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담마다로(dhammadharo)가 되자. (20090607) <장전동 첫법회>

담마마-마까 2021. 3. 4. 10:59

https://youtu.be/Hq8897n7AhQ

* 담마다로(dhammadharo)가 되자. (20090607) <장전동 첫법회>

 

여기 장전동에 와서 처음 법회가 이루어집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보름 법회죠! 보름 법회인데 보름날은 뭐 하는 날이라고 했어요, 스님이? 왜 다 주눅이 들었나 얘기들을 못 해? 보름날은 뭐 하는 날이라고 그랬어요? 가장 놀기 좋고 가장 또 수행하기 좋은 날이라고 얘기했죠!

절에 가는 날? 절에 가는 날은 절에 가는 날이지. 불교에서는 반월 반달마다 절에 가도록 돼있고 스님들도 보름마다 '빠띠목'을 하게끔 돼있고 전체가 모여서 화합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는 날은 맞기는 맞죠. 절에 가서는 뭐합니까? 수행하죠! 그래서 '보름날은 수행하는 날'이라고 반드시 명심을 해두어야 됩니다.

 

오늘은 '담마다로(dhammadharo)'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하겠습니다. 「우다나」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게송을 한번 읽어드릴게요.

 

『 Udāna 』

"Adhicetaso appamajjato, 아디쩨따소 압빠맛자또

Munino monapathesu sikkhato. 무니노 모나빠테수 식카또

Sokā na bhavanti tādino, 소까 나 바완띠 따디노

Upasantassa sadā satīmato" 우빠산땃사 사다 사띠마또

〖4. Meghiya vagga - 7. Sāriputta sutta〗

 

그렇게 돼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번뇌를 여의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항상 노력하라.

성자의 길을 걸어서 성자가 되도록 하라.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 항상 사띠하도록 하라.

그러한 사람에게 괴로움이나 슬픔은 없느니라."

하는 우다나 게송입니다.

 

불교경전 중에 '우다나'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감흥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그 깨달음의 상태에 대해서 마음이 좋아서 마음이 또 그지없이 행복해서 그때 인제 외치는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열반송' 그렇게 얘기하죠. 열반송 하고는 조금 다른데 어쨌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감흥어 게송들을 했던 그런 것입니다.

 

이 게송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어느 스님 한 분이 머리가 똑똑하질 못했어요. 그래서 배운 것들을 잘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데 딱 이 게송 하나만큼은 기억을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이 게송대로 할 것 같으면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항상 열심히 노력하라는 거라. 그리고 성자가 되기 위해서 성자의 길을 걸어라는 거라. 그리고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 항상 사띠하라 알아차림을 하라. 그러한 길을 가라. 그렇게 하면 슬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하는 게송인데, 이 네 가지 구절 속에 불법의 진수가 다 들어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이 우다나 뿐 아니라 여러 경전이 있습니다. 장부경전도 있고 중부경전도 있고 또 여러 가지 다른 경전들도 있습니다. 장부경전 같은 경우에는 웬만한 조그만 소책자 하나 정도입니다. 하나의 찹터(chapter)가, 하나의 이야기를 해놓은 게.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상응부경전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댓구로 돼있습니다. 두 줄 아니면 네 줄이 하나의 찹터입니다. 그러니까 한 페이지가 안 되죠. 그런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물론 조금 긴 것들도 있지만. 또 중부경전 같은 경우는 그 중간길이 정도 되고, 이런 여러 가지 경전들이 있는데, 그런데 큰 경전들 조그만 소책자 하나 정도 되는 경전을 보든 아니면 이 상응부 경전의 조그만한 구절을 하나 보든 그 속에는 그 불법의 정수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다나에 있는 이 네 개의 구절 속에 불교의 모든 것들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모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실천하는 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이 소중한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두 구절만 말해두지 여러 가지 긴 길이의 경전도 있고 짧은 것도 있느냐 하면 사람마다 인제 받아들이는 척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끔 법을 설해놓은 이유들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구절을 가지고 수행을 했고 이 구절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러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 보름 같이 뽀야날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초하루 날도 모이고. 크게 봐가지고는 그렇게 두 번 모이는데, 초하루하고 보름하고 그 중간 반달에 또 반달 그러니까 반월에 반달 해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이는데, 이 스님은 사람이 모이든 안 모이든 항상 이 간타로 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여기 있죠? 이것과 같이 이렇게 모일 때 모임종(땡~)을 울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단 말이라.

모이면 법을 설하는 게 뭐냐 하면 이 게송을 설해놓습니다. 이번 달 뽀야 때도 이걸 하고 그다음에 초하루 때도 이 게송을 하고 그다음 또 뽀야 때도 이걸 하고. 그런데 이 스님이 살고 있는 곳은 숲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도반스님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이 간타를 울리고 이 게송을 설했는데 게송을 설할 때마다 온 주변에서 싸-두 사-두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두(sādhu)"가 무슨 뜻입니까? (수행자 대답)

음, "장하다." "참 잘했습니다." 이 스님은 누군가가 이 법을 들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게송을 한 거라.

 

그런데 오늘과 마찬가지로 그날이 뽀야날이었어요. 멀리서 스님 두 분이 이 아라한 스님이 머무는 곳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도 훨씬 배운 것이 많고 오래도록 수행한 스님이니까 이 스님들이 법을 설하길 청합니다, 이 아라한 스님이. 그러니까 이 스님들이 여기 뭐 아무도 없구만은 뭔 법을 설하라고 그러느냐?

아, 아닙니다. 내가 한 번 설할테니까 한 번 보십시오. 이 게송을 탁 설하거든. 그러니까 주변에서 "사-두 사-두" 하는 거라. 어, 사람들이 많은 갑다. 눈에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숨어가 있는 갑다 이리 생각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인제 이 스님 두 분이 열심히 돌아가면서 법을 설합니다. 아무리 법을 설해도 법이 끝나고 났는데도 사-두 하는 소리가 안 들리거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가지고 왜 이렇게 사-두라고 말을 하지 않느냐? 하니까, 거 이상하다. 내가 법을 설할 때는 다 사-두 사-두 소리를 다 했는데 이 다른 스님이 하니까 안 하느냐는 거라. 그럼 내가 한 번 법을 설해보겠다 하고 그 아라한 스님이 이 게송을 다시 또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또 주변에서 "사-두" 하거든.

그러니까 그때야 이 두 스님들이 아, 모여있는 사람들이 일반인이 아니고 천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천신도 나쁜 무리라는 게 똑같이 법을 설하는데 왜 내가 설할 때는 "사-두" 안 하고 "잘했습니다" 안 하고, 이 아라한 스님이 설했을 때는 "참 잘했습니다" 하고 이렇게 하느냐는 거라. 이 편협돼있다는 거라. 천신들이.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이 사실을 얘기합니다. 아이고, 그 천신들 모여있는 천신들 못쓰겠습니다. 하고 인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누군가를 편드는 법이 없다. 내가 그 신에게 공양 올린다고 내 편을 들어주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법이 없다는 거라. 신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설하고 그 이해하는 것에 인해가지고 감동을 받았을 때 "사-두"라고 하는 것이지 그 가르침을 아무리 천신이 듣는다 해가지고 이해하지 못하고 감동 받지 못해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할 거 같으면 사-두라고 안 한다는 거라. 너희들이 법을 설한 것은 그 천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감동 받지도 못하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두라고 안 하는 것이다. 누구를 갖다가 편들어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불교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의 말입니다.

 

불교에는 가끔씩 부처님의 말 경전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라고 믿습니다.

어떤 힘들을 얘기합니까? 보통 여러분들 잘 아는 다라니, 주술들 왜 그 다라니를 하고 주술을 합니까? 그 구절에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다라니를 열심히 할 것 같으면 거기에 맞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게 됩니다. 진짜 그렇습니까?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고 진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힘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는 진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고 아, 내가 이 길을 따라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낼 수가 있어야 그걸 진리라고 얘기한다는 거라.

 

아라한의 말에 천신들이 사-두라고 했던 거는 뭐냐 하면 그 구절을 듣고 아, 열심히 노력해서 집착하지 말아라. 그거 말이 맞다는 거라. 아 그러면 내가 집착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집착하지 않게끔 내가 열심히 노력해야지 하는 노력할려는 마음도 가지게 되는 거고. 성자가 될려면 성자의 길을 따라가라. 어떻게 성자의 길을 따라가느냐? 열심히 사띠하라. 열심히 알아차리라.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성자의 길을 가는 거고 성자가 되는 길이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괴로움도 없고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번뇌도 없고 슬픔도 없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내가 사띠를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열심히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버려야 되겠구나.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낸다는 거라.

그게 진리의 말이라는 거라.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깨끗해지고 차분해진다는 거라. 평온해지는 거고. 그리고 그 말을 따라가야지 하는 감동이 생기니까 어떻게 돼요? "사-두" 라고 한다는 거라. 그게 '다라니'라는 거라.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불설(佛說), 부처님의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은 신비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인 힘이 있다는 거라. 그 말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함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온해지고 그것을 따를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하는 일들도 잘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하는 소원성취가 돼나간다고 하는 것이지, 만약에 그런 다라니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노력할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또 사띠할라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도 못하는 다라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불설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라.

 

불설(佛說)에는 반드시 그런 주술적인 힘보다는 진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무진장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아주 다양하게. 그걸 다 배울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여러분들 같으면 적어도 한 십 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경전을 한 번 전체라도 다 읽어 본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저기 뒤에 보면 책꽂이에도 꽂혀져 있습니다. 책을 책꽂이에 꽂아놨다고 해서 내 것이 됩니까? 그렇지는 않죠! 스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설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릅니까? 그렇지는 않죠!

 

그럼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까? 우선에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되겠지.

어떤 노력을 해야 됩니까? 집착하지 않게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집착하지 않게끔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열심히 사띠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게 성자의 길이라는 거라.

이와 같이 경전은 무수하게 있지만 이 네 구, 네 구에 부처님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는 거라. 이 네 구를 이해함으로 인해서 진리를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 진리를 이해해서 그것을 자기 생활화해나갈 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다라니가 되는 거라. 자기 자신만의 다라니가 되는 거라.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다라니가 있습니까?

가끔씩은 그럽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

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걸 이렇게 독송을 합니다. "가세 가세 바로 저 언덕으로 가세. 우리 모두 저 언덕으로 가세" 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그 구절에 저 언덕으로 가자는 것은 맞습니다. 어떻게 가라는 거라? 저 언덕으로 가면 뭐가 있는데? 그런 것이 다 빠져있다는 거라. 그거는 진정한 다라니가 될 수가 없다는 거라.

하나의 구절이 되더라도 실천하는 방법이 그 속에 들어가야 되는 거고, 또 그 구절 속에서는 그렇게 실천했을 때는 어떤 경지에 이르른다 하는 것이 표현이 돼야 그게 다라니가 된다는 거라.

반드시 여러분들은 자신만의 다라니를 만들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도 태국에 있을 때 힘이 들고 할 때 떠올리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아는 구절 중에 하납니다.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ī ti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 게송 하나만 외우더라도 내 스스로 감흥이 되는 거라. 내 스스로. 여러분들도 그런 구절을 만들어라는 거라.

 

먼저 자신이 실천하고 나서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은 나태해지지 않는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했습니다. 자신이 실천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이걸 해보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런 사람은 절대 나태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이걸 지키시오. 이걸 하시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정치가이든 아니면 도덕군자이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가 지키고 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는 거라. 그런데 경전에는 분명히 자기가 그걸 지키고 나서 실천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적어도 나태해지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는다는 거라. 그 길이 맞다는 거라.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얘길 하더라도 “니가 뭔데?” 할 거 같으면 할 말이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 뛰어난 스님이 법을 설했지만은 천신들이 감흥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 뛰어난 스님들이 아무리 부처님 경전을 많이 알고 있고 또 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천되지 않았으니까 천신들이 감흥할 수가 없는 거라. 감흥되지 않는데 어떻게 사-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신들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 실천하고 나서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감동을 합니다. 천신들만 그러겠습니까? 일반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자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사시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 말에는 동의를 한다는 거라.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진정으로 여러분들을 행복한 길로써 이끌어 주는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는 거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로 인해서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고, 또 학문적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고, 여러 부류들이 있다는 거라.

진정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이끌어 주는 것은 진리로써 이끌어 주는 것들입니다.

 

지식으로 많이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유연성이 없어집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보면 특히 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유연성들이 많이 떨어집니다. 다른 사고들을 잘 못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관리를 잘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리도 못하고 유연성도 떨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안 배우니만 못하다는 거라.

 

특히 불교도들 중에 절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오히려 더 고집이 세지고 아만심이 많아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렇겠습니까?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자꾸 배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실천할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만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더욱더 완고한 인간이 돼버리는 거라.

요기 물항이 요렇게 있는데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다가 흙을 자꾸 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흙은 처음에 조금 있을 때는 부드러운데 자꾸 쌓이면 단단해지고 견고해져버립니다. 꽉 차버릴 것 같으면 그거 퍼내기 전에는 더 들어가지도 못해. 그러니까 절에 다니면 다닐수록 더 고집만 세지는 거라. 거 왜 그런 거라? 실천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실천들을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은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경전이 참 소중하고 또 그것을 우리의 지표로 삼아야 되는 이유가 뭐 때문에 그런 거라? 그 속에는 이렇게 짧은 것이지만 실천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냥 지식적으로만 알려준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부처님이 위대한 분이라고 얘기를 안 했을 거라.

 

진리를 알려고 하지 말고, 진리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게 빨리어로 뭐냐 하면 '담마다로(dhammadharo)' '진리·담마·법을 가지는 자' 가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가질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날마다 노력해야 됩니다. 날마다 정진해야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정진하는 사람'도 담마다로라고 그럽니다.

삼장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을 담마다로라고는 안 합니다.

법을 잘 설하는 사람도 담마다로라고 명칭을 안 붙입니다.

그 '진리를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담마다로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땀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스님은 연극을 보지는 않지만은 가끔씩 테레비를 보면 진짜 실제 공연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땀 흘리면서 노력하는 배우들을 봅니다. 그럴 때 테레비에 클로즈업 돼가지고 땀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수행은 그렇게 리허설 중인 배우와 같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법을 아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법을 가지는 것입니다. 법을 아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법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만의 다라니를 반드시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 다라니에는 실천하는 방법이 있고 실천하고 나서의 경지가 설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다라니가 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에는 그런 힘들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에는 확실하게 그런 힘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법을 듣고 그것을 많이 이해할려고 하지 말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법을 가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사람을 이끌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주위의 사람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이 진리 이 좋은 법으로 이끌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법을 실천하고 그 법을 가지는 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