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진리와 더불어 사는 법 (20110906)

담마마-마까 2021. 6. 14. 09:09

https://youtu.be/sogKWx6jtqs

* 진리와 더불어 사는 법 (20110906)

 

인제 여름이 다 갔습니다.

"오늘은 진리와 더불어서 살아라"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우리 선원 앞에 저기 보면 글씨 써놓은 거 있죠? 엘리베이터 문에 버튼 누르는데 보면, 거기 뭐라고 써져있어요? 기억 안 나요? (수행자 대답)

그거는 요쪽 편에 있는 거고. 이리이리 공부들 안 하고, 그럼 내내 다녀도 뭐 써졌는지도 몰라요? 인제는 가을이니까 공부들 좀 해야 되죠?

 

부처님이 법문을 이렇게 하시면 보통의 스님들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어느날 다른 스님이 사리불 존자에게 물어봅니다. 부처님이 저렇게 얘기했는데 당신 그거 믿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는 "나는 그거 안 믿습니다."

부처님이 그 얘길 듣고 "사리불 존자가 훌륭하다. 그대로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확인해라." 그럽니다.

 

확인을 한 것만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지 누가 말한다 해가지고 그거 믿어버리면 안 되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누가 말하면 그냥 믿어버리죠? 특히 스님이 말한다 할 것 같으면 믿어버립니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이 한 얘기도 안 믿는 거라. 자기가 확인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 반드시 여러분들이 해야되는 것은 그것을 확인하는 것들입니다.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현명한 자들은 모든 것들을 관찰해서 확인한다 그럽니다. ‘어? 이것이 진짠가, 아닌가’ 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관찰을 해가지고 확인을 한다는 거라. 모든 것들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왜 그렇게 확인을 해야 될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즐거운 일만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굳이 확인 안 해도 되겠지. 만날 즐거운데 뭐. 확인할 게 뭐 있어. 오늘도 즐겁고 내일도 즐겁고 죽을 때까지 항상 즐겁다 할 것 같으면 별로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괴로운 일이 없는데 뭐하러 확인해? 어떤 일을 해도 즐겁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어떤 일을 해도 즐거운 법이 없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일도 괴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변하게 돼 있으니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언제 병이 들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확인하는 것들을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겁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괴롭다고 알아차리게 되면 적어도 그 즐거움이 항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괴로움도 항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는 항상 확인합니다. 부처님 제자는 반드시 이렇게 확인을 해야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리와 더불어서 살아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좋다" "싫다" 라고 알아차리게 되면 그 부분이 계속 일어나지지는 않습니다. 좋은 것도 좋다고 알아차리면 좋은 것도 거기서 그쳐버립니다. 싫은 것도 싫다고 알아차리면 싫은 것도 거기서 그쳐버립니다. 그 싫음도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것도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들을 알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확인을 반드시 해야 되는데,

 

진리와 더불어서 살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첫 번째가 뭐냐면, 진리의 말을 하고, 진리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가끔씩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스님이 어디 다른데 가서 법문을 하면 거의 스님이 하는 패턴은 거의 비슷합니다. 비슷합니다. 그러면은 뭐 좀 재밌는 얘기 해주고 좀 우스개 소리라도 해주고 이러면 참 좋을건데 맨날 비슷한 말투에 비슷한 패턴으로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뭐 별로 재미도 없다." 재미없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느냐면 그걸 들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리의 말이든 아니든 들을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걸 많이 스님이 느끼거든. 그렇다고 해가지고 스님이 어디 그 패턴을 바꾸던가요? 절대 안 바꿉니다. 그냥 그 패턴 그대로 나갑니다.

단지 스님이 해야 될 일은 진리를 말하는 것 뿐인 것이지 우스개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말을 할 때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리의 말을 해야 되는 것이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을 웃기기 위하고 이런 말들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진리를 말 할려고 해야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게 어려운 거 같죠? 그런데 어렵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될 때는 진리의 말을 하게끔 됩니다.

내가 ''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말을 하게 되면 진리의 말을 하게끔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나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왜곡되어져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말을 할 때는 진리의 말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말을 할 때는 항상 어? 내가 진리에 부합되는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확인해야 됩니다. 마음에서 '아, 내 욕심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확인이 되고 나면, 그것이 바르다고 판단이 되면 말을 하라는 거라.

 

들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진리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스님들이 얘기하는 말은 부처님의 말에서 벗어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변형시키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나의 생각을, 또 나의 견해를 가지고 말을 하게끔 되면 모든 이들이 다 그걸 진리라고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왜? 부처님의 말은 어느 때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리입니다. 부처님이 고(苦)라고 얘기했던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고(苦)입니다. 무상(無常)하다고 얘기한 것이 이 사람에게는 무상하고 저 사람에게는 유상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똑같다는 겁니다. 그게 진리의 말입니다.

그래서 "붓다 와짜" 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의 말, 그건 진실한 말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나의 사상을 가지고 영원한 것이 있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건 나의 사상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어? 부처님은 영원한 것이 없다고 그랬는데?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고 그랬는데 내가 움직이고 있으면 어, 영원한 자아가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은 절대로 자기의 사상, 자기의 생각으로 말을 하지 말아라, 법을 설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말을 할 때는 그와 같습니다. 진리의 말을 해야 됩니다.

물론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아직 배움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기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기의 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할려고는 할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이 어? 내가 이 말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무상·고·무아라고 얘기를 했을 거 같으면, 내가 말하는 불교적인 말도 거기에 부합해야 됩니다.

 

얼마 전에 여기에 '공(空)'이라는 것이 뭔가 하는 걸 적어놨더라고. 참 잘 만들어 놓은 거라.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내가 그걸 해놓은 선등님을 뭐라하기 위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입장에서는 그게 틀린 부분들이 보이는 거라. 왜? 부처님 말씀에 비춰봤을 때는. 그런데 일반적일 때는 그게 다 맞는 얘기라. 그런데도 그게 부처님의 말씀과 비춰봤을 때는 틀림없이 틀린 부분이 존재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아, 그러면은 이걸 작성하고 말을 할 때도 아, 내가 이것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부합하는가 아닌가를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말을 할 때는 꼭 마찬가집니다. 특히 진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법에 대해서 담론을 할 때는 항상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이, 이 말이 부처님의 말씀과 똑같은가 아닌가 하는 걸 항상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말을 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나의 생각을 가지고 나의 사상을 가지고 말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나를 내세울려고 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내세울 게 뭐가 있어? 그러면 그 말은 부처님의 말과 부합하지 않는 거라.

 

또 내가 남들에게 말하는 것이 나의 말을 강제적으로 듣게끔 하기 위해서 할 거 같으면 내가 화를 내면서 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럼 화를 내면서 말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 거라. 내가 욕심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그래서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진리와 함께 살아갈려면 맨 첫 번째가 말을 할 때나 그다음에 그것을 들을 때 반드시 그것을 실천하는 버릇을 들여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매일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실천하고 삽니까? 여기 와서 꼴라당 일주일에 한 두세시간? 아니면 한 두세번 나왔다 그러면 일주일 해도 한 열시간? 그걸 실천한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진리는 매일 실천해야 됩니다.

 

간혹 사람들이 시간이 없습니다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뭐 바쁘지.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어쨌든 사람들은 숨 쉴 시간은 있다는 거라. 밥 먹을 시간도 있고. 그런데 수행이 다른 게 아니고 숨쉬는 게 수행이고 밥먹는 게 수행이란 말이라. 그런데 그 생각을 안 하는 거라. 여기 와야만이 수행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매일 실천해야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반드시 내가 확인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생활과 수행이 자꾸 동떨어지게 됩니다.

 

또한 매일 그렇게 실천해야 되는 이유는 뭐냐하면 그렇게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치게 돼버립니다.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디 때문에.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겁니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행하게 되고,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하게 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것 같으면 그게 제정신이겠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많다고 해서 수행하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마음 닦는 것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들에, 모든 것들이 나의 수행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듣고 보는데도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소리가 들림' 하고 알아만 차리면 됩니다. 스님의 소리가 아름답다든지, 말소리가 너무 평범해서 지루하다든지 이렇게 마음을 일으켜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수행을 안 하게 되는 겁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맛보면 맛본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고, 가고 있으면 가고 있다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모든 일들에 수행으로써 연결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 입니다. 매일 실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참 편안하고 행복하다. 여러분들은 보석을 옆에 두고 있는 겁니다. 내 몸과 마음이 바로 그 보석입니다. 그 보석을 자꾸 갈고 닦아라는 거라. 얼마나 좋은 보석을 놔놔놓고 그걸 자꾸 방치를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내 자신이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려서 수행하지 않는 시간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밖에 보면 "하루라도 알아차림을 지니고 사는 것이 알아차림 없이 백년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백년 살면 뭐 할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진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드러내지 마라. 모든 사람들이 아마 이거는 꼭 필요할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한다고 드러냅니다. 지 잘난체하는 맛으로 삽니다. 그런데 수행이나 열심히 하면서 수행한다고 드러낼 거 같으면 좀 덜 미안할 건데, 자기 자신도 수행한다고 드러내놔놓고 미안해 지가. 수행 안 하면서 수행한다고 하니까. 드러내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버리면 이미 그것은 수행하고는 관계없어져 버립니다.

 

"당신은 수행자입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부처님 제자들은 "나는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게 수행자라. 그런데 나는 수행자입니다 하고 얘기를 안 하는 거라.

 

말이 어떻든 간에 수행자인 체 하고 드러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자신의 자아가 견고해져버리게 됩니다.

어떤 경우도 그것을 드러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에서 '나는 수행자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수행자이다 하는 것을 잊어버릴 것 같으면 마음대로 행하게 됩니다.

 

적어도 내가 부처님 제자다, 부처님 가족이다, 내가 수행자이다 하는 생각을 가질 것 같으면 잘못하면 '어? 내가 잘못했다' 하고 알아차리고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놓아버리면 돌아오는 게 더디어지든지 안 돌아오게 됩니다.

마음에서는 반드시 '아, 내가 바른 법을 따라가는 부처님 제자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리 하더라도 밖으로는 내가 수행자입네 하고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수행이 무르익을려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있는 그대로 확인하는 것들입니다. 들리는 것, 보는 것, 냄새맡는 것, 그다음 생각하는 것, 모든 것들을 지금 내가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거 하는 일이 수행자가 하는 일인데, 내가 수행자이다 하고 드러내는 것이 수행자가 할 일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명확하게 보도록 하라.

좋은 것은 잘 볼려고 합니다. 수행에서 여러 가지 기쁨의 현상이 있다든지 즐거움의 현상이 있다든지 할 거 같으면 잘 봅니다. 와가지고 쪼르르 쫓아와서 "스님, 스님, 내 이런 거 경험했습니다" 그럽니다.

그런데 싫은 것을 경험 안 했어요? 그런데 싫은 것들을 가지고 스님 나 이런이런 부분 싫은 것들 경험했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왜 그럴까? 애초부터 그런 것들은 자기가 차단을 해버리는 거라. 싫은 거 일어나면 피해버리는 거라. 아예. 무슨 뭐 똥을 피하듯이 이렇게 피할려고 자꾸 하는 거라.

피해진다고 피해집니까? 안 늙을려고 해서 안 늙어집니까? 안 죽을려고 해서 안 죽어지느냐는 거라. 싫은 것도 피할라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잠재되는 겁니다. 그래서 더 다른 조건들로 인해서 크게 일어나져 버리게 됩니다.

 

화도 화를 알아차려 버리면 간단한 부분인데 화를 억눌러 놓습니다. 그럼 이게 눌러져 있다가, 자꾸 차곡차곡 쌓이다가,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팍 터져버립니다.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세상은 좋은 것만 보고 살 수도 없고 싫은 것만 보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그거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싫은 거면 싫은 거라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될 때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싫은 사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지극 정성으로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냈는데 그 사람이 결국 나중에 마음이 탁 돌아와서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일어나는 행복은 굉장히 큽니다.

 

싫은 대상이라 해서 그것을 놓아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더 큰 수행의 진척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이미 자기가 포기해버리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좋은 대상이든 싫은 대상이든 반드시 그것을 명확하게 보아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싫은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보도록 해야 됩니다. 그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싫어하는 마음이 분명하게 바뀌는 것을 자기가 이해하게 됐을 때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를 않게 됩니다.

 

자따까 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그물을 떠가지고 낚는데 그물을 끌어올리는데 올라오는 것을 보니까 뱀장어 비슷한 게 이렇게 올라와요. 그런데 퍼뜩 생각이 물속에서 이런 게 올라올 때 이게 뱀장어인지 아니면 뱀인지 구분을 못하겠거든. 망설이는 거라. 뱀장어일 거 같으면 어부는 좋지. 그런데 만약에 물뱀이면 어떻게 돼? 그거 건져올려 놨다가는 잘못하면 내가 물릴 수가 있는 거라. 그러니까 망설이는 거라. 확인이 안 되는 거라.

그런데 어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건져올려야 되겠지. 뱀장어라고 생각하고 건져올리는데 보니까 뱀인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물을 놓아버려야 되겠지. 뱀인 줄 알 거 같으면 아이구야! 하면서 놓아버립니다. 저게 나를 물 수 있으니까. 안 좋은 거라고 하더라도 그걸 분명하게 확인할 거 같으면 놓아버립니다. 다시는 그 뱀을 건질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뱀장어를 잘못해가지고 놓칠 것 같으면 그걸 다시 잡을려고 하겠지.

 

싫은 것도 이렇게 분명하게 확인이 됐을 때는 그것을 다시 안 할려고 하게 됩니다. 가끔씩 살아가면서 나쁜 일도 하고 나쁜 말도 하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걸 확인을 안 할 거 같으면 다시 또 저질러버리게 됩니다. '어, 분명히 내가 잘못했다' 확인을 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아이고, 내가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참회를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걸 다시 안 하게 되는 거라.

 

수행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싫은 것들을 확인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뒤에 있는 좋은 면들을 보지를 못하게 됩니다. 싫은 것도 변해서 좋은 것이 된다는 것들을 알지를 못하게 됩니다. 마이너스 요인이라 해서 자꾸 배척만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마이너스가 있으면 반드시 플러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반드시 확인하라.

 

그다음에 진리와 더불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여러분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스님도 어떤 때는 속상한데. 어떤 법회에 가면 뭐 스님 법문 하든 말든 저들끼리 수군수군수군 그럽니다. 그럼 어떨 때는 아, 내가 참 여기 와서 그것도 돈도 안 받고 그냥 해주는 건데 내 돈 써가면서 차 타고 와가지고 이 법문을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떨 때는 가면 스님, “10분만 얘기해 주세요” 그럽니다. 10분 놓고 내보고 뭘 어찌하라고. 그래도 불교인들이 모여있는 곳은 그래도 조금 덜한데,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이 모여있을 때는 어떨 때는 아예 귀를 닫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안 들을려고 해요. 그게 아무리 좋은 얘기든 뭐를 하든 간에 안 들을려고 하는 거라.

 

여러분들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10분 해주라고 한다고 나는 10분 안 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옵니다. 중간에서 눈치를 주고 쪽지를 주고 뭘 하든 간에, 어쨌든 간에 내 할 일은 하고 옵니다. 그러면 다시는 안 부릅니다. 안 가면 되는 거지 뭐.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거기 가서 내가 할 일을 등한시 하지는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만이 내가 할 일이 결정이 되는 거라. 스님이 할 일은 그 사람들이 불교인이든 아니면 불교인이 아니든 법을 들을려고 하든 안 들을려고 하든 간에 한 사람이라도 그 법으로 인해서 바르게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 수행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게 스님이 할 일입니다. 그럼 한 사람이라도 들을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나는 해야 되는 거라. 그게 내 할 일이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걸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자기의 판단으로 기준을 정해버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 할 거 같으면 10분 해주라면 10분 해주고 나와야 됩니다. 10분에서 1분도 넘어가면 싫어하기 때문에.

내 판단으로 할 거 같으면 10분 해야 되는 걸 내가 여기 내 돈 써가면서 뭐하러 왔어 하면서 법문 안 해주고 가버립니다. 사람이 적게 모였으면 에이, 이 사람 갖고 안 해 하면서 가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이 그것을 바꾸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잘못하는지 그걸 자꾸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냥 잘못하는 게 있으면 어, 내가 잘못하는 게 있다 하고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렇게 잘못 안 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만이 그 사람이 바뀌어나가는 것이지 남들이 본다고, 아니면 내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그걸 감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절대 안 바뀝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할 일이 무언가? 나의 상태가 어떻는가 하는 것을 자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충은 진리와 더불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는 큰 행운입니다.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것도 큰 행운입니다.

그 행운을 내 스스로 행운으로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는 겁니다. 스스로의 실천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자기 것으로 자꾸 만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