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자극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우리(까마 찬다) (20100326)

담마마-마까 2021. 3. 1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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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극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우리(까마 찬다) (20100326)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말로 바꿔서 얘기하면 "자극을 받는다" 라고 하는 얘기와 꼭 같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다 자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극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그런 실정입니다.

실제로 우리 눈 귀 코 입 혀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그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습니다. 눈을 통해서 보는 여러 가지 자극, 혀를 통해서 맛이라고 하는 자극, 이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으면서 그걸 우리는 보통 "살아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가 자극을 받고 있는데, 그렇게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보고 듣고 하고 있는가? 하는 거라.

진짜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느냐는 거라.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정말로 보고 듣고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봤을 거 같으면 그 본 것을 정확하게 기억을 해야 되는 거고, 맛본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맛을 알아야 되는데, 보통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는 만약에 소리를 듣는다 할 것 같으면 소리를 우리는 그냥 ‘아름다운 소리다’, 아니면 ‘듣기 싫은 소리다’ 하는 이런 식으로 자극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극을 가지고 아, 내가 듣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보고 듣고 냄새맡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맛있다’, ‘기분 좋다’, 그다음에 ‘향기롭다’ 하는 그런 자극을 받아서 즐기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머리에도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러이러하구나’ 하고 생각을 만들어내서 머리에 자극을 계속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지만 확실히 볼려고 들을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냄새맡는 것도 맛보는 것도 접촉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단지 자극에 취해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에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눈을 가려놔놓고 어항 속에 물건을 집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때까지 많이 접해왔던 것들인데도 그걸 알아맞추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또 눈을 감아놔놓고 이때까지 즐겨 먹던 음식을 하나하나를 먹어봐라고 했을 때 즐겨 먹던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이때까지 맛보고 있었고 보고 있었고 그다음에 접촉하고 있어왔지만 정확하게 그걸 알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라. 결국은 자극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라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앞에 있는 운학스님의 그림이 있지만 저 그림을 볼 때 그림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냥 아, 저게 무슨 그림이구나, 매화 그림이구나 하는 걸 먼저 보게 되는 거고, 아, 저게 누가 그렸는가 하는 거, 그다음에 저게 언제 그렸는가 하는 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그림을 봤다라고 얘기합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그림을 본다는 거라. 실제적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극에 우리는 의존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거를 보통 현대인 뿐아니라 옛날부터 있어왔던 병이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자극을 중단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자극을 중단해버리면 죽을 거 같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극은 이런 것이다, 감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그런 자극에 의존하지 말고 바르게 알아차려라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될 거를 스님은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쓰고 또 예를 들어가면서 얘기를 해야만이 알아듣는 거라.

왜 그러느냐 하면 자극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 자극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걸 못 알아듣는다는 얘깁니다. 그것까지는 또 좋은데 자기 나름대로 그걸 또 해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실제 스님의 법문 내용은 빼버리고 재밌는 내용들만 기억을 하고, 일화 같은 걸 예를 들어주면 그 일화만 머릿속에 기억해있지 그 일화가 뭘 얘기한 건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거라.

그게 인제 '자극의존증'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하나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법구경 174. Pesakāradhītāvatthu]

 

Andha bhūto ayaṁ loko tanuk'ettha vipassati

Sakuṇo jālamuttova, appo saggāya gacchati.

"안다부또 아양로꼬 따누껫타 위빳사띠

사꾸노 잘라뭇또와 압뽀 삭가야 갓차띠"

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건성으로 살아간다.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물을 찢어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가 드물듯이 천상의 일을 요구하는 것 해탈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은 적다"

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언젠가 스님이 까마귀의 예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까마귀 부리는 굉장히 날카롭고 강한 철사 같은 것도 끊습니다. 그래서 음식물이 들어있던 것이든 먹을 것이 들어있던 것들은 아무리 단단하게 매놔도 까마귀가 그걸 쪼아가지고 구멍을 내서 음식을 먹는다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비닐봉지 아주 두꺼운 것에다 음식을 넣어놨다. 까마귀는 그 냄새맡으면 반드시 그걸 먹습니다. 그런데 그 까마귀에게 그 하잘것없는 비닐봉지를 몸에다 씌워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애요? 이때까지 잘 구멍을 뚫어서 먹을 걸 잘 먹었던 건데도 그걸 머리 위에서부터 씌워놔버리면 몸에다 씌워놔버리면 그걸 뚫을 생각을 안합니다. 그냥 두려워해서 도망칠려고만 하고 발버둥치려고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비닐봉지는 더욱더 단단하게 쪼여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물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물을 찢어서 자유롭게 되는 새가 드물다라고 얘기합니다.

 

새도 그러는데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도 똑 마찬가집니다. 자극이 더욱더 많아집니다. 현대화가 되면 될수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들도 더욱더 많아집니다. 휴대폰 하나도 전화를 받고 걸고 하던 것이, 또 발전해서 영상통화도 하게 되고 인제는 인터넷까지도 하게 되고 뭐도 하게 되고 자꾸 자극하는 것들이 증가할 뿐입니다. 경제적인 풍요함이 있는 뒤에는 오히려 자극에 의존하는 것들이 더욱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자극을 가장 많이 받는 것들은 '뜻'이라고 하는 것,

안이비설신의 중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견해, 그래서 가장 그물에 잘 걸리는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보는 대상은 오히려 머리를 돌려버리든지 그 보는 것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든지 하면 그것은 피할 수가 있는데 일어나는 생각·사고라고 하는 것은 끊임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강렬한 자극 그물은 바로 뜻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처가 쪽과의 갈등 아니면 자식과의 갈등 이런 것들은 전부다 자신의 견해·생각·관념이라는 것에서 그물에 걸렸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런 그물에 걸리면 일단 괴롭습니다. 두렵고.

그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젖은 음식물쓰레기와 같다 라고 이해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신의 사고에 대한 집착을 버려버려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대립하고 분쟁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걸 불교에서는 까마찬다(kāma-chand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극의 세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까마(kāma)'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욕구'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욕구의 대상'입니다. '찬다(chanda)'는 '좋아한다. 기분좋아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의 대상은 어떤 겁니까?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좋아해서 마음에 들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맛있는 걸 맛보고 나서 그것을 좋아해서 마음에 들어하니까 어떻게 돼요? 더 먹고 싶어 하는 거라.

 

그런 대상이 없어져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보통 사람들은 남자 같은 경우에 집에 들어가면 맨 먼저 하는 것이 신발 벗고 들어가서 소파에 탁 앉아서 테레비 먼저 탁 켭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 자극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극을 끊임없이 줘야되기 때문에 뭔가 자극을 준다는 거라. 애들이 학교를 갔다와가지고 집에 오면 자극할 것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요? 자극 있는 것을 찾아서 게임을 한다는 거라. 안 그러면 좀 건전하게 한다 싶은 사람은 집에 와서 운동을 하든지 아니면 책을 읽든지 어쨌든 그런 자극을 줘야된다는 거라. 자극이 없으면 두려워하고 외로워한다는 거라.

 

자극이 있을 때는 즐거워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없어지면 보통 우리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고 그럽니다.

도깨비라는 것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깜깜한데 자극이 없다는 거라. 보는 자극. 자극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도깨비라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거라. 도깨비가 낮에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벅적거리는 곳에 나타나는 법도 없습니다. 두려움을 가질 때만 나타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공포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무서움을 타면서도 왜 무서워하는지를 모릅니다.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하는 것들입니다.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죽는다는 얘깁니다. 죽는 것이 두렵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극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자극을 받을 수 없으면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사람을 아무런 자극이 없는 곳에 가둬놔 보십시오. 며칠을 견디질 못합니다. ? 죽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극이 없으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죽는다고 생각이 들게 됩니다. 죽는 것이 두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죽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천당으로 가니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할지 몰라도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겁니다. 안 죽을 수가 없다는 거라. 영원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죽는 것이 두려우면 두려워해야 될 것이 아니라 "죽음도 괜찮다. 지금 현재 당장 죽어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잘 살아라" 하는 겁니다. 그게 인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정신적인 병은 우리가 올바르게 관찰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서 죽는 것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두려움 공포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는 것을 부처님이 얘기했습니다.

 

이게 보통 불교에서 얘기하는 까마찬다라고 하는 겁니다.

한없이 끊임없이 자극을 요구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 그물에 걸려서 한없이 괴로워하고. 왜 그러면 자꾸 한 번 걸린 그물에 또 걸리고 또 걸리고 하는가 하는 거라.

그걸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수바니밋따(subha nimitta)' 라고 해서 좋아하는 대상입니다. '수바(subha)' '좋아한다, 행복하다, 기쁘다' '니밋따(nimitta)'라고 하는 것은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끊임없이 뭔가 좋아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낚시할 때 물고기에게 지렁이라고 하는 미끼를 줍니다. 물고기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지렁이를 주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덥석 무는 거라. 거기다가 낚싯밥에다가 꽃을 끼워가지고 주면 그 물고기가 먹겠어요? 안 먹습니다. 어린애들에게 초코렛을 주면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덥석 무는데, 어른들이 먹는 걸 주면 그 어린애들이 먹겠어요? 안 먹는다는 거라. 누구든지 좋아하는 대상은 있게끔 됩니다.

"눈앞에 매달려 있는 좋아하는 대상은 반드시 위험한 것이다 라고 알아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지렁이 누가 공짜로 주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어딨습니까? 공짜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탁 나타났다 할 것 같으면 그걸 덥석 물면 그건 그물에 걸린다는 겁니다.

 

그렇지만은 살아가는 생명에는 누구든지 좋아하는 대상, 이끌리는 대상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서양 문명을 흉내내려고 하고 좋아합니다. 그리고 애들은 달콤한 초콜렛 같은 걸 먹을려고 그럽니다. 어떤 것에 이끌리는 것들은 사람이나 연령 또 시대,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은 각자가 좋아하는 대상 이끌리는 대상은 반드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이런 먹이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 부처님이 이야기 하는 겁니다. ? 좋아하는 대상에 매달리다 보면 노예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예가 된 줄을 모른다는 거라. 청소년들이 오토바이 좋아해서 아무리 오토바이 타지마라 하고 부모가 얘기해도 자기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게 큰 화를 부른다는 걸 그때는 모른다는 거라.

 

왜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는 거라.

그 좋아하는 대상 공짜로 들어오는 대상들을 덥석 물면 그물에 걸린다는 걸 알아야 되는데 왜 알지 못할가 하는 거라. 그 좋아하는 대상, 이끌리는 대상은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청소년 때는 오토바이를 좋아했다가, 어른이 되면 술을 좋아했다가, 나이들면 말동무 하는 것을 좋아했다가, 이렇게 그 먹이가 자꾸 변한다는 거라. 변하기 때문에 그거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라. 변한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적어도 그 먹이를 덥석 물지는 않을 건데.

그래서 아, 이 변하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만이 이 대상에 대해서 달려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걸 부처님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많이 들어왔던 얘기죠? '요니소(yoniso)'가 뭡니까? '원인 결과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관찰한다, 알아차린다'

원인·결과에 맞춰서 그것을 알아차린다. 아, 이것은 이것이 원인이라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이것이 결과가 된다.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그것을 인식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논리적으로 사물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에 탁 걸려서 괴로워합니다.

어리석게 되고 곤란하게 되는 원인은 그래서 이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가 없어서 그렇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줄 알면서 우리는 알아차리려고 하질 않습니다. 정보를 즐기고 싶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정보를 즐기면 괴로움을 계속 당한다는 거라.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 먹이는 분명하게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눈을 예로 들어보면 짝쿠(cakkhu)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색깔이나 형태 루빠(rūpa)라고 하는 물질적인 것이 눈에 탁 들어옵니다. 그럼 우리는 보통 '보였다' 라고 하고 순간적으로 인식합니다. 짝쿠윈냐나(眼識) 라고 그러죠!

 

이렇게 세 가지 조건, 형태와 인식하는 안식 세 가지가 갖춰졌을 때 우리는 팟사(phassa ) 접촉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접촉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접촉이 생길 때까지는 뭘 봤는지 하는 걸 모릅니다. 그냥 단지 접했다 접촉했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사람인지 그것이 책인지 그것이 꽃인지 그물인지 하는 것은 아직 모른다는 거라.

 

그다음에 탁 태어나는 것이 웨다나(vedanā )라고 하는 것,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느낌으로 인해서 안다는 기능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산자나(sañjānā ) 라고 하는 안다는 기능. 그래서 아, 이제 안다는 거라. 안다는 기능에 의해서 우리는 이때부터 터무니없이 왜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단지 '알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았다' 라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탁 개입이 된다는 겁니다. 눈에 색깔이나 형태가 접해서 보인 것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 그것뿐인데, 그걸 사실대로 이해하지 않고 '내가 봤다' 하고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걸 산자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양 웨데띠 땅 산자나띠(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 라고 있습니다. "그가 느낀 것은 단지 그가 안 것뿐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느낀 것뿐인 것이지 진실한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내가 알아가지고 가지고 있는 견해는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일 뿐인 것이지 진실한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누구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단지 자신이 느낀 것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거라. 그걸 산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똑같은 걸 봐도 그래서 사람들 마다 그 나름대로의 반응이나 사고하는 방식이 있다는 거라. 듣고 생각하고 냄새맡고 맛보고 알고 보고 하는 그것은 자신만의 감각이지 진실은 아니라는 거라. 진실일 것 같으면 내가 맛 본 것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맛을 느껴야 된다는 거라.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봐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단지 내가 안 것 뿐이라.

 

그래서 이 안다는 기능, 산자나(sañjānā)의 기능에는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단지 '알았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내가 알았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왜곡돼버리는 거라. 웨다나 다음에 일어나는 게 산자나 기능인데 그런 것인데 그걸 왜곡시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산자나 기능이 있고 나면 일어나는 것이 '위딱까(vitakka)' 위딱까가 일어납니다.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탁 인식하는 기능. 만약에 눈을 탁 뜨자마자 앞에 있는 사람이 눈에 탁 들어왔다. 탁 들어오는 이걸 위딱까라고 합니다.

인식한 순간에 우리는 여러 가지 데이터들을 종합하고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교하고 구분해가지고 '아, 이것은 무엇이다' 하고 일순간에 탁 처리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마음의 흐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의 흐름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이걸 보통 위딱까라고 얘기합니다. 그 위딱까가 일어나면 그걸 탁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다, 꽃이다, 사람이다 하고 인식을 탁 하는 겁니다.

 

인식을 하고 나면 보통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이 '빠빤짜(papañca)'.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들어봤던 그런 빠빤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빠빤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힘드는 건데 이해하기 쉽게 얘기할 것 같으면 '망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망상, 개념'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들을 탁 인식했는데 그 이후에 그 인식으로 인해서 슬프고 기쁘고 좋고 하는 감정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된 것들 이걸 빠빤짜 라고 그럽니다. 저 대상을 보면 잘생긴 사람이면 아, 좋다 하고 집착할려고 하는 마음들, 좋아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맛있는 걸 보면 맛있다고 해서 집착하게 되고 맛없는 걸 보면 화내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걸 인제 빠빤짜라고 그럽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생각해서 실체화시키고 고정화시키는 것, 그걸 빠빤짜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와서 앞에 부처님을 봤다. 한 사람은 아, 거룩하다 그러고, 한 사람은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감흥도 없을 거고, 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저 부처님이 결코 좋다고 얘기 안 할 거라. 똑같은 대상이지만 각자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합성된 것에 따라서 앞에 있는 사실을 왜곡해서 말한다는 거라.

 

빠빤짜라고 하는 것을 아까 망상이라고 얘기했죠?

망상을 할 때는 그래서 항상 분노나 욕구 무지라고 하는 감정이 일어난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서 보통 우리는 '나의 것, 나의 견해' 라고 하는 것들로 탁 믿어버린다는 거라. 내 것은 올바른 거고, 남의 것은 틀렸다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통틀어가지고 우리는 "빠빤짜의 세계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얘기했어요? 나, 나의 것이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은 내가 경험한 것뿐인 것이지, 내가 안 것뿐인 것이지 진실은 아니라고 그랬죠! 그걸 그렇게 이해를 해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각자 다르다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망상으로 인해서 그것을 고정화하고 실체화시킨다는 거라. 그것으로 믿어버리고 스스로도 괴로움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괴로움을 맛보게끔 한다는 거라. 위딱까라고 하는 순간적으로 탁 인식하는 기능인데, 이것만 있으면 되는데, 그래서 데이터를 종합해서 구별해서 탁 인식하면 꽃이다 라고 이렇게만 인식하면 되는데 여기서 진도가 나가버린다는 거라. 빠빤짜라고.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나'라고 하는 '앗따(attā )'의 기능들이 자꾸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것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인식 시스템입니다.

 

집에서 가끔씩 이런 시스템을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왜? 인식하는 데까지만 탁 그치고 그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눈을 감고, 만약에 집에 고양이 기르고 있다. 눈을 탁 뜨면서 고양이를 보라는 거라. 고양이를 탁 인식했을 때는 그거는 위딱까 기능까지만 된 거라. 그런데 거기서 보통 보면 넘어가버린다는 거라. 예쁘다, 귀엽다 한다든지.

그런 기능이 일어나면 ‘아, 이것이 빠빤짜구나’ 하고 탁 알아차리고 그냥 인식하려고 하는 기능만 자꾸 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냄새맡을 때도 마찬가지고 맛볼 때도 마찬가지고 자꾸 훈련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아, 이게 망상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여러분들 집에 가서 한 번 훈련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빠빤짜'의 반대 '닙빤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망상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해방된 경지, 열반의 경지죠. 그런 세계를 얘기합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있는 그대로를 볼 것 같으면 적어도 빠빤짜로 안 넘어간다는 거라.

소리가 들린다. 들리면 들림이라고 하는 것에, 아니면 소리라고 하는 것에 거기서 스톱 하라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아, 이것은 누구 소리다. 아, 이것은 싫다 좋다. 아, 이것은 시끄럽다. 그거로 인해서 내가 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넘어가버리지 말아라는 거라.

 

들리면 들린다고 거기서 스톱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볼 때, 소리들릴 때, 냄새맡을 때, 맛볼 때, 접촉-몸에 감각이 있을 때, 생각이 일어날 때 딱 거기서 빠빤짜로 넘어가는 단계가 어느 단계인가 하는 것을 자꾸 훈련하라는 거라.

실제로 훈련을 해보면 그러면 좋고 싫고도 없이 뭔 재미로 살아가느냐 하겠지만은 실제로 그거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간다는 거라. 인식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라. 유혹이 너무 많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것들이 욕구다 하고 우리는 착각한다는 거라. 그건 안 그렇다는 거라. 그건 밖의 대상이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라. 단지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나떼가마야니 찟따다니로께 상깝빠라꼬 뿌리삿타까모

띳탓띠 찟따라니 다타와로께 얏탓따찌가 위나얀띠 찬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게 아름다운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그거 자체는 욕구가 아니라는 거라. 그냥 존재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사람의 마음이 일어나는 망상, 이 빠빤짜가 욕구일 뿐이라는 거라. 이 세상의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그거를 그렇게 이해해서 그 욕구에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버려버린다는 거라. 빠빤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거기서 끝난다는 거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나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것들로 그냥 구분돼서 존재할 뿐이라는 거라.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그냥 그것일 뿐인데 우리는 그걸 잘생겼다 못생겼다 할 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잘생겼다 못생겼다 하는 그것 자체가 욕구라는 거라. 그런데 그 자체는 그냥 존재하는 것뿐이라. 구분이 돼서 존재하는 것뿐이라.

 

그래서 마음의 욕구 망상으로 인해서 대상에 이끌리게 될 때 우리는 속박된다 하는 겁니다. 술이라고 하는 건 그냥 존재하는 것뿐이라. 각각의 요소가 틀리게끔 존재하는 것뿐이라. 그걸 갖다가 우리는 어떻게 해요? 술이 있어가지고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그러지. 그건 안 그렇다는 거라. 내가 욕구에 인해가지고 술을 먹게끔 된다는 거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욕구로 인해서 술이 취하게 된 것이지 술로 인해서 취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욕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망상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밖의 대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망상 욕구로 인한 것들이 우리가 진리를 알아차리는데 방해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괴로움들을 맛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돼서 우리는 부부싸움이든 뭐든 그런 것들이 일어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시스템은 굉장히 약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안이비설신의가 있고 그것의 대상들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 기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 가지가 합쳐지지 않으면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눈만 감아버리면 보이는 대상은 없어져버립니다. 그걸 인식하지 않고 다른 걸 인식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은 없어져버립니다. 인식시스템은 이렇게 약한 것들이라는 거라. 쉽게 망가진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써 바로 관찰하는 것들로써 이해해야만이 되는 것이지, 욕망이나 집착을 가지는 것들도 쉽게 망가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좋아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여기 마지막으로 부처님 말씀 하나만 예를 들게요.

 

Kāmā hi citrā madhurā manoramā, Virūparūpena mathenti cittaṁ.

'까마 히 찌뜨라 마두라 마노라마, 위루빠루뻬나 마텐띠 찟땅

Ādīnavaṁ kāmaguṇesu disvā,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아디나왕 까마구네수 디수와, 에코 짜레 깍가위사나깝뽀'

라고 하는 겁니다.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구절인데 "욕망의 대상은 아름답고 맛있고 기쁜 것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이런 대상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마음을 혼란시킨다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욕망의 대상은 무서운 재앙을 가져온다.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코뿔소의 뿔과 같이 혼자서 걸어가라." 욕망의 대상 색성향미촉법,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고, 접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멀리해야 될 대상이라는 겁니다. 멀리하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인식해야 됩니다.

들리면 들린다고만 인식해야 되는 것이고, 보이면 보인다고만 인식해야 되는 것이고, 맛보면 맛본다고만 인식해야 되는 것이고, 생각하면 생각한다고만 인식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자극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극의 그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미 그물에 걸렸을 때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빠빤짜로 넘어가지고, 또 나라고 하는 개념으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수행하는 자는 실재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