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성스러운 생활(아리야 지-위따, 어부이야기) (20091203)

담마마-마까 2021. 3. 9. 10:14

https://youtu.be/wu_IXk1AQS0

* 성스러운 생활(아리야 지-위따, 어부이야기) (20091203)

 

오늘은 목요탁발법회 날입니다. 조금 전에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공양 올리는 것을 부처님 당시 때 일화를 가지고 한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리야(ariya)' 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성스럽다'는 그런 뜻이죠.

'지위따(Jīvita)' 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생명을 뭐라 그래요? 생명을 '지와(jīva)'라고 그러죠! '지위따(Jīvita)'라고 할 것 같으면 '생활하는 것', 생활을 얘기합니다, 살아가는 것, 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각각의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동남아시아 지역 쪽에 보면 어부 계통들이 불교도는 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도가 되면 어부의 일들을 잘 안 할려고 그래요. 생명을 죽이는 거니까.

부처님이 이렇게 보니까 저쪽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가 한 분 있는데 그분이 깨달음을 이를 수 있는 때가 됐다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판단했을 때는 그 집으로 갑니다. 직접 가서 법을 설하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방법입니다. 될 놈한테 가서 법을 설해서 되게끔 만든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아직 깨달을 능력이 안 됐다든지 때가 안 된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맞게끔 법을 설해줍니다.

 

항상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그분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만 하더라도 그분들에게 직접 가지고 있는 괴로움, 이런 것들을 해결해주게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때가 안 됐을 경우에는 부처님이 그런 자애심을 가지고 문제를 들어주고 또 그 사람들에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럼 대부분 그것으로 그치는 경우들이 많은데, 때가 됐다고 생각이 될 때는 보통 부처님이 혼자 가시든지, 아니면 다른 부근에 있으면 다른 비구스님들하고 같이 이렇게 그 지역을 갑니다. 이때는 다른 비구스님들 하고 탁발을 갈 때였습니다.

 

탁발을 가다가 아리야 라고 하는 어부가 때가 이르렀다 하고 판단되어서 그 앞에 가서 말을 붙이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부처님이 앞에 와서 말을 붙이면 굉장히 고마워합니다. 이미 그때는 인도 내륙 쪽으로는 부처님이라는 명성이 알려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부처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참 영광이다 하는 생각들을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 부처님이 탁발을 가시다가, 탁발을 갈 때는 일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하고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직접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또 그 사람에게 법에 대해서 설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가던 길을 멈추고 가서 어부에게 얘기를 하니까 굉장히 고마워하죠. 그 앞에서 어부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 하기 전에 부처님이 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그런 시기가 됐다고 판단되는 사람한테 직접 찾아가느냐면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깨달음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 그렇게 됩니까?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보다는 욕망에 휩싸여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흥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해는 하는데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아이가 지금 공부해야 된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부모가 공부하라 해서 공부합니까? 그거 잘 안 합니다. 물론 할 때도 있고 그렇지마는 전심전력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훈련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고 항상 어디론가 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제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가 됐다고 판단돼서 이 앞에 갈 경우에는 반드시 그때를 딱 잡습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공부해라 할 때는 공부를 안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공부해야겠다고 탁 순간적으로 이해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부처님이 굉장히 잘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특별한 부처님의 능력이라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그 앞에 가서 이 아리야라고 하는 어부에게 처음부터 법을 설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난다에게 물어봅니다. “아난다야, 너는 이름이 뭐냐?” 아난다는 예, 스승님 나는 이름이 아난다입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를 해서 항상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있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난다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난다라는 뜻이 기쁘다는 그런 뜻입니다.

 

또 옆에 다른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아름이 뭐냐?” 스승님 저는 이름이 뿐냐입니다. 뿐냐는 여러분들이 알죠? 공덕이라는 그런 뜻이 있는데 공덕을 쌓는다. 인격을 완성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공덕행을 자꾸 쌓고 마음의 단점들 이런 것들을 없앴기 때문에 인격을 완성한 자다. 그래서 뿐냐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옆에 스님한테 물어봅니다. 스승님 저는 밧디야입니다. 밧디야라는 뜻은 바르다. 선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너는 선하지 않은 것, 불선을 없애고 선의 경지에 이르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밧디야(Bhaddiya) 밧다(Bhadda)라는 이름을 지니기에 적당하다.

 

또 “너는 이름이 뭐냐?” 예, 스승님 저는 마하나마입니다. 마하나마는 최상, 그리고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너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려서 해탈에 이르는, 최상의 경지에 이르른 자다. 그러므로 너는 마하나마 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다 하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부 아리야 입장에서는 기대가 되는 거라. 자기 이름을 물어보면 자기 이름에 대해서 칭찬할 거니까. 보통 이름들을 보면 여러분들도 이름을 부모님들이 나쁜 이름 지어주는 사람 있습니까? 그건 없죠! 대부분 좋은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뜻풀이를 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좋은 이름입니다. 아무리 발음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음 우리 여기 수수옥 같이 발음하기는 좀 뭐하지만 의미는 굉장히 좋은 의미들이거든. 다들 이름들이 그렇다는 거라.

 

그런데 이름이라는 것은 어쨌든 명칭입니다. 명칭일 뿐인데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해서도 안 되지만 그걸 또 지나쳐서도 안 됩니다. 가끔씩 그러죠? 이름값 해라 하고 얘기하죠? 자기 이름에 대해서 지지말아라 하는 거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름을 받았을 때는 이름에 걸맞게끔 살아가야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지만 명칭 이상의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경책하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리야에게 물어봅니다. 아리야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성스럽다는 뜻입니다. “너는 이름이 뭐냐?” 아리야입니다. 아리야에 대해서 얼마나 부처님이 칭찬할 말이 많겠어? 그런데 부처님이 “너는 아리야란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리야라는 것은 생명을 죽이지 않고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그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아리야라고 부르는 것이지, 너와 같이 생명을 죽이는 고기잡이 하는 사람에게 아리야라는 이름은 가당치 않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아리야라는 단어는 그때 당시 인도에서는 다른 종교에서는 쓰지 않았던 단어입니다. 이름에서는 물론 아리야란 이름을 쓸 수가 있죠. 그렇지만 어느 스승이든 그 스승을 가리킬 때 아리야란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당하게 쓰셨거든.

'아리야 앗탕기꼬 막고(Ariya aṭṭaṅgika maggo, 八正聖道)' 그리고 삼법인 할 때도 성스러운 세 가지 진리, 사성제 할 때도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 팔정성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아리야란 단어를 굉장히 많이 썼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아리야를 받아들일 때는 어떤 의미들을 가지고 있느냐면, 기원전 1500년경에 아리야 종족이 인도로 넘어옵니다. 옛날에 가지고 있던 모헨조다로 문명들을, 고대 문명이죠? 그걸 붕괴시키면서 인도에 새로운 문명을 만든 종족입니다. 그 의미에는 뭐냐 하면 우리는 너희들보다 뛰어나다 하는 그런 의미들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리야 종족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일단은 우월감이 좀 있었던 그런 현상들을 가집니다.

스리랑카에도 얼마 전에 분쟁이 거의 종식이 됐는데 계속 저렇게 분쟁이 일어났던 근본적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리야 종족의 혈통을 받았던 게 싱할라 종족이다 생각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밀종족이라는 것은 옛날 전에 아리야 종족이 있기 전에 고대문명들이 있던 종족 중에 하나라. 그러니까 그 종족은 아리야 종족에 비해서 하천하다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인도의 제도에서도 70%에 이르는 싱할라 종족은 타밀종족에 대해서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러니까 이게 조정이 안 되는 거라. 사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누구든지 생명은 평등한 것인데도, 어쨌든 인도에서는 아리야라는 이름 자체는 그런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이 단어를 쓰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안 썼는데 부처님은 과감하게 씁니다.

 

그런데 그 아리야라는 의미 자체를 변형을 시킵니다.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계층으로 인해서 성스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로 나아가는 길일 때 성스럽다 하고 의미를 바꾸게 되는 거죠.

어쨌든 아리야 라고 하는 의미들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가 아리야 종교인 셈이죠. 그런 성스러운 길을 가르쳐주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인데, 이 아리야에게 좋은 말을 안 해주거든.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크게 나쁜 생각들을 가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고 있단 말이라. 죄의식 같은 걸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들을 그냥 눈 덮어 두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지"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틀렸다는 거라.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거라.

 

죽이는 것이 만약에 용인되고 그것이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은 전부 다 영웅이 되어야 됩니다. 동물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어야 됩니다. 인간의 논리로 치면 그런 호랑이나 사자 같은 동물들은 영웅입니다. 아주 추앙받아야 될 그런 겁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동물의 세계는 인간보다 낮은 계층이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리 전쟁터에 가서 자기가 많은 생명을 죽이고 영웅이 됐다 해도 그거는 영웅이 아니라는 거라.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 사람의 행위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불교는 그런 겁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다 '행복하기를' 하고 바라는 것이 불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행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행복하기를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 싫어하는 사람들까지도 다 행복하기를 하고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죠? 모기 잡지 말아라. 바퀴벌레 있어도 바퀴벌레 죽이지 말아라.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 싫어하는 것도 행복하기를 바래야 되는데 왜 죽이느냐는 거라. 죽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오. 부처님, 나를 행복한 세계로 데려다 주시오. 이런 방법은 불교에서는 굉장히 금기시합니다. 그거는 아주 하천한 방법이라는 거라.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생활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칭찬하다가 자기의 그 좋은 이름을 가지고 부처님이 틀렸다. 그건 아리야가 아니다. 너는 아리야의 자격이 없다 하고 얘기했을 때 그 사람이 받는 충격은 어땠겠어요?

‘아, 아니구나. 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듭니다.

부처님이 그걸 찾은 거라. 칭찬해 줄려면 얼마든지 칭찬해주겠지. 아, 그래 열심히 잘 사시오. 아리야란 이름이 얼마나 좋은 거냐. 거기에 맞게끔 잘살아가시오. 그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고기 잡는 것들을 바꾸지 못해. 그걸 버리질 못하는 거라.

 

마음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문이라는 것은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지 말아라 하는 일들을 자꾸 할 거 같으면 그 마음의 문이 열리기 쉽겠어, 아니면 부처님이 해라는 것들을 갖다가 해나가면 마음의 문이 열리기 쉽겠어요? 진리를 보고 진리를 획득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준비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탁 그 진리를 듣고 그것에 대해서 깨달을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라.

 

불교라는 것은 성스러운 길을 가리키는 '아리야 막고(Ariya maggo)' 입니다. 성스러운 길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든지 그 성스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스러운 길이 성스러운 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 길을 가고 그 길에 대해서 도와 과에 이르려고 할 것 같으면 내 자신의 마음이 언제든지 깨어있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게 이 아리야라고 하는 어부에게 얘기를 한 부분입니다.

 

설혹 가끔은 잘못된 생활들을 하고, 잘못된 직업을 가지기도 하고, 또 잘못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얘기를 들으면 빨리 바꾸도록 해야 됩니다. 바꾸고 다른 핑계를 대지 말아야 됩니다. 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그러면 뭐 사자는 남의 생명을 죽였는데 그것도 용인해야 되는 거라? 불교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일 뿐이라는 거라. 그러면 영원히 그런 윤회의 세계에 떠돌 수밖에 없다는 거라.

성스러운 길로써 생각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