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마음의 산란함에 대처하는 법 (20100412)

담마마-마까 2021. 3. 15. 09:39

youtu.be/KDBQLWg0dwk

* 마음의 산란함에 대처하는 법 (20100412)

 

가장 기초적인 부분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마음이 수행을 해야 되는데 수행대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것을 보통 우리는 마음이 산란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화를 내서 산란할 수가 있고 욕심을 가져도 산란할 수가 있고, 또 우울했을 때도 산란하기도 하고 또 게으름에 빠져있을 때도 산란하다고 그러는 거고.

그런 것은 오히려 알아차리기 쉬운데 수행이 잘돼서 행복해가지고 산란해지는 것들도 있고, 또 하고자 하는 의욕들이 굉장히 강해가지고 산란해지는 것도 있고, 또 선정 선정삼매에 들고난다든지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하다 보니까 대상에 머무르면서 가져오는 산란함들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있죠? 그게 뭡니까? 아마 스님 법문을 자주 들어봐서 알 건데, 그래도 그것들은 조금 전에 얘기한 여러 가지 산란함들은 "수행의 대상이다" 하는 것들은 이해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오로지 그거 무시해버리고 앉아 좌선하고 있으면 호흡만 관찰해야 되는 거고, 경행하고 있으면 벽에 부딪치든 아니면 눈에 뭐가 보이든 신경쓰지 않고 걷는 데만 집중해야 되는 것들이고 그렇죠?

어쨌든 그런 산란함들도 수행의 대상이긴 한데 이게 여러분들은 지나치게 산란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 있어요? 지나치게 산란하지 않은 사람? (수행자 대답)

 

오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산란함들에 대처하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조용하게 스님이 말하는 것들을 잘 귀담아듣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산란함을 대처하는 방법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찾습니다.

집중하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왜 집중하는 방법으로 산란함을 대처하는가 하면 집중하는 힘들이 커지면 알아차리는 힘들도 더불어서 커지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면 집중하는 힘들도 커집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이 강하면 산란한 것들은 물러가버린다는 겁니다. 일어나도 금방 사라져버린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강하지 않으면 산란한 것들이 일어나지면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지게 된다는 겁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집중하는 힘이 하나가 커지면 당연히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기 때문에 그 알아차리는 힘으로 인해서 이 산란한 것들을 몰아내는 역할들을 하게끔 됩니다.

 

첫 번째 방법이 뭐냐 하면 시간을 재는 방법입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면 앉아 좌선했을 경우에 호흡에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호흡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당연히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또 다른 대상들이 자꾸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호흡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런 대상들이 안 나타나면 참 좋죠. 그것들이 안 나타나면 좋은데 나타나면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끊어내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끊어내버려야 호흡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타났을 때 여러분들도 경험을 해봤겠지만 그걸 나타나지마라 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 집니다. 끊임없이 생각들 망상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진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에 매달리고 있어봐도 그거 쉽게 안 끊어진다는 거라. 그때 필요한 것들이 뭐냐 하면 시간을 재는 방법입니다.

 

그런 것들이 일어났으면,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서 좌선수행을 하고 있는데 밖에 차 소리가 탁 들렸다. 그럼 그 차 소리가 신경이 쓰여서 그 차 소리가 '버스 지나가는 소리다' 아니면 '승용차 지나가는 소리다' 아니면 '오토바이 소리다' 하는 인식들을 한단 말이라. 그랬을 때 그 시간을 재는 방법입니다.

호흡을 관찰하다가 그 소리가 탁 들려서 들렸다 하면 이미 여러분들의 머릿속에는 그 소리로써 인식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소리가 '버스 소리, 무슨 소리' 이렇게 아예 개념화해서 들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재는 방법입니다. ', 그 소리가 나에게 들려서 지속된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지금 만약에 밖에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가 쭈욱 나는 게 차가 이렇게 지나가면서 승용차 지나가면서 나는 소리다 할 거 같으면 그걸 정확하게 1초 2초 3초 4초 5초 이렇게 잴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적으로 저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렸던 게 아, 이게 한 4~5초간 들렸다, 아니면 한 2초 정도 들렸다, 아니면 한 10초간 계속 들렸다, 하고 이렇게 시간을 재는 방법들을 씁니다.

 

시간을 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고 있는 소리를 개념화시키는 것으로부터 피하는 방법입니다. 소리가 들렸으면 '소리' 하고 그 소리의 파장을 인식하면 되는데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라.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의 파장이 귀에 접촉을 해가지고 그것이 뇌로 전달되면서 그것에 대한 변환이 일어납니다. 변환이 일어나면서 물질적인 접촉이 정신적인 접촉으로 변환이 됩니다.

그걸 우리는 소리라고 인식을 한다는 겁니다.

'소리'라고 인식을 하고 나서는 우리는 개념화돼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다 하고 알아차리는 거라. 이렇게 알아차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는 개념화되는 시간들이 점점 더 길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실제로 '소리들림' 하면서 알아차리면서도 실제의 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이 개념화돼있는 소리들을 알아차리는 경우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라.

 

대상을 볼 때도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사람이다, 동물이다, 남자다, 여자다, 이쁘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다' 하는 것들을 이미 개념화되어있는 상태로써 그냥 보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것을 본다고 알아차리더라도 이미 개념화돼있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려 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여러분들도 경험해봤지만은 소리가 어떻게 됩니까? 들려도 지나가버리죠! 볼려는 대상도 마음이 싫증을 내면 안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데 마음을 돌려버리면 그 대상은 사라져버립니다.

이 지속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먼저 체크를 하라는 거라. 마음이 이미 개념화돼서 산란해져 있는 시간을 재는 것으로 인해서 산란해져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동원해보면 어떤 결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밖에 소리를 들었는데 '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한 2초 정도 됐다' 이렇게 알아만 차렸다. 또 다음에 그런 소리가 들리면 또 그런 것들을 알아차렸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집니다. 개념화시킬 수 있는 시간들을 점점 더 내가 더 짧게 만들어나가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소리는 즉각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고 즉각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차 소리'라 해서 지속적으로 그 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내가 인식하는 거라.

그런데 그 소리를 시간을 재므로 인해서 '아, 내가 이런 개념화 된 것에 빠졌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 소리들이 그 소리의 시간을 재므로 인해서 그 소리들이 짧게 자꾸 만들어진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개념화로부터 자꾸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근거들을 마련한다는 것이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개념화의 작용들을 중단시키는 역할들을 해나간다 하는 겁니다.

 

그리해도 이것의 본래의 목적은 뭡니까? 시간을 재는 것의 본래의 목적은?

그 망상, 그 산란해져 있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져서 호흡을 관찰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소리가 들리면 아, 그 소리가 들렸다는 생각 때문에 짜증을 낸다든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합니다.

수행은 그렇게 해서는 안되죠! 대상을 밀쳐내서도 안되고 대상을 붙잡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우선 시간을 재므로 인해서, 시간을 잰다고 하는 것은 실제 소리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시간을 재는 것에 마음을 둠으로 인해서 개념화시키지 않는 작용들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의 산란함을 일차적으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개념화된 것도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는 것이고, 또 시간이라는 것을 재는 것도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 이치는 동일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마음의 산란함에 대처하는 방법은 호흡을 하는 것들입니다. 보통 심호흡을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러죠? 화가 일어났다. 그것도 산란함이니까, 일어났다면 어떻게 합니까? 참는 사람들은 보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몇 번 반복을 합니다. 수행에서도 이 방법들을 동원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 산란함이 일어났으면 산란함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즉시 그 대상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라 심호흡을 하는 겁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크게 내쉬고, 다시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게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조금 훈련이 되면 그 움직임을 보는 게 아니고, 숨을 들이쉴 때의 느낌을 보고 숨을 내쉴 때의 느낌을 봐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런 산란함이 일어났을 때? 숨을 들이쉬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숨을 내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심호흡을 할 때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눠서 심호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산란해져 있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

그다음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들, 딱딱한 느낌이든 시원한 느낌이든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는 것. 물질적인 것들보다 정신적인 현상인 느낌은 훨씬 빨리 변합니다. 단순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는 변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 숨이 그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의 방법에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의 감각 그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앞서야만이 물질적인 현상도 있고 마음이 항상 물질적인 현상을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려면 그 의도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숨을 들이쉴려고 할 때 들이쉴려는 의도를 내서 아, 숨을 들이쉴려고 한다 하고 알아차리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려고 한다 하는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고 이렇게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어떤 것이 앞선 것이고 어떤 것이 뒤따르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알게 되므로 인해서 물질적인 현상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방법들을 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심호흡을 하므로 인해서 마음의 산란함들을 몰아내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방법이 여러분들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방법입니다. 호흡을 세는 것.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그 호흡을 세는 방법.

보통 사마타 수행에서 아나빠나 사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를 하나로 쳤을 때, 그다음에 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두 번째로 치고, 그래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렇게 알아차리고, 다섯 번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했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넷, 셋, 둘, 하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렇게 오르내리는 수를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숨을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하나다. 그다음에 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하나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에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숨이 처음 1번 때의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하고, 두 번째의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할 때는 산란함들이 있었기 때문에 숨이 좀 거칩니다. 그리고 길어집니다. 그리고 점점 더 하다 보면 숨이 가늘어지고 숨이 더 엷어집니다. 그리고 길이도 짧아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 들이쉬는 것이 끝나고 나서 내쉬어지는 것이 이게 경계가 불분명해져 버립니다. 들이쉬는 것이 곧 내쉬는 것처럼 되어져 버리고 내쉬는 것이 들이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숨을 쉬는 것 수를 세는 것들을 중단해버리고 호흡을 바라보면 호흡을 아주 자연스럽게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수를 세면서 마음의 산란함을 제어하는 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 방법들이 통상적으로 쓰는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를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중에 자기가 맞는 방법들 중에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 보면 세 번째 방법들을 많이 씁니다. 수를 세면서 마음의 산란함을 가라앉히는 방법들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세 번째를 할 거 같으면 문제가 뭐냐 하면 대부분 마음에서 그 산란한 대상이 일어난 것들을 떨칠려고 하는 마음들이 강해집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만 조심하면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산란한 것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리해도 이런 방법을 동원해도 여러분들 마음은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가도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발의 통증 아픔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여러 가지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산란함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럼 또 그런 방법들은 동원했다가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오고. 또 일어나면 또 그 방법을 동원했다가 다시 돌아오고 이렇게 합니다.

잠이 오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그것도 마음의 산란함 중에 하나입니다. 게으른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도 탐·진·치 종류 중에 하납니다. 조금 있다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은 그게 마음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 산란함을 몰아내는 방법들을 여러 가지 동원하는데도 왜 자꾸 일어나느냐 하고 마음을 먹어버릴 거 같으면 더 이상 지속을 못해나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래요?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 했습니다. 아,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거구나 하고 인식을 하고 그래도 끊임없이 산란함이 일어나면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산란함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오고, 또 일어나면 또 그 방법을 동원해서 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해나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분들이 관찰해야 되는 대상은 호흡만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잘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호흡만 알아차리고 있겠지. 그런데 못 알아차리니까 그런 여러 가지 산란함들이 일어나거든. 그런데 그것도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라는 거라. 알아차릴 대상인데 대부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산란함을 몰아내는 이런 세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여러분들 호흡도 마찬가집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있는 그대로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면 좋은데 그게 안되니까 뭐합니까? 명칭을 붙이면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는 거라. 다른 산란함이 일어날 때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좋은데 알아차림이 약하면 어떻게 되요?

수면 아래로써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탁 튕겨져 올라왔을 때만 알아차리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것을 바르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과거의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라. 소리는 이미 훨씬 전에 지나가고 없는데도 소리 들린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현실을, 마음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아,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지극하게 지멋대로 날뛰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먼저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도 그 날뛰는 마음 따라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내가 해야 될 몫이라는 거라. 산란함이 일어나는 그 대상들도 내가 알아차릴 대상인 것이고, 호흡도 내가 알아차려야 될 대상일 뿐이다 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만이 사띠가 알아차림이 순일하게 돼나갑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그 호흡을 관찰하는 한 시간 중에서 십 분도 안됩니다. 나머지 오십 분은 그냥 막 날뛰는 마음들 여러 가지 산란한 마음들에 다 시간을 빼앗깁니다. 그러면 그렇게 계속 수행을 해야 됩니까?"

그리해야 됩니까? 맞습니까? 그리 해야 되는 것이?

그런데 관찰력이 집중력이 강하지 않으면 거기에 만날 시간 뺏겨서 시간 다 보내버리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

 

산란함을 알아차릴 때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앉아서 좌선할 때 '주대상'은 호흡입니다. '이차적인 대상'은 그런 여러 가지 산란함들입니다. 실제로 앉아서 수행할려고 했던 거는 뭡니까? 호흡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주가 되어야 되는 것인데 이게 거꾸로 됐거든.

그러면 이 밖에 것들을, 산란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 동안 알아차려야 되느냐는 거라.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산란한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릴 것.

그다음에 산란한 대상이 어느 정도 강한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것.

세 번째가 그 산란한 대상이 어느 만큼 어느 시간만큼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것.

이 세 가지 방법으로 해야 됩니다.

 

화가 일어났으면 '아, 화가 일어났구나' 하는 화가 일어난 사실을 먼저 알아차려야 됩니다.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먼저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화가 내가 참을 수 있는 정도인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정도인가 하는 것들을 그 강도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화가 어느 만큼 지속되는가? 내가 알아차리니까 그것이 금방 사라지는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지속하고 있는가?

이 세 가지를 알아차릴 동안에만 마음의 산란함이라고 하는 '이차적인 대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밖에 마음의 산란함을 알아차리면 안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알아차린다 하면서도 그 속에 내가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으면 시간이 더 많이 지속돼 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한 시간 동안에 십 분 호흡을 관찰하고 나머지 오십 분은 그 산란함을 관찰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만약에 이 세 가지를 알아차릴 때 알아차리는 것을, 내가 화가 일어난다고 칩시다. '아, 이게 화구나' 하고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화인 줄 알 거 같으면 우리는 화로부터 벗어나 버립니다. 화가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칩니다. 그럴 거 같으면 화는 놔둬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마음이 기본적인 대상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호흡에서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이 세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줘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 하고,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 동안 지속되는가, 이 방법으로 관찰하고 빨리 돌아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고 그 대상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밖의 대상이 일어나는 경우들을 여러분들이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순간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발화되듯이 일어나집니다. 화가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고 소리가 들릴 때도 마찬가지고 졸 때도 마찬가지고 어떤 것이든 자동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자동적으로 일어나면 마음은 그 대상을 뒤쫓기 바쁩니다. 마음이 대상을 쫓으면 쫓을수록 그 산란함의 대상이 속박을 하게 돼버립니다.

마음이 속박돼버리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못 알아차리게 됩니다.

 

대상이 일어날 때는 의식 아래서부터 일어나집니다.

집중력이 강하지 않으면 의식 아래서 일어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의식 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니까 대상에 쫓아가버립니다. 그것에 붙잡히고 빠져버리는 경우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대상이 일어났으면 그 대상이 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얼마만큼 강한가, 또 어느 정도 계속 지속되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이게 마음이 산란함의 병을 고치기 위한, 마음의 산란함들이 여러 가지가 일어났으면 그것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방법입니다.

 

왜 이 방법을 사용하느냐면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미 일어나는 시발점을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에 빨려 들어가버린다는 거라. 수행은 대상에 함몰되어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됩니다. 떨어져서 대상을 봐야만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되고 그 대상으로 부터 빠져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관찰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상으로부터 한발짝 물러나서 그 대상이 멈추도록 하고 나서 그것을 관찰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대신에 그런 대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억지로 억제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 대상이 일어났으면 그 대상을 무시해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그 대상을 멀리 쫓아내버릴려고 하고 나서 호흡으로 돌아온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그 대상을 절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난 것을 그대로 '아,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이게 생각이 지속되는 것이 '아, 생각이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는구나' 아니면 '생각이 일어났다가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무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 대상이 사라지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야지, 생각이 일어나는데도 그것을 무시해버리고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그 생각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그 생각들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또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오히려 그 생각들을 강하게 해줄 뿐입니다. 그 생각들을 집착이 없는 상태로써 관찰할 때만이 그 생각들은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나온 영화 중에 핫트로크 인가 하는 영화가 있었어요. 그걸 스님이 컴퓨터에서 맛보기로 보여주는 게 있었는데 그때 잠깐 본 게 뭐냐 하면 폭탄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여러 방호복을 입고 전선을 자를려고 하는데, 그거보다는 자기 자신은 옷을 벗어버리고 그 전선을 자릅니다.

그걸 보면서 스님이 생각했던 것들이 뭐냐 하면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전선을 자를 때는 방호복들을 입었으니까 몸도 무겁고 또 여러 가지 행동하는데 제약들을 가져옵니다. 그럼 불편한 상태라. 불편한 상태에서 할 거 같으면 호흡도 고르지 못하니까 당연히 잘못 자를 수 있다는 거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피해를 받을 수가 있는데, 옷을 벗어버린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 전선을 자르니까 정확하게 잘라집니다. 폭탄을 다루는 사람은 그와 같이 합니다. 우선 안정을 시키고 나서 대상에 다가가고 나서 그것을 분명하게 잘라줍니다.

 

산란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객관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대상을 바라봤을 때는 내가 잘못 잘라버린다는 거라. 대상을 명확하게 볼 수도 없을 뿐아니라 대상에 함몰돼가지고 지속돼 버린다는 거라. 시간이 한정 없이 길어진다는 거라. 방호복을 벗고 했으면 1분이면 끝날 거를 방호복 그 두꺼운 거를 입고 할 거 같으면 4분 5분이 걸려버린다는 거라.

 

산란함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종이호랑이와 마찬가집니다.

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오히려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거와 같습니다. 그 사실만 알 거 같으면 그걸 분명하게 봐서 빨리 제거를 해낸다는 거라. 그런데 보통 생각을 할 거 같으면 그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이 이미 평온하게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생각을 관찰하니까 시간이 더 더뎌지는 거라. 그걸 관찰하는 것이.

그래서 이 세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것이 이게 뭐다' 하는 거를 제일 먼저 딱 알아차리고, 그렇게 알아차릴 때는 아주 고요한 상태에서 마음이 직접적으로 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화가 일어났으면 '아, 화구나' 하고 알아차릴 때, 객관적으로 알아차릴 때는 '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아주 고요한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거고.

화가 일어난 것은 마음이 들떠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럼 들떠있는 마음의 상태를 '화구나' 하고 내가 알아차릴 때는 평온한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떨어뜨려서 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가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할 거 같으면 그 화를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이고, 제어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화로부터 벗어나야 되는 거라. 화를 관찰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거를 본다든지 다른 일을 한다든지 벗어나버려야 되는 거라.

이 강도가 얼만큼인지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제어가 되겠다 싶을 때 내가 다시 객관적으로 그 화를 관찰하게 되는 거라. 그럼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화를 아주 냉정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화가 얼마간 지속됐구나, 아 이번엔 화를 관찰했는데 금방 사라져버렸다. 아니면 이번엔 화를 관찰했는데 조금 더 오래도록 지속됐다 하는 걸 분명하게 내가 인식한다는 거라.

 

밖의 대상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도 수행하고 알아차릴 대상이지만 이 세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그 대상에 계속하고 있으면 한 시간 내내 실제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관찰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린다는 거라.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마음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일어나 있는 것들을 억제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중단됨이 있으면 안됩니다.

알아차리는 대상도 중단이 돼버릴 것 같으면 수행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호흡 계속하고 있죠? 호흡이 중단돼버리면 어떻게 돼요? 죽어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림은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중단됨이 없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탐·진·치가 있으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어떤 것이 탐··치가 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해야 됩니다. 그 대상을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대상은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수행이 알아차림이 끊어짐이 없이 탐··치가 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릴 때 우리는 도와 과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실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대상들은 많이 있습니다.

 

먼저 탐심·욕망·욕구 부분입니다.

욕심을 가지게 될 때 보통 어떤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까?

좀 더 하고 싶다든지 하는 이런 마음들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욕구를 가지면 쫓아가는 것들. 욕구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상을 쫓아갑니다. 이 두 가집니다. 이 두 가지가 일어났으면 아, 이게 욕구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 잘될 때 어떻게 합니까? 좌선수행 끝내고 경행해라 하면 보통 안합니다.

왜? 좀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탐·진·치가 있는 상태의 알아차림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는데 본인은 자꾸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 수행이 잘 되고 있으니까 조금 더 할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니까 한 시간까지는 참 잘됐는데 그 욕구가 일어나자마자 그 뒤로부터는 안돼. 수행이 안되는 거라. 당연히 안될 수밖에 없는 거라.

잘될 때도 마찬가진데 악한 욕구 같으면 더더구나 안 좋겠지. 그래서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아, 이게 더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일어났구나. 아니면 내가 이것을 쫓을려고 하는 욕구가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먼저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욕구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만 일어나집니까?

또 다른 감정들이 일어나집니다. 욕구가 일어나면 집착할려는 것들이 일어나든지 욕구가 일어났으면 또 뭔가 다른 감정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욕구와 함께 일어나는 다른 감정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욕구의 범위와 정도를 정확하게 자꾸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어느 정도 계속되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리도록 하고, 그렇게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고, 이게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먼저 뭐 하고 싶다 하는 게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아, 욕구가 일어났다 하고 그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됩니다. 하고 싶어하니까 어떻게 돼요? 또 다른 감정들이 일어나죠? 앉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앉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다,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났다는 그걸 또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앉고 싶다, 하고 싶다 하는 욕구가 어느 정도 지속되는가 그걸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딱 사라지고 나면 사라졌다는 걸 알고 호흡으로 돌아오고, 그러고 나서 시간이 다 됐으면 일어나서 경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 방법으로 해야 됩니다.

그 욕구가 사라지고 나서 좌선을 더 계속하든지 그런 방법으로 해야지, 더 앉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앉아버리면 수행은 안돼버립니다.

그게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다음에 화냄 <1분 정도 소리 안들림...>

그것들이 다 화냄·분노라고 하는 일종입니다. 그것도 꼭 마찬가지로 욕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아, 내가 화내는 마음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화내는 마음이 또 다른 마음하고 결합하는 겁니다. 화가 일어나니까 내가 마음이 쓰린다든지, 마음이 쓰린다는 건 신체적으로 쓰린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입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이 따라왔구나' 그런 것들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알아차려서 사라지고 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고.

 

그런 대상이 일어났을 때 세 가지 원칙을 분명하게 지키면서 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그것만 알아차리고 나면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분노에 휩싸인 상태에서 분노인 것은 알아차릴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가서 아, 이것을 '분노' '분노' '분노' '화냄' '화냄' 하면서 알아차릴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거라.

분명하게 그것을 인식하고 나서 그 인식한 것이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객관화시킨 상태에서 알아차릴 때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산란함이 일어났을 때의 세 가지 대처법을 분명하게 했을 때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지, 그렇게 안 될 때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아예 무시해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와 버리든지 무시를 해버리고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아까 노보살님 얘기했던 졸음 부분.

졸음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졸음이 있고 정신적인 졸음이 있습니다.

신체적인 졸음은 그것은 실제로는 수행의 대상으로 여기질 않습니다.

신체적으로 진짜 졸릴 때는 부처님도 자라 그랬습니다. 만약에 그런 경우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알아차리는 대상이 아니고 그냥 자야 됩니다.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일정 부분 신체적으로 휴식을 취해줘야만이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하루 중에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어떨 때는 세 시간씩 주무셨다 그럽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조차도 없이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고 오히려 그런 대상에 휘말려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잠은 안 자게 될지 몰라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힘들은 약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체적인 졸음은 떼어내고, 정신적인 졸음, 마음의 졸음입니다.

피로하다든지 이렇게 느껴졌을 때 진짜 육체적으로 막 일을 해가지고 피로할 때 이런 것은 신체의 감각입니다. 이런 신체적인 피로감 그거는 졸음이라고 그럽니다. 그거는 분리해서 얘기하고, 정신적인 피로감입니다.

 

마음의 졸음이라고 하는 것은 분노와 관계가 있습니다.

안 그런 것 같죠? 정신적인 졸음은? 분노와 반드시 연관돼있습니다.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할 때 졸음이 옵니다. 대상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할 때 아, 이거 수행하기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졸리게 됩니다, 정신적인 졸음.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분노입니다.

그래서 이게 졸음이지만 '아, 분노의 일종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뭐만 했다고 할 것 같으면 정신적으로 졸음이 온다. 실제로는 몸이 피곤하지도 않는데 자꾸 그런다 할 거 같으면 '아, 나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정신적인 졸음입니다.

 

그런데 아까 욕구하고 화냄은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뒤에 늦게 알아차려도 되는데 이 정신적인 졸음은 다릅니다. 정신적인 졸음은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졸음에 반드시 빠져버립니다. 이 정신적인 졸음이 일어날 때는 가장 신속하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언젠가 스님이 졸음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도 좀 더 세밀하게 분류를 해서 관찰하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건 빨리 알아차려야 되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잠에 떨어져버리게 돼버립니다.

실제로 눈꺼풀이 닫히고 있어도 '눈꺼풀 닫힘' 하면서 객관적으로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실제로 눈이 닫히고 있어도 졸음이 오는 초기 때는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아서 닫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는 '눈꺼풀 닫힘' 하면서 눈꺼풀이 닫히는 걸 알아차리면서 그 눈꺼풀을 뜰려고 합니다. 실제로 눈을 뜨는 게 아니고, 눈을 뜰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무겁다는 느낌이 또 옵니다. 그럼 '무거움' 하면서 객관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누르는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그 누르는 느낌들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러다 보면 따가움이 옵니다. 그럼 '따가움'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나중에는 쏘는 느낌들이 듭니다. 바늘로 찌르는 통증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다고 알아차리는 거고, 이렇게 졸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는 즉시 바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따가움의 고통스러운 상태가 지나가고 나면 바로 잠에 떨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어떻게 돼요? 그냥 처음 졸리는 때 마음이 서서히 무거워져 오면서 그냥 잠에 떨어져 버리는 거라.

졸음은 마음에서 활기가 없을 때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활기를 자꾸 불어 일으켜줘야 됩니다. 활기를 불어 일으킬려면 대상을 자꾸 쪼개서 나누어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음의 산란함을 일으키는 종류 중에서 초조한 것들입니다.

실제로는 바쁜 거 하나도 없는데 마음이 계속 초조합니다. <30초 정도 소리 안들림...>

손을 가만히 놓지를 못해. 뭔가를 자꾸 움직이고 잡을 게 없으면 앉아서 손을 자꾸 꼼지락꼼지락 거립니다. 초조하다는 거라. 물어봤어요. 마음이 고요하냐고? 자기는 마음이 고요하대. 그러면서 계속 그러고 있는 거라. 침착함이 없어져 버린 거라. 이미 하나의 대상에 몰두해가지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 초조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게 되고 또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초조함의 일종입니다.

 

그럴 때 초조함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만약에 손을 움직이고 있을 거 같으면 움직임을 그만두어야 되겠지? 생각이 자꾸 혼자서 일어나면 생각을 그만두어야 되는 거고. 나도 모르게 왔다갔다 방안을 휩쓸듯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중단해야 되는 거고. 초조함이 일어났을 때는 일단은 중단을 해야 합니다.

일단은 멈춰서서 행동을 멈추든지 또 정신적인 것도 멈춰서야 됩니다.

 

먼저 몸이 멈춰야지만이 초조함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멈추고 나서 '아, 내가 초조함이 일어났구나. 이것이 초조함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런 초조함이 일어났을 때 , 이게 초조함이 얼마만큼 강도가 강한가 알아차리기 위해서 가슴에다가 알아차림을 두고, 그래서 '팔딱팔딱, 콩닥콩닥, 아픔이 있다'든지 이게 얼마만큼 강한가 알아차려서 '아, 내가 초조함이 굉장히 심했구나' 아니면 '초조함이 조금 있었구나' 하는 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초조함이 있음을 갖다가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면 초조함이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주대상인 호흡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경행을 하고 싶으면 경행을 하고, 반드시 육체적인 행동 육체적인 움직임을 멈추어야만이 초조함을 제어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마음의 산란함을 가져오는 것들이 의심하는 것들.

여러분들 많이 하죠? 이거 해가지고 수행해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이 방법이 맞는가? 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이렇게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의심이라고 하는 건데 의심은 대책이 없습니다. 의심하는데 뭐 어떻게 할 거라? 의심이 일어나면 끝까지 자기가 확인을 해보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확인을 안 하고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심정적으로 마음을 굳혀버립니다. 그게 문제가 돼버립니다. '아, 이걸 해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없는가' 의심만 자꾸 하다가 그만두어버린다는 거라. 마음에 심정적으로 굳어져서 그것을 그만두어버린다는 거라.

 

왜 그렇게 될까? 의심이 일어나면 뭐 때문에 될까?

의심이 일어나는 것을 경전에서 뭐라고 표현을 하느냐면 '흐린 스크린'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이 맑지 않고 흐려져 있기 때문에 안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는 거라. 의심이 일어났으면 반드시 안에 뭐가 있는가 하고 확인을 해야 되는데 확인이 안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흐린 상태에서 보니까 어떻게 돼요? "없다" 하고 판단을 해버린다는 거라. 실제로는 있는데, 그게 의심이라는 거라. 그래서 의심이 일어났을 때는 '내 눈에 눈꺼풀이 씌인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을 하고 반드시 의심하는 것을 먼저 멈추어야 됩니다. 멈추고 나서 그 의심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의심이 일어났다, 그러면 '아, 의심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의심하는 것들이 내가 뭘 의심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먼저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 의심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의심한다든지. 수행법에 대해서 의심났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지금 수행해보면 되는 거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의심이 났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서 확인을 해보면 되는 거라. 확인해보기 전에는 어떻게 돼요? 그 의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의심을 중단해야 됩니다. 의심을 지속해가지고 좋은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단해버리고 다시 다른 대상을 찾아야 됩니다.

 

다른 것들은 수행에서 즉각즉각 다스려져 나가는데, 의심 부분은 수다원이 되어야만이 떨어지는 현상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확신은 내가 실제로 체험해보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의심을 가질 경우에는 그것을 체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중단하고 묵묵히 따라하든지, 아니면 의심하지 않고 그거는 나둬버리고, 또 다른 것들을 해본다든지 이런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자! 이렇게 악한 감정들은 <20초 정도 소리 안들림...>

 

선한 것들은 알아차리기가 참 힘이 듭니다.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 즐거움, 행복감, 또 삼매에서 일어나는 그런 성취감들 그런 것들은 알아차리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그것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될 대상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런 선한 마음들로써 일어나는 것들을 가지지마라 하는 게 아닙니다. 자비심을 가지라 해서 항상 자비심을 가지도록 자꾸 노력하고 자비심이 충만해서 행복감이 자꾸 일어난다 해서 그 행복감을 가지지 말고 그걸 버려버리라, 만날 얼굴 찌푸리고 있어라,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그 "행복하다는 것에 대해서 붙잡히지 마라" 라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할 것 같으면 거기서 또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고요한 얼굴들도 그런 집착으로 인해서 찌푸린 얼굴로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고. 어떤 것이든 그것이 설혹 선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집착의 대상은 아닙니다. 붙잡을 대상은 아니라는 거라.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고 놓아버려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마음은 이와 같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전부 다 산란함을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일어났으면 지속되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반드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아야 됩니다.

왜 그럴까? 호흡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호흡을 집착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어난 것을 집착하면 안 사라질려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도 일어난 걸 붙잡고 있으면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할 것 같으면 문제가 돼버립니다. 그것이 설혹 선한 마음이라 해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뭐라고 합니까? '아와사(아사와, asava)'의 열 가지 종류라고 합니다. '더러움', 마음을 물들이는 열 가지, 그중에 다섯 가지는 악한 마음으로 인한 것이지만은 또 다섯 가지는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행복감, 기쁨, 성취감 이런 것들도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는 종류들입니다. 붙잡아버리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집착할려고 하면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이 부분 마음이 산란함에 대한 부분은 다음 시간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