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보에 이르는 법 (20100827)
내가 눈이 뒤에 달리질 않아가지고 보지를 못하는데, 혹시 삼보예경 할 때도 꿇어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건 아니죠? 꿇어앉아서 해야 됩니다. 삼보 예경하고 삼귀의·오계를 받고 할 때는 항상 꿇어앉아서 하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마음이 꿇어앉아서 합장을 하고 하는 것하고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글 읽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많이 좀 다르니까 그렇게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법회를 하기 전에 항상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보예찬을 하고 그다음에 삼귀의·오계를 받고 아니면 불재일날은 팔계를 받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삼보에 인사드리는 것을 먼저 합니다.
불교도는 기도하지 않죠? 불교도가 기도하는 거 봤습니까? 기도 안 하죠!
(수행자 대답) 의미가 다릅니다. 부처님한테 절하고 하더라도 그걸 기도라고 얘기 안 하죠? "부처님한테 예경 올린다"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 담마에 예경 올리고 상가에 예경 올린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에 예경 올리는 것, 왜 예경 올립니까? 부처님한테.
스승이라서 예경 올리고, 또 두 번째는 왜 예경 올립니까?
위대한 스승이고 앞서가신 분이니까 예경 올리는 거고, 또 부처님이 깨달은 자리 깨달은 것에 대해서 예경을 올리는 거고, 또 하나는 뭐가 있겠어요? 나도 부처님 같이 그렇게 될려고, 따라갈려고 예경 올립니다. 담마도 마찬가지고 상가도 마찬가지죠! 그런 의미로써 삼보예경을 하는 겁니다.
그걸 통틀어서 우리는 「삼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삼보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삼보에 이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 수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 방법에 대한 얘기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가장 아래에 있는 방법부터 마지막 해탈한 것에 대해서 아는 지혜까지 얘기할 겁니다.
우리가 삼보에 예경드리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삼보가 잘나서 예경드리는 것보다는 내 마음이 삼보와 같이 그렇게 항상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삼보에 예경을 드리는 겁니다. 부처님께 예경드리는 것도 부처님이 위대한 스승이라서 인사드리는 의미도 있지만은, 그보다도 더 큰 의미는 나도 부처님과 같은 그런 마음이 되겠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기 위한 겁니다.
담마에 예경하는 것도 그 담마의 소중함을 알기 위한 것보다는, 그 담마를 실천해서 내 속에서 담마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상가에 예경 올리는 것도 그 승려들이 그 스님들이 뛰어나서 나보다 먼저 가신 지도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보다는 나도 그와 같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 하는 의미에서 그런 성스러운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삼보에 예경 올리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내 마음이 고요하고 행복하고 깨끗해지기 위해 그런 삼보를 예경드린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곧 삼보와 내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삼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이 된다 하는 그런 의미로써 삼보에 예경 올린다 하고 하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는 잘 안되죠?
대부분 보면 우리가 처음에 이런 법회를 시작하면 삼보예경을 먼저 합니다.
'아라항 삼마삼붓도 바가와' 부터 시작해가지고 말로써 이렇게 삼보에 이를려고 합니다. 삼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려고 그러죠. 말만 그럽니까? 행동으로도 그렇게 하죠! 내가 조금 더 빨리 부처님 법을 배운 사람들은 앞으로 앉죠? 부처님한테 더 가까이 다가갈려고 합니다. 스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려고 그러고, 그리고 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려고 그러고. 여러분 같이 저 뒤에 자꾸 앉을라고 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래서 앞으로 먼저 올려고 서로 싸우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이나 말로써 삼보에 다가가는 방법, 이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거 합니까? 삼보 아눗사띠 하죠?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상가눗사띠를 하면서 삼보의 덕 공덕들을 관찰하고 생각합니다.
아, 부처님 하면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고, 아, 누구든지 잘 진리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고, 완전하게 번뇌를 여의신 분이구나 하는 그런 것들을 회상합니다.
담마에 대해서도 잘 확인할 수 있고, 내가 그것을 따라하면 나도 그런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회상하고 그래서 빨리 그 담마를 실천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고.
상가도 마찬가지로 부처님 진리 따라서 그래도 바르게 살아가고 정확하게 수행할려고 하고 또 그 가르침을 우리에게 좀 더 편안하게 바르게 전달해줄려고 하시는 분이구나. 아, 그래서 상가라는 것이 참 소중한 것이고 또 그 상가 따라서 나도 그런 길에 이르른 자가 돼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고.
그게 인제 두 번째 삼보의 덕을 회상하고 그 공덕들을 생각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걸 보통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바와나(bhāvanā)' 그렇게 얘기하죠? '닦아나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거는 바와나는 사마디(samādhi) 쪽에 가깝죠! 그런 개념들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 위빳사나 수행할 때 수행이 잘 안 되면 네 가지 것들을 수행의 예비적인 단계들을 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들어가도록 그렇게 합니다. 자애에 대해서 염송을 한다든지, 죽음에 대해서 한다든지, 이 몸의 더러움에 대해서 한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에 대해서 마음속에서 생각을 한다든지, 이런 방법들을 쓰죠! 그게 뭐냐 하면 두 번째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삼보의 세 번째는 어떤 의미입니까? 자기 자신 자기 마음이 삼보가 되는 것!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른 자가 될 것 같으면 내가 곧 붓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는 자가 되는 거고, 담마 따라서 항상 나아가는 자가 되고, 또 그렇게 바르고 성스럽게 살아가는 자가 되는 거고, 자기 자신이 곧 삼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삼보에 이르는 방법은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방법을 씁니까? 대부분 보면 첫 번째 방법을 처음에는 많이 씁니다. 누구든지 오면 첫 번째 방법들을 하라고 그러죠?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방법이 안 되면 두 번째 방법으로 넘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신앙하는 것이, 믿는 것이 먼저가 되지 않으면 사마디로 넘어갈 수가 없고, 사마디로 넘어갈 수가 없으면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힘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처음에 부분부터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믿음(saddhā)에 의해서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아마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립이 아마 안 될 겁니다. 믿지 않으면 되는 것이 있습니까? 불교는 어떨 거 같애요? 믿지 않아도 가능하죠! 불교 안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법을 듣고 또 수행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기본적인 것들은 그런 믿음이 바탕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단계는 미신 같은 것일지라도 무조건적으로 믿도록 하는 방법을 씁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그게 밑바탕이 돼있습니다. 그게 다가 될 것 같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걸 믿음이라고 얘기 안 하죠!
믿음이라고 얘기할 때는 어떤 것들을 얘기합니까? 내가 조사하고 확인해가지고 이게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판단해서 자기 스스로가 믿게 돼버리는 게 믿음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단계를 불교에서는 믿음의 시작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지 믿어라 한다고 믿는다 해가지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처음에 신앙으로써 삼보에 다가가도록 하는 방법들을 쓰게 됩니다. 믿음으로써 삼보에 자꾸 다가가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의지할 곳이 없고 마음이 방황하는 사람들은 뭘 의지처로 하라 그럽니까? 삼보를 의지처로 하라 해서, 삼보를 의지처로 해서 나아가라 해서,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삼보를 의지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나아가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계(持戒)! 지계로 인해서 삼보에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들은 어떤 겁니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될 수 있는 행동들을 하는 것, 곧 올바른 행동들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를 지키는데 올바른 행위가 아닐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오계, 팔계들이나 스님들이 지키는 227계나 의미는 똑같습니다. 바른 행위를 하기 위한 겁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으로 바르게 나아가기 위한 의미인 것이지 다르게 써져 있기 때문에 그 계율조항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엄격하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하고 차이가 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좋은 행위를 하면 당연히 삼보에 대한 그런 마음들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좋은 행위를 하면 당연히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겁니다. 결과는 둘째치고.
그래서 아, 그게 부처님이 말해놓은 부처님의 담마가 가르치는 대로 또 그 스님들이 따라가는 대로 그렇게 계율을 잘 지켜서 나아가는 것들이 삼보를 의지하게끔 하고 삼보에게 조금씩 더 다가가는 방법이 됩니다. 아, 이래서 부처님이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이래서 담마라는 것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구나. 상가는 따라가야 될 스승이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희열(pīti)! 환희로써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바른 행위 하면 뭐가 일어납니까? 나쁜 마음은 일어나지 않죠! 좋은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내가 남에게 널리 베풀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도 기분이 좋은 거지 베풀고 나서 기분이 안 좋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베푼 것이 아닙니다.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 지계라고 하는 것은 계율 조항을 지킨다고 하는 의미보다는 십선(十善)을 행한다고 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바른 행위들, 계라고 하는 것은 바른 행위를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선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남에게 베푼다든지 아니면 마음을 자꾸 깨끗하게 한다든지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내 자신이 오히려 먼저 희열·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바로 이 기쁨·희열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질적인 것을 받았을 때 기쁨하고 물질적인 게 아니고 내가 훌륭한 행위를 했을 때 얻는 것에서 일어나는 기쁨하고는 차이가 납니다. 물질적인 것을 얻은 것에서 일어나는 기쁨은 그 물질적인 게 사라지면 기쁨도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행위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다음에라도 똑같은 것들을 내가 회상했을 경우 똑같은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훌륭한 행위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것으로 인해서 삼보에 더 다가가지도록 노력을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행위들은 내가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아, 내가 참 잘했구나. 내가 한 행위들에 대해서 한치도 잘못된 것들이 없구나 하고 마음으로 다가와지게끔 됩니다.
이때부터는 보통 뭐라고 얘기합니까? 사마디(samādhi)의 종류에 들어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세 번째는 기쁨·희열로 인해서 삼보에 이르는 방법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기쁨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일으키게 하는 것들, 그것을 또 유지하게 하는 것들에 자꾸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 이렇게 하니까 내가 기쁨들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자꾸 유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또 그것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버려버리고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네 번째는 뭐냐 하면 경안(輕安, passaddhi)으로 삼보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경안은 뭡니까? 경쾌하고 아주 가볍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깃털같이 고요해졌을 때 경안들이 일어나지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방해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들, 괴로운 마음들도 일어나지 않고 그런 방해하는 것들이 없고 마음에서 또 걱정이나 후회하는 것들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 경안입니다. 바른 일 했으니까 내가 기쁨으로 인해서 일어나지는 것이 경안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아주 부드러운 상태가 돼어집니다.
경안들이 일어나지면 설혹 주위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고 또 장애가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경안이 그런 것들로부터 방호벽 역할을 해주게 됩니다. 이것도 사마디의 일종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마디(samādhi)가 일어날 때는 기쁨이 먼저 일어나지고 나서 그다음에 경안이라고 하는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기쁨과 경안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기쁨은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쉽게 변할 수가 있는데 경안은 덜 변한다는 겁니다. 덜 자극을 받게 됩니다. 방해를 받는 것이 덜하다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자신이 목표를 하고 또 나아가는 일들에 대해서 성공하고 싶을 때는 기쁨이 있는 것보다는 경안이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경안이 있어야지만이 마음이 대상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영향들을 덜 받아서 바르게 판단할 수가 있게 됩니다.
기쁜 상태에서 결정내리고 나면 아니면 들떠서 결정내리고 나면 실패할 경우들이 많은 것들이 그래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고요한 상태에서 아주 부드러운 상태에서 결정내리고 나면 그것들은 대부분 보면 틀림이 없이 잘 됐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뭐냐 하면 사마디(samādhi)로 삼보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사마디는 마음이 온화하게 안정돼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써는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안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사마디가 있을 경우에 세속적인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내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안다는 겁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해야 되는 행위들, 그리고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게 인제 세속적인 것에서 사마디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사마디가 있다 하면서 내가 지금 뭘 해야 되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사마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마디를 더욱더 증장시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일상생활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사마디가 생겨납니다.
수행에서의 사마디는 마음이 안정돼있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인해가지고 마음이 대상에 잘 달라붙어 있는 경우 이걸 사마디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상에 잘 달라붙어 있는다 해가지고 거기에 폭 빠져있다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도 그 즉시 그 대상에 달라붙는다는 겁니다. 또 다른 대상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즉각적으로 달라붙는다는 겁니다. 달라붙는다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사마디가 있을 경우에는 항상 마음이 가볍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일어나는 즉각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민첩합니다. 빨리빨리 마음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완벽하게 사마디가 이루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온화하고 고요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나갑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사마디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마디로 인해가지고 삼보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적어도 이 사마디가 있어야만이 지혜에 이를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마디라고 하는 것이 대상에 착 달라붙어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마디(samādhi)를 보통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겁니까? 계율을 지키고 도덕적인 행위를 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희열·기쁨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마디.
두 번째는 그것조차도 안정이 되고 나서 경안 가볍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런 외부적인 자극들에 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마디.
또 마지막 사마디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민첩해지고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마디.
그렇게 사마디는 세 종류로 보통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바와나를 하든지 위빳사나바와나를 하든지 이것은 동일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는 뭐냐 하면 '야타부따 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ṇadassana)'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실지견(如實知見) 한자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실지견으로 삼보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야타부따가 뭡니까? 여실이죠. 냐나는 지혜를 얘기하고, 닷사나는 그걸 안다는 그런 뜻입니다.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지혜로써 보고 알아차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사마디의 상태가 되면 당연히 있는 그대로 모든 것들을 보고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걸 '야타부따 냐나닷사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마디가 되면, 그전에는 사마디가 되기 전에는 내가 자꾸 마음을 갖다 붙여야 됩니다. 그런데 인제는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겁니다. 사마디의 상태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사마디의 상태에서는 어쨌든 내가 갖다 붙여야 됩니다. 그런데 여실지견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사마디의 상태라고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상태를 여실지견의 상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될 때는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실지견의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그렇게 이르러야지' 하는 마음을 내야 됩니다. 그것이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을 대상에다가 자꾸 기울여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그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되고 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밖으로 가는 마음을 인제는 안으로 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소리가 들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전에는 밖으로 소리가 나갔던 것이 인제는 밖이라도 내 귀에다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소리들리는 것이 가슴으로 안으로 들립니다.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그뒤부터는 인제는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거기서 일어나는 감각들을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를 여실지견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하고 얘기합니다. 생각하거나 탐구하고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써 일어나게 될 때.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대상에 다가갈 때는 내가 노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또 귀에 마음을 알아차림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거기에다 기울여야 됩니다. 그래서 언제 이 소리가 들릴지 모르게 긴장을 바짝 해야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써 소리가 들릴 경우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거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여실지견의 상태라고 합니다.
대상이 굉장히 빠릅니다.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을 받습니다. 그게 사물의 실상인 줄을 모르고 굉장히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고 나면 '참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나만 그렇습니까? 다른 존재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에 연민하게 여기는 마음들이 저절로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은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반면에 또한 마음은 모든 것들이 '저게 가짜다, 속임수다' 하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연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탐·진·치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자꾸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마음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그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어떤 사람은 많고 어떤 사람은 작고 그렇습니다. 왜 그럴 것 같애요?
사마디(samādhi)의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사마디를 오래도록 닦았느냐에 따라서 그 보는 양들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마디의 힘이 크면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들이 크면, 더 강하면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마음들이 계속 더 일어나게끔 됩니다.
대부분 그렇게는 잘 안 되죠? 사마디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여실지견의 상태를 봤다 해도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다음에 잘 안 일어납니다. '아, 이것은 내가 사마디의 힘이 약하구나' 하고 빨리 판단하고 더 자꾸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수행으로 인해서 경험하고 하는 사마디의 힘들이 커지면 당연히 그러한 진실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들이 더욱더 커지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는 뭐냐 하면 닙비다(nibbidā)로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닙비다가 뭡니까? 싫어하는 것, 벗어날려고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보통 염리(厭離)라고 얘기합니다. 한자로 그렇게 얘기하죠? 싫증난다는 겁니다.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다. 꼴도 보기 싫다. 탐·진·치가 아,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거 같으면 그거 안 쳐다본다는 거라. 다시는 안 본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봤을 때는 염리가 일어난다는 거라. 다시는 화를 볼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게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겁니다. 스스로 각성을 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다시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시는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는 그런 각성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닙비다라고 하는 것은 염리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벗어나고 싫어한다는 것이 있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각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상태를 닙비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당연히 닙비다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바람피우는 사실을 내가 봤을 때는 고마 정내미가 딱 떨어집니다.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와 마찬가집니다. 그게 분명하게 알고 이해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여덟 번째는 위라가(virāga)로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위라가는 뭡니까?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탐·진·치에 인제는 물이 들지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런 탐·진·치에 달라붙지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물들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요? 그전에 물든 것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서서히 빠져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희미해지고 엷어진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마음에서 욕망이 희미해져버린다는 겁니다. 탐욕하는 것들이 희미해져버린다는 겁니다. 애착하는 것도 희미해져버리고, 증오심을 가지는 것도 희미해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탐·진·치에 물들지 않고 희미해져버리니까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버린다는 겁니다. 벗어나버린다는 겁니다. 이때는 이미 마음이 해탈하는 상태로 나아가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는 위뭇띠(vimutti)로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위뭇띠는 뭡니까? 잘 탈출했다는 겁니다. 그 우리로부터 벗어났다 하는 얘깁니다. 마음이 물들고 있는 것들이 희미해지는 것들이 완전히 빠져나가버렸다는 겁니다. 빠져나가버려서 깨끗해졌다는 겁니다. 내가 우리에서 탈출했을 때는 내가 어디로 가든지 자유롭다는 겁니다. 걸릴 것이 없다는 상태가 됩니다. 번뇌가 아무리 나를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인제는 내가 그 번뇌로부터 물들지 않고 방어가 된다는 겁니다.
뭐가 방어를 합니까? 지혜가 방어를 합니다. 지혜가 그 번뇌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고 그 번뇌를 태워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가 이 위뭇띠라고 하는 겁니다.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버립니다. 마음은 이미 번뇌의 위에 있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위라가(virāga)가 있고 뭐 어쩌고 하더라도 어쨌든 마음은 번뇌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제는 번뇌의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 탈출해 있는 상태가 이 위뭇띠-해탈했다 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은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여러분들 마음 맑고 깨끗합니까? 여러분들도 마음이 맑고 깨끗합니까? 번뇌가 없으니까 또한 어떻게 돼요? 덮고 숨길 것이 없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항상 밝다는 거라.
또 번뇌의 원인이 되는 둑카-고통이 없으니까 마음은 항상 고요하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자꾸 얘기하는 게 마음을 맑고 밝고 고요하고 깨끗하게 자꾸 만들라는 거라. 해탈했을 경우에는 이런 마음의 상태가 된다는 거라. 마음이 맑고 밝고 고요한 상태입니다. 그 위뭇띠라고 하는 것은 곧 둑카의 끝을 얘기합니다. 둑카의 끝이니까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돼요? 열반의 상태, 마음조차도 소멸해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다음 열 번째가 뭐냐 하면 '위뭇띠 냐나닷사나(vimutti ñāṇadassana)' 그렇게 얘기합니다. 해탈지견(解脫知見).
해탈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해탈했다는 사실을 내가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그래서 해탈하고 나도 냐나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인제는 완전하게 해탈했다는 확신을 가지게끔 되는 상태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삼보에 이르르게 되는 겁니다.
삼보에 이르르는 방법은 이렇게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외부적으로라도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고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자꾸 가질려고 하는 방법.
그다음에는 삼보라고 하는 것들을 계율을 지키고, 환희심을 가지고, 그다음에 대상에 대해서 항상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삼보의 안쪽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실질적 삼보를 실천하는 방법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그런 탐·진·치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 벗어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해탈에 이르러서 해탈에 드는 마음까지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변함이 없는 상태, 그때는 정말로 내 자신이 삼보가 돼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걸 보통 우리는 계정혜(戒定慧)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삼보에 이르는 것도 이런 방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곧 붓다의 마음, 담마의 마음, 상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완벽하게 삼보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삼보에 이르는 방법을 얘기하면서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인간이면 반드시 가져야 되는 특징이 있다.
다른 것과 구별이 되는 특징이 있다 하면서 이 네 가지를 얘기합니다.
이것을 잘 지키면 여러분들이 삼보에 이르는 방법들을 점진적으로 닦아나가게 된다 하는 겁니다.
첫 번째 계율, 계율을 잘 지키도록 하라.
두 번째는 인내하는 것.
좋을 때는 인내할 수 있겠지. 그런데 불행할 때 나쁜 결과가 있을 때 그걸 인내하는 것. 인내한다 해가지고 오만상 찡그려가면서 참는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상황 그런 불행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인내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될 특색 두 번째는 인내하라.
그다음 세 번째는 일관성 있게 하는 것.
이걸 요리 생각했다 조리 생각했다가 요리 판단했다가 저리 판단했다가 그렇게 하지 말고 일관성있게 쭉 밀고 나갈려고 하는 것. 다른 데서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면 반드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지혜, 지혜를 자꾸 계발하도록 하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색이라는 거라. 이 네 가지는 동물들도 가질 수 없고 천상의 신들도 가질 수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색이라는 거라.
이 네 가지를 자꾸 구비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여러분들이 삼보에 이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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