체하지 못해가지고 막 혼자서 춤을 추더라도 그 느낌들도 고통스럽게 다가와지게 되는 거라. 자기가 좋아가지고 스스로 춤을 추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거라. 그 상태로까지 즐거운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만이 그 즐거운 느낌을 다스려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밑에 마지막에 '삼매-사마디(samādhi)를 너무 강조할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적어놨습니다. 집중하는 것!

자연스럽게 여러분들에게 다가와지는 것들입니다.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런 강한 집중으로 대상에 붙잡혀 있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거는 자연스럽게 길러지게 돼있습니다. 순간순간 집중해서 순간순간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생각을 해야지 집중력만 키워줘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경행을 할 때도 보면 '나아감' 하면서 한참 동안 이렇게 서 있습니다. 위에서. 지금 그거 집중력 테스트하고 있는 거라? 뭐 하러 그러고 있는 거라? 대상을 왜 인위적으로 그렇게 가만히 멈춰 놔놓고 있어? 내가 뭐 자빠지나 안 자빠지나 그걸 테스트하려고 지금 하는 거라? (수행자 대답)

그렇게 하면 좋은데 이게 움직이면서 변하는 것들을 봐오면 참 좋은데, 천천히라도 움직이면 좋은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다가 딱 멈춰요. 멈춰가지고 이쪽 발의 느낌들이나 이쪽 발의 느낌들을 번갈아서 알아차릴 것 같으면 또 경우가 달라지는데, 그게 지금 얼마나 있는가 해서 가만히들 있어요.

그게 경행하는 것들을 보면 표가 납니다. 이 사람이 느낌을 진짜 관찰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집중력을 키울려고 하고 있는 건지 표가 납니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안됩니다. 그건!

 

그 집중력은 자연스럽게 키워집니다. 물론 내가 얼마만큼 집중력이 키워졌는가 테스트 할려면 가끔씩 해볼 수는 있습니다. 해볼 수는 있어도, 그게 경행의 일상적인 행동이 돼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크게 오산하고 있는 겁니다.

꼭 좌선 수행 할 때 호흡을 길게 들이쉬어가지고 멈춰가지고 얼마나 오래 참고 있나 하고 시험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가 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은 취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오히려 빨리 걷더라도 낱낱이 자꾸 알아차릴려고 노력들을 하기 바랍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찰나찰나에 집중하는 것들만 필요하지 깊이 있게 집중하는 것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제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번뇌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방법들입니다. 번뇌를 알아차리는 방법은 용량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한두 시간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당분간 아마 번뇌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방법 가지고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