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고통 1. 진리의 고와 감정의 고 (20090827)

담마마-마까 2021. 3. 6. 10:22

https://youtu.be/Nwm9o66Qr6g

* 고통 1. 진리의 고와 감정의 고 (20090827)

 

경전에는 "사는 것은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를 할 거 같으면 깨달음에 이릅니다. 사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지옥에 가 있든 극락에 가 있든지 어느 곳이든지 살아가는 것 자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하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참 힘들죠? 그걸 '진리로 말하는 괴로움'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괴로움을 느낄 때 진리로서 괴로움을 느낍니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죠? 감정으로 괴로움을 느낍니다.

살아가는 게 힘들다, 괴롭다 하고 할 때는 보통 감정을 가지고 하는 얘기들입니다. 감정을 가지고 괴롭다 하고 얘기할 때는 그건 사실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진리는 틀림없이 진리 그 자체는 사실입니다. 변함이 없는 겁니다. 어디든지 통용되는 것들이고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는데, 감정으로써의 괴로움은 그런 것은 없죠? 그래서 나에게는 괴롭더라도 똑같은 건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롭지가 않게 되고, 그래서 그것도 바뀝니다. 아이 보고 "아, 니 보면 내가 괴로워 죽겠다" 그런데 그게 진리는 아니죠? 그때는 괴롭지만은 좋은 때는 좋다고 그리합니다. 친구끼리도 "야, 니땜에 죽겠다" 그리하더라도 그때 당시 감정으로써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지 진리로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또 수행 중에서 내가 괴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다리에 통증이 있다. 아, 괴롭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건 진리로서의 괴로움입니까? 그렇지는 않죠? 감정으로서의 괴로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괴로움은 변합니다. 그런데 수행할 때 이 고통스러운 괴로움을 관찰하라 그러고 이걸 관찰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떻게 진리로서의 괴로움과 감정으로써의 괴로움을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어떻게 구분합니까?

잘 되고 싶을 때, 성공하고 싶을 때 그것이 만약에 안 될 경우 원하는 것이 안 될 경우에 그거로 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감정적인 '감정으로서의 괴로움이다' 라고 보면 됩니다. 분명히 그거는 감정으로서의 괴로움입니다. 그런 감정으로서의 괴로움은 화가 났을 때의 괴로움도 있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들도 있고, 여러 가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태어나면 죽게 돼있습니다. 태어나면 죽음을 맞아야 된다는 것도 부처님은 괴로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거는 감정의 괴로움입니까? 그건 아니죠. 진리로서의 괴로움입니다. 왜? 나도 태어났으면 죽어야 되고 여러분들도 태어났으면 죽어야 되고, 대통령도 태어났으면 죽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진리로서의 괴로움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로서의 괴로움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우선 내가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해서 이해하고 체험하지 않으면 사실은 진리로서의 괴로움을 알지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보통 부처님이 얘기할 때 '진리를 알아라' 하고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진리를 지켜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진리를 지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선 내가 감정으로서의 괴로움이 일어났단 말이라. 이 감정의 괴로움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걸 자기 자신의 그때의 감정의 괴로움으로써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있는 수수옥님이 참 마음이 침착하고 평온하다 하고 얘기를 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보는 수수옥은 이 사람은 침착하고 조용하지 않고 화를 잘 내고 이렇다 할 것 같으면 서로 상반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지켜라고 할 때는 단순하게 그냥 내가 수수옥님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이렇게 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내 감정으로서 내가 느끼는 것들로서의 수수옥을 본 것인데 진리로서 얘기를 해버리는 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말은, 진리는 어디에나 통용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말은 틀리게 돼버리는 거라. 그럴 때는 진리를 지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봤을 때 수수옥님은 이렇다” 하고 얘기하라는 거라. 내가 봤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또 다를 수도 있는 거고, 단지 내가 봤을 때는 지금 수수옥님은 이렇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이걸 인제 감정의 고를 가지고 진리의 고로 전환하기 위한 1단계라고 하고, 그래서 그런 진리를 지켜라.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사실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게 됩니다. 그걸 부처님이 '진리를 지켜라'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지켜나가야만이 수행할려고 해서 진리를 아는 사람이 되어나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자기 가치판단만이 옳다고 고집을 할 거 같으면 항상 감정의 괴로움이 있게끔 됩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내 입장에서는 이렇다' 하고 얘기할 때는 감정의 괴로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괴로움으로서 내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것이 맞다, 그것만이 진리다, 그것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고 단정 짓지를 않는다는 거라.

우선은 감정의 괴로움이지만 진리의 괴로움을 지켜나가는 형태들을 띠게끔 됩니다.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뭐냐 하면 먼저 일차적으로 여러분들이 마음을 가져야 될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괴로움이 있으면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내 자신과도 다투고 다른 사람들과도 자꾸 다투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진리를 지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진리를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데, 진리를 어떻게 알 것이냐 하는 거라.

예를 들어서 태어남이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먼저 여러분들은 태어남이 뭔지를 이해를 해야 됩니다. 왜 태어남이 괴로움인가? 진리로서의 괴로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조사·확인돼서 그것을 이해하고 확신이 있었을 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거라. 나에게도 진리가 될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똑같이 조사하고 확인해가지고 확신이 섰을 때는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진리가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봤을 때의 진리하고 다른 사람이 봤을 때의 진리가 똑같이 되게끔 되는 거라.

그것을 진리로서의 괴로움이라고 그러는데.

 

'자띠삐 둑카(jātipi dukkhā)' '태어남이 괴로움이다.'

'태어남'은 어떤 걸 얘기합니까? 어떤 걸 '태어남'이라고 그래요? 통상적으로 우리는 태어남을 뭐라 합니까? 아기가 엄마에게서부터 출산하는 것을 태어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태를 통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은 그러면 태어남이 아닌가? 그것은 아니죠. 그래서 태어남이라고 할 때는 보통 이생 다음생 그다음생 할 때 한생 두생 할 때 그 존재 자체를 통상적으로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존재가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할 때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부처님은 어디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예. 석가종족으로, 그 종족을 뜻할 때 그런 것도 태어남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다르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존재하는 것도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몸으로 존재하는 게 있고, 아귀의 몸으로 존재하는 게 있고, 지옥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고 그래서 이런 존재.

 

그다음 두 번째는 '자기가 속한 그룹' 이런 것들도 태어남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무더기 진 것, 그래서 오온이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오온 자체가 태어남이다' 그럽니다. 오온은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은 일어나는 것이 바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내가 마음이 그래서 일어나고 하는 것, 그 일어나는 것 자체가 다 태어남입니다. 형성된 것, 조건지워진 것들은 다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 하면 '모태에 들 때', 모태에 들 때 그때를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모태에 들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것 자체도 태어남에 해당이 된다 하고, 시작되는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애기가 엄마 뱃속에서 탁 나올 때, 그래서 '출산할 때' 이런 것들도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중생들의 경우에는 뱃속에 들은 입태에서부터 그 모태에서 나올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중생들이 아닐 경우에는 입태할 때까지의 무더기를 태어남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그것을 태어남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왜 그러면 왜 태어나는 것이 '자띠삐 둑카' 왜 괴로움인가? 왜 괴로움입니까? 태어나는 것이.

태어날 때는 괴로움이라고 여러분들이 느끼질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걸 괴로움이라고 그랬거든. 괴로움의 갖가지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괴로움은 크게 나누어가지고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누어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괴로움은 육체적인 괴로움, 정신적인 괴로움 그런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을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변화하는 것들. 변하지 않으면 괴로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운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조건지워지고 형성되어진 것들. 내가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것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감추어진 것들. 드러나지지 않은 괴로움들, 저 멀리 감추어져 있다가 어느 때 불쑥 튀어나올 때 감추어진 것들.

그다음에 드러나지는 괴로움들.

그다음에 직접적이 괴로움과 간접적인 괴로움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괴로움 정신적인 괴로움은 고요한 성질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짜 괴롭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괴롭고 정신적으로도 괴롭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얘기하고.

 

아무리 즐거운 느낌이라 하더라도 그 느낌은 변합니다. 변하면 괴로워지게 돼있는 거라. 그런 변화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그다음에 이 상카라라고 얘기하는 조건지워진 것들로 인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이 몸을 받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 몸이 있으니까 당연히 조건지워지는 거라. 죽어야 되고 늙어가야 되고 그래서 이 조건지워지고 형성되어진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감추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 만약에 이빨이 아프다. 이빨이 완전히 아픔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썩어가는지를 모릅니다. 사실은 그런데 썩어가는 그 자체는 괴로움입니다. 변해가는 거기 때문에. 그걸 감추어진 괴로움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빨이라든지 아니면 귀가 아프다든지 그다음에 내가 욕심을 부림으로 인해서 열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지금 열이 일어났지만 감추어져 있거든. 확 발산되기 전까지는. 그런 것들을 감추어져 있다 해서 감추어진 괴로움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드러나지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이 몸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나지는 것. 드러나지는 것을 드러나지는 괴로움이다 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그다음에 간접적인 괴로움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모든 괴로움의 토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태어남 자체가 간접적인 괴로움을 유발한다는 거라. 직접적으로 내가 지금 현재 괴로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그 자체는 괴로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그것이 모태가 돼가지고 괴로움이 발생은 한다는 거라.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직접적인 괴로움은 직접적인 것으로 겪는 괴로움들. 여러 가지 고통들 이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왜 괴로움인가 하는 것을 경전에서 한번 내가 간추려 봤습니다.

먼저 모태에 들 때 이 엄마 자궁 속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하지 못합니다. 저기 깨끗한 물에 연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깨끗한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거라. 아주 이 자궁이라는 게 좁고 그리고 꽉 막혀있으니까 어둡고 온갖 냄새도 퍼져 있을 수밖에 없고, 어쨌든 내장기관 중에 하나니까. 온갖 악취들이 나면서 그것이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온갖 박테리아라든지 벌레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는 곳이라는 거라. 그 구정물 통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거라. 그게 즐거울 리는 없다는 거라.

입태하는 그 순간 자체도 이미 괴로움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의식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 들어갈려고 하겠어요? 안 들어간다는 거라. 그리고 구정물 통은 이렇게 동그랗기라도 해. 그런데 이거는 동그랗지도 안 해.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구부러지고 그것도 움직여가면서 안에 들어가 있는 입태된 어떤 것들을 치고 한단 말이라. 그것이 어떻게 괴롭지 않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입태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입태하고 나서 있을 때, 기관은 항상 움직이게 됩니다. 움직이게 돼있기 때문에 그걸 경전에서는 '뱀 장수의 손에 든 뱀과 같다'라고 얘기합니다. 뱀 장수는 그 뱀을 자유자재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 뱀은 이렇게 움직여야 돼. 지가 살기 위해가지고 빠져나가기 위해서. 기관은 자꾸 움직이고 엄마는 가만히 앉아만 있고 안 움직이게 돼 있나? 항상 움직이게 돼있는 거라. 자궁은 자꾸 움직이게끔 돼있는 거라.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거는 얼마나 괴롭겠느냐는 거라. 그것도 안에 들어있는 거는 생각도 안 합니다. 똑 술 취한 사람이 이리 가서 부딪치고 저리 가서 부딪치는 거 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들어있는 동안에도 항상 그런 극심한 괴로움을 겪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뜨거운 거를 마시면 그 뜨거운 거로 인해서 지옥과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거고 차가운 것을 마시면 그 얼마나 차가운 것들이 바로 느껴지겠느냐는 거라. 입태한 것으로부터 해서 입태한 것이 그 속에서 서서히 태어나기 위해서 자라는 과정까지도 항상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짜면 짜다고 느끼고 짠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 시면 신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 극심한 괴로움이 임신에 기인한 괴로움이 항상 겪게끔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잘못해서 낙태됐을 때 그거는 괴로움이 없습니까? 찢어지고 할퀴고 하기 때문에 낙태가 되는 겁니다. 거기서 오는 괴로움들은 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거라.

 

어쨌든 그렇게 해서 견딘다고 하더라도 출생할 때, 출생할 때는 괴로움이 없는가? 그걸 경전에서는 낭떠러지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 구멍 속으로 폭 빠져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하고 같다 하고 그럽니다. 태어날 때 느끼는 것들이 그렇다고 그럽니다. 그 얼마나 큰 괴로움이겠어요? 정신적인 괴로움들이.

육체적으로는 또 괴로움이 없나? 온갖 괴로움들이 다 있지. 그 통로 속을 빠져나와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와 같은 괴로움, 분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태어나면 몸은 굉장히 연약합니다. 부드럽고 그렇지만 외부의 접촉을 처음으로 받았는데 그 접촉으로 인해서 굉장히 상처를 받기 쉽다는 거라. 목욕을 시킬 때든지 아니면 문지를 때든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그런 괴로움이 있다 하고 그럽니다. 그런 괴로움은 모태로 나옴으로 인해서 태어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라고 그럽니다.

 

이와 같이 입태에서부터 모태에서 출산하는 데까지도 많은 괴로움들이 있다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그 과정을 보니까 태어나는 것 이것 자체는 큰 괴로움이구나. 참으로 괴로움이다. 그걸 어떻게 괴로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라.

 

또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옥에 태어나는 것 그거는 괴로움이 아닌가? 지옥은 아주 타는 불길들로 인해서 참기 어려운 것들, 또 아주 얼어 붙은 듯이 차가운 것이 나를 찌르는 그런 참기 어려운 괴로움들을 발판으로 해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그런 곳에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이 아니겠느냐는 거라.

 

축생은 항상 두드려맞고 먹을 것을 찾아서 헤매게 돼있고 언제 죽을지 모르게 돼있는 곳들이 이 축생의 삶이라는 거라. 거기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겠느냐는 거라.

 

아귀라고 하는 것은 항상 배고프고 항상 목말라 있고 뭔가 하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곳. 어떤 것을 해도 채워지지 않고 태양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항상 고통받게 되고 그런 것들로 태어나는 것도 또한 괴로움이라는 거라.

 

아수라의 세계도 마찬가지고. 아수라는 추위와 더위 그리고 암흑이라고 하는 세계입니다. 항상 어두워져 있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곳, 내 편이나 남의 편이라는 구분 자체를 못 하는 곳,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만 만나면 싸우게 돼있는 거라. 그런 곳에 태어나는 세계 자체도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중생들 여러분들 태어나는 것?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그것도 마찬가지라. 똥자루와 같은 데에 입태하는 순간부터 받는 괴로움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시무시한 괴로움들을 받고 태어납니다. 이거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태어나든 괴로움이 있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모든 존재는 태어남이 곧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첫 번째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태어나는 걸 괴로움이라는 걸 실제 여러분들이 몸으로 느껴야 됩니다.

아까 태어남은 어떤 거라고 그랬습니까? 형성된 것도 괴로움이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실제로 모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태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거기서 자라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태어남을 괴로움으로 알 수 있는 근거는 형성된 것들입니다. 내가 몸과 마음의 조건지워진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볼 거 같으면 태어남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는 거라.

이 몸이 조건지워지고 형성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숨을 쉬어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 줄을 알아야 된다는 거라. 숨을 쉴 때 괴로움인 줄 아느냐는 거라. 숨을 들이쉴 때 일어나는 괴로움이 얼마나 많느냐는 거라.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나는 현상들이 참으로 괴롭다 하는 걸 여러분들이 실제로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을 '진리를 아는 단계'라고 그럽니다.

 

그럼 진리를 알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진리를 지키라고 그랬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명확하게 알아서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의심을 하지 않고 그것을 따라나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얘기하면 '아, 태어남이 괴로움이 아니다' 하고 얘기하더라도 '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하고 이해를 한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지키는 입장에서 부처님은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그랬는데 니는 왜 아니다 라고 그러느냐 하고 싸우는 것은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내가 지금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해서 그것을 확신하기 전까지 조사 확인해가지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진리를 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진리를 지켜나가는 입장이라는 거라. 그럼 진리를 지켜나가는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라는 거라.

 

그걸 통해서 내가 수행의 호흡이라든지 발걸음이든 이런 것을 통해서 아, 일어나는 것 자체가 참으로 괴로움이구나. 왜?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그만둘 수도 없고 그것을 중지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괴로움이구나 하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진리를 알기 전까지는 진리를 지켜나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손바닥에 불을 올려놓으면 퍼뜩 몸을 뺍니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이해했으면 그것을 진리를 지켜나가야 됩니다. 손바닥이 뜨거운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 손바닥이 화상을 입고 내 몸이 다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손을 뺀겁니다. 여러분들은 인제 '진리를 이해했으면 그 진리를 지켜나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하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부처님이 첫 번째로 얘기한 '자띠삐 둑카' '태어남이 괴로움이다' 하는 겁니다.

 

그 괴로움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수행을 통해서!

진짜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인가 하는 것들을 확인하라. 그래야 그 진리에 대해서 변함이 없게 된다는 거라. 그건 여러분만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고 2600년간 쭉 해왔던 분들이 변함없이 아, 태어남이 괴로움이구나 하고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그것을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진리는 항상 내가 지켜나갈려고 할 때 그것을 진리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감정으로 일어나는 괴로움은 진리의 괴로움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감정에 휘말려 들어가서 괴로움을 만들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감정의 괴로움을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괴로움을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