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삼마 다카타(올바르게 말해진 것) (20100326)

담마마-마까 2021. 3. 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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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마-다카타(올바르게 말해진 것) (20100326)

 

태국 민담 같은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찡쪽이라고 하는 건데 그 혹시 태국 가본 사람 창문에 모기 벌레 잡아먹는 도마뱀 같은 거 혹시 본 적이 있어요? 아무리 좋은 호텔에 가도 그 찡쪽이라고 하는 도마뱀들이 다 있습니다. 그 도마뱀을 보고 하는 얘긴데 어느 숲에 바람이 불어가 큰 나무가 부서져버렸어. 그러니까 동물들이 자기 갈 길을 다니질 못하는 거라. 그 나무 때문에. 그러던 찰나에 비바람이 불어가지고 그 나무가 다른 데로 휩쓸려가버렸어. 그 자리에 그 찡쪽이란 놈이 그 나무 위에 올라가서 놀고 있는 거라.

동물들이 보는데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야, 니들이 다니기 힘들었던 그 나무 내가 치웠다" 하고 얘기를 하거든. 사람들이 그걸 아무도 안 믿어 주고, 그 큰 나무를 어떻게 조그만한 도마뱀이 어떻게 치울 수 있느냐 그렇게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사실을 사람들이 그냥 믿게 됩니다. 그냥 다른 생각 없이 "그 찡쪽이 나무를 치웠다" 하면서 그렇게 숭배를 하게 됩니다.

 

그걸 어디에다 비유해서 얘기를 하느냐면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비유를 하는 속담입니다. 실제로는 자연스럽게 조건지워져서 일어난 것들로 인해서 변화된 것들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싫어한다는 거라. 누군가가 그 나무를 치웠다 하고 믿게 된다는 거라. 누군가가 우리를 창조했고 누군가가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진다 하는 그런 비유로써 그 민담이 있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적어도 태국이라고 하면 한국보다는 그래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접하고 있고 조금 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물며 그 나라조차도 그런 생각들이 많이 팽배해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해탈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모든 많은 사람들은 그냥 강기슭에서 이리돌고 저리돌고 떠돌아다닌다. 그렇지만 극히 일부 적은 사람들은 해탈에 이르른다."

어떤 사람들이냐면 "삼마 다카타 - 바르게 말해진 진리에 따라서 실천하는 자. 그러한 사람들은 마라의 영역을 넘어서 해탈에 이른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은 삼마 다카타에 대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할 거 같으면 삼마다카타 라는 건 올바르게 말해졌다 하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말은, 가르침은 어떤 경우든지 올바르게 말해졌다 하는 것,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완전하게 말해졌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말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말해졌다는 것은, 완벽하게 말해졌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누구에게도 맞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실천해나가면 그 말씀 그대로 따라서 실천해나가면 결국 해탈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세상에 해탈에 이르는 사람은 적다는 거라. 왜 적을까 하는 거라.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부처님이 하나를 들었던 것이 뭐냐 하면 "스스로 그것을 개조해버린다" 하는 겁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가 여러 가지 방법을 스스로 도입을 해봅니다. 수행할 때도 이 방법으로 해보고 또 저 방법으로 해보고. 쉽게 말하면 몸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배의 움직임에 관찰을 했다가 안되니까, 또 어디 가서 마음수련하는데 가서 그 방법을 해봤다가, 또 어떤데 가서 깊은 삼매에 빠지는 그런 방법을 해봤다가 여러 가지 방법을 스스로 자꾸 도입을 해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방법이 변질돼버리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바꾸어서 실천해버리면 그것은 당연히 바른 해탈에 이르르지 못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삼마다카타 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올바르게 말해진 것인데 그걸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그 삼마다카타라는 단어 앞에는 보통 뭐가 붙느냐면 '스왁카따'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설해졌다는 뜻입니다. '선서'라고 보통 우리나라에선 얘기하죠? "부처님에 의해서 잘 설해진 올바르게 말해진 진리"라는 뜻입니다.

밥을 만들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일정한 물에다가 쌀을 넣고 일정한 압력을 가하고 해야 만이 밥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떨 때는 죽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고두밥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부처님에 의해서 이미 완벽하게 완전하게 설해져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관리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한다고 해가지고 누구든지 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선정삼매를 계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참 미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기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마음이 환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마음이 스스로 결과를 생각해내서 그 생각하는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내버리게 됩니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미 생각으로써 정리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또 다른 생각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게 되었을 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물가에서 뱅뱅뱅 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윤회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은 생각의 굴레에서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방법으로 해가지고 그 방법으로 계속 실천해나가고, 또 부처님의 말씀이나 스님 법문을 통해서 듣더라도 자기의 방식으로 자기 생각으로 들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 방법으로만 계속 뱅뱅뱅뱅 돌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할 수 없게 되니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바꾸지도 말고 손대지도 말아라.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하고 인제 얘기를 합니다.

 

기차선로를 비유하면 여러분들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기차선로가 처음에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나중에는 굉장히 벗어나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벗어나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제자리로.

생각이 일어나버리면 그와 같이 돼버립니다.

간혹 수행을 가르치는 방법 중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곳들이 간혹 있습니다. 무슨 수련원, 무슨 명상원 이렇게 해가지고 갖가지 방법으로 가르칩니다. 물론 불교 내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염불을 하면 염불로 인해가지고 극락왕생할 수 있다 이런 얘기들도 하고, 또 어떤 방법으로 하더라도 해탈에 이르는 길은 똑같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의 말씀이 그럴까?

각각의 방법으로 해도 해탈에 이르는 것은 가능할까?

각각의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부처님이 가르친, 부처님이 말한 완전한 담마대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방법으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행해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그걸 단언합니다. 그 게송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생각의 굴레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만들어낼지는 몰라도 그 방법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러면 사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를려고 하는가?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표현했느냐면 '유신견' 때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라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것에 생각이 들어가버리면 이미 변질돼버린다는 겁니다. 나름대로의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것만 해도 잘못인데, 거기에다가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하면 "내 방법은 맞고 니 방법은 틀렸다"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은 항상 기슭에서 우왕좌왕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해탈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기슭에서 강가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판단하고 수행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우왕좌왕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과 결합할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설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받아들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겨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의 견해이고 의견이지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삼마다카타 라고 인제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완전하게 설해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형되어서도 안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특히 삼마다카타 완전하게 설해진 것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게 됐을 때 해탈에 이르게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윤회는 내가 지금 먹은 마음에 따라서 악한 마음을 가지면 축생의 윤회를 받는 거와 같고, 또 수행에서 평등한 마음을 가져서 무량한 한량없는 사무량심을 닦아나가면 천상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윤회하는 것은, 내가 지금 이렇게 이 몸을 받은 것은 과거전생의 업으로 인해서 이런 결과를 받았다. 나는 지금 부지런히 닦아서 좋은 공덕을 쌓아서 다음 세상에선 더 좋은 과보를 받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이 맞을까? 부처님이 말한 삼마다카타 부처님에 의해 완전하게 설해진 것인데, 부처님이 말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

두 가지 다 맞는 얘깁니다. 두 가지 다 맞는 얘긴데 예를 들어봅시다.

이생에서 윤회를 받는다고 할 거 같으면 과거생이나 미래생은 존재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럼 윤회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를 부정하게 됩니다.

또 부처님이 설한 윤회는 삼세의 인과를 설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생에서 열심히 닦아서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설해놓은 것이고 또 더 나아가버리면 윤회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고 돼버립니다.

후자의 것을 택할 것 같으면 윤회하는 것은 맞지만은 그 인과 과보의 법칙은 벗어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끊임없이 윤회를 하는데 그 법칙을 어긋날 수가 없다. 니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니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그 과보는 반드시 받는다. 그래서 닦아야 될 것들은 물론 좋은 것들을 닦아야 되지만은 나쁜 인연을 지어놓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되는 것들이다 하고 확정해서 얘기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한 윤회하고 이 두 가지는 그렇게 결론지어버리면 너무나 벗어나버립니다. 그게 기차의 철길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을 때까지 멀어져버린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삼마다카타 완전한 것이니까 있는 그대로 진리를 받아들이라.

부처님은 삼마다카타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완전하게 진리를 말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를 지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다카타 라고 얘기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천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 바른 실천이 된다는 겁니다.

말하는 사람도 부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말을 해야 되는 거고, 그 기본 조건은 그 진리를 변형시키지 않고 지켜나가야 된다는 의무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해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지켜나가야 되는 것이고, 실천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바르게 듣고 그것을 실천해나가야 되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삼마다카타 라고 얘기를 합니다.

 

불교의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간혹 처음 수행하는 자에게는 부정관을 하라. 또 어떤 경우에는 아나빠나를 하라. 호흡관을 하라. 또 어떤 방법에는 배를 관찰하면서 일어남 사라짐을 하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다르지만 길은 어떻게 됩니까? 똑같다는 거라. 다른 길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부정관을 하더라도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찰해야 되는 것이고, 아나빠나사띠를 하더라도 그것을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통찰해야 되는 것이고,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더라도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통찰해야 된다는 것, 오직 하나의 길만 존재할 뿐이라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왕의 영역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괴로움을 당하고 끊임없이 그 굴레에서 맴돌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누구든지 힘이 듭니다.

바르게 노력해도 힘이 들고, 또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노력해도 힘이 듭니다. 힘이 드는 건 틀림없습니다. 힘이 들지 않으면 그걸 노력해라 하고 얘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처님이.

산에 올라갈 때 산에 정상에 올라갔을 때도 똑 마찬가집니다. 정상까지는 누구든지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그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만이 그 정상에 도달해야 만이 아, 내가 모든 것을 마쳤다. 하고 몸과 마음에 피로를 확 내려놓을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고통은 있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바른 고통을 받든 틀린 고통을 받든 그런 스트레스는 항상 받게 돼있다는 거라.

'악한 것들을 지으면서 받는 고통들' 그것들은 부처님은 '하지 마라' 했습니다.

'선한 것으로써 받는 스트레스 고통들'은 그것은 부처님은 '널리 하라'고 그랬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이라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은 악한 것보다는 선한 것들을 택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고통으로 받지를 않게 됩니다. 그거는 정상에 이미 도달했을 때 일입니다.

그런데 정상에 도달하기 전에는 어떻게 돼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 악한 것들을 모을려고 하지 말고 선한 것들을 자꾸 모을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자꾸 모아서 일정한 목표에 탁 도달했을 때 그 보따리를 풀어봤을 때 적어도 쓰레기는 아니어야 되지 않느냐는 거라. 탁 풀어봤을 때 그게 보물이 돼야 되는 것이지 쓰레기가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나가야지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해나가서는 그것은 쓰레기를 모으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가끔씩 있으면서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스님 아, 내가 어느 경지에 도달한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스님이 들어봤을 때는 그 경지가 맞아요. 그런데 스님은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그것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버려버리라. 대상을 일어나는 대로 또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고.

“아, 잘했다. 잘했다.” 그런 말을 잘 안한다고. 내뿐 아니라 다른 스승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거 왜 그럴까? 이미 '그렇다' 하고 알아차렸을 때는 자기의 생각에 자기의 견해가 들어가버렸다는 거라. 거기서부터 또 벗어나버리기 때문에 벗어나지 말아라고 그러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걸어가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가면서 그런 쓰레기는 모으지 마라라는 거라. 보물이 되는 것 보석이 되는 것들을 모으도록 하라는 거라. 실제 생활에서도 도덕적인 행위들을 잘 정립해가지고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습니다. 쓰레기를 모은 거와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더 그렇지 않겠느냐는 거라. 왜 이마만큼 했다고 그마만큼의 견해를 자꾸 가지느냐는 거라. 그 견해 그 쓰레기를 모아가지고 어디다가 쓸라고.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나의 생각에 나의 견해를 보태지 말아라. 보태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부처님이 말한 삼마다카타에서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오로지 나는 지금 현재 내가 해야 될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이라고 판단을 해야됩니다.

그게 부처님이 말한 삼마다카타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바르게 설해진, 올바르게 말해진 담마, 그것은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만이 열반에 이른다 하는 뜻으로써 얘기한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완전하게 설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 말을 스님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시간 날 때마다 얘기되어질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생각 여러분들의 견해로 받아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야됩니다.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실천해나갈려고 할 때 해탈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슭에서 항상 돌아다니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선원에서 참 잘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는 것들이 그중에도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것들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진다는 겁니다. 나름대로의 생각들로써 부처님의 말씀을 정립할려고 한다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방법으로 정리를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해서 정리정돈을 하도록 자꾸 해야됩니다.

 

아직 갈 길들은 멉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그런 견해를 쌓아야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견해도 버려버리고 그냥 바르게 실천해나가는 길밖에는 없다는 거라.

스님이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