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수행 전에 먼저 갖춰야 할 5가지 (예비수행) (20140417)

담마마-마까 2021. 4. 4. 09:35

https://youtu.be/Ut_qVdxUHGI

* 수행 전에 먼저 갖춰야 할 5가지 (예비수행) (20140417)

 

동남아 국가에서 수행을 해보면 얻어지는 게 많습니다. 한국 하고는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도 있는데, 가장 차이가 나는 게 뭐냐면 자기가 뭔가를 했을 때 그것이 담마에 맞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자기가 해놔놓고 자기가 뭐 했는지조차도 잘 몰라. 선원에서조차도. 그런 문화가 그쪽은 형성돼있으니까 그래서 수행하기에는 좀 용이한 조건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때 그런 적이 있어요. 계를 거기서 88년도에 계를 받았는데, 거기에서 비구계를 받고 나서 스님들은 반드시 탁발을 나갑니다. 여기 오늘도 탁발을 받았지만, 사원 안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나가서 탁발을 하거든.

탁발을 해가지고 오면 받은 공양물을 나누는 규정이 있습니다.

자기의 것 제외하고, 그리고 아파서 탁발을 나가지 못한 동료 비구 스님들 몫 떼줄 거 떼주고 그게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하는 것이 사원 안에서 스님들을 위해서 아니면 다른 수행자들을 위해서 거드는 사람들을 위한 몫을 갖다 주고, 그리고 또 남으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마을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조래기에다가 비닐봉지 같은 데다가 해서 꾸띠, 꾸띠라고 하면 스님들 거주하는 거주처입니다. 거주처 앞에다 걸어두고, 그러고 나서는 할 일이 다 끝납니다. 그래서 공양을 이렇게 하죠.

 

공양을 하다 보면 어떨 때는 적절한 양보다 많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남은 음식물 아니면 또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물이죠? 그거하고 그중에 마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밖에다 걸어놨던 음식물 중에 일부를 떼어서 개나 고양이가 먹을 수 있게끔 그릇에다 해서 꾸띠 밖에다 이렇게 놔줍니다.

그러고 나서는 12시 되기 전에 바리때를 싹 씻어가지고 딱 엎어놔버리죠. 그러고 나면 인제 그날은 식사 끝입니다.

그게 인제 보통 탁발 받고 와서 공양할 때부터 공양 끝날 때까지 과정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장 고마워하는 부류가 어떤 부류일 거 같애요? 내가 탁발해온 음식물을 여러 부류에 나눠줬거든. 아픈 도반 스님, 또는 절에서 일보고 나를 케어해주는 깝삐야 같은 그런 부류들, 또는 가난한 이웃 주민들, 또는 개나 고양이들 이렇게 부류가 많은데 누가 가장 고마워할 것 같애요? (수행자 대답)

강아지? 가난한 사람들? 다 고마워하겠지 뭐. 다 고마워하는데 그래도 스님들이 느끼기에는 가장 고마워하는 부류는 개나 강아지들입니다. 몇번 먹다 보면 인제는 아예 안 가요. 그래서 스님이 어디로 가면 졸졸졸 따라다니고 그리고 잘 때도 스님 방문 앞에 딱 붙어서 자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스님들이 좀 불편합니다.

그렇게 있는 개들이나 고양이들을 보면 피부병 같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 그걸 옮기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내 수행 제쳐놔놓고 그것 안고 피부과나 병원에 가가지고 그것도 치료해줘야 되고, 그러니까 어떨 때는 번잡스러운 일들이 좀 생기기도 하긴 합니다.

 

그중에 가장 안 좋은 게 뭐냐하면 아침 일찍 인제 새벽에 동틀 때 돼서 탁발을 나가야 되는데 개가 덩치가 커놔놓으니까 잠을 자는 데가 똑 문 앞에서 자기 때문에 문을 못 여는 거라. 문 앞에서 자니까. 그래서 어떨 때는 아, 이놈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 거야. 이리 밀어도 지 좋아하는 줄 알고 꿈쩍도 안 해. 비키라고 해도 안 비켜.

그래서 어떨 때 그걸 길들일라고, 얘가 길이 그렇게 들었는 거라. 밥을 먹고 내 쫄랑쫄랑 쫓아다니다가 잘 때는 문에 내 가까이 자고 싶으니까 문에 딱 기대가지고 자니까 다른 데로 좀 떨어져 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번은 그 개에게 물을 확 뿌려버렸어요.

그러니까 개가 깜짝 놀랠 거 아니라. 이제도록 밥을 잘 주다가 갑자기 물을 뿌리니까. 그러니까 얘가 놀래가지도 도망을 가더라고. 그러고 나서는 밥은 먹기는 먹는데 내 주위로는 잘 안 쫓아다녀. 잘 때도 문 앞에서 자지는 안 해. 한동안은 그게 되게 좋았거든. 어쨌든 내가 드나드는데 불편하지 않고, 또 내가 피부병에 걸릴 일도 없고, 그렇지만 나는 먹이는 어쨌든 주니까 개가 먹고 가니까 나도 불편하지 않고 그리하는데.

 

뭐가 안 좋겠어요? 그걸 돌아볼 때마다 물을 뿌리는 걸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굉장히 아픈 거라. 마음이. 그 개가 얼마나 마음을 다쳤으면 내 가까이 올려고 하질 않겠어? 내가 편리하자고 고놈을 멀리하도록 만들은건데. 그러니 그런 마음 가지고 자기가 수행한다고 수행이 잘 되겠어? 안 돼요.

그전에는 차라리 내가 번잡해지고 피부병에 걸리기도 하고 문 여는데 불편하기는 하더라도 항상 마음은 고요한 상태라. 그리고 그 고양이를 보듯이 다른 사람들을 보더라도 항상 자애의 마음들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안 그런 거라.

수행하기는 아주 편해지고 탁발하기도 편해지고 아주 번잡한 일도 없는데도 마음은 오히려 더 차가워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경전에 보면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천신 그것도 여신인데, 여신이 부처님한테 와서 “부처님, 부처님 말씀을 내가 잘 듣고 있는데 그걸 다 종합을 해보니까 한 다섯 가지가 됩니다. 맞는지 한번 봐주십시오” 그럽니다.

'나쁜 생각 하지 말아라' '나쁜 말 하지말아라' '나쁜 행동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욕심 부리지 말아라' 그다음에 '순간순간을 알아차려라.'

아, 여섯 가지네. 내가 잘못 얘기했습니다.

그다음 여섯 번째가 '괴로움을 일으키는 걸 따르지 말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라' 이 여섯 가지로 대충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하고 얘기하니까 다 맞는 거잖아. 부처님은 “그래 잘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는 이 여섯 가지 중에서 몇 가지 어겼어요?

나쁜 마음 품었으니까 물을 뿌렸지. 그리고 개한테 다시는 “여기서 자지마” 하고 얘기를 했으니까 나쁜 말을 했지. 물을 뿌렸으니까 나쁜 행동 했지. 또 내가 그 물을 뿌릴 때 나쁜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물을 뿌렸을 거 아니라. 순간순간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지.

그리고 내 욕심부렸잖아. 만족할 줄 알아야 되는데, 내가 불편하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욕심을 부렸지. 그리고 그 일을 돌아볼 때마다 괴로움이 생기니까 괴로움이 따르는 일을 했지, 괴로움이 소멸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여섯 가지 다 걸리는 거라.

하나의 행동을 하면 하나만 걸리는 게 아니고, 이렇게 여러 가지가 다 걸립니다.

 

그것만 걸리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평온함과 고요함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거라. 돌아볼 때마다 그게 생각이 나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일 가지고 굉장히 후회를 많이 했었거든.

 

우선 자신이 딱 하나, 다른 게 없어요. 그 여섯 가지 아니면 일곱 가지 다 안 걸릴려고 할 것 같으면 자애의 마음만 있어도 이걸 다 막을 수가 있었는데, 이 자애의 마음을 잠깐 안 내는 바람에 요게 그냥 다 걸려버린다는 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는 걸 깨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자애의 마음 하나만 가지더라도 그거 다 막아주고 자신의 마음을 유지를 해나가는 거라. 그래야만이 수행해나가기가 수월해지는데 그걸 못한 거라.

여러분도 내꼴 나지 말라고 먼저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에게 하는 일들 아니면 동물들에게 하는 일들, 모든 생명에게 하는 일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자신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깨는 일이라면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깨버리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런 여러 가지, 여섯 가지, 일곱 가지, 이것만 일어나겠어요? 더 많은 일들을 내가 나쁜 것들을 쌓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도 어쨌든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야만이 수행을 해나갈 거 아니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수행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

자애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남 사라짐 할 거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붙잡을려고 합니다. 그걸 알아차릴려고! 거짓말 같죠? 진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는데 호흡도 어떤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하게 되고 명칭 붙이는 것도 나의 상태에 따라서 명칭이 짧아졌다가 길어졌다가 합니다. 자기는 물론 수행 잘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잡념은 안 일어나니까.

그런데 붙잡은 상태에서, 대상을 붙잡든지 명칭을 붙잡든지 붙잡은 상태에서 수행을 할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평온한 상태는 평온한 상태라도 그거는 별 이익이 없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데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대상을 알아차릴 것 같으면 멀찍이 떨어져서 그걸 봅니다. 마음에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보면, 일어나는 것이 짧으면 짧은 대로 알고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길면 긴 대로 그냥 알지, 그리고 명칭을 우선하지 않고 실재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하게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수행하는 것과 아닌 것과의 차이점이 이렇습니다.

 

또하나 더 얘기를 하면, 죽을만큼 아팠던 사람 혹시 있어요?

스님은 그런 경험이 여러번 있습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뭐냐 하면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지금 뭘 이뤄놨지?'

스님은 내 이름으로 된 책 한권 낸 적이 없습니다. 이름 내기 위해서 하질 안 했으니까 그거 당연히 없는 건데, 어쨌든 내가 책 한권 쓰지도 않았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물론 공부를 해서 석사를 했다 어쨌다 뭐 그거는 좋지만 그게 뭐 큰 의미를 가지느냐는 거라. 그게 불교 쪽에 있지만 불교 공부를 한 거 하고 내가 지금 이룩한 거 하고는 또 다릅니다. 그거는 의미가 없습니다. 책으로 써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거고,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거 내가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거고,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렇다고 스님이 재산을 모으기를 해, 뭘 해? 아무것도 없거든.

어떨 때는 돌아보면 '어?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여러분은 안 그럴 것 같애요? 되게 아플 때 그런 생각들을 자주 자주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진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이 죽으면 어떻게 할까?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평상시 때 건강할 때는 죽음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뭐 할려고 하더라도 참 잘 안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아플 때, 그리고 자신이 굉장히 그것으로 인해서 힘이 들고 할 때 이럴 때는 그것을 관찰하기 쉬워집니다. 좋은 찬스잖아.

나이 든 사람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가지고 진짜 움직이기 힘들고 할 때, 그때는 내가 젊었을 때는 이런 것은 했었는데 지금은 이런 것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나이들었다는 걸 실감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걸 안 받아들일려고 할 거 같으면 문제가 되는데 그걸 받아들일려고 마음을 먹을 거 같으면 그럼 자기에게 맞는 것들을 가지고 뭔가를 하게끔 됩니다. 그 나이에 맞게끔. 바르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큰 문제는 안 생겨버립니다.

그런데 받아들이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것들이 내가 죽음에 임박했다는 생각을 자주자주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지금 내가 할 것이 탁 드러납니다.

'그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뭔가 하나 이루고 죽어야지!'

그러면은 바로 마음이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그래도 알아차리면서 죽어야 될 거 아니야. 적어도 그거는 해야 될 거 아니라? 다른 거는 못해도 죽을 때 내가 내 죽는 줄은 알고 죽어야 될 거 아니라? 지 몸 이때까지 지 마음대로 부렸으면서 그 호흡 하나 지가 알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안 억울해?

 

죽음의 순간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또는 죽음의 순간에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평상시 또 살아있을 동안에 여러분들이 항상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은 그겁니다.

죽음에 대한 것!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바로 코앞에 눈앞에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 그것이 두 번째로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마음은 아주 고요해집니다. 아주 맑아지고. 호흡을 관찰할 때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아까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여러분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압니까?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알아요? 지금 여러분들이 어쨌든 향하고 있는 것이 부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건지, 아니면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명예를 많이 쌓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재산을 많이 모으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자신이 그것 정도는 알 거 아니라?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어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면 빨리 궤도수정을 해줘야 될 거 아니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로 가야됩니다. 그게 우선인 것이고,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부차적인 것을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부차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우선적으로 가야 되는 길을 자꾸 까먹어버리고 부차적인 것들을 자꾸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너무 돌아가버리게 된다는 거라. 이생에서는 너무 돌아가버리면은 돌아올 길이 없어져버립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길을 가고 있는 거라, 아니면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관찰을 합니다. 가끔씩 스님도 그걸 떠올립니다. 우리는 많이 봅니다. 특히 주변에서 출가한 스님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죽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그럼 어떨 때는 그 모습을 떠오를 때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모습들을 떠올리면 또 더더구나 '아차!' 합니다.

그 죽고 나서 그 죽음에 이른 사람이 나아가는 길들을 떠올릴 것 같으면 섬찟합니다. 아주 무서울 정도로 섬찟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또 현실로 탁 돌아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길까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한번 되짚어보십시오.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과연 그게 바른 길이라고 자신 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은 자기의 의지하고는 관계없이 마지막 백골이 될 때까지의 과정은 그대로 정해져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지금 여러분들이 가고 있는 길을 아무도 터치 안하고 자기가 돌아보지 않으면 그건 안 정해질 거 같애요? 똑 마찬가지로 그대로 정해집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만 돌아볼 수 있어도 빨리 자기가 제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필요한 것, 절제하는 것!

오히려 여러분들은 하기가 쉬운 것들입니다. 절제하는 것들. 절제 잘하죠? 예쁜 옷 있어도 당장 안 급하면 안 사죠? 메이커라고 하더라도 그게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할 것 같으면 안 삽니다. 절제할 줄 아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못하면 돈이 어디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그냥 다 나갑니다. 정작 필요할 때 쓸 돈도 없을 만큼.

대부분 절제하는 것들은 감각기관에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그러면서 오는 기쁨들은 행복감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유명 메이커 옷을 사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쁨을 누리고 행복한 마음은 잠깐입니다. 물론 그걸 입을 때마다 행복감을 누리겠지?

그런데 반비례 해가지고 지출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돈도 많이 지출됐지, 남한테 우쭐대야 되니까 나쁜 마음도 일어나지지, 반대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유명 메이커를 안 사고 절제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감은 그보다는 훨씬 크고 부작용이 없다는 거라. 돈 안 들어가서 좋지, 남한테 우쭐대는 나쁜 마음 안 일어나서 좋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절제했다는 것에 대해서 일어나는 행복감들은 더 크다는 거라. 부작용이 없는 길을 따르는 것이 낫지, 부작용이 있는 길을 따르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 절제하라. 밥 먹는 것도 한번 절제해봐요.

맛있는 거 먹으려고 하지 말고, 먹는 양도 평소보다도 훨씬 줄여가지고 절제해봐요. 훨씬 좋습니다. 부작용도 없을 뿐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여유의 시간들 여유의 마음들을 가지게끔 만들어 줍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하는 모든 생활에 관계된 것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야 됩니다. 절제할 줄 아는 것들! 생각하는 것도 되도록이면 절제하고, 되도록이면 안 할라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도 필요 없는 것들은 찾아다니면서 뭔가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행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다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유적지 중심으로 잘 다니다가, 조금 지나고 나면 유적지 중심이 아니라 한 곳에 가서 쉰다고 그럽니다. 유적지를 안 봐도 유적지를 보는 행복보다도 더 큰 행복을 거기서 얻기 때문에. 번잡스럽지 않게끔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휴가를 즐기고 오게 되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도 꼭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이 스승, 저 스승, 오만 스승 다 찾아다닙니다. 한국에 있는 스승들이란 스승들은 다 찾아다니고 외국까지도 나가서 막합니다. 별 차이 없습니다. 그 스승이 그 스승이지 뭐 다른 부처님 가르침 이외의 것을 가르치겠어요? 그럼 별 차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스승을 찾아 안 다닙니다. 자기 혼자서 수행을 하는 거라. 그리고 어느 장소에 있든지 그걸 수행할 수 있게끔 만듭니다. 그러면 스승을 찾아다닐 때보다도 훨씬 수행도 더 열심히 잘하게 되고, 또 마음도 훨씬 그때보다도 방황스럽지 않고 고요해지게 된다는 거라.

생활하는 것도 단순화시켜버리고 절제해버릴 것 같으면, 자신에게 찾아오는 평온함들은 자신에게 오는 자유로움들은 더 훨씬 크다는 거라.

 

대충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항상 마음에 담아두어야 되고, 또 그런 것들이 수행하면서 같이 겸해지도록 해야 만이 대상을 떨어트려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 더, 모든 감각 모든 느낌들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하라.

느낌을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의 진척은 없습니다. 모든 감각은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려나갈려고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것이 되면 수행도 하기가 좀 수월해지고, 수행하기 위한 준비들도 충분히 갖추게 됩니다.

 

이게 보통 "수행에서 먼저 해야 되는 예비수행이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게 예비수행에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본수행에 들어가더라도 이것은 그대로 유지돼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행의 단계」들에 대한 얘기들을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