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색함에 대해서 (20140424)
스님이 충청도 쪽에 다녀왔어요. 교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게 스님들이 계속적으로 출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터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테라와다 불교가 한국에서 계속 자리를 잡아갈려고 할 거 같으면 일단은 출가하는 스님들이 자꾸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없어도 또 그 스님들이 부처님 법을 전해줄 수 있도록 지속돼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스님들을 출가시키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몇 년 모아도 교단에서 지금 4천만원 모여져 있어가지고 그걸 가지고 땅을 사려고 하니까 참 잘 안돼.
그래도 하나 분명한 것은 그게 마련이 돼야 스님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포살도 하고 상가 갈마들도 하고, 그러면서 재가자들 수행지도나 여러 가지들을 해나가고 이런 일들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몰라 그건. 그런 자리가 언제가 될지.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게 형성이 되면 스님이 가야 된다는 거라.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스님을 놔줘야 돼. 당장 내일이 될지 아니면 이생에선 안 될지는 나도 몰라. 불법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몇 년이 들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미리 여러분들한테 얘기를 해두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다른 좋은 스님들 모시고 또 법회가 진행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얻기가 참 힘이 듭니다.
가끔씩 스님도 그럴 때가 있어요. 특히 교단 차원에서 하고 있는 게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서 법회를 보고 있는데, 아직은 내가 담당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이는 분들이 원하기도 해서 내가 하고 있지만은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다른 스님들에게 법문을 맡기면 불안해. 부처님 말씀을 잘못 전할 수도 있고, 또 자기 개인적인 생각들을 많이 강조를 하다 보니까,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 듣기에는 불편한 부분들이 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있어서 쉽게 맡기지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그것도 현명하게 판단을 해가지고 상황이 되면 맡겨야 됩니다. 내가 계속할 순 없는 거니까.
그래서 안을 낸 게 뭐냐 하면 삼 개월 전에 법문 주제를 정해라. 그러고 나서 한 달 전까지는 레포트를 제출하라. 그래서 레포트를 보고 큰 무리가 없으면은 그대로 하게 하고 아니면 변경사항 있으면 변경해서 고치도록 하고, 그러고 나서 법문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니까 다른 스님들이 아무도 안 할려고 그래.
그래서 ‘야, 이거 이렇게 했다가는 되도 안 하겠다’ 싶어가지고 바꿨어. 내가 인제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로 하고, 그 대신에 지금 그 스님이 법문을 할 때 포기해선 안 되는 게 뭔가 하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라.
여러분들은 끝까지 포기해선 안 되는 게 뭐가 있어요? 결혼한 분들이면 가족 포기하면 안 되겠지. 가족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책임져야 될 가족이 있다는 것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된다는 겁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그러다 보면 자기는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대가를 바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본인이 포기를 해선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되는 의무입니다.
법문을 전하는 스님의 입장에서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내가 전하는 법이 부처님 말씀을 왜곡해선 안된다는 것. 그거 하나만 기억하라는 거라. 그걸 기억을 안 하고 있으면 자꾸 자기 말이 들어가버리는 거라.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럼 이제부터는 레포트를 제출 안해도 되느녜. 그래 그렇게 합시다 해가지고 인제 타협을 봤어.
어찌 보면 그것도 타협을 보지 못하면은,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서 자기 자신의 인색함을 드러내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사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참 옹고집 같이 보이기도 하고, 인색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 권리나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수다원이 되면 없어지는 세 가지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뭡니까?
(수행자 대답 : 유신견, 의심, 계금취)
네. 유신견, 의심, 계금취. 물론 그런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대표적으로 그 사람이 유신견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아? 법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계금취에 집착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을 보고 어떻게 알 거라? 그건 잘 표가 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걸 가지고 측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수다원이 된 분들이 이게 있는가 없는가를 측정하는 것이,
질투하고 인색한 것들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보통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그거는 행동하는 것들이나 말하는 것들을 보면 표가 나게 돼있으니까.
수다원이 되지 않아도 법에 대한 의심은 없을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도 그런 것이 있거든요. 저 저쪽 강 건너에 부처님이 법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 법문을 들으러 가고 싶은 거라. 이쪽에서는 들리지 않으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이 강이 얼마나 깊습니까? 건널 수단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럽니다. 거짓말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부처님 법을 들을려고 그런다는 거라. 그 사람은 법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거짓말을 합니다. 안 깊습니다. 무릎 정도밖에 안 옵니다. 사실은무릎보다 훨씬 더 깊은데도.
그런데 이 분은 법을 들을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런 의심없이 그 강을 건너가버립니다. 실제로 건너가다 보니까 무릎보다 훨씬 깊어요. 그런데도 나중에는 헤엄을 쳐서라도 그 강을 건너서 부처님한테 가서 법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 왔느냐니까, 저쪽에서 왔다고 하니까, 배도 없는데 어떻게 왔느냐? 안 깊어서 그냥 건너왔습니다.
법에 대한 확신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법을 들을려고 하는 열망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 분을 수다원이라고 얘길하지는 않거든.
마찬가지로 유신견이 없다고 하는 것도, '나'라고 하는 환상을 완전히 깬 것을 애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몸에 대한 집착들, 그리고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실재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진아(眞我)니, 법성(法性)이니 하는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는 생각들을 얘기합니다. 그거는 없앨 수가 있습니다. 교리책 몇 번만 읽으면 '아, 없다' 하는 생각은 다 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분을 수다원이라고는 얘길 안합니다. 그것을 체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인식을 한 겁니다. '아, 그것은 실재하는 것은 없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삿된 견해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또는 어떤 의식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기 오면 빨리어로 삼보예찬 하고 오계 받고, 여기서 또 따라합니다. 또 저기 한국사찰에 갈 것 같으면 거기에 따라서 반야심경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분을 그런 계금취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서 수다원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질투하는 것을 끊기는 쉽습니다. 어떻게 끊기가 쉬울까? 질투하는 것들은.
질투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생각을 하고, 나보다도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이 들면 질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보다 좀 더 많이 가지든지 더 뛰어나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것은 사실은 일상생활이나 수행에서는 크게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자기 거 열심히 하기 바쁘고 또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을 거 같으면 크게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씁니다.
남의 슬픔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을 안 쓰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남이 잘 되고 할 거 같으면 물론 싫은 마음이 있고, 그것을 내가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질투하는 마음들도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크게 영향을 받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인색함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참 많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오늘 인색함이란 것에 대한 것들을 간단하게 조금 더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어느 사찰에 가면 저녁에 그 지역에서 자야 되는데 그 절에 주지스님이 방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방이 없다는데 거기서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잠잘 곳을 찾아서 이 절 저 절 다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참 야박하다’ 그런 생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안 그럴까? 누군가가 왔다, 나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지만은 그 사람이 오면 방 한칸 줬을 때 내가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밥 차려줘야 되는 그런 번잡함도 있고,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가까운 숙박시설에 가서 주무시라고 그렇게 얘기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핑계를 대든지 그분이 내 집에서 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것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베풀려고 하지 않는 거라.
거주처의 인색함은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마음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침해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걸 원한다, 그럴 것 같으면 이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걸 줄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일어나겠어요? 지금 나도 쓰고 있는 것들인데.
인색함이 없으면은 "아, 그래 이거 너 가져가서 쓰라. 그런데 나도 필요하기 때문에 얼마간 쓰고 다시 또 돌려도."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않으면 아예 이것에 대해서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래 니 해" 하고 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는 거라.
당장 내가 이게 없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그 생각만하지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일으키는 번뇌들은 생각하질 않는다는 거라. 사찰에서 방을 내주지 않는 것도 꼭 마찬가지 예의 형태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인색함들은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거주처에 대해서 인색할 거 같으면 그것으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은 점점 더 생겨나서 인색한 것들이 다른 것으로 번져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내가 생활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누어줄려고 하지 않고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지를 않는다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국에 가면 참 잘하는 것이 뭐냐 하면 길에 보면 물항아리들을 놔놓습니다. 아무나 가면서 목마른 사람들은 그 물항아리의 물을 떠 먹으라고. 그런데 그 물항아리들은 번호가 적혀져있고 주인의 이름이 적혀져있어요. 그 주인이 관리를 하는 거라. 그 주인은 아침마다 일어나서 그 항아리를 깨끗이 씻고 물을 새로 채워둡니다. 누가 먹는지도 모르고 먹는지 안 먹는지조차도 모르지만, 아침마다 그 사람은 하는 일이 그건 거라.
집에 있을 경우에 누군가가 와서 물을 달라고 그럴 거 같으면 물을 주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집에 오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지나가다 아무에게도 물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물을 먹으라고 그렇게 합니다. 어느 마을에 가든지 큰 나무들 밑에는 다 그것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색한 것들도 문제가 되지만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사람들이 혹시나 있을까 봐서 그런 배려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돼요.
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사원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짓는 것이 뭐냐 하면 방입니다. 그 절에 머물 스님 방과 또 다른 데서 와서 하루라도 머물 수 있는 스님들의 방을 동시에 짓습니다. 언제 누군가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걸 반드시 먼저 한다는 거라.
거주처에 대해서 인색하다고 하는 것은, 남이 뭔가를 얻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사람은 필요해서 그걸 얻을려고 하는데도 그걸 얻지 못하게 하는 거라. 왜? 나에게 불편하기 때문에, 내 것이 또 쓰여진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그 생각을 버려버릴 것 같으면 남이 얻고자 하는 것들은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들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실제로는 그게 많이 자신에게 뭔가가 낭비가 된다든지 아니면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누군가가 그 방에 와서 머물고 간다고 하더라도 방은 그대로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을 떠준다고 하더라도 그 물은 또 생겨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도 지금 현재 내가 인색한 마음 때문에 물을 줄려고 하지 않고 방을 내주지 않는 거와 같다는 거라.
이거 지금 현재 없으면 내가 불편하지만 이거 없어도 나는 다른 것들로 대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들에 대해서 줄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못 주고 있는 거라.
그게 인제 인색함을 없애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그 모임에는 전체가 한 덩어리 되는 걸 보기가 참 드뭅니다. 친한 사람 몇 명 요렇게 모이고, 또 요쪽에 친한 사람 몇 명 모이고. 그런데 그 그룹 그룹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참 좋은데 그런 경우가 참 드뭅니다. 그리고 이 그룹에 있던 사람 중에 하나가 누군가가 저 그룹으로 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되게 미워합니다. 우리 편이었다가 왜 거기에 가느냐는 거라.
수행하는 수행자 집단에서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가끔씩 그런 소리를 스님에게 해요. 누군가가 뭔가를 이렇게 하면 그걸 왜곡되게 전달을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좀 안 좋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저럴까? 하는 거라. 여러분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 아주 친하게 지냈다, 아마 별로 안 좋아할 거라.
예를 들어서 자기 와이프가 옆집에 있는 사람하고 나보다도 더 친하게 지낸다. 되게 싫어합니다. 뭐 다른 별일도 없는데 나보다도 오히려 친하게 깔깔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수행자들 그룹하고 별반 차이 안 납니다.
설혹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 법을 위해서 어울리는 데도 싫어합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도 그럴 겁니다. 여기 와서 법문 듣고 같은 도반들끼리 만약에 밥이라도 먹으러 간다고 할 거 같으면 되게 싫어합니다. 물론 잘못하는 부분들이 있겠지. 거기 가서는 잘하고 하는데, 집에 와서는 자기한테는 한 번도 외식시켜주지도 않고 할 일도 안 하기 때문에 싫어하겠지. 그런데 그걸 해도 싫어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 게 바로 인색한 게 있는 것들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부류 중에 한 사람이 다른 부류와 어울리고 그거와 친하게 지내면은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 그거 별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같이 가서 거기에 어울릴 생각들을 하지 않고, 또 같이 가서 그 그룹에 속해서 더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이 나에 속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것들은 빨리 고쳐야 되는 것들입니다.
점점 더 인색함은 강해질 뿐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것들은 강해져 버리게 됩니다.
한 번 놔놓아보십시오.
쿳줏따라도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 듣고 올 거 같으면은, 그 법문 듣고 온 것에 대해서 왕비가 인색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또 쿳줏따라가 자기를 시봉 안 하고 간 것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에 자기가 할 일들을 하고, 그러고 나서 쿳줏따라가 오면 니 부처님한테 뭔 얘기를 들었노 해가지고 그 얘길 다시 자기가 듣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 듣는 거와 마찬가지의 마음을 낸다는 거라.
얼마든지 자기가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도 단순히 그 인색함이라는 것 때문에 더 좋은 이익들을 놓치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언젠가 그걸 본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처음 출가를 했을 때 그 절에 스님 두 분이 똑같이 차를 샀어요. 그때 아마 소나타인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소나타 차를 똑같은 날에 똑같이 뺐는데도 뭔가 조금 차이가 있는 걸 발견할려고 하는 거라 두 스님은. 나는 여기가 광택이 니 차보다 더 낫다. 아니면 나는 내 차 안에 여기에 좌석이 좀 더 반질반질 한다. 아니면 나는 카바가 나는 비닐 하나가 니는 없는데 나는 있다 이러고 있는 거야. 남이 좀 더 좋은 거 잘되는 것을 못 보는 거라. 어쨌든 자기가 그것보다 낫다고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때는 그냥 무심코 흘려버렸어.
그런데 그게 인색함이 없으면 그게 가능하겠어요? 말장난 같이 스님들은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인색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하게끔 되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도, 특히 여성분들은 더 그럴 거라. 가면 누가 좀 예쁜 짓 하면 그거보다도 지가 더 예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거고. 아니면 뭔가 흠집내가지고 뭘 꼬투리를 잡아야 돼. 뭐하러 그러는데?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앞의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색함이라는 것은 인색함을 내는 사람이 오히려 안 좋은 결과들을 낳게 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은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내가 멀리 있는 사람을 보고 예쁘다 한다 해가지고 그 사람이 못 알아들을 경우에는 그 사람 그 자체는 그대로 그냥 있는 겁니다. 또 내가 멀리 있는 사람 똑같은 사람을 보고 밉다 한다고 사람이 어떨 때는 예쁜 사람이 되고 어떨 때는 미운 사람이 되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이 오히려 예쁘고 밉고 하는 것들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이 인색함을 만드는 것이지, 남을 꼬투리 잡아가지고 자기가 뛰어난 것들을 발견한다 해가지고 그 사람이 진짜 뛰어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색함만 더 해지는 것이지.
남이 더 좋은 것, 잘되는 것들을 보면 기뻐할 줄 알아야 되지 그것을 인색함의 도구로써 삼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욕심부리는 것.
아까 세 번째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경우가 다르지만은 조금 더 자기가 많이 가졌다는 생각을 가지는 겁니다. 남들보다도 조금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남들보다도 능력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가끔씩 어떨 때 보면 우리 선원에도 그런 걸 보기도 해요. 사람이 오면 아, 저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고 하는 것들은 대충 듣고 나서, 그냥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칠려고 그럽니다. 어떤 때는 보면 참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 듣고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일 거 같으면 그냥 가만히 듣습니다. 그런데 뛰어나지 않는 사람이면 뭐라고 하느냐면 "나 그거 알고 있어요." 그럽니다. 사실은 그거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얘기라. 드러내는 것들은.
그것도 자신의 탐욕,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어떤 것들이 있느냐면 특히 스님들 같은 경우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안 나눠줄려고 그럽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들, 자기 혼자 가지고 있을려고 그럽니다. 거 좀 나눠주면 참 좋겠는데 그걸 안 나눠줄려고 그럽니다.
말은 물론 그럽니다. 내가 말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내가 아직 완전하지 못해서. 능력이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도 다른 일반 재가자보다도 훨씬 뛰어난데. 그리고 지금 현재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도 재가자보다도 훨씬 뛰어난데도, 그냥 그 핑계대고 자기는 안 나눠줄려고 합니다. 물론 완전해지면 좋고, 또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면 좋지, 죽고 나서?
법에 대해서 인색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전에는 한국의 큰스님들이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지 않는다 해서 산문 걸어 잠가놓고 나서 열심히 수행하면 참 좋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닌 거라. 그 스님은 청정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스님에게는 수다원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고 있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테라담마라고 하는 열 가지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고,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을 갖기만 할 거 같으면 법을 설하라고 그럽니다. 능력이 뛰어나든 아니든, 아니면 아직 수다원에 안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스님들이 할 말이 없어 갖고 횡설수설하다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땀 삐질삐질 흘려가면서 겨우 그 시간을 때우기도 하지만은, 다른 사람들은 별로 얻은 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다 좋아합니다. 그렇게 설하는 법이라고 하더라도!
왜? 일단은 그 스님은 법에 대한 인색함은 없는 것이고, 그리고 법을 듣는 것은 법의 내용이 좋아가지고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설할 수 있는 스님이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재가자들은 기뻐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법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또는 어떤 질문들을 할 거 같으면은 그 질문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으면 잘못 알고 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되는데, 그것을 자신이 잘못할까 봐서 대답을 아예 안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할 뿐아니라, 자신의 인색함을 감추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들한테도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하는 거는 좋다. 그렇지만 스님이 갖춰야 되는 것은 수행력만 갖춰야 되는 것은 아니다. 스님들이 모여 있으면 스님들이 해야 될 일들을 익히는 것도 해야 되는 것들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해야 되는 것들이다. 그러면 그거 안 했으면 안 했다고 솔직히 얘기하라는 거라. 그리고 배울 건 배우고, 또 나눌 건 나누고, 질문할 건 질문 하라는 거라.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감춥니다. 그리고 그걸 안 할려고 합니다. ‘그냥 수행만 하면 되지’ 그것은 법에 대한 인색함 입니다.
어떤 경우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할 경우에는 나눠줄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게 법에 대해서만 그렇겠습니까?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할 때 그것을 우선 기브 앤 테이크로 나에게 돌아올 것들을 생각해서 자꾸 나눌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냥 나누어주면 됩니다. 책도 출판을 해야 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나눠주면 됩니다.
이런 게 인색함의 부류에 속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런 인색함이 점점 더 줄어들 때 여러분들은 더욱더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깊어지게 됩니다.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깊어져서 확신이 들게 되면은 점점 더 법의 테두리 안에 살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의도적으로도 계를 어길려고도 하지 않고, 또 남들에게 나를 내세우고 나를 폄하할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생활이 쭉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은 한 단계 성숙돼서 수다원에 이를 조건들이 성숙해서 무르익어서 수다원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들입니다.
적어도 인색한 부분들은 없애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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