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모네이야(Moneyya) (20091107)

담마마-마까 2021. 3. 8. 23:48

https://youtu.be/jdQL9yPWItg

* 모네이야(Moneyya) (20091107)

 

오늘은 기초적인 거 간단하게 얘기를 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붓다(Sākyamuni Buddha)라고 합니다. 보통.

'석가'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부처님이 태어난 종족을 얘기하죠. '모니'는 뭡니까? 빨리어 '무니'에서 왔죠? 성자를 뜻합니다. '붓다'는 깨달으신 분이라는 그런 뜻인데 이 '무니(Muni)'에 대한 얘기를 오늘은 좀 하겠습니다.

 

어제 그제 우리 행사 할 때도 스님들이 가사를 받고 나서 뭐 했습니까? 축복게송 했죠? 삽비띠요 위왓잔뚜(Sabbītiyo vivajjantu, 모든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면서 이렇게 축복게송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처음 초반기 20년간은 이 축복게송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탁발을 받든 공양청을 받아가든지 간에 그냥 공양만 하고 마음속으로서만 했지 입으로 게송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종교인들이 막 비판을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뭐 조그만 걸 하나 받아도 "아, 행복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스님들은 아무 얘기도 안 하니까 막 비판을 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20년이 지나고 나서 그 이후부터는 그런 축복게송을 해도 괜찮다 하고 허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일반 대중들이 그전보다도 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절을 위해가지고 더 불사도 하고 이렇게 되거든.

 

그러니까 다른 종교에서 위기감을 느낀 거라. 그전에는 스님들이 게송을 안 하고 할 때는 자기들에게 공양이 더 많이 들어왔는데 인제는 스님들에게 더 많이 들어가니까 인제 그때 또 시비를 합니다. 거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된 게 게송을 해도 뭐 저렇게 한참 길게 하느냐, 우리는 무니다. 성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한다. 침묵하는 성자들인데 부처님 제자들은 저렇게 침묵하지도 않고 계속 중얼중얼 말을 한다 이렇게 얘길 하는 거라.

그때 인제 부처님이 이 '무니'라는 것에 대해서 설법을 한 내용입니다.

 

보통 인도에서는 '무니(Muni)'라는 뜻을 성자에게도 쓰고 일반적으로 출가한 수행자에게도 똑같이 썼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갓 태어난 사람 애기한테도 이름 앞이나 뒤에다가 '무니'라는 이름을 붙여서 사용을 했습니다. 그마만큼 성스럽게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라 하는 그런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이겠죠! 그렇게 쓰다 보니까 불교에서는 이 '무니'라는 단어를 부처님한테만 붙이거든. 그런데 일반 대중들은 그걸 아무데나 다 붙인단 말이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거 이래서 되겠느냐,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남용돼서 되겠느냐 해서 그 뒤부터는 '무니' 뒤에다가 '인드라(indra)'를 붙여가지고 '무닌드라(Munindra)', 그리고 '무닌다(Muninda)' 이렇게 붙이든지 아니면 '마하무니(Mahāmuni)' 아니면 '무니라자(Muniraja)'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성자들의 왕, 대성자' 이런 뜻으로써 '인드라(Indra)'는 신들의 왕들이기 때문에 그걸 '무니'에다 붙이면 '인간들의 왕'이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성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이다' 하고 이렇게 붙이는 겁니다.

 

왜 불교에서는 '무니'라는 단어에 이렇게 집착을 할까?

그냥 뭐 고유명사로 쓰지 말고 일반명사로 쓸 거 같으면 무니는 아무에게도 붙일 수 있는데 꼭 불교에서만 왜 이 부처님에게만 무니라는 단어를 쓰는데 집착을 할까?

세속생활을 떠나서 산에 숨어들어가서 살아가는 수행자들에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그래서 '모네이야(Moneyya)'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침묵행을 따르는 수행자' 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게 인제 나중에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그런 수행자' 라는 뜻으로 쓰여집니다. 각각의 종교가들이 있고 각각의 종교인들이 있지만은 대립하지 않고 서로 우호적으로 잘 지내는 것이 인도의 종교의 특징 중에 하납니다.

 

그런데 이 무니는 어떤 거냐 하면 세속에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보통 성자들이라는 분들은. 왜 그러냐 하면 무니의 기본은 침묵행입니다. 침묵을 하면서 살아갈려다 보니까 침묵이라는 단어는 말만 안 하는 게 아니고 의성어나 이런 것조차도 금해진 겁니다. 쉽게 말하면 갑작스럽게 뭐가 탁 튀어나왔다 그러면 "악" 소리를 내는 이런 것조차도 금해진 것들입니다.

그 말만 그렇게 금해지는 것이 아니고 어디 탁발을 받아도 누가 해도 고맙다고 인사할 수도 없고 모든 것들을 다 금해진 상태를 인제 보통 무니라고 이렇게 썼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말을 안 하면 손짓발짓 하면 될 거 아니냐, 그것도 말의 종류에 들어가버립니다. 손짓 발짓 조차도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가는데 저기 누가 한 사람이 뒤를 못 봐가지고 뒤에 뱀이 물려고 하는 것을 그 수행자가 봤다. 그럼 그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침묵을 지키는 수행자라고 할 거 같으면? 자기 계율대로 할 것 같으면 일체 그것에 대해서 관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손짓 발짓 할 수도 없고 말도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세속에 나와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 사람들이 올 수 없는 곳에서 수행하는 분들을 무니다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른 종교가들이 자기들은 무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반대하셨거든. 무니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성스러운 침묵을 지켜라" 하고 부처님이 얘길 했습니다. "아리오 뚬하 바오" 그렇게 얘기한 게 있는데, "성스러운 침묵을 지켜라" 할 때는 완전 침묵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필요없는 것, 그리고 그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금해서 침묵하라는 의미로써 성스러운 침묵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거짓말을 한다든지 잡담을 한다든지 또 남을 이간질하는 말을 한다든지 또 필요없는 말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금해놓은 겁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싶다 하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원인이 뭔가 하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려서 그것을 없애버려서, 그것이 필요 없는 말일 거 같으면 하지 말고, 필요한 말일 거 같으면 하도록 하는 것이 이걸 불교에서는 '모네이야' "침묵행으로써 수행하는 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간에 말로써 전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또 경험자들이 인제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 경험을 갖다가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을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틀림없이 말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 또 악행을 없애주는 것일 때, 또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격려가 되는 말을 해야 될 때 이런 때는 말을 하라는 거라.

이럴 때 하더라도 항상 지금 현재 말을 하는 내가 '자애를 가지고 말을 하고 있는가' 항상 염두에 두고 말을 하라. 즉 사회생활 할 때도 말이란 것은 필요하고 사람 간에 살아갈 때도, 그다음에 자애를 가지고 말을 해야 될 때도 필요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필요없는 말은 금해야 될 때도 있는 것이고. 말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게끔 돼있다 하는 겁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침묵행이라는 의미를, 듣는 자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에 이르는가, 또 이익을 가져오는가, 또 내가 말하는 자가 그 말을 진실되게 하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라. 그러할 때 때와 장소가 합당하다고 판단될 거 같으면 그것은 말하라. 그것은 '모네이야'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바르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네이야 무니가 갖추어야 될 것들이지 무조건 침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침묵할 거 같으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세속하고는 완전하게 독립돼버린다는 거라. 독립돼가지고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좋은 법을 설해줄 수가 있고 또 부처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끔 인도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단지 우리는 보통 말을 할 때 말하는 방식이 잘못돼있다는 거라.

그걸 개념화해가지고 느끼는 것들을 저장을 해서 그걸 개념화해서 그걸 다시 증폭시키는 형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순환고리를 잘 이해를 해서 있는 그대로를 자꾸 알아차리도록 하라.

'꽃이다, 예쁜 꽃이다' 이런 개념을 가지지 말고 보이는 대상으로서 자꾸 보고, 또 들리는 대상으로서 듣기만 하고 이런 식으로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될 때 그것을 무니가 되는 모네이야 침묵을 따르는 성자들의 길에 들어서는 자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결국 말로서 침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서 하는 침묵이 돼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마음에 침묵이라는 것은 마음에 동요함이 없이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또 고요함 속에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가 마음의 침묵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만이 말을 했을 때 이익이 있고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때와 장소에 맞게끔 되는 것이지, 말로서 모든 것을 침묵하고 사는 것이 바른 성자의 길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석가모니 할 때 '모니'라는 것은 '바르게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실천해나가는 그런 성자를 이르는 말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니'라는 말에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무니 하고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무니 하고는 분명하게 의미가 다릅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이 무니는 아니라는 거라.

악을 버려버리도록 하고 선한 일들을 즐겨 행하도록 하고 그것을 지혜있게 인도해주는 자, 이런 자만이 무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네이야, 그런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고 또 행복을 가져오는 분이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으로서 나아갈려고 하는 자는 그래서 반드시 자기 수행에 대해서 점검을 받고 또 자기 수행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토론들을 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보완관계를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혼자만 가만히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수행이 자꾸 더디어집니다.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을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은 그것이 좋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지도 못하고 또 자기 자신도 그것에 따라서 수행하는 속도가 자꾸 느려진다는 거라. 얻는 만큼 자꾸 나누어가지고 그 부분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담론을 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의 수행은 자꾸 늘어난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단, 그렇게 말을 할 때는 자애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 기본 조건이 돼야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고, 마음으로써는 항상 침묵을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도록 만들어야 만이 바른 침묵이 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의 진리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무니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불교의 수행방법 무니가 되기 위한 모네이야의 방법을 따라서 자꾸 실천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