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4. 바른 견해1 (20080131)
(1) dassana(닷사나) 관찰의 장
··· 그게 한 찹트(chapter)입니다. 1번 항목에 대한 것이 끝난 겁니다.
오늘 좌선하면서도 이걸 한번 실험을 해봤어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 나간 부분에 대한 것들을.
위빳사나 수행에 대해서 모른 상태에서, 완전히 모르지는 않겠죠.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치더라도, 모른 상태에서 이렇게 법에 대한 고찰, 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첫 번째 성인의 경지, 수다원에 이르른다 하는 부분에 대한 얘깁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관찰하는 것이 올발라야 되는 것이지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글에 적어놓기는 둑카(dukkha)에 대한 얘기를 좀 적어놨죠. 둑카에 대한 얘기를 좀 적어놓고, 그다음에 '나'라고 하는 것, 실체, 자아라고 하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한 부정에 대한 얘기를 적어놓았습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참조를 해나가면 됩니다.
지금부터 그러면 수행이 만약에 잘 되면 사띠만 계속하면 됩니다. 알아차림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수행하다 보면 그게 잘 안되죠? 참 잘 안됩니다.
그럴 때는, 대책이 없을 때 어떡할 것이냐?
스님 말씀대로 자세도 바꿔보고 뭐, 아니면 잠이 오면 눈도 비벼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세수도 하기도 하고, 뭐 어떻게도 하고, 게으름도 몰아내보고 다 해보는데, 그렇게 게으름도 별로 없고 적당하게 좌선도 하고 이러는데도 수행은 진척이 없단 말이라. 그럴 때 어떻게 이 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빨리 내가 끌어올릴 수 있느냐 하는 거라.
물론 가장 궁극적인 것은 수다원에 이르면 가장 좋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도 그렇게 한번 해보니까, 법에 대한 고찰을 한번 쭉 하고 나서 수행에서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경우하고, 또 그렇게 경행을 하는 경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확연하게! 그래서 여러분들도 수행이 좀 잘 안 될 경우에, 진척이 없을 경우에는 이 방법들을 동원하면 좋은 결실들을 틀림없이 가져오게 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관찰들을 해나갈 것이냐?
대부분 스님이 무상에 대해서 관찰해라 할 거 같으면 뭘 하냐면, '어! 누가 어제 죽었지. 식구 중에 누가 죽었지, 아니면 친척 중에 누가 죽었지. 아! 참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그럽니다. 밥그릇 지가 잘못해가 털썩 떨어트려 놓고 깨지고 나면 '아! 무상하다' 아깝다는 소리지. 백날 해봐야 그게 소용없는 일입니다.
외부적인 걸 가지고 무상을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은 뭐라 그랬습니까? 안으로! 안에서 일어나는 걸 가지고 무상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지 밖으로 해가지고는 아무리 해도 그건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를 더 고착시켜주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괜히 '진아' '영혼불멸' 이런 것들에 고착된 줄 아십니까? 밖으로 대상을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에게서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고! 화두 참구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 방법입니다.
부처님한테 이 아난다 존자가 물어봅니다.
"부처님! 나는 무상이 참 쉬운데요. '무상'하면 내가 금방 압니다." 무상이 뭔지를 안다는 거라. 부처님이 되게 뭐라 합니다. "무상은 네가 그렇게 함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네가 무상을 알았다고 할 거 같으면, 연기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무상을 알 수 있는데, 그냥 무상한 걸 알았다고 그리 함부로 얘기해서 되겠느냐? 그리하지 마라. 그리할 것 같으면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게 된다."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무상 고 무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말 쉽게 얘기하는 경우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명확하게 내가 이해해가지고 거기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세워졌을 때, 그때 내가 그것에 대해서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체험하게 되어서 '아! 내가 그것에 대해서 알았다'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추론적으로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하다' 하는 것은 자기 것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도 이 아난다 존자에게 되게 뭐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면 해탈을 목적으로 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탈을 위한 바른 이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조용하게 눈을 감고 스님 얘기만 한번 딱 집중해보십시오.
이게 녹음이 되니까 녹음된 걸 갖다가 앞으로 두고두고 이 부분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 견해에 대한 것들만 바르게 세워준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수행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하게 눈을 감고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한번 잘 들어보십시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사리불 존자가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도 수다원이 될 때는 바른 견해, 바른 이해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게 뭡니까? 앗사지 장로가 한 말 "모든 것은 조건지워져서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조건지워져서 일어난 것들은 소멸한다고 우리 스승님은 얘기했다." 원인·결과에 대한 얘기들, 그것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가지고 바로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경전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연기에 대한 이해로써 깨달음에 많이 이릅니다. 그래서 연기를 바르게 이해할 것 같으면 깨달음의 지혜를 얻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하나만 바른 이해를 가지더라도 사리불 존자가 그랬듯이 수다원에 이르게 됩니다.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은 인제 열반에 들어간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열반의 흐름에 들어간다 하는 그런 의밉니다.
그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의미의, 그 수다원에 방해를 가져오는 가장 큰 것이 뭔가? 하는 겁니다.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영원하다 하는 것, 그리고 확실하다 하는 것, 그런 걸 믿고 싶어 하는 것들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고 하는 것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들, 아니면 내가 죽고 나서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영혼 같은 것이 있어가지고 뭔가가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날 것이다 하는 그런 믿음들, 이런 것들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파악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소중함도 물론 알지만은 그 대신에 타인에 대한 것들은 또 떨어지겠죠.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렇게 바른 이해, 연기에 대한 하나의 이해만 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는 겁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간단한 겁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 돼버리는 겁니다.
부처님은 뭐라 그럽니까?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다. 세상을 움직인다.'
누구 한사람, 현명한 사람이 숲을 헤치고 들어가다 보니까 그 안에 웬 오솔길이 있어서, 그 오솔길을 쭉 따라가다 덩쿨도 있고 해서 헤쳐내고 계속 가다 보니까, 커다란 아름다운 성이 있단 말이라. 그 성을 보고 확인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저 안에 성이 있다'하고 가르쳐준 거하고 마찬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비유를 해놔 놨습니다. 그 현명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그 성을 발견했든 안 했든 그 성은 거기에 존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이 진리는 그래서 세상의 법칙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쳐주든 안 가르쳐주든 세상은 변하게 돼있는 거고, 한시라도 머무는 바는 없게 돼있는 것이다 하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일단은 부정을 한다는 거라.
그 부정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조금 전에 얘기했던 '내가 존재한다. 실체가 있다. 영혼이 불멸하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또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는 거라. 왜? 변하는 것이 허무하니까! 변하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된다 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걸 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까지는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 살아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굉장히 힘듭니다.
괴롭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아마 마지막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참 좋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열심히 내가 괴롭더라도 뭘 하고 나면 내일은 '홀리데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괴로운 것도 그냥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거라. 어쨌든 오늘만 넘기면 되니까. 애하고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도 '아이고! 저놈의 자식 인자 십 년만 있으면 떠나버릴 거다. 아고! 내가 십 년만 참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조금 그 괴로운 게 덜해지는 거라. 십 년 후는 나는 자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안 들면 어떻게 돼? 지지고 볶고 하는 게 못사는 거라. 도저히 못 살겠다 해서 뭔가 탈출할 궁리를 찾는 거라. 그래서 술을 먹든지 아니면 '에이! 나 모르겠다' 하고 여행을 떠나버리든지, 뭘 하든지 하여튼 탈출구를 찾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통상적인 사람은 괴로움을 그냥 받는 거라. 마지막이 없이 그냥 받아버린다는 거라. 마지막이 없이!!!
괴로워하는 이유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괴로움은 받게 돼있습니다.
내일이면 괴로움이 없다는 이유가 생겨나야 만이 지금 받는 괴로움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거라.
세상의 진리는 항상함이 없이 변해가 있는 건데, 그거 안 변하는 거라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어쩔 수 없이 자기는 그걸 믿고 싶어 하든 믿고 싶어 하지 않든 간에 진리는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건데,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돼?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라. 왜? 세상의 법칙과 반대로 가야 되니까! 변하지 않도록 잡아야 되는 거고, 그렇게 또 믿을려고 붙잡아야 되는 것이고, 번뇌는 번뇌대로 생기는 거고, 고민은 고민대로 생기는 거고.
그래서 연기와 무상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한 덩어립니다.
무상은 무상대로 따로 있고,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따로 있고, 연기는 연기대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서는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 변함없다고 하는 것은 없다. 그런 존재가 될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버려버려라 하는 거라.
왜? 원인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신도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신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신도 변하는 거고, 여러분들도 변하는 거고, 어떤 것이든 변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변하는 존재는 누구든지 변하지 않기를 바라겠고, 정지해 있기를 바라겠는데,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반대로 나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그 괴로움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영혼이나 '나'라고 하는 것이 실재하는 것, 실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럼 내가 받아야 될 것도 없다는 얘기라. 그래서 뭐 그냥 오늘 마 되는대로 띵가띵가 놀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되는가? 그건 아니죠!
그런 것은 분명히 부처님이 그것도 하나의 극단이라고 그랬습니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왜? 실재하는 것은 없는데, 그러면 그런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거라. 내가 지은 것들은 그대로 받는다는 거라.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인해서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짐으로 인해서 저것도 없어지게 되고,
저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이것도 소멸한다.
하고 네 가지 구절로써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비유를 들면 여기에 꽃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씨를 가져와서, 사과가 씨로 됩니까? 사과는 씨로 안 되죠! 어쨌든 간에 씨로 된다 치자. 경전에는 원래 망고나무로 돼있는데, 사과 씨를 심어갖고 가꿉니다. 그런데 사과 씨 하나 가지고는 성장이 안 되죠? 여러 원인이 있어야 성장이 됩니다. 물도 있어야 되고, 공기도 있어야 되고, 흙도 있어야 되고, 여러 이런 조건 이런 조건,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저것도 있게 되고, 저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저것도 있게 되고, 이렇게 해가지고 조건들이 만들어진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씨는 이것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인해서 이것이 또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게 점점 더 생겨나지는 거라. 커나간다는 말이라. 그래서 이것이 생겨남으로 인해서 저것도 생겨나는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가지도 생기고 줄기도 생기고 이렇게 쭉 올라와서 사과가 열렸다.
그런데 땅바닥에 보면 사과 씨는 없습니다. 이미 없어졌습니다. 누가 와서 그 사과나무에 딸려있는 사과를 탁 따먹었다. 그럼 여러분 당장 “왜 내 사과 따 먹느냐?” 그럼 나는 인제 물어봅니다. “당신은 사과 씨를 심은 것이지 사과 저 나무하고 사과를 심은 것이 아니니까 당신 거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주인이 없으니까 내가 따먹어도 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보통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는 남의 거 훔쳐 먹었다고 그러죠. 그와 마찬가지라는 얘기라.
그렇게 변해갔다 하더라도 사과 씨로 인해가지고, 망고 씨로 인해가지고 망고열매 망고나무가 열린 것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없어졌다고, 사과 씨나 망고 씨가 없어졌다 해가지고 이것이 지금 자라가지고 이렇게 맺혀졌는 거 이것 망고나 사과가 내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하진 않는다는 거라.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고 존재라고 하는 것, 실체하는 것이 없다고 해가지고 내가 받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바로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은 행위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있게 돼있다 하는 거라. 허무주의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니다 라는 거라.
만물은 무상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씨도 무상해서 없어져 버린 거고, 나중에 맺혀져있는 사과 열매도 그것도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 따라 없어지게 돼있습니다. 변해나가게 돼있습니다. 그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책임을 자기가 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씨로 인해가지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지은 행위로 인해서 결과를 받게 돼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라. 그것이 실체하는 거하고 어떤 연관성을 가지느냐는 거라. 전혀 없다는 거라. 전혀 없다는 거라!
이런 견해들을 가지게 되면 집착하는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스스로 진리를 이해하고 또 그걸 관찰해서 '아! 그렇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 확신을 가지게끔 한다는 거라.
이것이 부처님이 번뇌를 격퇴시키는, 소멸시키는 첫 번째 방법으로 제시해놓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이 잘 안 될 때 한번 가만히 잘 자신을 한번 판단을 해보십시오. 자기가 체험한 것 중에서.
속박되어있는 자신이 있었을 거라. '아! 내가 좀 뭐가 묶여있는 것 같다. 속박되어있다'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원인은 자기가 안단 말이라. 뭐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었는지, 그렇게 속박되어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런데 그 원인도 어차피 부처님의 진리 아니면 세상의 법칙에 의할 것 같으면 그것도 변하는 것들입니다. 무상한 겁니다. 그리고 결과도 마찬가집니다. 결과도 내가 속박을 벗어나가지고 자유롭게 됐든, 아니면 그 속박으로 인해 계속 받고 있든지 간에 어차피 그 결과도 부처님의 진리나 법칙에 인해서는 그것도 무상한 것이다 하는 거라.
무상한 것이라고 그렇게 탁 받아들일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 비로소 나는 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붙잡을려고 하는 생각이 없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얘기한 바른 견해의 시발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것이든 무상한데, 변하게 돼있는 건데, 변하는 거기에서 속박돼야 할 이유가 없잖아. 이미 변했는데!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와 같이 먼저 받아들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다른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고, 여기 바른 견해의 첫 번째 부분 하다가 말았습니다이. 다음 시간에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사띠 위빳사나[고급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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