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빠와라나(Pavāraṇā, 自恣) 및 「보시 분별경」 (20111013.안거해제)

담마마-마까 2021. 6. 18. 08:52

https://youtu.be/i9pCpTE2ZEQ

* 빠와라나(Pavāraṇā, 自恣) 및 「보시 분별경」 (20111013.안거해제)

 

자! 인제 여러분들의 안거가 끝났습니다. 자자(自恣, Pavāraṇā)를 했고 또한 출가자가 아니고 재가자이기 때문에 그게 여러분들 법랍은 아닙니다. 법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출가하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단지 재가자로서 선배 역할들을 해야 됩니다.

안거를 여러번 해보신 분들은 선배 역할들을 하고 있는 거라요?

 

보통 2년차 정도 되는 재가자일 경우에는 무슨 일들을 해야 되느냐면 일반인들이 오늘같이 안거에 왔다 그럴 거 같으면 안거 순으로 앉을 수 있도록 배치를 해야 됩니다. 오늘도 보면 똑같은 첫 번째 안거를 마친 사람이라도 나이순으로 해야 되는데 뒤죽박죽이 돼있어. 그 역할을 지금 못 해주고 있다는 거거든. 나이만 먹으면 뭐 할 거라?

 

안거는 분명하게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불교를 접한 사람이 우선인 거고,

똑같은 때에 접했다 하더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도 바뀌질 않습니다.

설혹 뒤에 사람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서 일래과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뀌질 않습니다. 깨달음과도 무관한 거고, 또 세속적인 지식과도 무관한 거고 또 나이와도 무관한 겁니다.

먼저 불교를 접한 자가 '반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반떼'가 아니고 '아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배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보통 두 번째 안거를 끝낸 분들이 그 역할들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이 테라와다라고 하는 전통이 앞선 자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갈 수 있도록 잘 규율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자들이 반드시 되야 됩니다.

그리고 3년차, 4년차, 5년차가 될 것 같으면 인제는 그분들은 후배들을 이끌어 줘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2년차 정도 되면 보통 시봉하기 바빠. 쉽게 말하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조금 더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고 또 모일 수 있게끔 편의를 제공하고, 다툼이 없도록 자꾸 조정하는 역할들을 해야되는 반면에, 3년차, 5년차가 되면 인제는 밑에 사람들을 이끌어 줘야 됩니다.

인제 갓 들어온 사람이 불교가 뭔지, 위빳사나 수행이 뭔지 하는 것들을 바르게 가르쳐줘서 그분들이 수행할 수 있고 또 선배들을 따라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주는 역할들을 해야 됩니다.

 

위사카님 만날 밥만 하다 보니까 그 역할을 잘 못 하지? 음, 그런데 부엌에서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하지? 그와 같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다 이끌어 줄 능력은 안 갖춰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여러분들이 무슨 뭐 아주 뛰어난 경지를 가지지 않는 이상 한 분야에서 적어도 남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은 가질 수가 있습니다.

과연 자기가 어떤 능력들을 가졌는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 능력들을 자꾸 자기 자신과 또 밑에 온 후배들을 위해서 바르게 이용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선원에 올 거 같으면 우리끼리 참 잘 화합되게 뭉치는구나 하는 모습들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됩니다.

 

위사카님이 올해 몇 년차에요? 4년 됐어요? 5년 됐어요? 5년 끝났죠! 그런데 인제 부엌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라. 여기 밖에 나오면 대장 노릇 못해. 그거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대장 노릇을 하지. 그리해도 부엌에서는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줄 능력은 있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 능력이라는 것은 싸우면서 이끌어 줄 거 같으면 그건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화합되게 하면서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르게 사람들이 점심 공양을 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생각해서 이끌어 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인제는 본인이 다할려고 하지 말고 자꾸 시켜 먹어요. 밑에 인제 쫄다구들 많죠? 잘 시켜 먹고 앉아서 관리 감독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꾸 하면 됩니다. 밑에 사람들도 그것을 배워서 언젠가는 자기 때가 되면 그런 모습들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5년차 이상이 넘어가면은 인제는 이 선원을 떠나도 됩니다.

5년차 이상들은 인제 이 선원에 있을 필요 없어 가! 다른 데 가서 배워! 농담 같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5년이 경과 하지 않으면 한 선원에서 다른 선원으로 이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5년 지나도 겨우 알동말동 하는 판에 그거 벗어나버리면 오히려 더 뒤죽박죽이 돼 버리는 거라.

그래서 5년이 경과하고 나야만이 그 선원을 떠날 자격을 줍니다. 인제는 다른 데 가서 배우고 또 그것들을 가져와 가지고 선원에 여러 가지 펼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선원에서도 재가자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지도자 역할들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그 5년간은 열심히 수행도 배워야 되고, 경전도 배워야 되고, 여러 가지 의식들도 알아야 되고, 그래서 만약에 오늘 재가자들을 위한 빠와라나 한다 그러면 이 내용이 머리 속에 훤하게 들어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누구에게 뭘 해야 되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거라.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는 것들을 잘 갖출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 체계를 잡아주는 것이 바로 이런 안거라고 하는 제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겁니다.

 

안거 동안에 여러분들은 재가인으로서 잘 한번 돌아보십시오.

오늘 해제-빠와라나(Pavāraṇā)를 했으니까 불교에서 안거가 왜 필요했던가?

좀 더 수행을 열심히 하고, 좀 더 경전 공부를 더 많이 하기 위해서 안거를 했습니다. 과연 이번 안거 때 그렇게 했습니까? 안 한 사람 손 들어봐봐. 뭐 이렇게 많아?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안됩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평상시보다 두 배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두번 어떨 때는 세번씩 오든 이 선원을 그래도 매일 같이 나와서 수행을 하게 되고, 또 경전도 자주자주 들여다보고, 법문도 자주자주 듣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 생활도 돌아보게 되고, 이런 것들이 안거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재가인에게 꼭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필요한 것이 안거는 여러분들은 법납이 가산되지 않는 안거를 지냈지만, 스님들은 법납에 가산되는 안거를 지냅니다. 그럼 당연히 여러분들과 같은 곳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그 스님들을 시봉하는 역할들이 바로 또 재가인들이 안거를 하는 이유입니다.

스님 잘 시봉했어요? 불편한 것이 없는 건지, 또는 공양을 잘 차려드시는지, 또는 다니는데, 법을 설하는데 장애 요인은 없는지 잘 살피고 그것들 부족한 것들을 메꾸어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이번 안거 때 그렇게 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 믿어도 돼죠? 그랬으니까 조금 전에 빠와라나 해제 게송 했는데 "내가 마음과 말과 몸으로 행한 사소한 잘못이 있으면 참회합니다. 했을 때 "참회할 것이 있으면 지적해주십시요" 했는데 아무도 지적을 안 했잖아." 그렇죠? 다들 그냥 "잘했습니다" 해가지고 "싸~두, 싸~두, 싸~두" 했죠? 그랬잖아. 다 그렇게 했죠?

음, 가슴이 조금 뜨끔 하는 사람들은 있을 거라 이. 그런 사람들은 다음에는 그러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서간다는 것이 참 힘들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됩니다.

 

저 연경이 처럼 인제 겨우 한 살 된 애는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냥 쫓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할 일들이 많아지는 거라. 그마만큼 내가 잘 살아가야 되고, 잘 수행해야 되고, 잘 배워나가야 되고, 잘 시봉을 해나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역할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닥키나 위방가 숫따(Dakkhiṇā·Vibhaṅga Sutta)」 라고 하는 것들을 좀 얘기를 하겠습니다.

Dakkhiṇā-보시물을, Vibhaṅga-구별하는, Sutta, 「보시분별경」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시는 어떤 종류들이 있나 하는 것을 적어놓은 그러한 경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이 까삘라왓투 왕사성에 니그로다 마야라고 하는 사원에 있을 때, 부처님의 양모인 마하빠자빠띠 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에게 천을 두 조각을 가져와서 부처님에게 올립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이 새 천을 부처님에게 올리기 위해서 내가 손수 실로 짜서 베틀에다가 그렇게 실로 짜서 여러날 고생해가지고 만든 천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연민히 여기시어 이 천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옷감 천 짜는 게 힘들었겠어? 요즘 같이 기계로 되는 것도 아니고 손수 손으로 실을 뽑아내가지고, 그 실을 물레질 해가지고 만들고, 다시 또 다듬이질 해가지고 천을 곱게 만들고, 이런 역할들을 다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서 겨우 천조각 두 개를 만들어가지고 부처님 오신 날 갔으니까 부처님 옷 해 입는데 쓰기 위해서 천을 두 개를 가져와서 부처님한테 드리는 거라.

 

천이 귀했던 때니까 당연히 부처님이 받아야 되지. 그런데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고따미여!" 고따미는 석가종족의 여인들을 통칭해서 부를 때 고따미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고따미여! 이 천을 상가에 보시하라. 상가에 보시하면 나에게 보시하는 것이 된다" 하면서 안 받으시는 거라.

그러니까 이 마하 빠자빠띠 부인이 이해를 못하는 거라. 내가 그렇게 부처님한테 드릴려고 어렵게 짰는데 왜 부처님은 안 받을까, 또 얘기하고, 부처님이 또 "상가에 보시하라. 상가에 보시하면 나에게 받는 것이 된다." 도저히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고, 상가 어디에다가 주어야 되는 거라? 세 번을 얘기했는데 세 번을 부처님이 거절을 하시거든.

 

그래서 아난다가 옆에서 나서서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참 너무 합니다." 부처님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부처님 어머니를 대신해가지고 어머니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여기 마하 빠자빠띠 부인입니다. 직접 자기가 낳은 아들한테는 유모의 젖을 먹이고, 부처님한테는 자기의 젖을 먹여가지고 키웠는데 그 키운 정을 모르고 어렵게 천을 짜가지고 부처님한테 드릴려고 하는데 부처님 그것도 안 받느냐고 막 뭐라 하는 거라.

 

그때 인제 부처님이 얘기를 한 부분이 이 경의 주 내용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받겠어요? 여러분들이 상가에 보시하는 것과 일반 특정인에게 보시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이 그 뒤에 얘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보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 나눠서 두 가진데 특정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이 있고, 상가에 보시하는 것이 있다."

 

"특정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 - "빠띠 뿍갈리까 닥키나(pāṭipuggalika·dakkhiṇa)" 그럽니다. 특정한 뿍갈라, 그 puggala라고 하는 일반 개인에게, 대해서-pāṭi, 보시하는-dakkhiṇa 하는 것이 열네 가지 종류가 있다.

 

자! 여러분들이 개인, 일반인에게 보시할 수 있는 것이 어떤어떤 것이 있겠어요?

 

맨 처음이 부처님이 계시니까 부처님한테 올립니다. 그것이 첫 번째가 되는 거고.

그다음 두 번째가 벽지불-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그런 부처님들이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부처님에 인해서 부처님 살아계실 때 아라한이 되었던 분들, 사리불, 목련존자 이런 분들이 해당이 되겠죠. 그런 분들에게 보시 올리는 것.

그다음에 부처님 사후라도 아라한에 이르렀던 분들, 마힌다 존자라든지 여러 아라한들에게 보시 올리는 것들,

그다음에 불환과에 이르르신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그다음에 불환과에 이르기 위해서 나아가는 도에 들어선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그다음에 일래과에 이르신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일래과에 이르기 위해서 도를 닦고 계시는 일래도에 이르신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그다음에 예류과에 이르신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예류도에 이르는 분들에게 올리는 보시, 이렇게 하면 총 열 가지가 되죠.

 

나머지 네 가지는 뭐냐 하면 욕망이, 욕심이 없는 수행자들에게 올리는 보시, 이게 거의 대부분 출가자에게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일반인에게 올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반인이라도 계율을 잘 지키고 잘 살아가는 사람에게 올리는 보시,

계율을 잘 안 지키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올리는 보시,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축생들에게 올리는 보시가 있습니다. 집에 있는 고양이나 개한테도 밥 주죠? 그것도 일종의 보시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서 총 열네 가지 종류다. 개인에게 올리는 것은 이런 종류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공덕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축생에 올리는 것이 최고 작을 것이지만 그 공덕도 경전에는 한 천 가지 종류가 된다고 그럽니다. 거기서 오는 이익들은.

만약에 자기가 키우는 개한테 보시를 할 것 같으면 먹을 걸 자꾸 줄 것 같으면 집을 지켜주지, 자기 자신의 위험에서 보호를 해주지, 참 많은 이익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생에게 올리는 것만 해도 부처님이 봤을 때는 한 천가지 정도로 무수하게 많다는 겁니다.

 

당연히 축생뿐 아니라 계율을 안 지켜도 일반인들에게 보시를 하면 아, 그 사람은 아 이때까지 내가 참 잘 못살아왔구나 하고 잘 살아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당연히 사람인데 축생보다도 더 마음을 바르게 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 오는 이익은 더 많다는 거라. 자기 자신 보시를 받은 사람도 변하게 되고, 보시를 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게끔 되는 거라.

그게 더 많고, 그다음에 계율을 더 잘 지키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또 더 많은 거고, 그 위에 일래과부터 부처님까지 이르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된다는 거라. 그렇게 참 많은 공덕이 됩니다.

그리해도 그거는 개인에 한정된 공덕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보시 방법 중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상가가따 닥키나" 라고 그럽니다. "상가에게 올리는 보시" (saṅghika·dāna)

지금은 해당이 안 됩니다. 부처님 생존 시에 비구, 비구니의 상가가 적용됩니다. 지금은 부처님이 생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부처님 입멸하고 나서 비구, 비구니 교단에 올리는 보시. 이것도 지금 해당이 안 됩니다. 비구니가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비구 비구니가 화합되게 머물 수 있는 그런 현상은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비구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

네 번째가 비구니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인원수를 한정해가지고 비구 비구니 상가에 보시하는 것.

여섯 번째가 인원수를 한정해가지고 비구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

그다음 일곱 번째가 인원수를 한정해서 비구니 상가에게 보시 올리는 것.

 

지금은 해당이 되는 것들이지만 인원수를 한정하는 것은 개인에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에게 합니다. 다섯 분의 스님이라든지 아니면 열 분의 스님에게라든지 이렇게 인원수를 한정하는 것, 그것보다도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앞에 와있습니다. 그래서 인원수를 한정하지 않는 경우가 더 큰 공덕을 낳는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보시의 종류는 이렇게 개인에게 드리는 보시가 있고, 상가라고 하는 여러 무리에게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원수가 한정돼있든지 한정돼있지 않든지 간에 그런 종류가 있는데,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보시를 올리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해야 될 것!!! 이것이 갖추어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보시를 받는 자가 청정해야 될 것.

그다음에 세 번째 보시를 받는 자와 보시를 주는 자가 동시에 청정해져 있는 경우.

네 번째가 보시를 주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가 청정하지 않는 경우. 둘 다 청정하지 않는 경우 이렇게 네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당연히 보시를 주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가 함께 청정해져 있을 것 같으면 가장 큰 공덕을 낳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에게 탁발공양물을 올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양 올릴 때 스님은 반드시 마음속으로 게송을 외우고 있습니다.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그렇지 않으면

"이당 메 다낭 수키 호뚜" 그렇지 않으면

"이당 메 다낭 아유 완낭 수캉 팔랑" 이런 게송들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아픈 분이 공양을 올린다 할 것 같으면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십시오. 이 보시공덕으로 인해서 건강하고 오래도록 사십시오" 하는 마음을 냅니다.

수행을 더 열심히 해볼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이와 같은 보시공덕으로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르십시오" 하고 얘길합니다.

 

왜 그럴까? 보시를 받는 때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내가 그 마음을 내면 내고 있는 나는 마음이 청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시 올릴 때 어떻게 합니까?

스님, 이거 잡숫고 건강하십시오. 스님, 이거 잡숫고 우리들에게 좋은 법을 설해주십시오.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공양을 올릴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죠?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 마음을 낼 때는 마음이 청정해져 있습니다. 깨끗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를 받는 순간, 이 바리때가 왜 이렇게 돼있겠어요?

 

왜 스님이 자꾸 바리때에 넣어라 하느냐면,

바리때에 넣는 순간에 보시자와 보시를 받는 자의 마음이 함께 청정해지게 됩니다. 그걸 순간적으로 닙바나, 깨달음을 체험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 공덕은 한량없이 돼버린다 하는 겁니다.

"순간의 깨달음을 위해서다." "따당가 빠하-나(tadaṅga-pahāna)" 라고 그럽니다.

"순간적인 청정, 순간적인 깨달음을 경험하는 것"

탐심도 있고, 진심도 일어나고, 치심들도 일어나집니다. 그리하더라도 적어도 공양을 올리고 받고 하는 그 순간이라도 청정해지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공덕이 자기 것이 되는 거라. 그 공덕이 굉장히 크게 역할들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 공덕을 쌓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한 사람에게 보시를 하든지, 상가에 보시를 하든지 그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보다도 상가에 보시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을 낳는다고 부처님이 얘기했을까? 마하 빠자빠띠가 와서 부처님한테 그렇게 드릴려고 해도 부처님이 안 받고 "나한테 하지말고 상가에 해라. 상가에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나에게 하는 것이 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거든.

 

아난다가 와서 "그냥 받으십시오." 그렇게 간곡히 청해도 부처님이 안 받으시고 끝끝내 상가에 보시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공양을 올릴 때는 반드시 특정인을 정해버릴 것 같으면 그 특정인 한 사람에 대한 공덕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상가에게 보시를 하게 될 것 같으면 모든 스님들에게 그 공덕을 회향을 하게 됩니다. 그 공덕들이 그마만큼 커지게 됩니다. 지금 출가한 분들 뿐아니라 앞으로 출가할 스님들도 모두 해당이 되는 거라. 그래서 상가에 공양을 올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공양을 올릴 때는 반드시 일반인들은 마음속에서 공양을 올리는 마지막 순간에, 예를 들어서 "이 공양물 잡수시고 스님 건강 하십시오" 하고 공양 올리더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상갓사 데마(Saṅghassa dema)"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 공양물을 상가에게 올립니다." 상가에게 올리기 때문에 이 공양물은 특정한 스님만 잡숫는 게 아니고 모든 스님들이 잡술 수 있는 그런 공양물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상가에게 보시물을 올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하나의 탁발을 할 때도 꼭 그와 같습니다.

"상갓사 데마" 하고 공양물을 올립니다. "이 공양물을 상가에게 올립니다."

실제로 그 스님에게 올리더라도 그 스님이 대신해서 받는 것들입니다. 모든 시주물들은 그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공양을 올리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그걸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적어도 공양을 올릴 때에는 깨끗해져라."

예를 들어봅시다. 손이 더러워져 있는 상태면, 여러분들 마음은 계속 더러워져 있습니다. 잠시 뭐 깨끗할 때 있을 것 같지만은 좀 있으면 또 더러워져 있습니다.

욕심부리게 돼 있고, 화나게 돼 있고, 게으름부리게 돼 있고,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항상 더러워져 있습니다. 더러워져 있더라도 이 더러워져 있는 걸 물에 가서 이렇게 씻어버리면 깨끗해져 버립니다. 그럼 다시 더러움이 묻기 전까지는 깨끗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보시는 그와 같이 합니다. "손을 깨끗하게 씻는 것과 같이 해라."

"빠야따빠-니-(payatapāṇī)"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시로 손을 깨끗하게 씻는다, 보시를 올림으로 인해서 손을 깨끗하게 씻는 거와 같은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왜 수행하고 왜 부처님 말씀을 배웁니까? 청정해지기 위한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청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청정한 마음으로 말을 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행동하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자꾸 손을 씻듯이 마음을 그렇게 씻어라는 거라.

 

그런데 보시를 하면서 그런 경우를 자꾸 경험합니다.

뭐 음식물이든 뭐든 스님한테 가져오고 나서 스님이 안 먹고 있을 것 같으면 "스님, 왜 이거 안 먹어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질 파라락 부리죠. 그렇다고 잘 먹질 않는 걸 갖다가 어쩌라고, 내가 뭘 좋아해가지고 아무거나 아무때나 가서 먹으면 좋겠지만 열두 시 넘어서는 안 먹는 걸 그걸 갖다놔 놓고 며칠 만에 그걸 다 먹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걸 다 먹어져? 당연히 안 먹게 돼있는 건데, 그거 왜 안 먹었느냐고 그럽니다. 삼시세끼 먹는 것 처럼 착각을 하는 거라. 그런데다가 뭘 이렇게 갖다놔 놓고 뭘 안 먹으면 성질나가지고 다시 가져가버립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라.

 

공양물을 올린 것은 스님에게 올리는 것이 아니고 상가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상가에 올리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든 회수가 안 됩니다. 상가 어디 가서 주라 할 거라? 먹는 음식이든 아니면 다른 물품이든 회수가 안 되는 겁니다.

보시 올린 것들은 상가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상가 소유는 그럼 모든 상가 스님이 다 모여가지고 의결해가지고 "그거 돌려주십시다." 하고 의결이 되고 나면 돌려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상가 스님들 다 모아가지고 그걸 의결할 거라?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불에 스님한테 올리면서 "상갓사 데마" "상가에 공양 올립니다." 하고 나서 스님 안 먹었다, 또 안 쓴다 해가지고 파라락 성질내가면서 가져갈 생각조차도 아예 하지 마십시오. 드리고 나면, 상가에 공양물을 그렇게 올리고 나면 자기 역할은 이미 끝난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기 역할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리고 그 보시물에 대한 것들도 이미 소유권은 상가에게 있는 겁니다. 상가에서 공동으로 이용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는 것들이지, 그 특정한 개인 스님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둬야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주고 나서 성질부리지 말고, 또 안 먹었다 해서 아쉬운 마음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주면서 여러분들은 그런 공덕들을 쌓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 보시의 행위는 이미 끝나버린 상태가 됩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선원에서 까티나 가사 의식을 합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올리고 나서 그게 어떻게 쓰여졌는가 하는 것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상가에서 사용 내역을 공개를 하죠. 그리하더라도 설혹 공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보시 올릴 때의 내 역할은 끝났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내가 이런 보시를 함으로 인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탐··치로부터 손을 깨끗하게 씻은 상태를, 잠시나마 나는 열반을 체험해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 자꾸자꾸 늘도록 해야 됩니다. 보시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써 선근공덕을 성취하는 것은 그런 잠시나마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런 행위들입니다.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또 뭐든지 열심히 바르게 노력을 할려고 하고, 항상 평등한 마음을 가질려고 하고, 이것이 바른 것이다 하면 탁 결정해가지고 그것을 밀고 나갈려고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열 가지 바라밀들은 전부 다 순간의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순간의 열반들을 자꾸 늘려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열반의 상태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살아가는 자체가 항상 청정한 상태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