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3. 닷사나 (20080124)
37조도품은 여기 목요일 저녁 수행반들에는 계속 프린트해 주겠습니다. 그거는 수행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니까, 안 받은 사람도 있죠? 목요일 오후에 하는 건데, 그거는 저녁 시간에 하는 분들도 필요하니까 그거는 해드리도록 하고, 물론 그 시간에 여러분들이 와서 듣지는 못해도 그 프린트물로 보면 웬만한 거는 이해가 될 거라고 봅니다.
자! 번뇌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부분이죠!
(1) dassana(닷사나) 관찰의 장
「관찰」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번뇌(asava dassana pahatabba)
관찰이라고 말해도 맞고, 바른 견해를 가지는 장이라 해도 말이 맞고, 그렇습니다. 저번에 스님이 뭐라 얘기했습니까? 알아차림이 없는 것, 그렇게 알아차림이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는 전체가 번뇌다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경우에 뭘 관찰합니까? 몸과 마음을 관찰하죠!
그거 이상도 없고 그거 이하도 없습니다. 딱 그겁니다. 보통 수행 부분을 빼고 나면 사람은 뭘 관찰하기가 수월합니까? 몸을 관찰하기가, 물질을 관찰하기가 수월하죠!
학문적인 지식이라든지 안 그러면 이 세상이 발전해나가고 있다 하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들을 관찰함으로 인해서 더욱더 발전해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것들은 꼭 수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관찰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그런데 마음에 대한 관찰은 좀처럼 잘 안 합니다.
불교에서는 수행한다 그럴 거 같으면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마음, 정신에 대한 것들도 같이 아울러서 관찰을 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불교 용어로 그것을 '야타부따(yathābhūta)'라고 그럽니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있는 그대로!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왜곡하거나 변형하거나 또 거부하거나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그런데 보통 우리는 물질적인 걸 관찰을 하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을 관찰할 때든 어떻게 합니까? 변형해서 관찰하죠! '있었으면 좋겠다. 요렇게 바뀌였으면 좋겠다. 이런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관찰을 하고 생각을 하게 돼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이라크 침공하기 전에 얼마만큼 많이 연구하고 관찰했겠습니까? 굉장히 뭐 첩보전도 하고 어쨌든 관찰을 했을 거 아니라. 그런데 그걸 우리는 있는 그대로 관찰을 했다고 합니까? 그렇게는 안 하죠? 미국이 이라크를 관찰할 때 기본조건이 뭡니까? 적입니다! 적이라는 갈고리를 물고 관찰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관찰할 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정복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더 가질 수 있느냐 하고 관찰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안 그런 거 같습니까?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뭘 관찰한다는 것들, 가만히 놓고 보면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되는가? 대부분 그런 경우 없죠!
이 번뇌를 관찰하는 장에서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어떠한 것도 들어가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뭐라 그랬습니까? "보통 뿌툿자나(puthujjana) 교육이나 예의범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생각하고, 고찰·관찰해야 할 것은 관찰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번뇌가 일어나서 망상을 하게끔 되어있다 하는 얘깁니다. 뭔가 변형돼서 관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감정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침착하게 될 수 없죠. 지혜롭게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감정이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즐거워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맛있는 거 먹으면 맛있다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즐겁단 말입니다. 그걸 아주 기분 좋게 미식가 같이 먹는다, 그거 좋아해야 되는 겁니까?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은 건데. 맛있게 먹었는지는 몰라도 마음은 성장한 것은 아니죠! 몸은 뭐 성장은 많이 했겠지. 그런데 마음은 그거로 인해서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가 됩니다.
저번에 스님이 열 가지 얘기했죠. 지혜를 저지하고 끌어내리는, 그런 감정 열 가지에 대한 얘길 했습니다. 욕구, 분노, 질투, 원한, 침울함 같은 침체된 것들, 흥분하는 것, 의심하는 것, 후회하는 것 이런 것들 열 가지 감정들.
이런 감정들이 마음에 침투하는가 안 하는가를 잘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먼저 번뇌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감정이 탁 들어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통상적으로는 안에 갇혀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화가 일어났다. 화가 일어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렇죠. 눈에 보이는 게 있을 거 같으면 화를 멈추겠지.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 자기가 일어나는 감정대로 그냥 휩쓸려 버립니다. 그래서 밖에 정보가 들어가지 못하게끔 해버립니다. 감정이 마음에 침투가 돼버리면 그거는 참 큰일입니다.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냐면
'산딧티 빠라마시(sandiṭṭhi parāmāsi) 아다나 가히(ādhāna gāhi) 둡빠띠 닛삭기(duppaṭi nissaggi)' 그렇게 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사물을 내가 요걸 인식했다는 마음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하물며 '나'라고 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인데,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할 수야 있겠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야타부따(yathābhūta)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다 하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중에 참 힘드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화가 일어나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화가 사라지고 나면 '아이! 내가 잘못했지' 하고 생각들을 한다는 거라. 욕심부려도 '아이! 내가 괜히 욕심부렸네' 하고 조금 있으면 어쨌든 그렇게 바뀐다는 거라. 그런데 딱 안 되는 것들이 뭐가 있느냐? 견해입니다. 견해!
견해가 생겨나 있는 상태에서는 안 바뀝니다. 웬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이것이다'하고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는 마음도 안 바뀔 뿐만 아니라 지혜가 성장하는데도 멈춰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가끔씩 그런 얘길 합니다. "스님 법문 듣다가 다른 법문 들으면 마음에 안 찹니다." 그러거든. 그것도 하나의 견해입니다. 물론 조금 있으면 그 견해에 대한 것들도 조금 더 상세하게 얘기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얘기는 귀담아 들을려고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이미 아까 감정이 일어나면 뭐라 그랬습니까? 외부를 차단한다고 그랬죠! 이미 차단해버리는 거라. 자기의 견해라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가끔씩 어느 보살님들이 와서 그럽니다. 이렇게 법문 듣든지 수행하다 보면 '아! 이거다.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진작 왜 몰랐을까?' 환희심이 일어나가지고 난리를 칩니다. 조금 있으면 안 와요! 거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도 자기의 견해에 파묻혀버리기 때문에! 인제 안 가도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고, 또 다른 거는 성에 차지 않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 그 견해에 딱 매여버리니까 꼼짝달싹을 못 하는 거라.
그러면서 실제로 제대로 알았으면 경우가 다른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거거든. 몇 번 와서 법문 듣고 수행한 거 가지고 "아! 이길 만이 유일한 길이다" 뭔 판단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라? 그거는 오히려 견해로 인해서 다른 정보들을 차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써 자기 수행은 수행대로 안 되고, 또 더욱더 배타적이게 되고, 지혜는 거기서 그냥 중단이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뭐 더 이상 여기 와서 똑같은 법문 계속 들을 필요도 없는 거라. 절에 올 필요도 없고, 또 다른 거 할 필요도 없으니까 어떻게 해? 집에서 하다가 그놈의 거 한참 그러다 보면 또 시지부지 해. 그럼 다른 거 또 찾아간다. 요 왔다가 저 갔다가.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스님 법문 외엔 다른 게 귀에 안 들어온다." 두고두고 법문을 듣다가 보니까 아! 이게 진짜 바르게 가르쳐주는 거고, 내가 수행해나가는 데 참 도움이 된다. 하니까 비교는 하지 않더라도 다른 법문을 듣더라도 그것은 그거대로 사실대로 들리지마는 크게 나에게 도움은 주질 않는다 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미 경험상으로 쭉 그런 것들이 쌓여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견해입니다.
견해인데 흔들리지 않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이 오더라도 내 견해가 바뀌어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어떤 면에서는 견해를 가지게 된다는 거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게 돼있다는 거라. 바르지 않은 견해를 가질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안 좋을 거고, 바른 견해를 가질 거 같으면 유익할 거란 말이라.
바른 견해를 가지면 뭐가 있습니까? 삭까야 딧티(sakkaya-ditthi, 유신견) '나'라고 하는 견해도 벗어나게 되고, 또 허례의식이나 이런 것들에 치중하게 되는 거, 무엇에 매달리고 하는 그런 것들(silabbata-paramasa, 계금취)에서도 벗어나게 되고, 또 아, 이게 맞는가 틀린가 의심하는 그런 것들(vicikiccha, 의심)로부터도 벗어나게 되고, 그거는 바른 견해가 주는 이익입니다. 그거는 수다원에 이르르게 됐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이라. 그러니까 견해 하나만, 바르게 관찰해서 바른 견해만 가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수다원에는 이르게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번뇌를 이해할 때는 맨처음에 부처님이 견해-관찰의 장을 두어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제대로 알아라 하는 거라. 그런데 통상적으로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돼? 올바르지 않은 생각(견해)들이 일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사악한 견해들)
'까마사와(kamasava)' 이거는 뭐 구태여 설명을 안 해도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오욕락에 대한 집착! 이 부분도 스님이 37조도품 할 때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을 자세하게 얘기를 해놓을 겁니다. 아마 프린트물 나갈 거니까 그때 조금 더 하도록 하고,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고, 욕망에 대한 집착 같은 거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거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바와사와(bhavasava)'라고 하는 것. 살아나가는 것에 대한 집착! 살고자 하는 충동입니다. 윤회하는 거는 뭣 때문에 윤회합니까? 살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윤회하는 겁니다. 죽음에 이르게 돼서 만약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살할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 살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니까 팍 죽어버리면 괜찮은데 안 죽으면 어떻게 해? 다시 죽을려고 안 하고 '살려달라. 살려달라.' 그렇게 합니다.
개체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마음이 다음 개체로 재생하는 원인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충동입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충동에 인해서 끊임없이 윤회하게 돼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하고 부처님이 이걸 진단을 해놓은 겁니다. 설혹 내가 죽음에 이르게 돼도 이러한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다음의 육체를 만들게 돼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충동은 뭡니까? 마음의 에너집니다. 마음의 에너지는 육체 에너지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굉장히 큰 겁니다.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집착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지 못한 것이고, 이 살고자 하는 충동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여러분들이 참 잘 오해하기 쉬운 게 '아윗자사와(avijjāsava)'.
보통 아윗자사와를 갖다가 간혹 어떤 데서는 잘못 풀이한 경우가 있어요. 앞에가 살고자 하는 충동이니까, 이거는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라고 이렇게 풀이를 하는 경우들이 있더라고요.
아윗자는 뭡니까?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 무명입니다. 무지한, 무명의 증거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공포, 두려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무지한 어리석음의 증거'라는 겁니다.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 소위 실체를 모르게 되어가는 것, 그거는 뭡니까?
내가 존재하는 실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이 존재의 실체를 모름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망상들입니다. 우리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거는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도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게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감정들도 이 '아윗자사와' 어리석음의 증거입니다.
왜 죽고 싶지 않습니까? 육체적인 죽음으로 오는 두려움, 우려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참 웃긴 게 여러분들 죽어 봤습니까? 안 죽어봤죠. 죽은 경험도 없는데 육체가 죽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거라. 그거 조금 잘못된 거 아닙니까? 죽어봤으면 아! 죽는 것이 이렇게 두렵구나 하고 얘기를 하겠지만 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두려워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부처님이 뭐라 했습니까? 번뇌라고 했습니다. 번뇌!
죽고 싶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갈고 닦습니다. 뭘? 몸을!
마음을 좀 그렇게 갈고 닦으면 참 좋을 건데, 보통은 그냥 몸만 갈고 닦는다는 거라. 그런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좀 추한 겁니다. 신체가 노쇠해지면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죽는 것이 훨씬 나은 건데, 그러지 않을려고 그런 우려들, 두려움, 그 어리석음 때문에 그렇게 붙잡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제 마음은 능숙하게 콘트롤하지 않고 산다는 겁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불교도라고 할 거 같으면,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해야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이 죽는 것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것을 무서워해야 됩니다.
마음은 모든 걸 다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몸을 콘트롤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잘못되면 얼마만큼 큰 파장을 끼친다는 건 더 잘 알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오히려 더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배웠을 거 같으면, 내가 더러워진 번뇌에 물들은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 번뇌에 물들었다는 건 그건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가타부타 안 하죠. 야! 누구든지 다 죽는다. 니가 과거부터 죽은 사람 앞에서 눈물 흘린 걸 다 합하면 저 태평양보다도 훨씬 많다. 뭘 그리 울어쌌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는 거라. 오히려 정신적인 죽음을 더 두려워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올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입니다.
그중에서 이 세 번째에 해당되는 것들이 견해를 바르게 가지는데 많이 좌지우지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열다섯 가지 얘기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해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 똑같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어쨌든 간에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내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만약에 존재한다면 어떤 존재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동물인가 뭐 어떤 것인가,
어떻게 존재했는가? 옛날에는 어떻게 존재했는가, 미래에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지금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럼 그 존재가 어떤 삶을 살아갔는가? 과거에는 내가 뭐로 태어나가지고 뭐로 우찌우찌 살아갔고, 뭘 우찌 살아갔는가, 미래는 어떻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현재는 어떻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고 나서 그 존재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이냐? 과거에 내가 그런 몸으로 태어났었다가 죽고 나서 내가 지금 현재의 몸을 받은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몸을 받은 것이냐? 지금 내가 죽고 나서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
또 그 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죽고 나서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거는 '삼세실체설'을 주장했던 부파가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라고 하는 부파입니다. 그 부파에서 많이 부르짖었던 그런 것들입니다.
여러분들 알고 있는 아비담마, 아비담마는 사실은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체설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태반입니다. 아비담마는 그렇게 태동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에서는 뭐라 그럽니까? 삼세실체 하는 것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죠? 존재하는 것은 지금 현재 순간뿐이다. 지금 현재 순간의 현상, 지금 현재 순간의 담마일 뿐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는 것도 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서 계획하고 하는 것도 하지 마라. 그럼 우찌 살아라는 얘기라?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참 잘해왔던 거, 만약에 지금 내가 현재하는 게 어려울 거 같으면 그거 생각해가 분발할 수도 있지않느냐? 과거에 그런 경험들을 떠올려가지고 분발할 수 있지않느냐. 또 미래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갈 거 같으면 미래는 아주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된다, 그럼 미래에 대한 목표 미래에 대한 결과 이런 걸 생각하면 또 지금 현재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인데 왜 그것조차도 하지 말아라 그러냐? 하고 가끔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알아야 됩니다. 기억력하고 능력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과거의 아무리 좋은 경험들도 생각하는 것은 기억력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지금 필요한 거는 뭡니까? 그 과거에 잘해왔던 그런 능력이 지금 필요한 것이지 그 기억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럴 거 같으면 그 능력을 그게 과거의 좋은 경험이든 아니면 미래의 좋은 결과이든 필요한 능력은 언제 필요한 겁니까? 지금 현재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걸 과거하고 미래하고 무슨 연관을 자꾸 시킬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해야 할 일의 입장에서 볼 거 같으면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거고, 미래를 떠올리는 것이든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든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것이고, 그마만큼 에너지 능력은 소모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순간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걸 요구하지 않고, 지금 현재 현재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걸 할 거 같으면, 어디에다 기준점을 두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뭔가 모티베이션(Motivation, 동기부여)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행동하는 모티베이션이.
어릴 땐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한테 의지하죠. 어머니가 날 지켜주기 때문에. 그래서 안도감을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조금 크면 나라가, 아니면 사회가, 내 직장이 나를 지켜준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바뀌죠? 직장이 나보고 나가라고 할 수도 있는 거고, 사회가 나를 퇴출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사람들은 조금 더 근사한 걸 동기부여를 합니다. 뭡니까? 신이라는 개념! 부처님이라는 개념. 그래서 거기에 매달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걸 갖다가 부처님이 비유로써 뭐라 해놨느냐 하면, 누가 여러분들 중에 한사람이 사자한테 쫓기고 있는 거라. 사자한테 막 쫓기고 있는데 인제 마지막 사자한테 잡아먹히기 직전에 있어. 그래가지고 부처님한테 막 매달렸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부처님이 주장자를 짚고 그 앞에 탁 나타납니다.
그러면 나를 믿고 눈감아봐라. 그럼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진짜 실제로 그렇게 되거든. 아무리 사자가 옆에 쫓아와서 입을 쩍 벌리고 있어도 부처님을 당할 순 없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나를 믿고 눈감아봐라. 편안할 것이다.
진짜 그리하니까 편안하거든. 그러니까 그냥 편안하게 있는 거라. 그러니까 사자가 어떻게 하겠어? 도망가지 않는 놈을 어떻게 하겠어? 덥석 잡아먹어버리는 거지.
뭔 얘긴 줄 알겠어요? 부처님이 그렇게 비유를 해놔 놨습니다. 지금 이뤄야 할 것들을 이뤄야되는 것이지, 과거나 미래의 일로 좌지우지되는 것은 그와 같다는 얘깁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 순간순간의 연속이라는 생각,
그다음에 어디다 그러면 주안점을 두어야 되느냐?
나에게 이익되고 남에게 이익되고 또 나와 남에게 이익되는 것에 둬라.
그다음에 지혜를 계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살아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지혜롭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다 보니까 지혜로워져야 됩니다. 혜안이 열렸다 그러죠? 지혜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다가 보니까 지혜는 나에게 다가와지는 거라. 다가와지도록 만들어라 하는 겁니다. 그런 지혜가 사람을 저 먼 혜안-닙바나로 이끌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세 가지만 중점을 두면 그것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바르게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이 열다섯 가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들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을 의지하거나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상적으로 사악한 견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면 지혜롭게 되는 것들이 멈추어져 버립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뭐라 그럽니까? 딧티(ditthi)라 그러죠! 견해, 견해를 가지는 것들. 참 다른 것보다도 오히려 더 위험한 겁니다.
얼마만큼 위험하냐 하면 나이든 분에게 비유를 하면 맞습니다. 나이든 분들 가만히 보면 여기도 마찬가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 와서 담마스쿨 한다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백이면 백 다 잡니다. 안 들어가 귀에. 귀에 안 들어가. 그러니까 아무리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돼는 거라. 어드바이스도 안 되고 충고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돼. 어떻게 할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는지도 몰라. "젊었을 때 공부 못하면 나중에 가서 그때 가서 할려고 해도 후회한다." 후회한다는 거라. 공부는 여러분만 할 때 공부들을 해야 됩니다.
견해를 가진다는 거는 그와 마찬가집니다. 도리가 없어. 대책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그릇된 견해들은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몇 시나 됐어요? 지금 얼마 못했죠! 대충 얘기를 하겠습니다.
살아갈 때 의도적으로 집중력을 키우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집중력을!
집중력으로 인해서 충실감을 자꾸 가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기쁨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잘못된 견해를 가지기가 자꾸 쉬워집니다. 무엇에 매달리든지, 아까 같이 당장 사자한테 잡아먹힐 것 같아도 부처님이 눈 감아라 한다고 눈감고 앉아있는 거와 꼭 마찬가지가 돼버리는 거라.
집중력을 자꾸 키우도록 하고, 밝게 살려고 해야 됩니다. 밝게! 뭐든지 밝게! 그러니까 전환을 잘 시켜줘야 됩니다. 재미없는 거 해도 재밌게 받아들이고,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유연해지라는 얘깁니다. 유연해져라. '음! 그럴 수도 있지' 요렇게 바꾸어나가고 자꾸 유연해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완전하게 확인되고 내가 체험된 게 아닐 것 같으면 '그것만이 진실이다'하고 받아들이지 마라.
세계는, 나에게 오는 정보만 내가 받아들입니다. 그럼 나에게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걸러버립니다. 그럼 거기서 생겨나버리는 건 어떻게 돼? 나의 견해일 뿐인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견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거라. 그럼 다른 사람의 견해와 충돌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생기는 거라.
그러니까 이 견해에 대한 것들을 유연성을 가질 거 같으면, 적어도 그걸 충돌들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만이 최고다. 이것만이 진실이다.' 하고 내가 확정적으로 말을 하고 확인되기 전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어떤 것을 하든지 철저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걸을 때도 철저하게 알려고 해야 되고, 생각할 때도 철저하게 생각을 하고, 뭐든지 철저하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번뇌가 침투해버릴 수밖에 없다하는 겁니다.
어떻게 비유를 들 수 있느냐 하면, 바르게 관찰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고 나간다고 하는 것은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겁니다. 한 방향으로!
그런데 그렇지 않고 사고하고 번뇌에 물들어 있고 하는 것들은 보통 어떻게 됩니까? 뺑뺑이 돕니다. 맴돕니다. 일은 추진은 되지 않고, 그냥 그 속에서 계속 생각으로 맴돌든지, 아니면 일을 하더라도 진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맴돌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걸 가지고 아, 내가 지금 바르게 관찰하고 있는가, 아닌가? 바른 관찰로 인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갖다가 판단을 해야 되고, 그런 또 '나'라고 하는 견해에 집착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의심이 있는가? 아니면 허례의식 같은 뭐 이런 것에 얽매여 있는가? 하는 것으로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물질적인 것들은 일시적인 현상을 일으키기는 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주사를 놓고, 인슐린을 놓고, 감기 걸렸으면 감기 주사약을 맞고 하더라도 감기는 나아질지 몰라도 또 감기는 걸리게 돼있다는 거라.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돼? 마음은 그렇게 키워놔 놓고 할 거 같으면 잘못된 거 전체를 제거해버린다 하는 거라. 그런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이런 견해가 바로 바른 견해다 하는 겁니다.
그 밑에 쭉 얘기해놨죠. 실제적인 것들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뭐라 그랬습니까?
부처님은 "나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들은 모두 다 설명했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는 건 뭡니까?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지혜롭게 되기 위한 것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설명했다는 거라. 쓸데없는 것들, 필요 없는 것들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런 답을 구하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이런 것들이 사악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인데, 제가 한 열 가지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사악한 견해를 가지지 않고 바른 견해를 가지기 위한 것은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주저하지 말고 행하라. 그것이 바른 견해를 가지는 데 도움을 준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밝고 활발한 사고. 비관적이거나 어두운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경우이든 밝고 활발한 사고 쪽으로 스스로가 변경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내가 최고다. 내가 훌륭하다'하는 그런 생각들을 버려버려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 대신에 '누구든지 다 똑같다'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도, 어떤 누구도 나와 똑같다 라는 그런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내 중심적인 사고, 내 중심적인 생각 대신에 자애의 생각들, 자애의 사고들로 마음을 채우도록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다섯 번째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생각 또 행동 들을 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고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의지할려고 하는 성격을 고쳐라. 그거는 어린아이들이나 정신이 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뭐 아무 증거도 없으면서 부처님을 믿고 아니면 신을 믿고 그런 나약한 경우가 어딨어? 그런 성격을 고쳐야 됩니다. 뭐 어떤 것이든 의지할려고 하는 것들을 고쳐라 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가 만약에 지금 살아가는 방법이 올바르다고 할 거 같으면, 장래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하지 말아라. 바르게 가고 있는데 뭘 걱정할 게 있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여러분들 생명보다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고 물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보다도 여러분들 생명보다도 오히려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지혜를!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터전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어리석기 위한 생활 어리석기 위한 장소로써 활용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내 생명보다도 지혜를 소중히 할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뭐냐 하면 집중력을 기르고 강화시키도록 하라. 마음이 산란해지고 망상이 들고 하는 것들도 마음의 에너지는 있는데 그 마음의 에너지를 집중력을 키우는데 활용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너지는 여러분들에게 다 있습니다. 살아있으면 에너지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집중력을 키우는데 강화시키도록 노력을 자꾸 하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 마지막 열 번째가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 아마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겁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진리를 체험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된다는 겁니다. 뭐를 가지고? 야타부따(yathābhūta)!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빳사나로써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이 열 가지만 생각하고 자주 자꾸 떠올리고 이렇게 노력을 하다 보면, 사악한 견해를 가지지 않고 바른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에 인해서 틀림없이 여러 가지 이익들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 그래서 바른 이해를 얻는 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제거해나가고 번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하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닷사나 관찰·견해에 대한 것 두 번째 시간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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