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수다원에 이르는 길 (20140415)

담마마-마까 2021. 4. 2. 17:32

https://youtu.be/0O0Ezby031U

* 수다원에 이르는 길 (20140415)

[다툼을 줄이는 방법, 말을 할 때의 기본적인 조건,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

 

저 언양 쪽에 수마나 스님이라고 있어요. 가끔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이리 하는데, 어제 그게 점심 맛있는 거 사줄테니까 점심 먹으러 가재. 그래서 “그럽시다” 해가지고 식당에 가서 밥을 한참 먹고 있는데, 우리는 어쨌든 12시 전에 식사를 해야 되니까 일찍 가서 먹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왔는데 식당 종업원이 아직 보통은 12시 돼서 식사 시작하기 때문에 준비해야 될 것들이 많아가지고 물을 안 갖다 줬어, 그사람한테. 자기가 안 갖다 주면 조금 기다리든지 그러면 될 건데 물 안 갖다 준다고 종업원한테 난리를 치는 거라. 종업원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와가지고 미안하다면서 물을 갖다 주고 그랬는데.

 

한참 우리는 먹고 있는데 좀 있으니까 또 시끄러운 거라. 뭔가 해서 이렇게 보니까 저사람은 나보다 뒤에 시켰는데 왜 먼저 나오고 자기건 안 나오느냐는 거라. 자기 거는 요리가 좀 오래 하는 거니까 당연히 뒤에 나오는데 먼저 시켰는데 안 준다고 막 종업원한테 불러가지고 따져쌌고 주인 나오라 해쌌고 막 이러는 거라.

그래서 그모습을 보고 참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밥 먹으러 와가지고 저렇게 마음 먹어가지고 밥먹어가지고 그게 소화가 잘되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씨익 웃으면서 그와 같은게 아, 부처님 말씀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경전에 보면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 목련 존자하고 관계된 것인데 어느 청년이 부처님 계신 데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항상 그 도량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설하러 갈 때는 그 도량에 안 있고 다른 곳에 가있기도 하고, 안거 때는 또 다른 곳에 가있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날따라 마침 부처님이 그 도량에 안 계셨어요.

그런데 이 청년은 와서, 그것도 일반 낮에 온 것이 아니고 저녁 늦게 왔어요.

보통 저녁 늦게는 스님들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준비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 늦게 오면 대부분 스님들이 사람들을 안 만날려고 그럽니다. 자기 할 일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스님들 같지만 스님들은 자기 역할이 딱 정해져 있거든. 그러니까 만약에 이번 한달간은 사람들 수행하는 공간 정리정돈하는 임무를 맡겼으면 그 일은 반드시 매일 해야 되고, 아니면 도량 청소하는 임무가 맡겨지면 도량청소를 잠자기 전에 다 하고 자고, 이런 식으로 합니다.

 

사리분 존자가 그달에는 법당 정리정돈 하는 임무가 맡겨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와서 성질이 좀 급해 놓으니까 다짜고짜 맨 앞에 처음 만난 그 사미 스님한테 “부처님 어딨어? 부처님한테 가서 내가 상담할 게 있으니까 빨리 안내해?” 이러니까 이 사미도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지금 부처님 안 계십니다” 하니까, “그럼 다른 스님 누구야? 누가 제일 뛰어나?” 하니까 “지금 사리불 스님 있습니다.” 하니까 “그럼 빨리 사리불 스님 오라고 그래!” 이렇게 하거든.

사리불 스님은 그때는 법당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중단하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리불 스님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라. 법당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한 1~20분만 기다리면 내가 가겠다고 해라. 만약에 그렇게 기다릴 시간이 안 될 거 같으면 급하지 않으면 내일 오라고 그래라.” 그렇게 얘기를 했어.

그런데 이 사람은 그 10분도 못 기다리는 거라. 그 10분 동안 그 사미는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겠어? 왜 안 오느냐고 막 야단치고 하니까 그 옆에 있는 사미도 죽을 맛인 거라. 빨리 사리불 스님이 왔으면 좋겠는데, 사리불 스님은 자기 할 일 다하고 온다고 법당 청소 다 할 때까지 안 오는 거야.

 

사리불 스님이 한 10분 20분 정도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이 있는데 오니까, 그사람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내가 조금 전에 어디 용하다는 점쟁이한테 갔는데 이 점쟁이가 자기 점을 안 봐주더라는 거라. 그날 시간이 다됐다고.

인도 같은 경우에는 해가 떨어지면 점을 못보는 모양이라. 나도 그거 정확하게 확인된 것은 아닌데 경전에 나와있으니까, 해가 있을 때 점을 봐야만이 점괘가 맞대. 그것도 희한하지. 그러니까 어쨌든 해가 떨어졌으니까 점을 못봐준다고 했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이사람은 지금 당장 급하니까 왜 못봐주냐고 성질을 부리다가 그 점보는 점쟁이가 ”그럼 다른날 약속 잡아온나“ 그러니까 내일 할 수 있냐 그러니까 내일은 예약이 차서 안된다 그러는 거라. 한 삼일 후에나 가능하다 이리 하니까, 이사람은 성질이 급하니까 그게 안 되는 거라.

 

다른 사람을 못하게 하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하니까 점장이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거라. 그래서 당신 이런 사람이면 나 못본다 해서 ”가라“ 해버린 거라. 거기서 이사람은 대판 싸우고 이 절에 찾아온 거라.

그래가지고 와서 사리불 존자한테 하는 얘기가 그 사람 점쟁이가 나쁜 놈이니까 벌주는 신통력을 좀 부리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사리불 존자가 벌주는 신통력을 부릴 수 있어요? 아무리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지만.

이 사람 좋자고 저사람을 벌줄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건 못한다 하니까 당신은 신통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있는데 왜 못하냐는 거라. 그러면서 니 신통력이 가짜 아니냐 뭐 어쩌고 하면서 사리불 존자하고 또 대판 싸우고 간 거라.

 

왜 이렇게 될까? 왜 이렇게 다툼이 자꾸 일어나게 될까? 사람들이.

식당에서도 그사람도 종업원하고 물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소리가 높아지고 다툼이 있게 되고, 경전에 나오는 이 청년도 점보러 다니는 데부터 해가지고 절에 와서도 사미스님, 그다음에 사리불 존자하고 끊임없이 다툴려고 하고.

조금만 참을 줄 알면 그 다툼은 사실은 없는데 그걸 사람들이 못하는 거라. 옛날에도 그랬는데 요즘같이 바쁠 때는 더더구나 다툼이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사람이 하는 말들이나 형태들을 보면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점보러 간 것이고 그러니까 너는 당연히 점을 봐줘야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그러니까 점을 안 봐주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잘못된 시간에 간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점 안 봐주는 니가 잘못된 것이고 나쁜 놈인 것이고, 지금 내가 사리불 존자를 만났는데 만나러 가가지고 다른 사람이 일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나는 지금 사리불 존자를 만나야 되는 거라. 사리불 존자를 만나러 간 나는 정당한 것이고 늦게 온 사리불 존자는 나쁜 놈이 되는 거라.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배움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탓도 자신의 탓도 하지 않는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남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또 내 탓하는 사람은 그건 진짜 부처님 가르침도 모르는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그런 것이 유행한 적이 있죠? "내 탓이요!" 이렇게 해가지고 이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경전에 비춰볼 것 같으면 결코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죠? 남 탓하는 것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내 탓이요' 할 것 같으면 내가 잘했든 잘못했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아, 내가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러면 참 좋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내 탓이요' 하면 일어나는 마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한 것에 대해서 ‘아, 잘했다’고 기뻐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내 탓이요' 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 참 너는 잘했다’ 하는 기뻐하는 마음 정도는 일어나야 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는 거라.

 

다른 사람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라는 거라. 남의 탓도 하지 않고 내 탓도 하지 않는다는 거라. 어떻게 해야 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뻭카(upekkhā) 평정의 마음을 항상 가지는 것!

좋고 싫은 것들은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럼 좋은 마음도 끊임없이 관찰해서 평온한 마음이 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싫은 마음도 끊임없이 관찰해서 평온한 마음이 되도록 해야 그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남의 탓 하고 내 탓 할 것 같으면 이게 안 되거든.

좋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이것의 위험성을 알 것 같으면,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이것도 변하고 어떨 때는 나중에 잘못되면 싫어하는 마음으로 바뀌기도 하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 뭐 그렇게 좋아갖고 못살 정도로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좋아하는 것에, 좋아는 하겠지만 기뻐할 수도 있고 하겠지만 그것에 너무 끄달려들어가고 그것에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또 어떤 일로 해가지고 그게 헤까닥 180도로 바뀌어가지고 좋아 못 죽을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라. 그러면 싫어하는 것도 그것도 영원하지 않고 그때 일어나는 마음일 뿐이다 하고 그 싫어하는 마음도 버려버린다는 거라.

 

경전 중에 「아디나와 카타(ādīṇava kathā)」라고 하는 빨리어 경전이 있습니다.

"조건지워져 성립된 것들은 항상 불완전하다" 어떤 것으로 인해서 내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어떤 것으로 인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이게 조건지워졌다는 거라. 그 대상이 없었으면 내가 좋아하는 마음도 없었고 싫어하는 마음도 안 일어난다는 거라. 그렇게 조건지워져 일어나는 것들은 불완전하다는 거라. 불완전하다는 사실만 알아도 그것들에 대해서 크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이 '넥캄마(nekkhamma)'라는 겁니다. 그것들을 버려버리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버려버려야만이 나에게 평온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뻭카(upekkhā)'가 일어나는 형태를 띱니다. 우뻭카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에 따라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상을 만났을 때 내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 위한, 그걸 훈련하기 위한 좋은 도구 만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좋은 마음이 일어나든 싫은 마음이 일어나든 이거는 얼마나 좋은 대상 만난 거라? 내가 스스로 만들려해도 만들 수도 없는 것들인데. 그런 대상들은 만났다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외부적인 대상만 그런 대상이겠어요? 내가 보는 대상, 듣는 대상, 맛보는 대상, 모든 것들은 그 대상입니다. 점심공양을 하면 내가 맛보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아, 내가 좋은 대상 만났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거 자꾸 먹으려고 하고, 싫어하는 거 안 먹으려고 하고 이런 마음들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그 음식이라는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평온한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대상 만났다고 생각하고 그 음식들을 먹도록 자꾸 해보라는 거라.

보여지는 대상도 꼭 마찬가지고 들리는 대상도 꼭 마찬가지고,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내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 위한 좋은 대상이 일어났다고 자꾸 판단을 하라는 거라. 적어도 그래야 그 대상에 대해서 끄달려들어가지는 않을 거 아니라.

 

자애(mettā)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하고 자꾸 경쟁할려고 합니다.

적어도 그 밥먹는 사람이 이런 경쟁하는 마음만 없었으면 자기 거 먼저 안 나온다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는 거라. 지금 당장 나에게 물을 안 갖다 준다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는 거라.

애들도 경쟁시키죠? 성적가지고 경쟁시키고 대한 가지고 경쟁시키고 뭘 가지고 경쟁시키고 합니다. 경쟁심이 꼭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기본 그 경쟁심의 밑바탕에는 자애의 마음이 있어야만이 왜곡되지를 않습니다.

아, 참 진짜 저 애가 행복한 것이 뭔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만이 그 경쟁을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경쟁을 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거라. 애는 이걸 원하고 이 길로 가고 싶어 하는데 엄마는 애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고 가고 싶어하는 길로만 데려가려고 하는 거라.

물론 그 길로 갈 수가 있어. 그 길로도 살 수가 있고. 그리하더라도 반드시 애는 언젠가 한번은 엄마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들 엄마에 대해서 나쁜 마음들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 한번으로 그치면 좋은데 평생 그게 갈 거 같으면 그 경쟁에서 이겼지만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거라.

 

경쟁을 시키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가져야 되는 것은 자애의 마음을 가져라는 거라. 아예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적어도 살아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필요하다고 할 것 같으면 자애의 마음으로서 그게 밑바탕이 되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자기가 꼭 일등 해야 되고 자기가 먼저 해야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는 않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들,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언짢은 말을 해서 상처를 주는 것들을 하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동정하는 연민심(karuṇā)이 항상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될 것 같으면 비수가 되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 가슴에 딱 꽂혀버립니다. 아, 참 저사람에 대해서 연민하는 마음들 가엽게 여기는 마음들을 가질 거 같으면 그분에게도 그런 마음으로서 “물좀 주세요” 하고 얘기할 거 같으면 그사람도 그걸 알아듣습니다. 그럼 자기 하는 일이 바쁘지만 중단하고라도 ‘아, 참 저사람 나를 위해주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으니까 와서 물을 주게 돼있는 거라.

그런데 그마음 없이 그냥 “물줘!” 하니까 이사람은 기분 나쁜 거라. 내 지금 바빠 죽겠는데 자기가 떠먹든지 안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갖다 줄건데 하는 마음이 들게 돼있다는 거라. 잔인해지는 거라.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도 잔인해지고 듣는 사람도 잔인해지고 서로를 해치려는 마음들이 상처 입힐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먹는데 비수가 될 수 있는 것들은 행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진짜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저 사람이 진짜 좋은 방향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연민심의 마음을 그래서 계속 키워줘야 되는 거라.

 

적어도 자비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끔 됩니다.

 

자! 여기서 경전의 비유도 있었고 실제 생활에서 경험한 것들도 있지만, 말할 때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을 할 때는 바른 때 해야 된다.

저사람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 말을 해야 되는 것이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는 그것은 바른 때가 아닙니다.

내가 성질이 나있는 상태다 아니면 저 사람이 성질이 나있는 상태다. 그럴 때 내가 아무리 바른말을 그사람한테 하더라도 그것은 바른 때가 아니다. 바른말 할 때는 차라리 성질 가라앉고 나서 고요한 상태에서 서로 경계하는 마음이 없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을 때, 바른말을 할 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이나 여러 가지들을 이해를 구할려고 할 때는 그때를 잘 살펴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이 말을 저 사람한테 해도 되는가 하는 그 시기를 반드시 보고 적당하다 싶을 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을 해주기를 바랄 때 해주어야 됩니다. 그걸 반드시 살펴라.

 

두 번째, 말을 하는 것은 미사여구를 섞어가지고, 아니면 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사탕발림 식으로 말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 진실되게 말을 해야 됩니다.

그 시기가 맞다고 할 거 같으면 진실되게 말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둘러서 얘기할 거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왜곡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이 있고 자기가 판단하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말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럼 왜곡되게 말하고 둘러서 얘기할 거 같으면 그중에 일부분 자기에게 유리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럼 실제의 내용하고는 다르게 자기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에둘러서 얘기했는데도 그 사람은 그렇게 못 받아들이는 거라. 왜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때만 바르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바르게 얘기해야 됩니다.

 

세 번째, 말을 할 때는 부드럽게 하라. 어떤 경우든지 거칠게 얘기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바른말이라고 하더라도, 바른 때라고 하더라도 거칠게 얘기하면 안됩니다. 부드럽게! 입술이 달싹거리고 할 때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또 내마음이 고요하고 부드러운 상태에서 말을 해야만이 부드러운 말이 되는 것이지, 내 감정에 휩싸여가지고 아무리 진실된 말을 하더라도 그거는 부드러운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앞에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말이 부드럽게 되지 않으면 딱 중단을 하라는 거라. 그거는 큰 이익이 없다는 거라.

 

네 번째, 그 말을 했을 때 반드시 이익이 되어야 됩니다.

때를 잘 살피고 진실되게 말하고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해도 이익이 없으면 안됩니다. 내가 그말을 하고 나서 ‘나도 참 잘했다’ 하는 마음이 들어야 되는 거고, 그 말을 듣고 난 상대방도 ‘아, 참 내가 이런 것은 잘못한 거고 이런 것은 잘했다’ 하고 마음이 기뻐해야 되는 것이지 듣고 나도 시큰둥해가지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큰 이익이 없는 거라. 그래서 이익이 있을 것 같지 않게끔 듣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도 중단하라는 거라.

말을 하고 나서 저 사람이 그래도 참 나를 생각해주는 모양이다 하면서 그사람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더욱더 우정이 견고해지고 말 하나도 ‘아, 참 내가 저사람한테 이 말을 참 잘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또 저 사람에 대해서 인간적인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원수가 되지 않도록 돼야 되는 것이지, 그런 이익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큰 이익은 없다는 거라. 그냥 말은 말로써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이익이 되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다섯 번째, 이런 모든 조건들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자비심을 가지고 자비심을 일으켜서 말을 하라.

자애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말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왜?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다른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필요에 인해서 핵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균열이 가서 누출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아무리 이런 앞에 4가지 조건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이 방호벽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게 없을 거 같으면 언젠가는 누출되게 돼있습니다. 지금 설혹 기뻐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 돌아봤을 때 그 사람은 또 다른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는 거라.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방호벽을 치고 얘기할 것 같으면 나도 이롭고 다른 사람 듣는 사람도 그것들에 대해서 오래도록 가게끔 된다는 거라. 한번 하고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일 거 같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애의 마음으로서 항상 하라.

 

이게 말을 할 때의 기본적인 조건들입니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되도록이면 말을 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 스님들은 말 안 하고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을 하면 여러 가지 알아차릴 것도 많고 또 여러 가지 내가 판단하고 생각해야 될 것들도 많고, 가장 좋은 것은 생각 안하고 판단 안하고 말 안하고 내 할일만 하고 있으면 그것 같이 좋은 게 없어.

그런데 그 큰 행복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는 그 행복은 미뤄둬야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은 오히려 사람 찾아오는 게 더 귀찮아. 오히려 안 왔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해서 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번 같은 경우에는 서울에서 오늘 법문 들을려고 내려 온다는 거라. 내려온다는 걸 오지마라 소리도 못하고, 어쨌든 와가지고 오늘 법문을 듣고는 있지만, 다음부터는 여기 오지마요. 가까운 서울에서 좋은 스님들이 많으니까 거기서 법문을 듣고 거기서 해요. 뭐하러 이 멀리까지 시간들이고 비용을 들여가면서, 본인이 판단할 부분은 있지만 그마만한 이익이 생긴다 할 것 같으면 오기는 오더라도 나의 이익만 따질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익이 없는 일들은 생길 수가 있다, 그 부분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스님이 크게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현명하게 해야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내가 자꾸 이러니까 우리 여기 선원에 운영위원들한테 욕을 먹는 거라. 오는 사람 만날 오지마라 쌌고 가라쌌고 하니까, 그래도 그사람 입장에서는 현명한 방법을 택해야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금 더 이익이 있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럴려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첫 번째,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고 하는 일들은 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말을 하더라도 해치는 상태가 되고 자신이 그말을 하고 나서도 기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하지 마라.

행동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지금 당장은 기쁨이 있고 즐거울지 몰라도 나중에 더 큰 불행을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생각하는 것도 지금 현재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망상 피우다가 끝나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거라. 그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럴 동안에 나는 애한테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있다는 거라.

가치없고 무의미한 것들, 또는 나와 남을 해치는 일들 이런 것들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주변의 가족들 내 주위의 친구들은 항상 그사람 편이 되도록 자꾸 해줘야됩니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그래서, 사실은 내 편이 되어야 되는 거라. 네가 틀린 것도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될 일들만 분명하게 하는 것!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줘야 될 일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

예를 들어봅시다. 남편이 병들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뭐해요? 그냥 간호합니다. 병들고 나서 이 사람이 병 나으면 나한테 잘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간호하는 경우는 잘 없죠? 간혹 그런 사람들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이렇게 간호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왜 이렇게 못하느냐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거 왜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내가 해야 될 것은 지금 그사람들 편이 돼주는 것만 하면 돼. 그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주기만 하면 돼. 돌아올 걸 생각하지 말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나 이런 법의 도반들이나 그건 어떤 경우든지 그편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편이 돼서 그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그사람에게 이익된 것이 뭔지 하는 것을 내가 끊임없이 자꾸 해줄려고 해야 돼.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지 거기서 뭔가를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거는 이미 틀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번째는 그 일을 반드시 하라는 거라.

 

적어도 이 두 가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이생에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보다도 더 잘 살아가게 됩니다.

이 방법들이,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했을 때, 그것이 완전하게 자기 것이 되면 그 사람은 어느 순간에 소따빤나(sotāpanna)에 이릅니다. 수다원에 이릅니다.

 

수다원에 이르는 조건들은 그 조건들입니다.

 

처음에는 바른 법을 배우고 듣고 해서 그 조건들을 먼저 충족시키는 것.

내가 지금 하는 것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를 것 같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거라. 말하는 것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수행하는 것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거라. 그래서 우선 그거 먼저 배워라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배움의 과정들, 스승을 찾는 일들, 또 좋은 도반들이 옆에 형성되도록 하는 것, 이런 것들을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 선우)라고 그럽니다. 소따빤나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빠리얏띠(pariyatti, 이해하는 것)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 몸에 익도록 하라는 거라. 아무리 배우면 뭐해? 그것이 자기 몸에 익혀져야지. 그렇다고 몸에 익혀진다 해가지고 실수 안하고 잘못된 길로 안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더라도 ‘어, 이게 아니다’ 하고 분명히 알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서 바른 것이 자기 몸에 익혀지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세 번째가 빠띠빳띠(paṭipatti, 실천하는 것)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 지금 내가 해야 될 것이 뭔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뭔가, 이익되는 것이 뭔가, 이익이 없는 것이 뭔가, 먼저 해야 될 것이 뭔가, 그리고 뒤에 해야 될 것은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기가 판단이 돼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해야 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지 않게끔 하고 그런 것들이 자꾸 생겨나는 거라.

그것이 생겨나면 그 사람은 번잡스럽지 않게 됩니다. 아주 간단해집니다. 단순해집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아? 그 시간에 수행할 수 있고, 그 시간에 법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고, 더더구나 자꾸 닦을 수 있는 조건들이 되는 거라.

 

네 번째가, 이러한 것이 수다원에 이를 때까지 벗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것.

 

4가지가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조금 전에 말을 하는 것도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그 방법대로 해나가야 됩니다. 적어도 말하는 것만 잘해도 수다원에 이른다는 거라. 먹는 것만 잘 먹어도 수다원에 이른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배우고 또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 바른 것이라고 인식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을 자꾸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게 몸에 익혀지도록 해야 됩니다. 익혀져서 완전하게 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어느 순간에 한 단계 확 뛰어넘어가게 됩니다. 마음이 180도로 탁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자꾸 그런 마음이 180도로 바뀌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하나가 떨어지면 나머지 것들도 동시에 같이 떨어져나갑니다. 또 동시에 엷어져버리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든 바르게 실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