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희망과 욕망1 (20100114)

담마마-마까 2021. 3. 11. 09:48

https://youtu.be/L6__ztfmwi8

* 희망과 욕망1 (20100114)

 

저번에 얘기했듯이 「희망과 욕망」 부분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뭔가를 바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희망이라고 하면 좋은 것, 욕망은 나쁜 것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물론 불교 학자 같은 경우에는 욕망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욕망이 있고, 또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욕망도 있다 이렇게 얘기들도 할 겁니다. 어쨌든 욕망은 욕망이고 희망은 희망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른 가르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바른 가르침은 뭘 얘기하고 삿된 가르침은 뭘 얘기합니까?

바른 가르침은 바르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거고, 그다음에 둑카 고통의 종식으로 이끌어 주는 것 이런 것이 진짜 바른 가르침입니다.

삿된 가르침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 가르침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삿된 가르침이겠죠. 일어나 있는 번뇌를 더욱더 일으켜주고, 일어나지도 않는 건데 그 가르침으로 해서 번뇌가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삿된 가르침이다 하고 보통 그렇게 판단들을 합니다.

 

반대 대칭되는 것을 가지는 희망과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느냐, 아니면 해로움을 주느냐?

또 지혜를 생기게 하느냐, 아니면 지혜를 멈추게 하느냐?

그다음에 장애나 속박을 가져오는 것이냐, 아니면 장애나 속박을 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냐?

쉽게 말하면 감각적인 욕심을 더 일으켜주는 것인지 성냄을 일으켜주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냐 하는 것들에 따라서 다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을 주는 건지 그렇지 못한 건지 이런 것을 가지고 ", 이것은 욕망이다, 이것은 희망이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희망부터 한번 보면, 거기 교재에는 희망부터 나와 있죠. 희망부터 봅시다.

희망은 어떤 것의 실현을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것들인데 아마 이 적어놓은 앞부분들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못 할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것을 일으켜주는 것, 그리고 나쁜 것은 없애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희망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 뒤에,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게으름피우는 것이 욕망이라고 보면 됩니다.

희망을 가져도 마음이 의기소침해지는 그런 일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희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게 지속돼야 되는데 지속이 안 되니까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럴 땐 보통 게으름을 부리게 되고, '아, 이게 안 되는구나.' 하게 되면 그거는 이미 욕망으로 바뀌어버렸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장애를 만났을 때 그 장애를 뛰어넘고 계속 나아가는 방향은 그게 바른 방향일 때는 희망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욕망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통 욕망이라고 할 것 같으면 보통 우리가 '딴하(taṇhā)'라고 그럽니다.

보통 빨리어로 '까마(kāma)', '찬다(chanda)', '라가(rāga)', '잇차(icchā)', '아상사' '아신사'나 그다음 '딴하' 이렇게들 얘기합니다.

보통 욕망의 근원적인 욕망을 '딴하' 라고 해서 '갈애'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보통 이런 것들이 욕망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딴하(taṇhā)'의 경우에 예를 들어보면 세 가지로 많이들 예를 드는데.

'뿌납바와'(punabbhava)' 라고 해가지고 '다시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뭔가를 바란다는 거라. 하나를 채우면 또 다른 거를 얻기를 원하는 것. 목표를 도달했으면 또 다른 목표를 성취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 뭔가가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해서 채워지기를 바라는 이런 거를 뿌납바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난디 라가 사하가따(nandi rāga sahagata)' 라고 얘기합니다. '기쁨을 수반한다' 하는 것. 뭐든지 내가 마음에 들어야 되는 거라. 내한테 좋아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게 채워지면, 욕망이 채워지면 기쁘다는 거라.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다고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이런 것들은 욕망의 범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이런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욕망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욕망을 보면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끊임없이 자극해서 채울려고 하는 거라. 끊임없이 자극을 찾는 거지. 봤으면 조금 더 예쁜 걸 볼려고 그러고, 들었으면 조금 더 즐거운 소리 들을려고 그러고, 맛보는 것도 조금 더 맛있는 걸 먹을려고 그러고, 이런 것들이 포함되고.

 

그다음에는 살아가는 것들이 됩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 '바와 딴하(bhava-taṇha)'라 얘기를 하는데, 살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조금 더 살고 싶어 하고 그래서 조금 더 뭔가를 하고 싶어 하고 이런 것들.

 

그다음에는 반대되는 건데 '위바와 딴하(vibhava-taṇha)'라고 하는 건데 잘못하면 이걸 자살로 오해를 하는 수가 있는데, 자살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싫은 것들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의미합니다. '파괴욕구'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맛없는 걸 먹으면서 맛있는 걸 먹고 싶다 할 때 이럴 때는 위바와 딴하가 되게 됩니다.

 

그 상황을 바꿀려고 할 것 같으면 '바와딴하'가 되고 더 살고 싶어 한다든지 이렇게 돼버리는데, 그 자체를 뒤집어버린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 이 상황이 싫어서 더 그걸 추구해나가는 게 아니고 아예 반대 방향으로 그걸 원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는 것이 괴롭고 힘드니까 이게 싫어서 자살해버린다든지 이런 것들이 범주에 들어가겠죠. 이런 것들을 '위바와 딴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들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보통 욕망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무명과 이런 욕망이 잘 얽혀서 우리는 괴로움을 만들면서 윤회를 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망을 잘 이해한다고 할 것 같으면 무명과 얽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무명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을 모르기 때문에, 변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항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그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이 욕망이 어리석은 것하고 같이 얽히지는 않는데 우리는 그걸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먹고 싶으면 항상 먹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있고, 어리석음 하고 얽혀버리니까 이게 괴로움을 만들어내게끔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 교재에는 「욕망에는 여러 가지 계층이 있다.」

'아빗자(abhijjha)' 라고 하는 단어를 맨 처음으로 써놓았습니다. 아비담마 할 때 아비(abhi)하고 똑같습니다. '아비 잇차' 라고 하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도를 넘어섰다, 상식 수준을 넘어섰다는 겁니다. 그냥 희망한다는 거면 되는데 희망하는 것이 그 도가 넘어버렸다는 거라. 상식 수준을 넘어버렸다는 거라. 그걸 아빗자라고 합니다.

 

그 아빗자는 열 가지 십악(十惡) 나쁜 행위, 악행의 범주에 속한다 하고 되어있습니다. 다른 거는 여러분들이 잘 안 하는데, 생명을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삿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하고, 나쁜 말로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사이를 갈라놓고, 쓸데없는 말 잡담하고, 이런 것들은 '아, 이게 나쁘다' 하는 건 압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밑에 불필요한 욕망, 강한 욕망, 아빗자 라고 하는 것도 악행에 든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무조건 많이 벌고 더 욕심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이것도 부처님이 봤을 때는 열 가지 악행 중에 하나라.

그다음에 분노, 강한 분노, 강한 분노는 여러분들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건데 이 두 개가 연결되는 고리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열 번째가 삿된 견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 '아이고, 이렇게 해도 과보도 없다. 내가 편하게 살고 내 마음껏 살다가 가면 되지' 그런 것들을 가지는 것들이 포함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열 가지 악행인데 그중에 하나가 '아빗자(abhijjha)' 라고 합니다.

 

앞에 것들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나 말에 포함이 돼 있는 건데도 조금 주의해서 할 거 같으면 콘트롤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남의 생명 죽이는 것 그리 흔하지도 않고, 물건을 훔치는 것도 흔하지도 않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충분히 주의해서 콘트롤 하면 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아빗자(abhijjha)', '브야빠다(byāpāda)'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그것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고 또 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않으면 나쁜 행위가 돼서 그것으로 인해서 윤회의 고리를 계속 받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빗자 라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욕구다 하는 것입니다.

 

쭉 설명을 해놨으니까 한번 읽어보구요, 그다음에 밑에 똑같이 욕망의 범주에 들어가는 빨리어 단어가 '마힛차따(mahicchata)'라고 하는 겁니다. '마하+잇차따'가 합해진 겁니다. '큰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이 희망 자체는 좋은데 다들 너무 커버리고 도가 넘어 버리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라. 그래서 '큰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빠삣차따(papicchata)' 라고 합니다. '빠빠+잇차다' 하고 합해진 겁니다. 죄가 되는 것, 죄나 악이 되는 것 그런 것들을 원하는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누구든지 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들 죄가 되는 것을 원합니다. 악이 되는 것인지를 알면서도 원하는 것들, '사회적인 통념들이 그러니까 뭐' 하면서 넘어가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욕구에 해당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욕망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해놨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메울 수 없는 구멍입니다. 밑 빠진 독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끊임없이 채워줘도 그것이 찰 수가 없는 거라. 왜? 이미 밑둥이 빠져있기 때문에 아무리 채울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다는 거라. 채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딱 되는데 대부분 그걸 알지 못하니까 끊임없이 그걸 자꾸 채울려고 한다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의 삶들이 대부분 그럴 겁니다. 이거 하고 나면 또 저거 해야 되고 끊임없이 하다 보면 나중에는 죽을 때가 되어서 "아이고, 내가 뭐 하고 살았노?" 그런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같은 경우는 참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서 일정하게 나이가 되면 종교적인 생활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배려를 합니다. 그게 뭐 잘살아왔든 못살아왔든 아니면 뭘 이뤘든 못 이뤘든 간에 일단 탁 놔둬버리고 종교적인 생활을 하도록 돼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을 돌아본다는 거라.

그래서 인도 같은 경우는 우스개 소리로 비자를 내는데, 성직자 비자 그러니까 종교 비자를 내려면 굉장히 안 내줄려고 그럽니다. 우리는 그런 철학자나 종교가들이 너무 넘쳐나서 문제이지 모자라서 문제가 안 된다는 거라. 그 정도로 그런 종교적인 성향들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마찬가질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런 구멍들을 끊임없이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하다가 메꿀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그냥 일단 놔버리고 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하면서 돌아보는 계기들이 되면 '아, 이거는 메울 수 없는 거구나' 하고나서 그때 이제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때 인제 포기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게 인제 욕망이라는 것들입니다. 욕망은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메울 수 없는 구멍이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만약에 욕망이라고 판단이 들면 '아, 이것은 메울 수 없는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 밑에 인제 억만장자도 마음은 가난하다 하고 돼있습니다. 왜? 억만장자들은 백만장자 되고 싶어 하는 거고, 언제든지 메울 수 없으니까 가난하게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 밑에 두 번째 보면 실이 끊어진 연이라고 돼있습니다. 바닷가 이런 데서 연 한번 날려봤죠? 실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날아갑니다. 지 맘대로 날아갑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그게 어떻게 될지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실이 끊어진 연이라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탐욕이 많은 원숭이 부분 얘기를 해놨습니다. 원숭이 잡을 때 어떻게 잡는지 저번에 스님이 얘기했죠? 안에 지 좋아하는 거 넣어놓으면 잡힙니다. 오른손을 넣었다가 거기에 만약에 찐득거리는 꿀 같은 것이 발라져 있다. 그러면 손을 펴가지고 이걸 뺄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구멍에서 손이 안 빠지면 그다음 손 또 넣습니다. 그럼 왼손도 그 찐드기 한테 잡히는 거라. 그러고 나면 이걸 다시 또 풀려고 생각 안 하고 또 발 집어넣습니다. 한발 넣고, 또 이쪽 발 넣고 그래도 안 되면 주둥이까지 집어넣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몸이 그냥 그 찐드기에 다 붙어버리는 거라. 꼼짝을 못 한다는 거라. 그렇게 스스로 자꾸 집어넣는다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걸 인제 부처님 당시 일화를 가지고 남의 나라를 침입하는 왕을 지혜롭게 잘 인도해서 욕심부리지 말도록 하는 것들로서 이렇게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이런 욕망은 붕괴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반드시 욕망은 무너진다는 거라. 무너지지 않을 거 같으면 한없이 욕망을 부리라고 하겠지. 그런데 반드시 그 욕망은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무너진다 하는 거라. 무너지는 속성을 지녔다 하는 거라. 아무리 남의 나라를 빼앗아도 그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다시 뺏기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 부분을 쭉 얘기했습니다.

 

그런 욕망을 맹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울타리에 들어간 맹수

그 맹수는 어디에 있느냐는 거라.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있다는 거라. 이 우리 몸과 마음의 육근! 울타리 안에 들어간 맹수, 범이라는 거라. 그 욕망을 취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라. 울타리에 들어가 있으면 창경원이나 동물원에 가보면 밖에서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안전했을 경우에. 그런데 그게 울타리가 부서졌다든지 관리를 잘못 할 경우에는 그 맹수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밖에 있는 사람이 다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욕망이라는 걸 알고 가둬둘 필요성이 있다는 거라. 그게 맹수를 취급하는 방법으로써 얘기를 해놔놨습니다.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제거해야 된다. 욕망은 반드시 세트로 일어난다. 분노와 욕망은 하나의 세트로써 일어난다" 하는 사실을 그 밑에 적어놨습니다.

 

그 관리하는 방법이 쉽게 얘기하면 희망 부분에 해당이 된다 하는 겁니다.

욕망에 대해서 이해가 됐으면 인제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방법을 알아야 된다 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희망을 가지는 방법 그렇게 해놨습니다.

 

희망을 가지는 방법이 뭐 있겠습니까? 바른 노력입니다. 바른 노력(正精進)! '삼마와야마(sammā vāyāma)'라고 그것이 희망이다 하는 겁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게으르지 않는 것을 얘기합니다.

 

바르게 노력하자 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을 네 가지로 부처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나쁜 것들, 나쁜 부분들은 없애도록 하는 것.

여러분 나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서, 욕심부리는 게 있다. 그럼 욕심부리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 그걸 욕심부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렇게 노력하는 것들. 또 화를 잘 낸다. 이게 나에게도 나쁘고 남에게도 나쁘고,

나쁘고 좋다 하는 그 근거는 뭐냐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 속에서 탐·진·치라고 하는 세 가지의 의도가 있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행동하는 것, 이것은 나쁜 범주에 속합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않고 행복을 주지 않는 것들, 그런 의도나 그런 행위들 이런 것들은 나쁜 범주에 속합니다.

 

그럼 좋은 범주는 뭡니까? 나와 다른 이들 남을 이익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의도나 그런 행위들, 그다음에 탐·진·치가 없는 의도나 그런 행위들 이런 것들은 바른 것이다. 자기가 판단해서 이것이 내가 나쁜 부분이다. 그러면 지금 있는 그 나쁜 부분을 없앨려고 노력하는 것들.

이것이 희망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특히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됩니다.

보통 습관이 잘 안 들여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부지런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게을러서. 게으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해버립니다. 특히 만약에 예를 들어서 직장에 안 나가는 아이다. 그러면 실컷 잡니다. 피곤하기도 하지. 그런데 그게 게으름을 자꾸 습관화시켜준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잠은 사실은 그럴 필요성은 없거든요. 얼마 자지 않아도 충분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을 놔두고 어쨌든 내가 뒹굴뒹굴하면서 게으름 부릴려고 한다는 거라. 그것이 더 강합니다. 그게 습관화되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금 일어나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부분을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먼저 게으르지 말아야 됩니다. 조금 더 부지런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게으름뱅이는 아침 늦게까지 잔다」 하는 부분으로써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부분, 밑에 부분이 뭐냐 하면 낭비하지 않는 것, 헤프지 않은 것. 있는 족족 써버릴 거 같으면 그 어디 뭐 모이기나 하겠어? 그런 것들이 나쁜 부분을 없애주는 데 도움을 주는 부분입니다.

이걸 경전에서 비유를 해놓은 게 뭐냐 하면 "좁고 빠른 협곡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살에 그냥 쓸려가 버린다는 거라. 아무리 내가 이쪽이나 저쪽으로 갈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갈 수가 없다는 거라. 낭비하는 것은. 그냥 쓸려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은 낭비 부분입니다.

낭비하지 않고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먼저 고쳐주면 나쁜 부분은 자꾸 없애나갈 수가 있다 하는 거라. 나쁜 부분은 '아, 그 부분이 내가 안 좋은 습관이다' 하는 걸 알 것 같으면 그걸 없애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리해야 바른 희망이 된다는 거라.

 

두 번째가 행한 일이 없는 나쁜 일을 앞으로도 하지 않는다.

이때까지는 안 해왔지만 그 나쁜 걸 내가 안 한다고 보장을 못 한다는 거라. 이제까지 술 안 마셔왔으니까 당연히 죽을 때까지 안 마실 거 같지? 그건 또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누가 주변에서 권할 거 같으면 어쩔 수 없을 경우에 먹는다는 거라. 스스로 핑계대는 거라. 스스로 어쩔 수 없으니까! 딱 한 번이니까. 뭐 바람피우는 사람이 이때까지 부부간에 잘 지내왔다가 어쩌다가 한번 했다. 아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딱 한 번이니까, 그것으로 용인이 됩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행한 적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지 않아야 된다 하는 거라.

 

세상은 나를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거라. 전부 유혹한다는 거라. 그것 투성이라는 거라. 거기서 내가 바르게 지켜나갈려고 할 거 같으면 이런 자세를 반드시 가져야 되는 거라.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악행은 앞으로도 하지 않게끔 자꾸 노력하는 것. 어쩔 수가 없다는 거라.

거짓말하는 게 나쁜 것이다. 다른 사람은 거짓말 해가지고 조금 승진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거짓말 안 하고 그냥 묵묵히 가는 거라. 그것이 오히려 바른 거라. 설혹 내가 승진을 못 하고 그 회사에 짤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나쁜 업은 짓지 않는다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