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고통 2. 사성제의 진리-고통이란 무엇인가? (20090929)

담마마-마까 2021. 3. 7. 10:17

https://youtu.be/f8KYSetjodE

* 고통 2. 사성제의 진리-고통이란 무엇인가? (20090929)

 

아마 이렇게 한 스무 페이지 되는 것이 드물겁니다. 한 주제 가지고. 다른 주제는 한 페이지 아니면 두 페이지 뭐 꼴랑 많아 봐야 한 다섯 페이지 정도 이렇게 하는데 왜 이 둑카는 스무 페이지나 적었을까?

둑카의 이해가 직접적인 수행과도 연관이 있을 뿐 아니라, 이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바르게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아주 자세하게 적어놓은 겁니다이. 내 볼 생각하지 말고 내 소리 들을 생각해.

 

둑카(dukkha), 둑카하면 생각나는 게 뭡니까? 보통 사성제(cattāri ariyasaccāni) 그렇게 얘기하죠! 둑카(dukkha), 사무다야(samudaya), 니로다(nirodha), 막가(magga) 그렇게 얘기하죠! 고집멸도(苦集滅道)

둑카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둑카의 발생 즉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둑카가 소멸된 열반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열반에 이르는 길 방법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그렇게 사성제를 얘기를 합니다. 그럼 하나 하나로 치면 네 개라는 거죠? 사성제니까. 그 하나 하나에 또 세 개로 구분을 해놨습니다. 경전에 보면 그렇게 돼있죠!

 

둑카, 둑카를 아는 지혜 쉽게 말하면 '삿짜냐나(saccañāṇa)' 그러는데 그 둑카라는 진리를 아는 지혜.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둑카에 대해서 이 둑카가 뭔가, 이게 무슨 역할을 하는가, 무슨 기능을 하는가, 또 어떤 작용들을 하는가 하는 걸 완전하고 또 철저하고 또 그걸 닦아나가고, 그리고 내가 잘못가지고 있는 견해일 거 같으면 버려버리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걸 '낏짜냐나(kiccañāṇ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둑카를 '까따냐나(katañāṇa)' 라고 해가지고 완전하게 인식해서 아는 지혜, 그렇게 세 등분으로 해놔놓습니다.

 

고에 대해서도 세 등분으로 해놓고, 집에 대해서도 세 등분, 멸에 대해서도 세 등분, 도에 대해서도 세 등분 이렇게 해놔 놓죠! 그래서 고집멸도를 설명할 때 네 가지만 이렇게 서술형으로 써놓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에 대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또 하나에 대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그래서 열두 가지 문장으로 써놔놓았습니다.

 

참 부처님이 참 정확하신 분입니다. 그냥 무조건 이것이 고다 하고 그냥 던져 놓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고인데, 이게 왜 고인가, 이게 무슨 역할을 하는가, 낱낱이 다 분해를 해놓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알 때까지, 그러고 나서 취할 것 버릴 것 가려가지고 닦아 나가야 돨 것 닦지 않을 것을 완전하게 구분을 해주고, 그러고 나면 그것을 자기가 철저하게 닦아나가고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완전하게 이해를 하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세 등분으로 나누는 거라.

 

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멸, 도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구분해 놓은 방식이 부처님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일상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들은 그렇게 얘길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보면 불멸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설명들을 합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믿게끔 그렇게 만듭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식을 하고 있고, 그게 일반적인 종교의 패턴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절대 그런 패턴들을 안 해놨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속에 뱀이 있다. 이럴 것 같으면 이 속에 뱀이 있다 해가지고 보여주지는 않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뱀이 있다. 그럼 내가 뱀을 확인 할라니까 이거 무서워가지고 도저히 할 용기가 안 난다. 그럴 것 같으면 니가 용기 없는 걸 먼저 인정하라. 인정을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용기가 생기는 법을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거라.

그럼 요렇게 요렇게 할 거 같으면 용기가 생긴다. 쉽게 말하면 이걸 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뱀이 널 문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이 안에 있는 걸 이렇게 잡을 거 같으면 뱀은 안 문다.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밝혀 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내가 손을 내밀어 갖고 요 안에 있는걸 갖다가 탁 잡아보니까 어, 진짜 뱀이거든. 그럼 뱀이구나 하고 확인하는 거라. 이런 방법을 쓴다는 거라.

그냥 이거 안 보여주면서 "뱀이다" 하고 "믿어라" 이러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진리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선 둑카를 설명을 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둑카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해라는 거라. 모른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모르면 알도록 해야 되는 거라. 어떤 게 둑카인지를.

그래서 그걸 알도록 하고, 만약에 둑카에 대해서 이해를 할 거 같으면 이 둑카가 왜 생겨났는가 하는 걸 알도록 해야 되는 거고. 그걸 알고 나서는 자기가 아, 이게 둑카구나 하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를 하게끔 되는 거라. 이런 방식을 취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 만이 그게 자기 것이 되는 것이지 다른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부처님은 고집(苦集) 그리고 멸도(滅道) 라고 하는 방식으로써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라도 명확하게 구분을 세 가지로써 구분을 하지 않으면 또 사람들이 모른다는 거라. 그냥 이것이다 하고 던져주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일일이 다 구분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제 부처님의 방식인데 그리 할려면 최고 전제조건이 뭡니까?

여러분이 먼저 현 상태를 지금의 내 상태를 먼저 인정해야 돼는 거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지 간에 자기 자신은 자기가 더 잘 알 거 아니라? 그럼 내가 이걸 알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거는 자기가 안다는 거라. 그러면 알고 있으면 알고 있다고 해야 되는 거고, 모르고 있으면 모르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고, 그리고 요마만큼 알고 있으면 요마만큼 알고 있다고 얘기해야 되는 것이지 더 부풀려가지고 할 필요성은 없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일단 본질 자체를 접근을 못 한다는 거라. 아까 선등님 같이 “다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면 모른다고. 그러면 "다 알고 있습니다" 하고 얘기해선 안 되는 거라. "한번 읽어봤을 뿐입니다" 얘기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안 가져온 것에 대해서 다른 핑계거리를 잡아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접근을 못해. 진리라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현실을 인식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쉽게 말하면 진리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게 우선이 돼야되는 거라. 그게 돼야 만이 그것에 접근을 해나갈 수가 있는 거라. 항상 여러분들이 그 부분을 정확하게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왜 괴로움이라고 하는 걸 그냥 내가 해결해 주마 하고 다른 종교처럼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과연 둑카라는 것이 뭐기에 부처님이 그렇게 일체지자인데 이것을 낱낱이 구분을 해가지고 그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증득하게끔 만들었을까?

왜 그랬을 거 같애? 그거는 부처님이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내가 천국에 보내주겠다 한다 해가지고 부처님이 천국에 보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내가 너희들 둑카 이 고통 소멸시켜 주겠다 한다 해가지고 소멸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왜?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반드시 원인에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들인데 그걸 부처님이 어떻게 하겠어? 다른 도리가 없는데. 차라리 그럴 거 같으면 그 원인이 뭔가를 가르쳐줘가지고 그 원인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부처님의 정확한 방법이지,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고통이 있으니까 고통을 소멸시켜 주겠다 할 거 같으면 그게 되겠느냐는 거라. 그게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인제 사성제를 설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 둑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키가 있습니다. 열쇠!

둑카는 뭐로 가지고 이해를 하겠어요? 뭐로 가지고 이해를 해야 될까?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뚝딱 해가지고 없애주지도 못하는 거면, 이거 어치피 내가 조사·확인해보고 철저하고 완전하게 내가 수행해가지고 내가 아는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뭐로 가지고 이해해야 되겠어요? 뭔가 이걸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될 거 아니라. 뭐로 가지고 이해를 해야 되겠어요?

(수행자 대답) 어떤 경우든 수행은 자기 몸 가지고 하는 겁니다. 그거는 기본이니까 그거는 뭐 제차 얘기할 필요가 없는 거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여러분들 만날 삼법인 배워도 헛거라니까.

삼법인의 가장 기본 중의 하나가 무상··무아(無常 苦 無我), 고가 들어가 있으면 당연히 무상하고 무아를 가지고 이 고를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되고, 무아를 이해할려면 무상하고 고를 가지고 이해를 하도록 이렇게 되야 되는데, 그걸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무상한 성품을 알 거 같으면 아, 이게 고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거고, 무아라는 성품을 이해할 거 같으면 이게 고라고 하는 것을 더욱더 이해하는 게 부처님의 방식이라. 그래서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항상 이 방식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불변하는 요소는 없다는 거라. 그거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거라. 불변하는 요소가 없고, 항상 머무르지도 않고 변해가게 돼있다는 거라. 그렇게 변해가고 있으니까 변해가는 모습들을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라. 누구든지 가만히 있고 안 변하기를 바란다는 거라. 그게 사람의 인지상정이라. 지가 변하든 말든 간에 내 자신은 적어도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는 거라. 거 왜 그렇겠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둑카가 존재하는 출발점이 그건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둑카 자체가 없어. 둑카가 없는 게 아니고 정신적인 둑카가 없어. 그런데 어쨌든 둑카가 존재를 한단 말이라. 그럴 것 같으면 정신적인 둑카들이 있고 여러 가지 둑카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출발이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세상은 다 변해도 내 거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거고, 그리해도 어떻게 돼요? 내 거도 변하게 돼있는 거라. 변하니까 어떻게 돼요? 괴로운 거라. 불만족스러운 거고.

그러면 둑카를 뭐로 가지고 이해를 해야 되겠느냐는 거라. 무상으로써 이해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무아를 가지고도 그렇게 이해를 하는 거고.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둑카(dukkha)라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둑카(dukkha) 이게 두(du) 하고 카(kha)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두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여러분들 잘 알고 있는 둑카의 반댓말이 수카(sukha)죠! 그럼 뒤에 카는 똑같죠? 앞에는 두(du)고 또 하나는 수(su)라. 두가 뭐고 수가 뭐라? 두(du)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수(su)는 그럼 뭐겠어요? '같다'는 뜻입니다. 그럼 카(kha)가 무슨 뜻입니까? '버티어낸다. 지속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둑카는 무슨 뜻입니까? '다른 걸 지속하고 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나하고 견해가 다른데 견해가 다르다고 소리도 못 하고 그냥 아, 하고 참고 있는 거라. 힘들겠지? 나하고 견해가 같다, 그 견해가 같은 걸 지속적으로 계속하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기분 좋다는 거라. 그게 둑카, 수카라.

같은 걸 지속하느냐 다른 걸 계속 지속해나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 차이로 인해서 불만족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이 있는 거고, 고통이 있는 거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용어로써 정의를 해놓은 겁니다.

그런데 둑카라는 의미는 다른 것들이 계속적으로 지속해나간다는 거라. 한 번만 탁 해버릴 거 같으면 문제가 아닌데 그렇게 안 되거든. 왜? 변하니까! 변하니까 지속돼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인제 둑카의 의미인데 '둑카'를 보통 뭐라고 표현들을 해놓았느냐 하면 '불만, 불안정하다, 괴롭다, 허무하다' 이런 얘기로써 얘기를 했습니다.

 

이게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던 단어일까?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다들 행복이란 것을 찾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많았는데 괴로움을 찾아가지고 그 원인을 밝혀내고 하는 방법을 취해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이전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진리다 하고, 그게 뭐냐 하면 사성제라는 거라. 그 사성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둑카라는 거라. 사성제의 처음을 수카로 잡아놓지는 않았다는 말이라. 둑카로 잡아 놨다는 거라. 이전에는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설한 적이 없다는 거라. 다른 종교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오직 지금까지도 부처님이 유일한 방법이지 다른 방법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둑카의 의미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반대라는 얘기하고 마찬가지거든. 지속하는 것이 다르니까 내가 지속해나가고 싶은 거는 뭡니까? 이런 방향인데 그 반대방향이라는 얘깁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그 진리를 발견하겠어요? 진리는 누구에게나 드러나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도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항상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진리입니다. 그렇죠? 그럴 거 같으면 우리도 적어도 생각할 수 있어야 되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공기를 ‘시원한 공기를 더 마시고 싶다’ 그런 바람을 가진다. 그런데 시원한 공기는 절대 내가 더 마시고 싶다 해가지고 더 마셔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시원한 공기를 더 마실려고 할 거 같으면 계속적으로 들이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들여마셨으면 반드시 내뱉어야 된다는 거라. 내뱉지 않으면 다시 들여마실 수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의 바람은 계속 들이마시기만 하길 바란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불만족이 생겨난다는 거라.

 

세상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멀리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내가 경험하고 내가 또 살아있는 이것 자체가 바로 담마라는 뜻입니다. 담마가 진리라고 할 거 같으면 보편타당한 것이고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이걸 우리가 경험을 할 거 같으면 둑카를 이해하게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숨을 들이쉬는 데서 '아, 이것이 둑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할 것 같으면 진리를 체험하게 된다는 거라. 저 멀리 가서 진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게 인제 진리를 찾는 방법입니다.

단,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거 같으면 절대 진리는 찾을 수가 없겠지. 왜?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은 진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고자 한다는 거라. 그래서 둑카라는 거라.

 

자! 인제 둑카에 대한 의미는 파악을 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부분이 1페이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은 행복하기를 추구하고 바라고 나아가고 있다 하는 것으로써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찾아가는데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우리 삶 속에서는 우리 살아가는데 경험되는 것은 즐거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그런 건데, 그 즐거움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괴로운 것도 또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둑카는 뭐로 가지고 찾는다고 그랬어요? 변하는 것에서 찾는다고 했죠.

그러면 쉽게 말하면 즐거운 곳에서도 내가 둑카를 경험하게 되는 거고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괴로운 곳에서도 내가 둑카를 경험하게 되는 거고, 어떤 것이든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것들에서 모든 대상에서 둑카를 체험하고 이해하고 할 수 있게끔 된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게 인제 1페이지에 있는 겁니다.

 

조금 더 구분해서 얘기하는 내용이 2페이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둑카라고 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일곱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둑카 둑카따(dukkha dukkhatā 苦苦性)' 해가지고 보통 한문으로 고고(苦苦)라고 하죠!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앉아있는데 다리가 아프다 참기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 또 누가 애를 먹여가지고 내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일어나는 정신적인 괴로움 이런 것들이 쉽게 말하면 둑카둑카따 라고 얘기합니다. '괴로움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괴로움들'

 

그다음에는 뭡니까? '변화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 아무리 즐거운 것도 즐거운 그대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변한다는 거라. 괴로운 것도 변하는 거고 즐거운 것도 변하는 거고 모든 것들이 변한다는 거라. 그 변화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돈을 십 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십 원이 항상 나한테 있었으면 좋겠는데 요게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써야 되는 거고 아무리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이 끝날 때가 있다. 이렇게 변한다는 거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변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연결되고 절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괴로움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위빠리나마 둑카따(vipariṇāma dukkhatā 壞苦性)' 그렇게 얘기합니다. '변하는 성질을 가진 괴로움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상카라 둑카따(saṅkhāra dukkhatā 行苦性)' 형성된 것, 형성된 것!

형성된 것은 어떤 뜻이냐면 즐겁다 할 거 같으면 즐거움을 계속 유지할 것 같으면 얼마만큼 노력을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술을 먹어서 즐겁다. 그럼 술 안 먹으면 어떻게 돼요? 즐거움이 당연히 끝나버립니다. 그러면 그 즐거움을 계속 유지시켜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끊임없이 술을 먹어야 되는 거라 논리대로 할 거 같으면. 그걸 '형성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 즐거운 것들 좋은 것들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형성을 해야 됩니다. 내가 돈이 많아서 즐겁다 행복하다,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된다는 거라. 이걸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 거라.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끊임없이 씻겨주고 닦아주고 해야 된다는 거라. 왜? 이 몸은 형성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괴로움. 어떤 경우에는 진짜 육체적으로 괴롭고 정신적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보다도 '형성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더 클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부처님이 봤을 때는 괴로움이라는 거라.

 

보통 이렇게 크게 세 부류로써 나누어 주는 경우가 있고,

또 그다음에 다시 또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감추어진 괴로움, 드러난 괴로움.

감추어진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거냐면 이빨 같은 통증. 이빨은 사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놈이 완전히 썩어가지고 진짜 아프기 전까지는 요걸 잘 몰라. 이런 것들을 쉽게 말하면 감추어진 괴로움이라고 그럽니다. 나중에 탁 터져봐야 그게 괴로운 줄 안다는 거라.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감추어진 괴로움이 없습니까? 많죠?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감추어진 게 충족하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서 감추어 두는 거라. 그런데 나중에 일정 기간이 지나서 결국 충족이 못 됐다. 그럼 그때사 괴로움이 탁 터지는 거라. 이 탁 터지는 괴로움은 어디서 연유된 거라?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쭉 진행되어 왔던 것들입니다. 요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통 감추어진 것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은 그렇다고 그것이 없다고는 얘기를 못 한다는 거라.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더라도 원인 없이 지가 그냥 아프겠어? 지속적으로 뭔가 자극을 받았을 때 이게 머리가 아파지는 거라. 그런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도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애써 아니다 하고 나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뿐이라. 이런 걸 감추어진 괴로움이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드러나는 괴로움, 드러나는 괴로움은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당장 내 몸에 뾰족한 송곳으로 찌르면 당연히 아프겠죠. 그건 것들이 드러나는 괴로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뭐 칼에 베인다든지 이런 것들.

둑카를 나눌 때는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는 것은 간접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

직접적인 것은 쉽게 말하면 지금 일어나는 고통 정신적인 거든 육체적인 거든 이런 것들로 인해서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것. 이런 것들은 직접적이라고 그럽니다.

간접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괴로움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기로 태어났으면 그 아기는 끊임없이 뭔가를 구해야 돼. 구함으로 인해서 안 구해지고 하니까 괴로운 거라. 그러니까 그 괴로움은 어디서 토대가 되는 거라? 태어난 것이 토대라는 거라. 이걸 간접적인 괴로움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받는 거라. 태어난 것 자체가, 태어남 자체는 어떤 경우든지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이런 개념이 없으니까, 그런데 어쨌든 태어났기 때문에 괴롭다는 거라. 그걸 간접적인 괴로움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을 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둑카를 설명을 할 때 둑카따 라고 할 때는 요렇게 일곱 가지로 보통 구분들을 해놓습니다.

그게 인제 이 일곱 가지 속에는 통상적으로 둑카라고 하는 것들은 다 포함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 그러면은 그 밑에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둑카를 철저하게 바라보고 원인을 밝히지 않고, 쉽게 말하면 감추어둔다고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냐 하는 게 이 두 번째 부분에 있습니다.

피할 수 있습니까? 피할 수 있으면 그 방법을 좀 내한테 가르쳐도.

타조가 쫓아오는 사냥꾼을 피하기 위해서 머리를 폭 쳐박는다 해가지고 지 몸이 안 보입니까?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피할 수 있을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둑카를 피할려고 한다 해가지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이 피할 수 없는 것, 내가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되는 것, 이게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먼저 알아라는 거라. 그래야 만이 아이고 이거 도저히 힘들어서 못 짊어지고 가겠다 싶을 때 아까워도 어떻게 해? 내버리고 가는 거라. 그래야 둑카를 버려버릴 거 아니라!

 

둑카의 속성을 낱낱이 분해해가지고 알 거 같으면 '아, 이 둑카라는 거 이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구나' 하고 인식을 해야 만이 요걸 버려버린다는 거라.

이 둑카가 있으므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내가 인식하고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살아갈 준비를 하게끔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서 착각을 합니다. 둑카 괴로운 것이니까 이거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거는 감춰두고 아예 꺼내지도 말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일부 학자들도 그런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거 말고 부처님 말한 거 좋은 거 얼마나 많은데 그거 그냥 얘기하자는 거라.

 

쉽게 말하면 죽음에 대해서 얘기한다. 뭐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스님 하고많은 것 중에 뭐하러 그걸 얘길 합니까? 섬찟하게" 그런다는 거라, 사람들이. 그런데 이거 버려두고 갈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할 거냐는 거라,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것만 끄집어낸다 해가지고 요걸 갖다가 감추어두고 비밀스럽게 한다 해가지고 요걸 영향을 안 미치는 것도 아니고 안 드러나는 것도 아닌데 어떡할 거냐는 거라.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요놈을 정확하게 더 끄집어내갖고 완전하게 없애버리라는 거라. 없애버리고 원인을 없애버릴 것 같으면 뭐 그럴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것만 찾을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또 좋은 것들만 들을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거라. 그것도 엄밀하게 보면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둑카가 안 된다고 보장을 누가 하느냐는 거라. 즐거운 것들 이런 것들을 볼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얻을려고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얻지 못하면 당연히 둑카가 된다는 거라. 결국에는.

물질적인 방식으로써는 둑카의 끝을 알지 못한다는 거라. 아무리 다른 것으로 대체할려고 해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감각적인 욕망이 증가하면 둑카도 증가한다는 거라. 즐거운 거 자꾸 쫓다가 보면 오히려 이 둑카를 없애기 위해서 이리 했는데도 오히려 반대라는 거라. 오히려 둑카를 더 키우는 형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게 둑카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선지식들이 있지만은 이렇게 둑카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선지식이라도.

 

그러면은 부처님이 둑카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겠습니다.

오계에 반하는 행동은 확실히 둑카로 향하게 한다. 불행으로 이끌게 한다 하는 사실을 명심해서 우선 수행이 안 되더라도 오계를 지키라는 거라. 오히려 쉽게 말하면 행복하고 좋은 것을 쫓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지금 현재 것들을 적어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둑카를 더 일으키지는 않는 방향으로 만들어라는 거라.

그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다시 둑카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둑카를 경전에서 한번 쭉 간추려봤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숙제 내준게 있죠? 왜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 중에서 늙음이(병듦) 빠졌고, 어떤 경우에는 소까빠리데와 라고 하는 그 문장 슬픔 비탄이라고 하는 그 문장이 빠지고 하는 것도 있는데 이게 어떤 것이 맞느냐? 그거 한번 해봐라고 했죠? 그렇죠? 여러분 토론한 게.

(수행자 질문)

그래 병고- 브야빠디, 브야디삐(byādhipi). 내가 병고라고 안 하고 늙음이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내가 말을 잘못했다. 병고!

여러분들이 결론 내린 것은 <생노사는 제행무상의 법칙에 피해갈 수 없으나 병은 피할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이 있기 때문에 병을 사고에서 제외한 것이다.>

병은 왜 제행무상에서 제외가 돼? 이건 무슨 논리라? 누가 이렇게 결론 내렸어?

(수행자 대답)

병을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육체적인 병들 이것만 병이라고 부처님이 얘기했습니까? 가장 큰 질병은 뭐라 그랬어요? 배고픔이 가장 큰 질병이다. 그럼 배고픔도 질병에 해당이 돼.

(수행자 대답)

그 부분은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잘했어. 그렇게라도 의견을 모을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이게 연찬(硏鑽)의 중요성입니다. 연찬이 물론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버리면 좀 곤란한데, 어쨌든 결론내려가지고 자기가 어느 정도 다른 견해 가진 자들과 동일해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견해를 확립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자띠삐 둑카' 하는 부분부터 한 번 읽어보십시오. 왜 그러냐면 여기에 적은 거하고 다른 경전에 나온 거하고는 다릅니다.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ṁpi dukkhaṁ,

자띠삐둑카 자라삐둑카 브야디삐둑카 마라남삐둑카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pi dukkhā,

소까빠리데와 둑카도마낫수빠야사 삐 둑카

 

자띠삐둑카 자라삐둑카 그다음에 브야디삐둑카 마라남삐둑카 그렇게 돼있죠? 맞습니까? 어떤 경우들은 브야다삐라고 이렇게 태국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브야디삐든지 브야다삐든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브야다삐가 들어간 게 있고 어떤 경우에는 '소까빠리데와 둑카도마낫수빠야사 삐 둑카'라고 해서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괴로움, 절망이라고 하는 괴로움' 이 부분 구절이 빠져있는 것도 있고 어떤 경우는 들어있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뭐냐 하면 이 두 문장 중에 하나는 반드시 들어있다는 겁니다. 두 문장이 다 들어있는 곳도 있고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는 있게 돼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병들음'이 없으면 반드시 그 문장에는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괴로움, 절망이라고 하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그런 문장이 들어있고 안 그러면 이 슬픔 비탄이 빠져있으면 병들음 이라는 것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여러분 논리대로 할 것 같으면 아,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어쨌든 그 논리가 바른 것은 아닌 것 같애 이.

 

그러면 부처님이 어떨 때는 이걸 빼고 어떨 때는 요걸 빼고 왜 이렇게 했을까요? 보통 우리는 '삽반뉴따냐나(Sabbaññutāñāṇa) 일체지혜를 가진 부처님'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부처님이 기억력이 왔다리갔다리 해가지고 어떨 때는 여기 넣고 어떨 때는 여기 안 넣고 그렇게 했을까? 그렇게 했을 수는 없겠죠!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원인을 밝혀놓기를 뭐라고 해놨느냐 하면 이거는 절대 부처님 잘못이 아니다.

이 문장에서 병들음이 빠져있는 문장을 전체를 한번 추려봤어요. 추려보니까 공통적인 게 딱 뭐가 나왔느냐 하면 율장! 율장 부분에서만 한 두군덴가 그래. 경장에는 그런 게 없어. 경장에는 겨우 하면 이 병들음은 들어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 슬픔 비탄 이러는 이 부분의 한 문장 정도 빠져있는 경우가 있기는 해. 그런데 인제 대부분은 동일해. 이 전체가 다 들어있어요.

 

율장 부분은 보면 이 부분이 빠져있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이 설명하기를 뭐라고 하느냐면 이거 틀림없이 일차결집 할 때 율장은 누가 송출했어요? 아난다가 했죠. 아, 율장은 라훌라가 했죠. 경장은 아난다가 했죠! 라훌라 같은 경우에는 부처님 말씀을 직접 지근거리에서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오해가 있었을 수가 있다. 그래서 1차결집 때부터 아예 요렇게 만들어져버린 거라. 율장을 송출한 분이 이 부분을 빼고 송출을 했다는 거라. 그런데 다른 장로 스님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착각을 하게 된 거라.

 

경장은 그대신에 경전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이 보면 부처님에게서 설명 듣는 경전은 대부분이 유통을 합니다. 이 부분을 부처님이 얘기했다 하면 직접 안 들은 사람에게도 전하고 했는데 율장 같은 경우에는 그것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먼저 공고하는 형식으로, 이거 하지마라 이건 요렇게 해라. 그러면은 어떻게 되느냐면 요부분이 다른 사람한테까지 다 전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버린다는 거라. 이런 것들로 인해서 율장을 송출했던 지계범자 같은 경우는 이 부분을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군데에서 빼버리고 송출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후대에 와가지고 사람들이 과연 이게 어떤 게 맞느냐?

그래서 판별을 보통 어떻게 하느냐면 '늙음(병듦)'이라는 항목에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부분이 포함될 수가 있는가? 그렇지는 않죠? 늙음(병듦)에는 그 부분을 포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이라고 하는 항목에는 늙음(병듦)의 항목을 포함시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걸 후대에서 나중에 정리하라 할 거 같으면 대부분 늙음(병듦) 부분은 빼버립니다. 늙음(병듦)이 여러분들 말마따나 이걸 피해갈 수 있는 상황이래서 빼는 게 아니고 경전에 그렇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늙음(병듦) 부분은 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늙음이 아니라 '병듦'! 병듦 부분은 뺄 수가 있는데 뒤에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이 부분은 빼지를 않는다는 거라.

어쨌든 이 병듦 부분을 포함을 할 거 같으면 팔고(八苦)의 형태가 되는 거라. 빼면 칠고(七苦)의 형태가 돼는 거라. 대부분이 이렇게 주석을 합니다. 그래서 설명하는 사람이 일곱 개를 설명하는 경우들이 있고 여덟 개를 설명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은 이 여덟 가지는 시종일관 똑같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걸 틀리게 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뒤에 완벽하지 못한 부분들로 인해서 그런 오류들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절대 이 부분을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갖다가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를 않습니다.

단, 그 부분을 내가 체험해보고 통찰해보고 나서 아, 이랬을 것이다 하고 스스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걸 후대 사람들이 발견한 게 뭐냐 하면 일곱 가지로 정립해 놓았을 때는 '병들음' 부분은 '슬픔 비탄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 속에 포함될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빼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인데 여러분들에게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그겁니다.

그런데 이걸 제행무상 법칙에서 피해갈 수 있다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스님 입장에서는 좀 의외였어요. 어떤 경우든 제행무상에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들음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아까도 얘기했죠? 단지 둑카라고 하는 것은 드러난 둑카가 있고 드러나지 않는 둑카가 있습니다. 그 드러나지 않는 둑카가 병들음이 포함이 안 되나? 지금 내가 건강하다 해가지고?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제행무상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거라.

자! 그게 인제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던져줬던 것들이고

 

그러면 인제 하나씩 구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띠(jāti)' 라고 하는 '태어남', 태어남은 여러분들에게 한번 얘기해줬죠? 그걸 구분을 굉장히 잘 해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해놔놨기 때문에 그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태어남이 있을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일 경우에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이 있고 또 하나는 거기에 자궁에 붙어서 성장해서 밖으로 나올 때까지의 과정이 있고 이렇게 두 개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생입태' 한문으로 풀이할 때 그렇게 얘기하고, 그다음에 '태생입태' 그러니까 태에 들은 거, 난생일 때는 태에 들기까지의 과정.

인제 논란이 되는 게 뭐냐 하면 난생입태 과정, 의학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아기가 생기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아기가 생긴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뭐라고 얘기해요? 그렇게 얘기 안 하죠? 정자와 난자는 당연히 있어야 되는 거고 하나 더 첨가되는 것이 있습니다. 피! 이것에 대한 정자와 난자와 피를 근원으로 해서 태, 쉽게 말하면 태어남이 시작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아기를 가지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상태 그리고 그런 피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불교적인 견해로는.

그래서 반드시 정자와 난자와 의도하는 것에 따른 피 이것이 겸해져야 만이 난생입태(卵生入胎)가 된다하고 불교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업을 지었고 불선업을 짓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 행위들이 조건지워져가지고 그 조건이 그다음생을 태어나게끔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전혀 안 해버린다는 거라. 이게 필요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의학적인 견해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그다음생은 일어나니까.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거라. 의도, 의도하는 피로 인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업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음으로 다시 그게 원인이 돼가지고 그 결과를 받게끔 된다는 거라. 이게 하나가 첨가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것이 더 정확할지는 여러분이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말한 방법이 오히려 더 정확한 벙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똑같은 유전형질을 가지고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 몸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짐승이 얼마든지 나와야 된다는 거라. 또 다른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별종의 성질들이 자주 출현을 해야 되는 거라. 왜? 그냥 두 개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기만 해서 태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래요? '지어온 성향, 습관, 업'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라.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원숭이가 태어나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거라. 그런 특징입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에도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로 얘기해놓았습니다.

보통 습생(濕生)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이끼 같은데 축축한데 그걸 매개로 해서 태어나는 것, 애벌레 같은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습생이라고 얘기합니다. 습생도 이 조건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이 세 가지 불교에서 말하는 조건.

 

그다음에 신이라든지 그다음에 아귀, 지옥 이런데 태어나는 것들을 뭐라고 그럽니까? 화생(化生)이라고 그러죠. 화생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조건을 갖춘 자로서 태어나게끔 됩니다. 그것을 화생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의학적인 용어로 얘기할 것 같으면 이런 거는 도저히 설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게 설명이 가능한 거라. 업력으로 인해가지고. 그래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걸 보통 화생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성인의 몸으로 탁 그대로 태어나는 거고. 보통 그거를 불교에서는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존재, 존재하는 존재의 형태로서 태어나진다는 겁니다.

천신들을 그릴 때 대부분 늙은 모습으로 그리는 법이 없습니다. 아주 앳된 소년의 형태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소년의 형태로 있게 됩니다. 왜? 그 천신들은 늙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늙음을 알지를 못해. 죽음 직전에야 쉽게 말하면 드러나지지 않았던 숨어져 있던 고통들이 드러나지는 형태들을 띤다는 거라. 인간하고는 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라.

 

사람 몸과 같이 이게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고 바로 그냥 태어나지는 거라. 그러니까 나하고 내 집 어디에서 탁 태어났다 그러면 내 아들 내 딸이 되는 거고, 저 집에서 태어났으면 저 집 어디에서 나왔다 할 거 같으면 저 집 아들 딸의 천신이 되는 거고. 이게 여기 하고 저기 하고 두 집의 중간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이미 성인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태어날 때 어디를 보고 있었느냐 우리 집을 보고 있을 거 같으면 내 아들이 되는 거고, 만약에 어느 집도 보지 않았으면 어느 집 아들도 아니라고 그래. 경전에 그게 무수하게 써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화생이라는 형태입니다.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고.

(수행자 질문)

부모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그런 식으로 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틀림없이 자기의 업식에 인해서, 업에 인해서 여기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의학의 논리로 할 거 같으면 이 부분이 해당이 안 되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날 수가 없는 거라. 천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 거라. 지옥도 마찬가지고. 의학적인 견지에서는. 왜? 지옥이든지 아귀계든지 천상은 정상적으로 어린애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는 거라. 성인으로서 태어납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태난습화(胎卵濕化) 이렇게 해가지고 사생(四生)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태나 생겨나는 것의 첫 시작을 보통 태어남 자띠다 하고 얘기합니다 불교에서. 자띠의 시작이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열달 동안의 과정을 저번에 한 번 설명들을 했고, 프린트물에 있으니까 그거에 따라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과정을 겪어서 태어나는 자띠(jāti) 태어남을 왜 괴로움이라고 했는가?

아까 뭐라고 했어요? 태어남은 직접적인 괴로움이라고 했어요, 간접적인 괴로움이라고 했어요? 간접적인 괴로움이라고 그랬죠. 태어난 거 자체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거라. 물론 태에 있을 때 갖가지 괴로움들을 받고 하는 그런 것들은 직접적인 것이지만은 어쨌든 그것 자체는 직접적인 괴로움은 아니라는 거라.

무엇이 모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늙고 병들고 죽고 갖가지 고통을 받는 모태가 되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축생계에 태어났으면 그 먹고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 괴로움의 원인은 뭡니까? 태어나는 것이 원인입니다.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거라. 인간도 마찬가지고 어떤 윤회계에 있는 것이든 다 마찬가지로 괴로움들을 가지는 거라. 육도윤회는 이 괴로움 태어남의 괴로움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거라.

천상에 태어난다고 해서 그 괴로움이 없습니까? 죽는 괴로움도 있어. 늙는 괴로움도 있고 급작스럽게 나타나서 그렇지. 그게 원인이 뭡니까?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본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거의 한 달에 두세번 꼴로 읽는 경전이 있습니다.

'법의 요람'이라는 그런 경전입니다. 그걸 항상 독송을 하는데 그걸 독송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안 태어나고 싶어서. 안 태어나고 싶어서! 쉽게 말하면 늙는다는 것도 점진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늙는 거 쉽게 내가 알 수 있는가요? 그리고 그렇게 늙어가고 나서 죽고 나면 내가 어디로 가겠어요? 또 다음 생을 받는다는 거라. 다음생을 받을 때는 어떻게 받아? 내가 지은 행위에 인해서 받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다음 생을 받을 때 잘 사는 집에 태어날 수도 있고 못사는 집에 태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저기 지옥에 태어날 수도 있고 그렇다는 거라. 그렇게 계속적으로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를 계속한다는 거라. 그런데 누구든지 잘사는 집 좀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집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거라. 그게 인제 쉽게 말하면 법의 요람이라는 겁니다.

 

그러고 싶으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내가 지금 짓는 행위들을 좀 더 좋은 행위들 바른 일들을 많이 해야 만이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좀 더 좋은 거 많이 하자, 선행을 많이 하자 하고 되뇌이게 되고, 그것도 어쨌든 또 변해가지고 나쁜데 태어나기도 하고 계속 윤회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것도 못 보겠다 할 거 같으면 아예 태어나지를 말자 하고, 인제 안 태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둑카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둑카의 원인을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이 법의 요람이라는 경입니다. 그걸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읽어. 그러면서 아이고, 내가 빨리 이 윤회고로부터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윤회고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면 적어도 나쁜 일 하지 말고 좋은 일 하자. 그래서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자 하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둑카 부분에서 자띠(jāti) 부분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자띠 부분은 쭉 읽어보면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태어났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일어난다. 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안 태어나면 됩니다. 더 이상 재생 안 하면 됩니다. 안 태어나면 이 고통 안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난 거 자체는 괴로움이다. 그게 이 자띠의 의미입니다.

 

모든 존재는 항상 둑카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태어남이 없으면 이 둑카 괴로움도 없다. 그래서 이 태어남이라는 거 자체, 자띠삐 둑카(jātipi dukkhā)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자띠는 둑카라는 것들을 이해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