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수행의 진척을 위하여 (20100707)

담마마-마까 2021. 3. 1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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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의 진척을 위하여 (20100707)

 

수행을 해나가는데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수행이 빨리빨리 진전이 잘 안될까? 무슨 이유들이 있을까?

(수행자 대답)

가장 근본적인 것을 빼먹었어. 뭐겠어요?

수행 안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지 뭐. 안 그래요? 수행 열심히 하는데 진전이 없을리는 없잖아. 수행에 진전이 없는 거, 수행 열심히 안 하는 거, 게으름 피우는 거는 틀림없이 이유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살아가는 생명체라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뭐냐면 편하고 싶고 하기 싫어하고 게으름피우고 싶다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들을 바르게 해야 되고.

 

또 수행에 진전이 없는 이유들이 뭐가 있겠어요? 뭐가 또 있을까? 여러분들이 생각해봐요. 왜 진전이 없는지? 너무 바쁘지! 수행할 시간보다는 주변적인 일들에 너무 많이 바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주변적인 일들을 안 할 수도 없는 거고 그건 틀림없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수행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과정들(...)

대부분 크게 보면 이렇게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자! 인제 스님 말을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부처님 말씀 이해 못한다는 사람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거야. 부처님 말씀같이 쉬운 게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놨습니다. 단지 인제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들이 한문을 통해서 오고 이래가지고 좀 어렵게 되어있는 경우들이 있는데, 요 근래에는 테라와다 서적들이 그대로 번역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참 쉽다. 그리고 가슴에 와닿는다 하는 경우들을 많이 얘기들을 합니다.

어쨌든 원래 부처님 말씀들은 참 쉽습니다. 그걸 듣고 이해를 못 하는 경우들이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아주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금방 그걸 듣고 이해해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게 있습니까?

실천하지 못하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없을 거라. 부처님 가르침의 특색이 그겁니다.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는 만약에 예를 들어서 보시하라고 할 때는 보시를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고, 또 명상하라고 할 때는 명상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지 그냥 말로만 요즘 말로 하면 그냥 립서비스로만 하는 얘기는 없다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중에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있어요?

아, 이거는 세상의 이치와 다르다. 아니면 다른 자연적인 조건들 하고는 다르다 해서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늙고 병들기 때문에 늙고 병든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고, 누구든지 만족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얘길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는 누구든지 실천이 가능하고 누구든지 그것을 납득하고 증명할 수가 있는 거고,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에는 크게 어긋나는 부분,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것들은 사실은 없습니다. 그 가르침 대로만 해나가면 우리가 수행에 진전이 없을 리는 없단 말입니다. 또 한 번 되짚어보십시오.

 

부처님이 언제 앉아서 좌선만 하루 종일 하라고 한 적이 있어요? 없죠! 그리고 밥을 한 끼만 먹고 아니면 밥을 한 끼도 먹지 말고 하루 종일 수행만 하라고 한 적 있어요? 밥 먹을 거 다 먹고 좌선하다가 또 힘이 들면 일어나서 경행하고 또 일상생활할 거 있으면 일상생활하고 그러라고 한 거라.

고행을 해가지고 힘들게 수행하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라.

 

그리고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관습들 그거하고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습들을 버리라고 한 적 있어요? 없잖아! 여러분들 기독교 믿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집안이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다고 언제 기독교 버려버리고 불교 믿으라고 한 적 있어요? 집에서 제사 지내고 있기 때문에 제사는 틀린 것이다 해서 제사 지내지 마라 한 적 있어요? 그런 건 없다는 거라.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서 배척하고 하지 마라 한 것도 없다는 거라.

 

또 하나는 종교적인 관습들. 종교적인 관습들이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수행법회를 시작할 때 맨 처음 삼보예경을 합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담마에 대해서 상가에 대해서. 그런 것들도 종교적인 관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관습없이 하지 마라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든 안 하든 그거는 개인의 자유이고 그 단체의 자유인 것이지 그것이 강제적으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른 선원에 가면 종교적인 관습이 이 방식대로 안 하고 그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하게 됩니다. 도 다른 절에 가면 다른 방식들로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틀렸다 해가지고 그거 따라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전통적인 것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것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힘들게 수행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부처님 가르침이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고 증명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적느냐는 거라. 적은 건 둘째치고 그 적은 사람 중에서도 또 수행에 진전이 있어가지고 과위를 성취한 사람들은 더더구나 더 드물다 하는 거라. 왜 그럴까 하는 거라.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특정인을 위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누구는 부처님 법을 지닐 수 있고 누구는 지닐 수 없다 하고 얘기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수행을 열심히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했지, 내 제자이기 때문에 니만 깨달을 수 있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는 거라. 그리고 누구든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얘기한 것도 없다는 거라. 누구든지 다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어요? 대념처경 같은 경우에는 열심히 수행하면 7년 이내에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른다고 돼있습니다. 그렇게 돼있죠! 대념처경 맨 마지막에 보면 그렇게 돼있습니다.

 

어느 종교가가 내 가르침을 잘 실천하면 특정한 기한을 정해놔 놓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얘기해놓은 게 있을까? 내가 죽고 나면 사후 천국에 간다, 아니면 이 지구상에 멸망하고 나면 내가 구제를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생전에 그런 경우가 있을까? 자이나교가 그런 게 있습니다.

자이나교에서 그것도 일반 재가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수행자가 돼가지고 출가해가지고 출가사문이 돼가지고 지극정성으로 수행하면 12년이 지나고 나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문헌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도 재가인과 출가인을 구분해가지고.

 

그런데 부처님은 재가 · 출가 구분도 없이 그리고 빈부의 격차라든지 아니면 지식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열심히만 하면 7년 이내에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도 모자라가지고 6년 이내에, 1년 이내에, 마지막에는 7일 이내에 깨달을 수가 있다는 거라. 열심히만 하면! 열심히만 하면!

그마만큼 부처님은 이 가르침에 대한 확신들을 가지고 얘기를 했습니다.

결국 경전에는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없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고 그것을 실천해나가고 그것을 증명해나가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잘못된 부분은 없다는 얘깁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얘기하지 못했던 것까지 부처님이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대부분 수행에서 텍스트를 잡고 있는 것들이 뭡니까?

대부분 청정도론을 잡고 있습니다. 그럼 청정도론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경전에 문제가 없으면 그 경전을 주석해 놓은 주석서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청정도론은 5세기 때 붓다고사 스님이 쓴 거죠! 싱할라어로 써진 이 주석서를 빨리어로 번역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하고 스리랑카에 있는 큰스님들한테 얘기를 합니다.

스리랑카에 전해진 경전은 빨리어 삼장과 주석서가 같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빨리어 삼장은 빨리어 그대로 싱할라말로 표기를 해놨는데, 주석서는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해가지고 기록을 해놔 놓았거든. 그러니까 스리랑카 말을 모를 것 같으면 주석서는 읽을 수가 없어. 이해를 못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한글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번역을 본 사람들이 이걸 보고 뭔 말인 줄 어떻게 이해할 거라? 전혀 모른다는 거라. 주석서는 그렇게 써져있습니다.

 

그런데 경전은 뭐로 해놓았냐 하면 공통적으로 쓰이는 빨리어로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붓다고사 스님이 봤을 때 아, 이 주석서를 빨리어로 다시 쓸 거 같으면 누구든지 그걸 보고 이해를 할 수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넘어온 스님을 스리랑카에서 뭘 믿고 주석서를 빨리어로 바꾸도록 해주겠어요? 일구일언도 어긋나지 않게끔 기록을 해놨던 것들이고, 일구일언도 변경하지 않고 첨가하지 않은 것들인데 아, 이 붓다고사 스님이 빨리어로 바꿨을 때 개작하면 어떡할 것이냐는 거라. 그래서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 스리랑카 스님들이 이 붓다고사 스님한테 여러 가지를 질문을 합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통과되고 나서 마지막 관문에서 상윳따니까야 니까야 중에 한 구절을 이 붓다고사 스님에게 줍니다.

 

청정도론이 어떤 형식으로 써져있습니까? 세 가지 찹터로 써져 있죠! 그렇죠? 계정혜(戒定慧) 부분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에게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구절 계·정·혜에 대해서 논하시오. 요즘 같으면 논문을 써라는 거라. 그 논문을 쓴 게 이 청정도론이라. 그래서 청정도론을 보고 다른 장로스님들이 "아, 이 붓다고사 스님이 빨리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어긋나게 적을 가능성이 없다" 하고 판단해가지고 그 주석서들을 빨리어로 번역하도록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 있는 주석서들이 다시 빨리어로 써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청정도론은 어떤 면에서는 논문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렵죠. 그래서 청정도론을 주 텍스트로 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산란해합니다. 그런 경우들이 많죠? 수행방법도 가지가지 아주 자세하게 써놔 놓고, 그러니까 이건 어떤 걸 해야 될지 감을 못잡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경전을 근거로 해야 됩니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수행이 시작이 돼야 되고, 그리고 경전을 근거로 해서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 주석서를 활용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주석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주석서가 근거가 돼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면 경전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수행방법 중에 하나를 택한다든지 아니면 스승에게 물어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주석서가 아니라 경전을 근거로 해서 자꾸 공부를 하도록 하고, 그걸 또 근거로 해서 수행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쨌든 수행방법은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 그중에 하나를 택해가지고 하도록 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승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더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게 빨리어 경전과 주석서의 의미입니다.

 

어쨌든 이런 경전과 주석서가 있는데도 부처님 당시 때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직접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인데도.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처님 살아계실 땐데, 부처님이 직접 가르쳤는데 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부지기수로 많이 있었을까? 나름대로의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는 수행할 때 뭘 목적으로 해서 수행하겠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있습니까?

수행 왜 합니까?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서, 내 몸에 병이 있으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그거 좀 고쳐볼려고, 갖가지 이유들을 댑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보면 십중팔구 수행에 진전이 없어요.

 

수낙캇타라고 하는 스님이 출가를 했는데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는데, 출가해서 수행하는 목적이 뭐냐하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신통력, 붕붕붕 날아가는 신통력 개발할려고 수행을 했습니다. 부처님한테 신통력 개발하는 걸 아무리 가르쳐달라고 노력해도 안 가르쳐주고,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똑같이 안 가르쳐줬는데도 그 스님들은 어떤 경우에는 신통력이 있거든. 이상한 거야. 부처님이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수행하다 보면 얻어지는 결과라는 생각을 안 하고 신통력 개발할려고만 생각하고 그쪽으로만 공부를 하다보니까 안되는 거야.

 

정신적인 문제라든지 육체적인 질병이라든지 아니면 마음을 편안히 하려고 하는 것은 수행하다 보면 얻어지는 결과물인데 그걸 목적으로 하다 보면 안되는 거라.

이미 그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수행에 진전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 때도 그랬다는 거라.

 

또 하나 수행이 진전이 없었던 이유는 뭡니까? 부처님 당시 때든 아니면 지금이든? 니 탓하는 겁니다. 내 탓이 아니고 니 탓. 우리 선원이 집중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되니까 화요일 와서 두 시간 수행하고 목요일 와서 두 시간 수행하고 일요일 와서 두 시간 수행하고 땡! “집중수행 안되는데 어떻게 해요?” 외부적인 조건에만 자꾸 전가를 한다는 거라.

우리 애가 공부 못하는 거는 선생이 잘못 가르치니까 그렇다는 거라. 선생이 실력 없으니까 우리 애도 공부 못한다는 거라. 외부적인 환경조건에 자꾸 빌미를 주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습니까? 그럴 거 같으면 못난 선생 밑에는 다 공부 못해야 되는데 어떤 애들은 서울대 들어가거든. 왜 자기 아들만 서울대 못 들어가는 거라, 아예 대학에서 떨어졌느냐는 거라. 주변 조건들도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수행처가 집중수행 못하는 근거라고 할 거 같으면 집에서 집중수행하면 되는 거고 다른 데서 집중수행하면 되는 거고, 또 다른 날 와서 이 선원에 와서 수행하면 되는 거라. 그런데도 자꾸 그 환경조건만 탓하고 있는 거라. 대부분 진전이 없는 것들은 보면 이런 이유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뭐라고 그랬어요? 목적을 가지고 수행을 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두 번째는 내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주변적인 것들,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주변적인 것에 자꾸 핑계거리를 찾을려고 하는 것들.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게으름'이라는 것들입니다. 게으른 게 만날 잠이나 자고 늦게 일어나고 뭐 이런 것들을 게으름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게으름 피운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아까 처음에 얘기했지만 모든 생명에게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이 게으름 피우는 것들입니다. 그걸 반드시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괴롭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이 행동이 되는 것들이라. 배가 고프는 괴로움이 있으니까 밥을 먹을려고 하는 거고, 서있으니까 괴로우니까 앉아야 되는 거고, 앉으니까 괴로우니까 누워야 되는 거고, 먹은 것이 괴로우니까 대변으로 배출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괴롭지 않기 위해서 부단하게 자꾸 벗어날려고 합니다. 그런데 벗어나질 수 있습니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도 부단하게 벗어날려고 하거든.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는 인식하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인정을 하든 안 하고 있든 간에.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그런 것들로부터 멈추고 싶은 마음은 언제든지 일어나게 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는데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잠시라도 멈추고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은 항상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한번 보십시오. 스님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저기 수변공원이 있는데 있을 땐 아침 저녁으로 경행하기가 참 좋았어. 그러니까 시간만 나면 나가서 포행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니까 수행할 곳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여기 선원 안에서만 뱅뱅뱅뱅뱅뱅 도는 거라. 실제적으로도 모자라거든. 형편없이 모자란 거라. 그러니까 자꾸 핑계거리를 찾는 거라. 에이, 경행할 곳이 없는데 뭐. 나가면 사람들 많고 복잡하고 하니까 마 그냥 안 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이 안에서만 있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조그만 것들만 있으면 그렇게 되는 거라. 게을러지고 싶어 하는 거라. 조금만 그런 게 생기면 멈추고 싶어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바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생명에게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게 게으름 피우고 싶어하는 것들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이 안될 때는 안되는 것으로 게으름 피우고 싶어하는 거고, 잘되면 잘되는 것으로서 거기에 취해가지고 게으름 피우고 싶어하는 거고, 그러니까 조금 진전이 있을라고 하다가도 만날 멈추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게으름 피우는 걸 벗어날려고 그냥 집중수행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그 게으름 피우는 걸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애요? 그건 꼭 한 학기 동안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있다가 시험 딱 땡 하니까 일주일 동안 벼락치기 한다는 거라. 벼락치기 해가지고 성적은 가끔씩은 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것이 돼? 시험 땡 하고 끝나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데. 전국적인 수능 모의고사 치면 점수 안 나와. 그렇게 공부했으니까 안 나오는 거라. 평상시에 꾸준하게 공부해왔을 거 같으면 학교에서 치는 시험을 설혹 못친다 하더라도 전국에서 치는 거는 그 뒤에 한참 뒤에 치는 것들은 점수가 잘 나올 수가 있는 거라. 꾸준하게 해온 사람들은 그런데, 벼락치기 한 사람들은 그렇다는 거라.

그 게으름 피우는 거 벗어날려고 일주일 동안 집중수행하고 나오면 “아, 스님 나는 인제 공부가 좀 잘되는 것 같습니다.” 환희심이 일어나서 옵니다. 딱 일주일 갑니다. 일주일 지나고 나면 평상시 모습으로 쏙 돌아갑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무모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수행을 하는 것은 뭡니까?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겁니다. 지혜로워지기 위한 겁니다. 어떤 것을 해야 되고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되고, 보다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해서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럼 내가 지금 해야 될 때 내가 지금 뭘 해야 되는 가를, 그냥 울뚝심으로 할 게 아니고 보다 더 냉정하고 보다 더 편안하게, 내가 이것을 해서 행복해지고 이익이 있는가 좋은 결과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하고 생각해서 차분하게 천천히 해도 안 늦는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의 제 1보가 뭐냐하면 슬로우(slow)라. 천천히 하라.

뭐든지 천천히 해야만이 그 대상을 바르게 볼 수가 있는 거고, 뭐든지 천천히 해야 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바르게 판단하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한꺼번에 뭔가를 취할려고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그것도 게으름의 일종입니다.

 

또 하나 더. 연경이는 지금 달리기 하면 달리기 잘할 것 같지? 어릴 때는 잘했지? 지금도 마찬가지라. 달리기도 달리기할 때 잘하는 것이지 지금 인제 달리기하려면 못해.

체력이 있을 때 수행은 해야 됩니다. 지금은 돈을 벌어야 될 때고, 지금은 놀아야 될 때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수행 못한다는 거라.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느 태국에 있던 스님이 그걸 비유를 해서 뭐라고 그랬냐면 산모가 출산일이 다됐어요. 오늘 출산할 거라. 그런데 오늘 가만히 보니까 친구하고 약속을 잡아놨거든. 그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이 나오려는 애를 못나오게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럴 수 없다는 거라. 비가 많이 왔을 때 벼를 심어야 되는 것이지 모내기를 해야 되는 것이지, 비 올 때 나는 노는 타임이니까 놀아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모내기 못하는 거라. 수행도 그와 같은 거라. 지금 할 거 다하고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 진전이 없는 이유 첫 번째는 게으름이지만,

두 번째가 변명하는 것. 스스로에게 자꾸 변명하는 거라.

아, 지금은 너무 춥기 때문에, 너무 덥기 때문에. 뭐 하기 때문에 하면서 지금 밥 먹고 났으니까 배가 불러서 못하겠다, 뭔가 자꾸 변명거리를 찾는다는 거라. 내가 지금 뭐 단식 때문에 수행 못한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여러 가지 일들이 많으면 오히려 그게 수행하기 좋은데 여러 가지 일이 있으면 수행을 안 해버린다는 거라. 그게 수행거리라는 생각을 못한다는 거라.

 

왜 그러냐면 그걸 변명거리로 자꾸 삼기 때문에 수행할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물론 그렇게 변명거리 삼아가지고 자기 일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자기 하는 일들이 생각만큼 잘 되든가요? 절대 잘 안됩니다. 그 일도 안되고 수행도 안됩니다. 그것이 오히려 수행이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차라리 수행도 되고 그 일도 잘돼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변명거리를 절대 찾아서는 안됩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들은 딱 하나로 정리하면 '망상'입니다. 수행하고 싶어하지 않고 변명거리를 자꾸 찾고 있으면 아, 내가 망상피우고 있다 하고 딱 생각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경쟁상대를 (주변 것들로 잡는 것.) (10초 정도 소리 안들림)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경쟁할 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주변 것들 밖에 것들을 그 경쟁상대로서 잡습니다. 왜 그렇게 경쟁상대로 잡습니까?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건데 왜 자기 자신을 경쟁상대로 안 잡고, 왜 주변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하느냐는 거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만약에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지 주변 것이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주변 것들을 잡는다는 거라.

내가 보다 더 행복해지고, 보다 더 자유롭고 싶고, 보다 더 수행에 진척이 있고 싶다고 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을 경쟁상대로 삼아야 됩니다. 주변적인 요인들, 주변 것들을 경쟁상대로 삼는다든지 그것이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꾸 경쟁하도록 하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자꾸 이기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세 번째입니다.

 

부처님이... (10초 정도 소리 안들림)

결제가 지나고 나서 해제 때 찾아오는 스님들에게 굉장히 기쁘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거기서 이번에 수행을 잘했느냐 묻고, 지내는데 불편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여러 가지들을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아주 따뜻하게 해줍니다.

한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너무 부럽거든 그게. 그래서 자기도 ‘아, 나도 수행해가지고 어느 정도 과위 성취하고 나면 부처님이 저렇게 나에게 따뜻하게 해주겠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그렇게 해주는데 자기한테는 한마디 말도 안 하니까. 그래서 자기 혼자 수행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한다 해가지고 성취가 돼집니까? 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이 스님도 마찬가지라. 경행하다가 하도 잠이 오는데도 경행하다가 고마 바위에 부딪치고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어.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라, 밤에. 다른 스님들이 그걸 보고 치료 안 해줄 수가 없으니까 내 거기 붙들려가지고 치료를 해주고, 그러다가 그날 공양나가는 걸 잊어먹어 버렸어. 나갈 수가 없는 거라. 이 아픈 사람을 놔두고 어떻게 그 공양청을 받으러 갈 거라.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참 공부 안 할라면 자기 혼자 공부 안 하지 주변 사람들까지 다 저렇게 망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공부를 안 할 경우에는 혼자 조용하게 안 해도 됩니다. 주변 사람들까지 이렇게 동원해가지고 공부 안 하는 쪽으로 휩쓸리게 한다, 그러면 안되는 거라.

 

네 번째는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수행을 안 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끌여들여서는 안됩니다.

여기도 가끔씩 그럽니다. 공부할라고 하는데 "야, 우리 오늘 오후에 스님 법문도 없고 하니까 저기 놀러가자" 물론 좋습니다. 그걸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 가더라도 그것이 수행으로써 해야 되는 거라. 거기 가서 그 주변 경치들도 보고 또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거기서 수행한다 생각하고 가야 되는 것이지, 그냥 대부분 사람들은 놀러가버린다는 거라.

 

이런 것들이 수행에 진척이 없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잘 기억을 해놓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에 금방 진척이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두 가지만 여러분들이 하면 됩니다.

첫 번째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림 하라. 사띠하라.

어떤 경우든지 순간순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 순간순간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놓치면 놓친 건 놔둬버리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사띠할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 하나만 반드시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설혹 사띠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철저하게 침착해져 있을 것.

이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순간순간 알아차릴려고 노력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경우들이 태반입니다. 지나친 것까지는 좋다는 거라. 그런데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그럴 때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고요하고 평온하게 침착하게 있어야 되는 것이지 탐·진·치에 휩싸여버리면 안된다는 거라.

내 자신이 그렇게 되어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아주 평온하게 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부처님을 볼 때 부처님을 어떻게 봅니까?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다고 그럽니다. 왜 그렇겠어요? 어떤 경우든 고요한 상태를 만들고 있거든, 부처님이. 또 어떤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라.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가든지 순간순간을, 그렇지 못할 경우에라도 고요하고 침착한 것들을 항상 유지해나가야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해야 됩니다. 이거 두 가지만 할 거 같으면 수행은 자꾸 진전이 있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깨달음에 진전이 왜 없는가 하는 것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생각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나에게 부족한 것들이 뭔가 하는 것을 자꾸 살펴서 반성하고 나서, 따라갈려고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