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미따 바니 (20090630)

담마마-마까 2021. 3. 5. 10:18

https://youtu.be/FwcHS_axuRw

* 미따 바니 (20090630)

 

··· 못 외웁니다. 그 한장 간단하게 쓴 거라고 하더라도 시간을 많이 들여가지고 생각하고 생각해가지고 문장을 올리는 거니까, 좀 읽고 경전에 대한 이해들 그리고 불교의 세계에 대한, 여기서 불교의 세계라는 건 테라와다 불교죠? 테라와다 불교의 세계에 대한 이해들을 빨리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미따 바니' 라고 하는 말 혹시 경전에서 들어봤어요? 편하게 우리 말로 얘기할 거 같으면 '요점만 얘기해라' 요점만 얘기해라. 길게 장황하게 말 늘어놓지 말고 요점만 말해라. 또 다른 의미가 뭐냐 하면 함부로 그냥 입에서 나온다 해가지고 뱉지 말고 '생각하고 나서 말하라' 생각하고 나서 말을 하라.

 

요즘은 어떻게 보면 말의 홍수입니다. 굉장히 미사여구도 많고 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은 아니죠? 살아가면서 점진적으로 배워나가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몸에 익혀지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꼭 그 여러분들이 철되면 인제 여름이 되니까 여름옷 새로 장만하는 거고 그래서 옷이 새로 하나 늘고, 또 겨울되면 겨울옷 하나 장만하고 그래서 옷이 하나 더 늘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고, 언어라고 하는 것은 배워져나가는 것이지 결코 뭐 유전자같이 타고날 때부터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각각의 언어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은 혼자 있을 것 같으면 사실은 말이 필요 없죠? 스스로 내가 생각하는 걸 내가 이해하면 그만이니까 말이 필요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써 언어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언어는 그런 도구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 도구가 아닐 것 같으면 자칫 오해를 사고 그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그대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사회에서는 대부분 내가 말한 것을 상대방이 그대로 이해하지 않죠?

 

가끔씩 스님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법문을 이렇게 하고 나면 사람마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릅니다. 내가 생각해서 법문한 주제는 요건데, 이 사람은 이렇게 받아들이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받아들인다는 거라. 또 이 사람이 이렇게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고 나서 똑같은 걸 음성으로 다시 또 녹음기를 통해서 들었을 경우에는 또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물며 법문도 그러는데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건 오산이겠지.

그게 여러분들이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하기 전에 많은 생각들을 합니다. 이 생각들을 해가지고 그 말을 하게 되는 거죠. 생각을 한 것들은 아직까지는 말로써 뱉어내지는 못한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할 때는 이 생각의 결과를 종합해가지고 말을 하는 거기 때문에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이 말에 투영됐다고 일단은 판단을 한다는 겁니다. 상대방은 말을 하는 것 그것만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 내 생각을 뭘 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항상 이런 오해들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생각하지 않는다 할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뱉어내버린다고 할 거 같으면 별 문제가 안 됩니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봅시다. 원숭이가 누가 위험하니까 동료에게 깍깍 소리를 질렀다. 그럼 모든 원숭이들이 그걸 똑같이 받아들입니다. 원숭이나 이런 동물들은 말이 단순하죠? 많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커뮤니티가 형성돼있는 상태에서는 요거는 위험을 알리는 소리다, 또 이것은 좋아서 내는 소리다, 이런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그룹에서 그런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받아들이는데 오해가 없는데, 인간은 그것만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라는 거라. 굉장히 많은 생각들로 인해서 굉장히 많은 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웅변가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써가지고 문장으로 표현해가지고 소설이나 시로 써서 나타내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게 됩니다.

 

어쨌든 인간이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의 주관을 갖다가 주관적인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그런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사실은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대로 전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하고 말하는 사람하고 필이 맞다고 그러죠? 보통. 그거는 뭡니까? 생각하는 것들이 비슷하고 또 흥미를 가지는 것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또 알아듣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고 다르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필요한 면이면서도 또 잘못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은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나서 말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지도하는 스님들이 말을 뭐에 표현하느냐면 '원자력 발전소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조그만한 구멍이 생겨도 큰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테라와다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테라와다, 보통 비유를 할 때? 여러분들 댐의 둑 봤습니까? 물이 차 있는 댐의 둑! '댐의 둑과 같다' 하고 그럽니다. 댐의 둑은 미세한 균열이 생기더라도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서 나중에는 댐 자체가 전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댐의 둑은 반드시 관리자가 있어서 항상 체크를 하게끔 됩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 반드시 물이 새어서 그 물의 압을 못 견뎌서 댐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되면 큰 재앙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관리를 하게끔 됩니다.

말은 그와 같고 테라와다 불교도 그와 같다 하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테라와다를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면 '너무 권위주의다' 그리고 '다른 사상을 용납을 못 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그런 오해들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둑이 균열이 생겨버리면 그건 감당을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변형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름대로의 주관을 덧붙여가지고 아예 다른 방향으로 설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잡을 길이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아예 애초부터 그런 부분을 배제해버리는 거라.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날 거 같으면 당장 쳐버립니다.

 

동남아시아 불교에서 각각의 신흥종교 그러니까 불교라는 이름으로 많이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이 보면 전부 소멸됐습니다. 역사적으로 봐가지고. 왜 그러냐 하면 신흥종교 생기지 마라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신흥종교가 생기면서 불교라는 이름을 띠고 있을 경우에 그 만든 사람이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것을 부처님 말씀에 개입을 시킨다는 거라. 개입을 시키니까 당연히 조금씩 변형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변형을 가져왔다는 것을 상가에서 판단만 할 거 같으면 당장 그것은 틀렸다 하고 중지를 시켜버립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교도주의적으로 흘렀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마만큼 부처님의 말씀이 소중하고 그 말씀 이상의 진리가 없다고 확신들을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어쨌든 이 말도 댐의 둑과 마찬가지로 원자력발전소와 마찬가지다 하고 비교를 하게 됩니다. 조금만 균열이 생겨도 큰 재앙을 가져오듯이 말은 반드시 신중하게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는 거짓말하는 것, 나쁜말 하는 것, 그다음에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말 하고 일언이구라고 그러죠? 그런 말 하는 것. 그다음에 여러분들도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안 해도 뭐 잘합니까? 잡담! 그렇죠? 그런 것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말의 악업이다 하고 경계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둑이 무너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언제 내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럴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툭 뱉은 말인데 상대방은 크게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큰 힘을 갖지 않지마는 그 하나의 말이 그룹을 이룰 경우에는 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한 사회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뭐 그렇더라' 이렇게 말을 만들어내다 보니까 당연히 그게 기정사실화 돼버리는 거라. 종교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들도 이런 패턴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부처님은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말을 할 때는 사실을 말해야 된다.'

말을 할 때는 그게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된다.'

그다음에 '가치가 있는 말을 해야 된다.' 도움도 안 되고 가치도 없는 일일 것 같으면, 쉽게 말해서 가치없는 거는 뭡니까? 말해봐야 한참 떠들고 놀았지만 공허한 것들은 가치가 없는 겁니다. 잡담 이런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이바지하는 말을 해야 됩니다.'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아, 내가 부처님 말씀을 조금 더 공부해볼려고 하고 수행을 해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이익이 있는데 오히려 반대적인 자극이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필요 없는 거라.

그다음에 '행복과 평온함을 가져오는 말을 해야 됩니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평화롭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오지 않는 말일 것 같으면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지혜를 가져오는 말을 해야 됩니다.' 그런 말로 인해서 내가 유추해서 아, 이것은 사실이구나 하고 판단을 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똑같은 일이 닥쳤을 때 아, 그 말을 떠올려가지고 ‘아, 이건 이렇게 대처해야지’ 해서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로운 그런 말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도움이 되는 말이어야 되고, 상대방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되나? 상대방의 입장을 손상시키는 말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런 말을 하는 자만이 부처님의 제자요 현명한 자들이고 바른말을 하는 그런 자들이다 하고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가장 말썽을 많이 일으켰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룹으로 묶어가지고 "육군비구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육군비구들은 모였다 하면 잡담하고 떠들고 노는 게 일이라. 스님들인데. 그러니까 누구 한 사람이 그 그룹에 끼어들 것 같으면 누구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닌 거라. 그 육군비구가 있으면 사람들이 가서 잘 접근을 안 할려고 그래. 아는 사람들은.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같은 스님이니까 가서 인사하고 이러다 보면 고마 거기에 휘말려가지고 이 다른 스님이 그냥 완전 나쁜 사람이 돼버리는 거라. 소문이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가서 뭐라고 합니다.

"말은 반드시 가려가면서 해라. 신중하게 해라." 하면서 한 게 뭐냐 하면 '미따 바니' 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스스로 사람이 하는 말들에 대해서 속지 않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좋은데, 물론 여러분들은 그런 능력들을 지녀나가야 됩니다. 그 판단을 나와 남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는가? 하는 것을 그것을 같이 판단을 해가지고 그런 말이 아닐 거 같으면 그 말에 속으면 안 되는 거라.

어쨌든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은데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 말을 하는 것에 내가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듣는 것도 신중해야 되지만은 말하는 것도 일단은 내가 신중해야 되는 거라.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나서 말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라는 거라. 너무 많은 말도 필요 없고,

 

그러고 나서 판단을 할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이 사람이 과연 어떤 내용을 말하는가 하는 것을 판단을 해야 됩니다. 내용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의미가 없는 말이 돼버립니다. 뭘 말하고 어떤 내용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가 하는 것을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도움이 되는가? 듣는 입장에서는 그 말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 말이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그 말이 얼마만큼 간결하게 말하고 있는가? 괜히 쓸데없는 것 덧붙여가지고 말하는 것인가 아닌가? 쓸데없는 게 덧붙여지면 덧붙여질수록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왜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만 받아들일려고 그 수준 이상이 될 경우에는 대부분 거부할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일단 못 받아들인다는 거라. 그래서 얼마만큼 간결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서 내가 얼마만큼 편안해지는가?

 

말하는 사람은 어떠한 차례로 말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판단을 해야 됩니다. 툭 결론부터 아무리 바른 것이라 해도 결론부터 툭 던져놔 놓으면, 쉽게 말하면 애한테 성적이 요즘 떨어졌다. 니 공부해! 일단 결론이 공부해 공부 열심히 해라. 이렇게 결론부터 먼저 던져놔 놓고 그러고 나서 서론을 풀어나갈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선 애는 반발감을 가집니다. 반발감을 가지면 그 서론 본론을 아무리 잘 풀어나간다고 해도 안 들어가. 그래서 차례를 분명하게 하라는 거라. 차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차례가 반드시 있다는 거라. 그 차례에 맞게끔 말을 하라는 거라.

 

그리고 상대방이 지금 듣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먼저 파악을 해야 된다는 거라. 듣고 싶지 않을 거 같으면 거 말해 봐야 소용이 없는 거라.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이 돼야 된다는 거라. 말할 땐 내가 아마 5분 정도 말해야 된다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5분이 조건이 돼야 되는데 중간에 말을 하다가 뭐 밥하는 걸 갖다가 뭘 해야 된다든지 아니면 잠깐만 어디 갔다 와서 끊어진 상태에서 또 이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그 조건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럴 조건이 되는가? 그런 것들을 일단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바른말을 하는가? 하는 거라.

이것을 '미따 바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듣는 사람도 미따 바니가 돼야 되고, 말하는 사람도 미따 바니가 돼야 됩니다. 그것이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바른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이 군중심리에만 끌려서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제자 이름인데 지금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에까'는 맞는데, 하나의 게송만 이해하고 외운다는 스님이었는데, 그러니까 '에까가타'가 되는데 아마 '가타' 용어를 안 쓰고 다른 말을 썼던 것 같은데 하여튼 '에까'라고 칩시다.

에까라고 하는 스님이 이렇게 사람이 없는 데서 막 부처님 법을 딱 하나 아는 게송을 하는 거라. 다른 스님이 거기에 왔어요. 그러니까 그 스님한테 아이고, 스님 잘 왔습니다. 아, 여기 법 좀 설해주십시오. 그 스님이 벙찌는 거라. 아무도 없는데 누구한테 말하라는 거냐. 아이, 아니라는 거라. 나는 부처님 법을 탁 얘기를 하니까 여기에 모여있는 천신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도 한번 해보지. 그 스님이 법을 설합니다. 천신들이 박수치기는커녕 천신들이 보이지도 않는 거라. 그래서 에이, 스님 거짓말을 이렇게 하느냐고. 또 다른 스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 다른 스님이 와서 또 부처님 법을 설했는데도 똑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에까 스님이 이상한 거라. 왜 이러지? 나는 분명히 부처님 법을 설하면 천신들이 다 내려와가지고 박수치고 좋아라 했는데, 다른 스님들은 이렇게 했는데 보이지도 않고 박수도 안 치느냐고.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아까 얘기했던 그 조건을 이 에까 스님이 충족했다고 그럽니다. 다른 스님들은 그 조건을 충족을 안 했다는 거라. 아무리 바른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이 조건들 "말하는 조건, 듣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천신들이 기뻐하고 그리고 박수칠 일이 없다는 거라.

하물며 천신들도 그러는데 인간이면 더 안 하겠어요? 여러분들도 말은 가려가면서 소중하게 할 줄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