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현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표적 조선 지식인이다.
28세 때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을 시작한 이래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까지
계속됐는데 이는 정조 시절 후반기 12년 동안에 해당한다.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의 공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정약용은
고향집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으로 짓는데
이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서,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若畏四隣)"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세에 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57세가 되어서야 귀향할 수 있었다.
포항 장기에서 9개월, 전남 강진에서 나머지를 보낸 18년 동안의 유배였다.
고향집(與猶堂)에 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수정 보완하면서
만년 18년을 살다가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ㆍ경제ㆍ역리ㆍ지리ㆍ문학ㆍ철학ㆍ
의학ㆍ교육학ㆍ군사학ㆍ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전집(全集)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
사서육경(四書六經)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 등 총 492권으로 구성된다.
다산은 문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 건설 때 기술관료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점이 특이하다.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정조는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다.
신도시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별한 것이었다.
다산의 역량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 창안 등 과학기술적 업적 외에도,
당시 당연시되던 강제 노동(부역) 대신에 성과급 방식의 임금 노동을 채택하여
유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한 경제정책적 배려에서 돋보인다.
다산의 집안을 살펴 보면 당대의 걸출한 지식인이자 관료들과,
박해를 당한 천주교인들이 망라된다.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매형은 선교사가 없는 상태에서
자생적 천주교 조직을 구축했던 이벽(李檗)인데
다산은 그를 통해 처음 서학(천주학)을 접했다.
교황에게 보내는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이다.
다산의 둘째형 정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자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함께 귀양길에 올라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가는데,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쓰는데
흑산도의 흑(黑)자는 죄인의 이마에 먹물을 새기는 등 좋지 않은 어감이어서
같은 뜻의 자(兹)자를 써서 호로 삼은 것이다.
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다산에게 약전은
인편으로 보내는 저술의 유일한 독자(讀者)였다.
그 한 명의 독자를 위해 다산은 쓰고 또 썼던 것이다.
형제는 끝내 만나지 못했고,
약전이 흑산도에서 사망하자
자신의 저서 240권을 불태워야겠다는 다산의 절규는
유일한 독자를 잃은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정약전 자신은 저술에 그리 열심이지는 않았지만
학문 수준은 다산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형 정약종은 다산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박해 때(1801) 희생되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정약종의 어린 두 아들과 딸 역시 천주교로 인해 희생당했다.
약종은 여러 차례에 걸친 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배교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등 참 천주교 신자로 존경받는다.
정약용의 처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 받은 천주교도인 이승훈이며,
당대 제일의 천재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체제공 사후에 남인 영수가 된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며, 성호 이익(李瀷)의 종손 겸 성호학파의 대표자였다.
이승훈과 이가환 또한 신유박해로 처형당한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 벽파는 당시 현실적인 정치실세였지만
정조는 그 속에서 착실히 개혁세력을 성장시키면서 상황을 바로잡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빌미로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있던 38세 때,
다산의 정치적 후견인으로서 남인 영수 겸 명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다.
불길한 전조였다.
곧이어 정조의 건강에 탈이 났고 보름새에 운명하고 말았다.
다산에게는 이제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남인으로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 한 다산으로서는
목숨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정조가 장차 크게 쓰려했던 인재들이 붙잡혀 왔다.
이가환, 이승훈은 사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다산은 사지(死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18년간의 긴 귀양살이가 시작되었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며,
호사스런 집안의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인정한 것도 아니다…
반드시 가장 총명한 선비가 지극히 곤궁한 지경을 만나서
종일토록 사람 소리나 수레바퀴 소리가 없는 곳에서
외롭게 지낸 뒤에야
경전과 예서의 정미한 뜻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비뚜루 서고,
상소리를 내뱉으며 어지러운 것을 보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평생 크게 마신 적이 없어서 나 스스로 주량을 모른다…
너희들은 지난날 내가 반 잔 이상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과 혀를 적시기도 전에
직접 목구멍으로 넣는데
그래서야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이 붉은 귀신처럼 되고 토악질을 하고 잠에 골아 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둘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도 쓴다.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만일 이익만 보고 의를 보지 못하며,
가축을 기를 줄만 알지 그 취미를 모르면서,
애쓰고 억지쓰면서
이웃 채소 키우는 늙은이와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만 한다면,
이것은 바로 서너 집밖에 없는 산골에 사는 못난 사람들의 양계인 것이다…
닭 기르는 이론을 뽑아내어
『계경(鷄經)』을 짓는다면 어떻겠느냐.”
현대인들이 다산을 존경하는 이유는
실용과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실사구시적 학풍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배려가
현대인들을 감정이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고통은
다산의 섬세한 심금(心琴)을 날카롭게 울렸다.
“인생이 만약 초목이라면
물과 흙으로도 살아가련만…
마른 목은 여위어 따오기 모양이오
병든 육신 주름져 닭살 같구나…
우물물 있다마는 새벽물 긷지 않고
땔감 있다마는 저녁밥 짓지 못해
사지는 아직 움직일 수 있건만
굶은 다리 제대로 걸을 수 없네…” – 다산 「기민시(飢民詩)」
다산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은
인근의 해남, 완도 등과 함께 황칠나무의 주산지(主産地)이다.
특히 완도를 근거지로 활약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수출 물품 중에서
가장 고가였던 황칠은 다산의 이목을 끌 만했다.
“완주(완도)의 황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 (莞洲黃漆瀅琉璃)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 (天下皆聞此樹奇)
작년에 임금께서 세액을 경감했더니 (聖旨前年蠲貢額)
봄바람에 밑둥에서 가지가 또 났다네 (春風髡枿又生枝)”
– 다산 「탐진촌요(耽津村謠)」 중 제8수
귀한 조공품인 황칠의 징수를 둘러싸고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던 사실은
당시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정조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늘어나고
고관에게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5일
백성들의 이러한 수난을 다산의 시선이 놓칠 리 없다.
“그대 못 보았더냐! (君不見)
궁복산 가득한 황칠나무를 (弓福山中滿山黃)
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네 (金泥瀅潔生蕤光)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하듯 하는데 (割皮取汁如取漆)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 (拱把椔殘纔濫觴)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㔶箱潤色奪碧)
잘 익은 치자 물감 이와 견줄소냐 (巵子腐腸那得方)
서예가의 경황지①가 이로 인해 더 좋으니 (書家硬黃尤絶妙)
납지②, 양각③ 모두 다 무색해서 물러나네 (蠟紙羊角皆退藏)
이 나무 명성이 자자해서 (此樹名聲達天下)
박물지에 왕왕이 그 이름 올라 있네 (博物往往收遺芳)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工匠)에게 옮기는데 (貢苞年年輸匠作)
서리들의 농간을 막을 길 없어 (胥吏徵求奸莫防)
지방민이 이 나무 악목이라 여기고서 (土人指樹爲惡木)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每夜村斧潛來戕)
지난 봄 조정에서 공납 면제 해준 후로 (聖旨前春許蠲免)
영릉에 종유 나듯④ 신기하게 다시 나네 (零陵復乳眞奇祥)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나고 (風吹雨潤長髠枿)
나뭇가지 무성하여 푸른 하늘 어울리네 (杈椏擢秀交靑蒼)
– 다산 「황칠(黃漆)」
① 경황지 – 당지(唐紙)의 이름으로 노란 물감을 먹인 종이
② 납지 – 백랍 먹인 종이
③ 양각 – 염소뿔을 고아 얇고 투명한 껍질로 만들어 씌운 등
④ 영릉에 종유 나듯 – 유종원 <영육복유혈기>에 나오는 이야기.
영릉(영주)에 석종유가 나서 공물로 바쳤는데, 그 채취가 힘들 뿐 아니라
보상도 해주지 않아서 그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다 없어져 버렸다고
거짓으로 보고함. 나중에 지방관이 어진 정사를 베풀자 백성들이 다시
석종유가 되살아났다고 아뢰었다는 고사.
결국 강대국의 과도한 조공 요구와 수탈이
황칠나무를 악목(惡木)으로 만든 것이고,
그래서 황칠은 우리 곁에서 200여 년 동안 사라진 것이다.
다산은 유배생활 동안 몇 차례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파의 저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반대파의 중심에는,
황칠을 둘러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다산과 의견이 일치했던
서용보(위 『조선왕조실록』 인용 참조)가 있었다.
다산은 구차하게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 분명한데 자존심까지 잃을 수 없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모두 운명이라 여겼다.
57세 때 가을, 드디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며 18년을 더 살았다.
1836년 그의 부부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
그리하여 친척들과 자손들이 모인 날,
그는 75세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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