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의 결과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20111001)
여러분들 메일(mail) 쓰고 있죠? 도반들한테 메일을 보낼 때 맨 첫머리에 뭐라고 하고 보내요? (수행자들 대답) 음, 음, '수수옥 도반님' 하고 그렇게 시작을 하고 그렇게 하죠!
불교의 어떤 단체든지 아니면 불교를 잘 아는 분들이 메일을 보낼 때는 맨 위에, 맨 첫머리에 뭐라고 그럽니까? '귀의 삼보하옵고' 하고 나서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들 씁니다.
대부분 불교 신도들은 맨 첫머리 글을 그렇게 씁니다. 어느 메일을 받든지.
그걸 빨리어로 "나모 붓다-야, 나모 담마-야, 나모 상가-야."
(Namo Buddhāya, Namo Dhammāya, Namo Saṅghāya) 그럽니다.
우리는 그냥 삼보라고 통틀어서 얘기하는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마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거를 따로따로 하나씩 씁니다. '나모 붓다야' 하고 줄일려면 캄마(,) 하고 '담마야' 하고 캄마(,) 하고 '상가야' 그렇게 적게 되는 거죠. 그게 우리말로 할 거 같으면 '귀의 삼보하옵고' 하는 그런 의밉니다. 여러분들도 보통 그렇게 말머리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대부분 뭐라 해서 끝맺어요?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하면서 느낌표(!) 하면서 보통 끝마칩니다. 그게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들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신을 믿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설혹 이 선원 앞에 오더라도 부처님 앞에 가서 공물을 올리지를 않습니다. 그러죠? 과일을 올린다든지 쉽게 말하면 먹을 것들, 마지를 올린다든지 이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다 하고 있죠?
그런데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어느 사원에 가든지 먹는 것들은 부처님한테 올리질 않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앉아가지고 기도를 하더라도 '부처님! 부처님! 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이 수능에 합격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질 않습니다. 지금 현재의 어떤 이익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바라지는 않죠. 그런데도 똑같이 부처님한테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들 오면 맨 처음에
"아라항 삼마-삼붓도- 바가와-, 붓당 바가완땅 아비와-데-미
(Arahaṁ sammāsambuddho bhagavā, buddhaṁ bhagavantaṁ abhivādemi.)"
하면서 절을 한번 하고,
그다음에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담망 나맛사-미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Dhammaṁ namassāmi.)"
하면서 또 절을 한번 하고,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 상고-, 상강 나마-미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saṅghaṁ namāmi.)"
하면서 절을 한번 하고, 그렇게 세 번 보통 절을 하죠.
절을 하면서 그런 의미들을 되새기면서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테라와다불교도들은 어떤 것보다도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잘 안 바뀌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바꿀려고 하질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인들이나 아니면 대승불교에서 부럽다 할 정도입니다.
오히려 점 같은 걸 보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믿음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데 맞으면 참 믿음이 가는데 어쩌다 한번 틀려놔놓으면 금방 돌팔이라 하면서 돌아서버립니다. 그래서 믿음을 오래도록 가지기가 힘이 드는데 부처님 앞에 와가지고 인사하고 절을 하는데도 아무런 그런 것도 없이 하는데도 그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바꾸질 않습니다. 그게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사위성에서 어린애 둘이가 요즘 말로 하면 딱지치기를 했거든.
한 애는 나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간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부처님' 하면서 딱지를 탁 치는 거라. 한 애는 이교도이기 때문에 자기의 스승 이름, 인도말로 하면 스승을 구루라고 합니다. '구루님' 하면서 딱지를 탁 치는 거라. 그런데 번번이 '부처님' 하고 딱지를 탁 치는 놈이 이기는 거라. 그러니까 이 '구루님' 하고 치는 놈이 이게 왜 이런가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절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지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자꾸 이기거든.
그래서 이 '구루님' 하던 놈이 지는 인제 '구루' 안 한다는 거라. 나도 인제 '부처님' 하면서 탁 치는 거라. 그런데 이긴 거라 진짜. 그래서 이 '구루님' 하던 애가 자기도 모르게 맨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처님' 하면서 그리하는 거라. 딱지 칠 때만 그리하는 게 아니고 무슨 일만 있으면 '부처님' '부처님' 하고 입에 붙는 거라. 쉽게 말하면 '나모 붓다야' 하고 '나모 붓다야' 하고 하는 거라.
어느 날 이 아이하고 엄마 아빠가 사위성 부근에 소 풀을 먹일려고 갔는데, 소가 한 마리 잘못해가지고 저녁때가 되니까 다른 소를 따라서 그 왕사성 안으로 들어가버렸어. 그러니까 이 엄마 아버지가 소를 찾으러고 왕사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왕사성은 해가 지면 문이 닫겨버립니다. 그러면 통행을 못하게 돼버립니다. 소하고 부모들은 왕사성 안에 들어가버리고 아이는 왕사성 밖에 노지에 혼자 남겨지게 되는 거라. 밤이 돼가지고 애가 무서움에 떨게 되는데도 그때도 항상 마음가짐이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하고 마음을 먹으니까 거기가 아무리 공동묘지라도 든든한 거라. 부처님이 항상 나를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잠이 들었어. 그때 마침 야차 무리들이 와서 이 아이를 봅니다. 이 아이를 잡아먹을려고 아이 발을 탁 잡았거든. 잡으니까 아이는 항상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는 게 '부처님' 하는 소리라. 그러니까 '나모 붓다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야차들이 깜짝 놀라는 거라. 조그만한 것에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저렇게 가지는 아이를 건드리니까, 여러분도 혹시 그런 거 해본 적 있어요?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다 보면 집중력이 굉장히 강하면 대상이 흐릿해집니다. 대상에 고정돼있기 때문에. 대상이 뚜렷하게 안 보입니다. 그래서 삼매쪽으로 빨려들어갈 순 있어도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들은 없어집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뚜렷한 사람들은 대상은 분명하게 아는데도 마음이 안정이 안됩니다. 들뜨게 됩니다, 약간. 그거 혹시 아세요?
그 균형을 잘 잡아줘야 됩니다, 수행할 때는.
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 부처님' 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부처님' 하고 마음을 탁 내는 동안에는 자기도 모르게 몸에서 전율이 일어나는 거라. 부처님이 확 나타나는 것같이 몸에 전율이 확 일어나는 거라.
그러니까 야차가 아이 발을 확 잡았는데 그 전율이 그대로 전해지는 거라. 그러니까 야차가 오히려 두려운 생각이 일어나는 거라. "아이고 인제 큰일났다" 그래가지고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해가지고 아이가 배고플 거니까 왕궁에 있는 왕이 쓰는 황금 접시에다가 음식을 담아와가지고 아이에게 음식을 줍니다. 그래가지고 밤새껏 아이를 돌봐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 황금 접시는 아이에게 있는데 그 접시에다가 글을 써놓습니다. 나는 여차저차해서 이 황금 접시에 아이에게 먹을 거를 줬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라 하면서 글을 적어놓고 가버립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그날 발칵 뒤집어집니다. 왕이 먹는 황금 접시가 없어서. 찾다가 보니까 아이가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어떻게 해서 이걸 가지고 있었느냐 하고 아이에게 물어보니까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밤에 자다가 일어나보니까 엄마 아부지가 와서 밥 주더라. 그래서 나는 밥 맛있게 먹고 잠잤다. 그런데 엄마 아부지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이미 없는 상태였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아이가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 있어도 스스로를 보호해줄 수가 있었는데 그게 가능한 겁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맞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에게는 항상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섯 가지를 예를 듭니다.
여섯 가지를 얘기하기 전에, 왜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될까?
보통 우리는 우리가 지은 행위는 우리가 받게끔 됩니다.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옛날에 지은 게 언제 나한테 나타날지를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가다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한다든지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옛날에 지어놓은 업들이 방해업으로써 나에게 다가와지는 겁니다. 나를 방해했기 때문에 그 업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버렸다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그때 방해업이 나한테 탁 다가올 때 내 마음에서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한 상태에서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거 같으면 그 업이 영향을 발휘할 찬스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걸 기유업이라고 그럽니다. 결과를 낼 수 없게 만들어져버리는 거라. 방해업이 다가왔는데 결과를 못 만들어내는 거라. 무엇 때문에? 내가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힘으로 인해가지고! '부처님' 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힘 때문에 그 방해업이 기유업으로 바뀌어버리는 거라.
가끔 여러분들 그런 거 경험을 합니까? 어떨 때는 직접 그런 것들을 많이 느껴요.
뭔가가 일어날 것이 예감이 돼요. 그럴 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걸 비껴나가. 희한하게. 그걸 보통 스님들이 "신장들이 보호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거는 내가 평온한 마음으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업이 나에게 영향력을 발휘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 기유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업은 방해를 받아가지고 다시는 결과를 못 만들어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그 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거라. 그 방해업을 지었던 것이 실제로는 발휘를 못하고 소멸돼버리는 결과들을 가져오는 거라.
그걸 보통 "업이 소멸됐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는 업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영향을 발휘를 못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게 한번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건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니고 소멸된 것은 아닌데 나타나지는 못하게 돼버렸다는 거라. 그런 형태가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살아가는 게 좀 순조롭게 됩니다. 급격하게 무슨 일을 당하고 하는 것들은 잘 안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런 경험들 해본 분들 있어요? 틀림없이 해봤을 겁니다.
항상 마음속에서 부처님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가지라는 거라. 그 생각만 가지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것만 되는 게 아니고 부처님에 대한 것만 그런 게 아니고, 담마에 대한 걸, 그다음에 상가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는 것들, 그다음에 이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있을 때, 내가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다고 알아차리고 먹고 있을 때는 먹고 있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을 '까야가따 사띠'라고 그럽니다.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 '담마-눗사띠(Dhammānussati)' '상가-눗사띠 (Saṅghānussati)'
'까-야가따-사띠(kāyagatāsati)' 몸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유지하면 또한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네 가지 얘기했죠!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하면 '아힝사-(Ahiṃsā)' 해칠려는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항상 자애의 마음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
그다음 여섯 번째는 '바-와나-야 사띠(Bhāvanāya sati)' 항상 수행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모든 대상을 수행의 대상으로써 생각하고 수행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서 그 마음으로 인해서 방해업이 영향을 받지 못하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실제로는 그 아이는 그냥 '부처님' 하고 마음속에서 가진 것뿐입니다. 누가 나를 잡아가 두려움이 일어났을 때. 그런데도 그 업이 나타났는데도 그 방해업이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그래서 기유업이 돼버리는 거라. 결과를 낼 수 없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도 애는 어떻게 돼요? 그게 방해업이 나타났는지 기유업이 나타났는지 그건 전혀 모릅니다. 그 아이 입장에서는 나는 '부처님' 하는 하나의 힘으로 인해가지고 평온한 거라. 평온하고 그냥 잘 자고 일어나게 되는 거라.
경전에는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이 여섯 가지 부처님, 담마, 상가, 그다음에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 수행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여섯 가지를 할 거 같으면 잘 자고 잘 일어난다는 거라.
'숩빠 붓당 빠붓잔띠(suppabuddhaṁ pabujjhanti)' 그럽니다. 잘 자고 잘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밤에 잘 때 자는 줄을 분명하게 알고 잤다가 탁 깨어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푹 자고 일어날 때도 잘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잘 때 오만 생각하면서 자면 잠도 편치 못하고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수행하다가 망상 피우거나 아니면 게을러져 가지고 폭 잠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깨어나면 보통 보면 몸이 구부정해 있고 고개는 앞으로 폭 고꾸라져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대상을 알아차렸는데 내가 한 십 분이나 이십분 시간이 훅 지나가버렸거든. 잔 거하고 마찬가지지. 그런 상태에서 다시 깨어난 사람들을 보면 몸이 그대로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한 상태와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는 그런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잘 자고 잘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숩빠 붓당 빠붓잔띠' 라고 하는 것은,
'빠붓잔띠(pabujjhanti)' 라고 하는 것은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숩빠 붓당(suppabuddhaṁ)' '잘 깨달아서 분명하게 깨어난다'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무명을 잘 알아차려서 무명을 타파하고 나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살아가는 rjt 자체에서 급격하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없이 평온하게 잘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생활 패턴들이 비슷비슷 비슷하게 이어질 것 같으면 크게 생활에서 동요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급격하게 뭔가 일어날 것 같으면 그 변화로 인해서 굉장히 심한 고통들을 당합니다.
가장 좋은 게 뭐냐 하면 일상생활에서는 큰 위험요소도 없고 큰 횡재도 없이 고만고만 고만하게 살아가지게 될 때 마음이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마음먹은 사람들이 크게 욕심을 안 낼 것 같으면 큰 불편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잘 자고 잘 일어나는 것과 같이.
여섯 가지를 항상 마음에 둘 것 같으면 적어도 크게 돈 번다는 얘기는 못하지만 큰 어려움은 겪지 않고 살아가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결국에는 해탈로 향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게 부적 하나 쓰는 것보다도 훨씬 안 나을까? 점 한번 치는 것보다도 훨씬 낫습니다.
얼마만큼 내가 이 여섯 가지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느냐?
실제 불교도들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급격하게 뭔가를 얻고 이룰려고 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점진적으로 자꾸 향상되어 나가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점진적으로 향상이 되어나가는데 방해하는 것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오히려 큰 이익입니다. 그거는 내가 지금 이런 여섯 가지 대상들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계속해나가는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돼나갑니다.
이 여섯 가지가 바로 나에게는 최상의 부적과 같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 인생은 순조로워진다는 거라. 그래서 결국에는 해탈로 이르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그 여섯 가지를 생활 곁에서 가까이 두고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다음에는 이메일을 보낼 때 맨 첫마디에 항상 그렇게 써보십시오.
"나모 붓다-야, 담마-야, 상가-야
(Namo Buddhāya, Dhammāya, Saṅghāya)"
나는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나는 그 든든한 빽으로 인해서 크게 곤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도록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모든 이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하는 것.
그런 것들을 자꾸 생활화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1~201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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