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8~2010 일상수행법문

사악처의 문을 닫는 법 1. (20100827)

담마마-마까 2021. 3. 19. 09:39

https://youtu.be/btwf28uRyrU

* 사악처의 문을 닫는 법 1. (20100827)

 

오늘은 목요탁발 시간에 다음 목요탁발 시간하고 두 번에 나눠가지고, 육도윤회 중에서 네 가지 악처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악처의 문을 닫는 법」이란 것으로서 두 번에 걸쳐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악처가 어딥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이런 것들인데 사악처의 문을 닫을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수행자 대답)

선행을 많이 하면? 음 선행을 많이 한다. 또 다른 사람?

(수행자 대답)

뭐 그것은 해탈한다는 거니까 당연히 사악처에서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거니까 그거는 해당 사항이 없고.

신통력을 개발하면 사악처에서 벗어날까? 그것도 안됩니까? 그럼 또 뭔 방법이 있을까?

(수행자 대답)

공덕을 쌓는다? 보시를 하든지 뭐 계율을 지키든지 이런 방법으로 공덕을 쌓는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이번에 하는 얘기들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은 자기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경우든지 불교의 기본은 믿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합니다.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이해해서 확신을 가져서 받아들이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것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먼저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담마입니다.

부처님의 담마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담마는 뭐와 비슷하다고 얘기하느냐면 "물과 비슷하다" 얘기합니다.

물을 한번 여러분들이 가만히 보십시오. 물이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차별해가면서 먹을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죠! 사람이 가려가면서 먹을 수는 있겠지만 물 자신은 사람을 차별해가면서 내 먹어라 먹지 말아라 이렇게 하진 않는다는 거라. 사람을 선택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뭘 또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장소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물 먹는데 촌에서 먹는 거하고 도시에서 먹는 거하고 산속에서 먹는 거하고 이런 거를 선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은 있으면 그걸 먹을 수는 있겠죠. 장소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는 거죠.

그다음에 또 하나는 물먹는 시간, 시간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시고 싶을 때 먹는 것이지 그거는 시간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담마도 이렇게 마찬가지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담마를 실천하는데 누구는 담마를 실천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고 사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담마를 실천하는데 선원에서만 실천할 수 있고 다른 데서는 실천할 수 없다는 장소를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또 담마를 실천하는데 특정한 시간에 담마를 이해할 수 있다, 체험할 수 있다 하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담마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물과 비슷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물을 먹으면 먹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가?

여러분 물 먹으면 어떤 이익이 있어요? 맨 처음엔 갈증을 해소하죠. 그다음에 진짜 사막 같은 데에는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죽음 직전에 갔을 때 그 물을 먹을 거 같으면 당연히 살아나집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식물들도 마찬가지죠. 그게 없으면 죽음을 맞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이 물은 사람의 수명을 길게 만들어준다 하고 얘기합니다. 적어도 물만 먹을 거 같으면 오래도록 견딜 수가 있는데 물조차도 안 먹으면 더 빨리 죽음을 맞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명을 연장하는 역할을 가져온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을 먹고 나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은 사람이 씻게도 하고 먹게도 하고 그래서 보통 물 종류 가지고 위장이나 이런 데 만약에 잘못돼 있을 경우 씻어냅니다. 그 물로 가지고 우리는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해가지고 몸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물은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씻어내니까 당연히 마음도 평화롭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물을 먹은 사람의 이익이다 하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이익이 있을까?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네 가지 이익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치에 대한 강한 욕구를 없애준다 하는 겁니다. 담마를 실천하면 당연히 탐욕도 줄어들고 화내는 것도 줄어들고 또 어리석어서 뭘 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들이 줄어들어 간다는 거라. 실제 그렇습니다. 담마를 실천하고 있으면.

그래서 탐·진·치가 줄어들어가지 탐·진·치가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익은 담마를 실천하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업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업을 쌓더라도 불선업보다는 선업을 더 쌓게 된다는 거라. 선업이 점점 더 많아지고 증가하게 되지 불선업이 많아지진 않는다 하는 거라. 당연히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바르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선업을 더욱더 증가시키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몸과 마음이 청정하게 돼서 깨끗하게 된다.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은 얼굴이 빛나고,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은 마음이 온화하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를 실천하면 그런 이익이 있다 하는 얘깁니다.

 

마지막에는 담마를 실천하면 당연히 열반을 실현한다.

 

그게 담마를 실천하는 자의 네 가지 이익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생에서만 이익이 있습니다. 다음생에까지 지금 이생에 있는 물이 나를 먹여주지 못합니다. 만약에 먹여준다 할 것 같으면 다음생에 누가 천상에 태어났으면 천상의 신에게 물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아귀계에 태어났으면 아귀에게 물을 줄 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러지는 못합니다. 이생에서만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담마의 이익은 그렇지는 않죠? 담마의 이익은 이생뿐아니라 다음생까지도 넘어갑니다. 왜? 담마의 실천으로 인해서 다음생이 결정되고 다음생으로 나아가는 방향들이 결정될 수가 있기 때문에 다음생에 까지도 이익을 줄 뿐 아니라, 그것뿐 아니라 담마를 잘 실천하면 윤회하는 것까지도 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물과 담마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입니다.

 

그리하더라도 물이어도 그냥 깨끗한 물이면 괜찮은데 보통 물들에는 뭔가가 섞입니다. 그래서 설탕물도 될 수가 있고 구정물도 될 수가 있고 이렇게 섞이게 됩니다.

담마도 마찬가집니다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도 그게 섞여버리게 됩니다. 섞여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고 바른길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깨끗한 물을 먹는 거와 마찬가지로 바른 담마로 나아가지 않고 삿된 담마로 나아가게 될까?

 

그 첫 번째 이유가 뭐냐 하면 노력의 부족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바르게 노력하는가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하기 싫은 거라. 담마를 실천하는 것도 천천히 할려고 그러고, 그리고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할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수행 두 시간 해야 될 거를 '마, 오늘 수행 한 시간만 하고 또 내일 하지 뭐' 이렇게 자꾸 노력이 부족해진다는 거라. 그게 바로 나쁜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이해하는 것들입니다.

담마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것 같으면 아,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것이 틀린 길이다 하는 걸 갖다가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거라. 이해할 것 같으면 바른길로 더 자꾸 나아갈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길은 가지 않을려고 해야 되는데 그 이해하는 것들을 안할려고 한다는 거라.

이해하고 있더라도 노력이 부족하니까 또 그길로 안 갈라고 그러는 거라. 노력이 부족하고 이해하는 것이 부족하니까 나쁜 담마의 길로 자꾸 나아가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자아,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들.

'나'라고 하는 관념 개념에 휩싸여버릴 것 같으면 바르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 담마를 실천하는 데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공존해야만이 그게 바른 담마가 됩니다. 그런데 나가 우선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나 행복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길을 가게 된다는 거라. 그거는 바른 담마쪽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유신견-나라고 하는 견해에 휩싸여버리면 바른 담마쪽으로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담마를 실천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네 가지 이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탐·진·치가 점점 더 엷어지고 그게 증가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선업이 점점 더 증가하게 되고,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몸과 마음이 청정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열반을 실현하게끔 돼있는데, 그게 이익인데 그런 이익이 나타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선업이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악업이 증가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탐·진·치가 엷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탐·진·치가 계속 증가하게 된다는 거라. 그럴 때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담마의 공덕들이 드러나지 않고 담마의 소중함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담마는 그 사람이 그 길을 가든 안 가든 담마는 담마일 뿐입니다.

그래서 담마는 이름 그대로 진리로 나아가는 가르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 담마가 진리였고 지금도 진리입니다.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도 똑같은 진리입니다.

'모든 현상들은 변해간다' 지금도 진리이고 앞으로도 진리입니다.

'모든 것들에는 불만족함이 있다' 아무리 만족한다 해도 만족하는 것 따라서 불만족이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옛날에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담마는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반드시 바르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담마는 뭐냐하면 분석하는 가르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담마는 여러분들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내가 그걸 조사·확인해보고 분석해보고 맞을 거 같으면 내가 취합니다. 테라와다의 기본이 분석하는 그런 것들로부터 왔다 하고 얘기합니다. 테라와다가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 불교라는 것이 그렇다는 거라. 조사 확인해보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확인해 보고 아, 이 길로 가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있다 싶으니까 와서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법이라고 하는 것은 담마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가르침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왜 과학적입니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 담마는 실천되는 것이지 궤변으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과학적이라는 거라.

그리고 또 하나는 담마는 도덕적인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담마를 실천하면 바른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지 삿된 생활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얘기라.

그리고 담마를 실천할 것 같으면 심리적인 것들이라는 거라. 심리적으로 안정되니까.

또 담마를 실천하면 반드시 그것들에 대해서 분석하고 하기 때문에 바른 사유를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가 담마는 과학적인 가르침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담마는 실천하면 분명하게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끔 된다는 겁니다. 바른 것 그른 것들에 대한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담마의 속성입니다.

 

이게 담마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 담마를 내가 봤을 때 "아, 이게 바르게 나아가는 것이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 뭐냐하면

"아,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길은 따라가라는 거라.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있는데 나에게는 이익이 없다" 그래도 그 길은 따라가라는 거라.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나에게는 이익이 있다" 그러면 그것도 따라가라는 거라. 이 세 가지는 따라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반대로 나에게도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없는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 이런 경우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에게는 이익이 없는 경우들 이 세 가지 같은 경우들은 그거는 삿담마 바른 담마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그거는 따라가지 말아라는 거라.

 

담마를 따라가야 될 때는 반드시 이익들이 있는 경우에만 따라가게 됩니다. 이게 본래의 능력입니다. 법은 그런 능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법은 이런 이익들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담마를 실천하는데 어떻게 실천해야만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사악처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일상적인 행위들을 합니다. 행위를 하면 어떤 경우든지 선업을 쌓든지 불선업을 쌓든지 하게 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든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든지 하게 됩니다.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웁니까? 잠잘 때라든지 그런 땐 보통 유분심이 일어났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든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든지 한다는 거라. 살아가는 동안에는. 선한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선한 행위를 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나면 악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걸 보통 빨리어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두(du)'와 '수(su)'라고 구분합니다. '두짜리따(ducarita)' '수짜리따(sucarita)' 그렇게 얘기합니다. 짜리따(carita)라고 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두(du)라고 할 것 같으면 나쁘다, 반대방향으로 간다. 수짜리따 할 것 같으면 바른 방향으로 잘 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둑카(dukkh) 수카(sukha) 할 때도 두(du)와 수(su)가 나오죠? 둑카는 뭡니까? 반대방향으로 이끈다 하는 겁니다. 수카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하는 겁니다. 물이 흘러가는데 거스를 것 같으면 두짜리따가 되는 거고, 내려가는 길을 그대로 타고 내려갈 것 같으면 수(su)라는 의미에서 수짜리따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갖다가 바르게 흘러가는 경우에는 '수짜리따'라고 하고, 거슬러서 올라가는 경우 그걸 '악행'이라 해서 '두짜리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에 따라서 선행과 악행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살아가면 어차피 선심이나 불선심이 일어납니다. 어떤 것들을 해야 되겠어요?

악한 마음을 내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 선한 마음을 내서 선한 행위들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악한 것들은 뭐가 있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 열 가지 종류입니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말로써 짓는 네 가지,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그걸 여러분들에게 누누히 얘기해왔기 때문에 알겁니다. 그래서 열 가지가 있습니다.

또 열 가지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그중에 가장 우두머리가 뭐냐면 악행을 저지르는 우두머리가 사악한 견해입니다.

사악한 견해로 인해서 나쁜 말을 하게 되는 거고, 사악한 견해로 인해서 악한 행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사악한 견해를 바로 잡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지금 현재 두 발이 불타고 있고 가슴에 창이 꽂혀있다고 하더라도 사악한 견해가 일어났으면 그거부터 먼저 뽑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오히려 손발이 불에 타고 있고 가슴에 창이 찔린 건 두 번째라는 거라. 이게 더 급한 것 같지만 부처님은 사악한 견해를 먼저 뽑아라는 거라.

왜? 사악한 견해는 이생뿐아니라 다음생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손발이 잘리고 가슴에 창이 찔린 건 이생에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생에서만 고통을 받을 수 있는데, 사악한 견해는 '윤회하는 것이 없다' '죽음이 없다' 이런 것들이 사악한 견해입니다. 그거는 이생뿐 아니라 다음생까지도 계속 윤회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더 급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선행과 악행은 열 가지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보면 40가지가 됩니다.

그 열 가지가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 열 가지,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켜가지고 행하는 것,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시켜가지고 행하는 것,

네 번째는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악행을 저질렀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것이 네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사십 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지르는 40가지 업으로 인해가지고 우리는 악업을 짓게 되고 또는 선업을 짓게 됩니다. 악업을 저지르니까 당연히 그 결과로써 사악처에 이르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통 사악처에 이르는 것에는 그렇게 구분을 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귀계에 태어나게 되고,

화가 많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축생으로 태어나게 되고,

그다음에 아만심 자만심이 많은 사람은 아수라에 태어나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십 가지 짓는 것 중에 이렇게 자기가 강한 경향성에 따라서 그다음 과보를 받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악업을 짓지 않고, 사십 가지 선업을 지은 사람은 당연히 보시도 하게 되고 계율도 잘 지키게 되고 그리고 수행도 잘하게 됩니다.

보시하고 계율 잘지키고 수행 잘하는 것, 삼매에 이르르고 그다음 신통력이 있는 것,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사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못가게끔 탁 잡아두긴 잡아두는데 놓쳐버리면 떨어져 버린다는 거라.

아까 사악처를 벗어나는 길 얘기할 때 누군가가 그런 얘기하대. 선업을 자꾸 짓는데, 뭐 계율 잘지키고 보시 잘하고 그다음 삼매에 들고 또 혹은 신통이 열리고 그럴 것 같으면 사악처를 벗어날 게 아닌가? 못 벗어난다는 거라. 막아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거라.

 

벗어날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길이 없다는 거라. 내가 지혜가 열려서 그 지혜로 인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밖엔 없다는 거라. 지혜가 열리는 것은 뭐를 가지고 열릴 수 있습니까?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열릴 수가 있는 거라.

 

사마디-삼매라고 하는 것, 선정을 지혜라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지혜의 종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일선정부터 사선정까지 들었다, 선정을 자유자재로 한다. 또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건 지혜가 아니라는 거라.

하물며 그거보다 못한, 내가 절 짓는다 해가지고 몇억씩 기부를 했다. 그것가지고 그러면 악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어요? 못한다는 거라.

 

단지 이생에서 보시를 하고 계율을 잘 지키고 선정수행을 닦고 하는 것은 이생에서 "부자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생에서 부유하게 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틀림 없다는 거라. 그런데 부자는 돈이 떨어지면 가난하게 돼있다는 거라. 이 영향력이 다 떨어져버리면 떨어지게 돼있는 거라. 요행히 다음생에 좋은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공덕 다 까먹고 나면 사악처로 떨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렇지만 지혜라는 것은 "학문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배우는 겁니다. 배우는 것은 지금 배워가지고 알고 있는 거는 십 년 후에도 써먹는 거라. 계속해서 써먹는 거라. 아무리 사용해도 그것이 마르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지혜를 개발할 거 같으면 다음생에도 똑같은 영향을 받는다는 거라.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죠? 태어났는데 바로 이 수행법을 처음으로 알아들었는데 금방 이해하고 따라해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속도가 훨씬 빠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과거에 그런 위빳사나 수행을 해가지고 닦은 사람들이 현재 그 인연을 만나서 다시 불꽃이 붙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인제 "마르지 않는 지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와 같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사악처로부터 벗어나는 길 이외엔 다른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할 수 있는 거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가 가능해요? 인간 외에는 못한다는 거라.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다섯 가지 얻기 어려운 일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둘라바-(dullabhā) 그렇게 얘기합니다. 둘라바- 입니다.

아, 네 가지가 아니고 다섯 가지입니다. 다섯 가지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맨 처음에 뭐를 얘기합니까 부처님이?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움'이라고 얘기하죠?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움 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얘기하면 불교를 만나기 어려움을 얘기합니다. 그 불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거를 얘기합니까?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나 다른 사람들 같이 부처님 앞에 와서 절하는 걸 불교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른 가르침을 얘기하는 겁니다. 바른 가르침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뭡니까? 그 바른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른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어려움'이라는 거라. 아무리 들을 수가 있어도 여러분들은 많이 들어놔 놓으니까 들으면 이해를 한단 말이라. 그런데 처음 듣는 사람은 들어도 이해를 못해.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한다는 거라. 들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라. 그게 인제 두 번째 어려움입니다. 법을 설하는 사람이 있고 법을 듣는 자가 있다고 그래도 그 들을 귀가 준비가 안됐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그걸 한국에서는 잘못 이해해가지고 장부로 태어나는 것, 남자로 태어나는 것으로 자꾸 얘기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원어를 잘못 해석해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요 세 가지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하면 '믿는 것에 적합한 가르침을 믿는 것' 아, 이것은 믿고 따라가야 되는 것이구나 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 이것은 따라가지 말아야 될 길이구나 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들,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거라. 아무리 내가 부처님 정법을 만나고, 그다음에 그걸 듣고 또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게 정법이고 이게 정법이 아니다 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는 거라.

확신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바른 길이면 따라가야 되는 거고, 바르지 않은 길일 것 같으면 따라가지 않아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네 번째라는 거라.

 

다섯 번째가 뭐냐하면 여러분들은 해당이 안되는 겁니다. '출가해서 사문이 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그 길만 따라가는 것.

이거는 보통 한국에서는 제외해버리고 앞에 네 가지가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원래 경전에는 다섯 가지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만큼 담마라고 하는 것은 힘드는 것들입니다.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 현재 태어났을 때 빨리 해야됩니다. 부처님이 「락카 시카 숫따」라고 하는 경전에서 얘기했습니다. "손가락에 비유해 놓은 경전"이란 뜻입니다. 한번 읽어드릴게요.

 

여러분들이 본 나의 손톱 끝에 묻어져 있는 흙 정도만이 다음생에서 사람이나 천상이나 범천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머지 이 흙과 같이 이 많은 것들은 다음 세상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사람으로 태어나고 천상에 태어나고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힘들다는 거라. 흙을 이렇게 쥐어가지고 내 손가락에 묻어있는 그 흙 요만큼만이 겨우 사람과 천상에 태어난다는 거라. 많은 사람, 육십 억이라는 인구가 있지만은 다음 세상에 천상과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그마만큼 드물다는 거라.

여기 지금 한 스무 명 앉아있지만 스무 명 중에 쉽게 말하면 비율로 치면 다음 세상에 사람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거는 한 명 있을동말동 한다는 거라. 나머지는 어디로 태어난다는 얘기라? 사악처로 들어간다는 얘기라.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난게 얼마나 좋은 거라? 이 좋은 때를 왜 자꾸 놓칠려고 하느냐는 거라.

 

또 하나는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사악처로 떨어진 사람이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을 뭐라고 했느냐면 「까까차 숫따」라고 경에 '맹귀불경'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에 뭐라고 했느냐면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가끔씩 올라왔는데 구멍이 뚫린 널빤지에 머리가 쏙 하고 들어올 확률, 그 넓은 바다에서. 그런 사람만 사악처에 떨어졌다가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거라.

굉장히 어렵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악처에 한번 빠지면 인간이나 천상으로 태어나기도 힘들고 지금 여러분들 뿐아니라 모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태어나기는 그마만큼 힘들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더 빨리 공부를 하라는 거라. 공부를 하더라도 만날 보시나 하고 계율 잘지키고 선정이나 닦을라 하고 이런 거 하지마라는 거라. 그것도 필요하다는 거라. 방어를 해주기 때문에. 그렇지만은 그것보다는 지혜를 빨리 개발하는 수행을 하라는 거라. 그러지 않으면 이 사악처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요원하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겁(劫)」에다가 비유를 해놨습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가는데 시간이 많이 드니까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불교에서는 겁이 백 년에 일세씩 수명이 줄어들고 백 년에 한 살씩 수명이 늘어난다고 그럽니다. 지금 2500년이 지났죠? 그럼 부처님 당시 때는 백 살이라고 그랬으니까 백 년에 한 살씩 줄어드니까 지금은 2500년으로 치면 스물다섯 살이 줄어든 거죠? 그럼 현재 나이는 75세가 됩니다.

바르게 누리고 수행할 수 있는 나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나이가 75세가 됩니다. 이게 점점 줄어들어서 10세까지 갔다가 10세에서 다시 또 한량없이 늘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겁이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75세가, 인간의 평균수명이라는 75세가 되는 그 시점으로부터 50세가 될 때 앞으로 2500년 간은 굉장히 지혜가 개발되는 시기라고 그럽니다.

그전에는 오히려 불교가 점점 더 쇠락해가는 시기였는데, 그리고 그 뒤에 2,500년간은 불교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시기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지금 시기가 딱 그 전환점이라는 거라. 실제로 보면 그렇습니다.

1900년 전으로 해가지고 수행하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그전에는 거의 뭐 동남아 서너 개 나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이 태어난 거는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히 복을 지은 거죠. 그래서 점점 더 수행할 수 있는 시간들은 많아지게 됩니다. 어쨌든 그걸 하나의 겁이라고 그럽니다. 그 겁 동안에 많은 시간들이 있지만 그 시간 동안에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드물다는 거라.

 

인간으로 태어났고, 정법을 만났고, 그걸 들을 수 있는 조건을 갖췄고, 그럴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가지고 바른 것 틀린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분들 몫이라는 거라.

세 가지 조건을, 지금 현재 시간대에서는 조건을 갖췄다는 거라. 그럼 네 번째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라.

그 다섯 번째도 마찬가지고. 꼭 출가라는 것은 전문적으로 출가한 스님만 얘기하는 것도 있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이런 안거기간 동안에 진짜 열심히 그 세 달 동안 수행에 전념하라는 거라.

 

생활을 하는 것이 수행과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또 시간이 여기 와야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행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수행하는 것은 시간도 초월하는 거고, 사람도 초월하는 거고, 그다음에 그 장소도 초월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조건들을 갖췄을 때 빨리 이 사악처의 문을 닫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다음 시간에는 그런 방법에 대한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