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을 자세하게 보자. (20111001)
추석도 지났고 한해의 반은 지났습니다. 저번 토요일이죠? 양평 가서 법회 봐줄 일이 있어서 가다가, 스님은 가다가 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어야 되니까, 청주휴게소에 들려서 점심을 먹어요. 그러면 오후 1시에 법문 시작이니까 그때 시간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청주휴게소에서 밥을 먹을려고 된장찌개를 시켜놔 놓고 식권을 받아 갖고 식탁에 딱 앉아있으니까 어떤 분이 가까이 와요. 가까이 와서 하는 소리가 "스님. 가사 입고 있으니까 참 보기 좋습니다" 이러는 거라.
그래서 나도 "예, 나도 가사 입고 있는 게 참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뭘 물어보더라고. 스님 어디서 오셨습니까? 부산에서 왔습니다. 하고, 그러니까 문답식이지. 범인 취조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스님이 가사를 입고 있으니까 보기가 좋으니까 그런 얘기를 한 거죠.
가끔씩 지하철을 탄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사람들이 시주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하게 앞만 보고 앉아서 가고 있으면 와서 합장하고 만원짜리를 툭 앞에다가 놔놓고 가는 경우들이 있고 이래요. 그런 경험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랬어요.
그러면서 아직 밥이 나올 때가 멀었으니까 "스님, 좋은 부처님 말씀 있으면 한마디만 들려주세요" 이러더라고. 갑작스럽게 밥 먹을라고 기다리고 있는 스님한테 그러니까 문득 떠오르는 게 없어.
그때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혹시 여러분들 풀꽃 봤어요? 한 번도 안 봤어요? 도심에서만 살아서 풀에 꽃이 피는 거 못 봤어요?
음, 그러면 풀꽃이라 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산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야생화를 예를 들어봅시다. 아주 작은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 대부분 일반적으로 산에 지천으로 피어있으면 잘 모릅니다. 꽃을 피운 줄을. 왜 그러냐면 우리 야생화들이, 보통 꽃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를 않습니다. 노랑꽃이라도 옅은 노랑꽃이고, 분홍빛이라도 옅은 분홍빛이고 이런 빛깔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안 보면 꽃을 피운 줄 모릅니다. 그냥 쓰윽 지나가버리면 그걸 잘 모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끔씩 꽃이 핀 줄을 알거든. 여러 개가 피어있으면 물론 많이 알겠지. 그런데 군데군데 한 몇개 피어있으면 잘 모르는데, 가끔씩 사람들은 그걸 압니다.
어떤 사람은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달라질까?
자세히 본 사람들은 그 꽃이 핀 줄을 알 거고, 그냥 봐도 건성건성으로 보면 그 꽃이 핀 줄을 모르는 거라. 그런데 꽃이 피어있더라도 그 꽃이 아름다운 줄을 아는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꽃이 핀 줄은 아는데 ‘어, 피었네’ 하면서 가까이 가가지고 더 자세히 오래도록 보면 ‘아, 참 아름답다’ 하고 압니다.
꽃에도 보면 심이 있고, 꽃잎이 몇장이 되어있고, 어떤 색깔이 있고, 색깔이 이쪽하고 요쪽하고 다르네 하는 것들도 알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보게 되면 그사람은 아, 풀꽃이나 야생화가 참 아름답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은 그다음에는 그런 야생화들을 되게 좋아하게 되죠.
보통 하나의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과정들을 겪게 됩니다.
그게 기본적인 과정인데, 수행도 꼭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대상을 관찰할 때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걸 자세하게 봐야 됩니다.
자세하게 보도록 해야 만이,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싫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상을 피할려고 한다든지, 또는 대상으로 인해서 그걸 확 붙잡을려고 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자세하게 보면 대상은 참 예쁘게 보입니다.
왜? 그 대상은 각각마다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야생화하고 저 야생화하고 꽃이 다 다른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걸 봐도 예쁘고 저걸 봐도 예쁩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자세하게 알아차리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마음에서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 현상들이 대상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꽃이 핀 야생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아야 만이 즐거움으로써 오래도록 남게 됩니다. 그 대상을 떠나서 집에 오더라도 그 즐거움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상을 오래도록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단순히 예쁘기만 해가지고 거기서 그쳐버릴 것 같으면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 대상들이 그 예쁜 것들이 내가 보면 볼수록 다르게 변해가고, 보면 볼수록 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무수하게 연결되고, 하는 것들을 보게 되면 즐겁게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부터 예쁘다 해가지고 그거를 콱 꺽고 싶다든지, 아니면 그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다른 마음들 싫어하는 마음들이나 집착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지는 않습니다.
항상 오래도록 대상을 봐야 됩니다. 대상을 자세하게 봤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그것을 오래도록 볼 수 있어야만이 그 대상으로 인해서 즐거움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에서 그 즐거움으로 인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을 벗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들에 핀 꽃이라 해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마찬가집니다. 항상 그것들을 자세하게 볼려고 마음을 먹어야 되고, 또한 그것을 오래도록 볼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자세하게 안 보면 어떻게 될까?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면 대부분 두 가지 패턴으로 나눠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 시간 좌선을 한다.
좌선을 하자마자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30분 어떨 때는 40분 지나고 나서 그때부터 의식이 좀 깨끗해지면서 알아차림이 아주 잘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1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수행을 시작하면 수행이 잘 됩니다. 잠도 안 오고, 망상도 안 일어나고 수행이 조금 잘 됩니다. 그러다가 한 20분 30분이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졸리기 시작합니다. 망상도 막 일어나고. 그러고 나서 나머지 30분은 내가 수행을 어떻게 했는지를 몰라. 뭐 그냥 조불었는지 아니면 한참 망상만 피우다 일어났는지.
그 두 부류들이 보통 있습니다. 수행이 안 되는 사람들을 얘기합니다.
잘 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하겠죠.
두 부류의 차이점이 뭘까? 어떤 게 이익이 있을까?
처음에 수행이 잘되는 사람이 있고, 처음에 수행이 잘 안되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반 정도는 잘된다고 치고.
처음에 수행이 잘되다가 나중에 가서 수행이 잘 안되는 사람은 수행하고 나도 개운한 줄을 모릅니다. 좀 몸이 무겁고 또 그 사람은 수행을 하고 나도 수행이 재밌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조불었다가 나중에 가가지고 한 20분이라도 깨끗하게 수행을 한 사람들은 굉장히 몸이 가벼워집니다.
혹시 그걸 느껴봤어요? 대부분 아마 그럴 겁니다.
처음에 수행이 잘 되다가 뒤에 수행이 안되고 조불고, 망상을 피운 사람들은 게으름에 빠져버렸습니다.
수행을 하다가도 수행을 할려는 마음을 많이 잃어버린 경우가 돼버립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대상을 관찰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건성건성으로 하게 됩니다.
당연히 수행은 잘 안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도 뭔가하면 뭔가가 될 것처럼 생각을 하니까 처음에는 열심히 하는데, 대상이 맹숭맹숭하니 똑같은 현상이고 할 것 같으면 그뒤부터는 움켜잡을려고 했던 마음에서 아예 버려버리려는 마음으로 바뀌어버립니다.
30분 동안 한 것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상을 움켜잡을려고 그랬고, 수행이 또 안되고 조불었던 30분 동안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않고 대상을 버려버릴려고 그랬고, 1시간 내내 수행을 안 한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행하고 나도 재미없어. 그리고 만날 피곤하고.
내가 게으름에 빠졌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볼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
자세하게 봐야 그게 예쁜지 뭔지를 알 거 아니라. 자세하게 안 보고 그냥 꽃이 있으면 꽃을 따버리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보더라도 그 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르고 지나가버리게 되는 거라.
그 꽃도 자세하게 봐야만이 그 꽃이 이쁜 줄을 압니다. 대상은 반드시 자세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도 있는 그대로!
꽃이 있는 그대로 있어야만이 그것을 자세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꽃을 꺽는 순간 그 꽃은 있는 그대로 존재를 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대상을 붙잡게 되면 그 대상은 반드시 있는 그대로 놓여져 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변형되어버리게 됩니다.
내 의도에 따라서, 아니면 다른 조건에 따라서 변하게끔 됩니다.
대상을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어떤 것이건 대상은 자세하게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두 번째 패턴에 있는 사람들, 처음에는 좀 조불고 망상을 피우더라도 나중에 가서 수행이 잘되는 사람들은, 그건 순리대로 한 겁니다.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반대로 가려고 합니다. 앉아있으면 일어서고 싶고, 일어서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여러분들 몸과 마음입니다. 그렇게 습이 쌓여져있고 또 그런 경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앉아있으면 다리에 통증이 있게끔 됩니다. 항상 반대방향으로 나아갈려고 하는 거라.
그런데 앉아있는데도 그런 현상들이 안 일어난다는 거거든. 이미 몸이든 마음이든 그걸 받아들였다는 얘기라. 그래서 대부분 수행 잘하는 사람들은 앉자마자 조불고 있대. 그러고 나서 나중에 깨어나서 수행을 열심히 잘합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는 거라.
우리의 뇌에서 앉아있으면 일어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안 일어나고 딱 견디고 있으면 뇌도 나중에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안 해. 그래서 앉아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좋습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움직거려 가지고 그 고통을 피하라고 그럽니다. 마음에서.
그런데도 안 피하고 그냥 그대로 놔둬버릴 것 같으면 마음에서 명령을 다시 안 내립니다. 고통스러운 것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다음 명령은 더 커져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좌선을 하고 앉아있다. 꼼짝하지 말고 좌선을 해라 할 것 같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 안 한다고. 어떨 때는 엉덩이조차도 까딱을 안 한다고. 그럴 거 같으면 마음이 어떻게 되겠어요? 움직이라 하는데도 안 움직일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명령을 안 내립니다.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릴 것 같으면 이미 마음에 따라서 명령에 따라서 내가 움직이게 되는 거라. 물론 그러고 나면 그 고통스러운 게 조금 시원해지고 어떨 때는 좀 많이 시원해지면서 아예 고통스러운 느낌이 없습니다. 그 먹이를 바라고 사람들은 꼼지락거린다는 거라. 그러면은 마음은 또 또 다른 강한 명령을 내립니다.
고통스런 느낌 또 안 옵니까? 또 좀 있으면 또 옵니다. 그러면 인제는 더 참기 힘들어집니다. 왜? 마음에서 더 강한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래서 인제는 꼼지락 하는 게 아니고 발을 펴야 돼. 그러고 나면 또 좀 있으면 더 큰 고통이 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좌선 못하고 일어나야 되는 거라.
이게 기본적인 건데, 그 명령을 거부할 줄 알고, 몸과 마음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앉아있어도 그러한 명령을 안 내립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고통스러운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아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자기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앉자마자 조부는 거라.
조불기는 조불더라도 마음에서 내리는 명령을 따라서 하지 않고, 자기의 의지대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사람은 나중에 30분이 지나고 나면 그것도 무료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대상을.
조종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차리면 그것들을 오래도록 볼 수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오래도록 보게 될 때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큰 이익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얼마만큼 나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나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들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나머지 30분을 좌선을 하고 일어나더라도 그 사람은 깨끗하게 되고, 아, 수행 잘했다는 마음이 들고 몸이 피곤한 것들도 싹 어느 정도 가시게 되고.
명령을 하는 것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움직이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 여러분들의 습관이나 경향성은 수행하는 것 하고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그거 따라서 가다가 보면 수행 못하게 되는 거라.
두 가지 패턴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 처음에 졸다가 나중에 수행하는 사람,
또 수행 잘하고 있다가 나중에 조는 사람.
적어도 여러분들은 전체 다 수행할 힘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처음은 졸더라도 나중엔 수행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을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내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힘들을 자꾸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이 잘 될려고 할 것 같으면, 맨 처음에 해야 되는 것이 정해놓은 시간, 또 정해진 장소에서 이탈하지 않는 겁니다.
하루에 2시간씩, 아니면 하루에 1시간씩, 아니면 하루에 30분씩 좌선을 하겠다, 경행을 하겠다 마음을 먹으면 절대 그 시간을 어기면 안됩니다.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수행이 되든 안 되든 견디어나가야 됩니다.
그것도 좌선 30분 했다, 망상을 피우든 잠을 자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일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매주 목요일날 아니면 화요일날 아니면 토일날 이 시간 만큼은 내가 와서 수행을 하겠다. 되든 안되든 그 시간만큼은 반드시 지킬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의지력이 생겨나갑니다. 인내하는 힘이 없으면 절대 수행력이 길러지질 않습니다. 자꾸 마음을 수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마음이 일으키는 것에 따라서 기울어지도록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먼저 의지력을 자꾸 키워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십시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 정해진 방법에 따라서 그 시간만큼은 반드시 지켜나갈려고 하십시오.
그래야만이 적어도 똑같은 수행시간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이익이 있는 시간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이것만 하면 되겠죠? 더 필요해요?
또한 그분에게 얘기를 했던 게 풀꽃을 비유를 해서 얘기했지만, 자세하게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그분에게는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풀꽃 비유를 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풀꽃을 비유할 때 나에게 떠날 수 없는 가족과 도반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족 여러분들 곁을 떠날 수 없죠?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인연지어진 것들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대상이 예뻐야 되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즐거움이 일어나야 됩니다. 누가 만듭니까? 자기 자신이 만듭니다. 예뻐질려면 자세하게 봐야 됩니다. 그 대상이 좋은 점이 뭔가, 싫은 점이 뭔가를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싫어하는 것은 안 할려고 하는 거고 좋아하는 것들은 더욱더 할려고 하게 됩니다.
자세하게 봐야 그 대상이 나에게 예뻐집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미워죽겠죠? 예뻐지도록 자꾸 노력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 대상으로 인해서 오래도록 그 대상을 보면 내가 즐거워집니다.
여러분들 곁에 있는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즐거워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즐거워지지 않으면 그 대상을 어디다 쓸 거라.
지금은 여기에 도반들끼리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까 도반들 보면 즐겁죠? 물론 이중에도 틀림없이 계파가 있을 거라. 스님이 모르는.
그래서 다른 사람은 보기 싫고 자기가 좋아하는 도반이면 즐거워지고 할 건데,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 똑같은 대상으로 보고 그 도반으로 인해서 내가 즐거움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대상으로 인해서 즐겁고 즐겁지 않는 것은 대상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만드는 겁니다. 항상 그런 마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분에게는 그렇게 얘기했어요.
가족들에 대해서 항상 자세하게 보도록 해서 그 가족이 이쁘도록 하라. 오래도록 봐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그 가족으로 인해서 더욱 즐거움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도반들 간에는 그러한 마음들이 생겨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 도반이 나로 인해서 불편함이 없는지, 내가 저 도반을 생각할 때 나쁜 부분만 자꾸 보이는 것이 아닌지 하고 자꾸 반성을 해서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바꾸도록 해야 됩니다.
좋은 도반들이 있으므로 인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데는 큰 후원자를 얻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도반으로 인해서 서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그런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1~201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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