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위대한 사람의 사유(Mahā purisa vitakka) 1. (20120107)

담마마-마까 2021. 6. 21. 08:43

https://youtu.be/4URLYBjOewM

* 위대한 사람의 사유(Mahā purisa vitakka) 1. (20120107)

 

빨리어 읽는 부분 그렇게 장단(長短)없이 해가지고 어떻게 해? 만날 배우면서도 그렇게 그냥 읽어버리면 안돼 이.

 

자! 「마하뿌리사 위딱까(Mahā purisa vitakka), 위대한 사람의 사유」라고 하는 경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고 해탈에 이르는 사람들을 얘기하겠죠.

여러분들의 생각과 그분들의 차이가 뭘까? (수행자 대답) 반대입니까?

 

맨 처음에 얘기한 거, 압삣차(Appiccha) 보통 우리말로 번역하면 소욕(少慾)이라고 그럽니다.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 그런데 위대한 사람들은 이걸 그렇게 풀이를 할까?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한번 봅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합니까? 맞습니까?

다양하죠! 여러분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도 있고 또 대승불교도 있고, 또 대승불교 중에서도 여러 가지가 있고, 그래서 여기 가면 "이거다" 하고, 저기 가면 "저거다" 하고 여러 가지입니다.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다양한 데도 그걸 잘못 판단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얘기했어요? 당신의 가르침을 조사·확인하고 맞는지 틀렸는지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라. 그래서 맞을 거 같으면 가져가서 이용을 하고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버려버려라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마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유롭게 그것을 조사·관찰할 수 있게끔 만들어놨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좀 의문 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다르게 해석을 할 경우에, 그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고나 그러한 생각들을?

 

그렇지는 않겠죠!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원래의 가르침하고 다르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거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삼법인을 얘기해놓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사법인을 만들었다 열반·적정을 만들어서 그래서 사법인이다. 부처님은 사법인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는데 사법인이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틀린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거지!

 

불교 역사에서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이 부족하다, 아니면 다르게 해석해가지고 다른 부파들을 만드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부파들이 있었죠!

부파불교 시대의 여러 가지 열여덟 부파라든지, 아니면 새로운 대승불교 내에서도 또 다른 각각의 종파라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부파불교 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법 때문에 각각의 파가 생겨났지만, 나중에 후대에는 그런 가르침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 때문에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게 됩니다.

 

본인이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생겨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도 종파가 몇 개가 될런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한 50개는 너머 될 거 같은데.

가르침이 그렇게 차이 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지 인제 본인이 그 종파를 만들고 싶어하고 거기에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그렇게 만들게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인정하는 자유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겁니다.

과연 부처님의 말씀을 변경하거나 또 다르게 해석하거나 또 덧붙이거나 하는 것까지도 자유롭게 허용했을까? 그렇지는 않겠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제로(0)입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를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변경 할 경우에는 불교라는 이름이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쓸 수 있게 되겠죠.

 

불교에서 자유로이 허용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사하고 확인하고 또 이것이 올바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시험해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견들을 나누도록 하는 것, 이런 것까지는 허용이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새로운 가르침에 자신의 생각들이나 사상들을 만들어서 하는 것들을 허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허용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거기까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혼합되어버리면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들이 분간하지를 못합니다. 내가 예를 들어서 부처님 가르침 외에 새로운 생각을 덧붙여가지고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할 경우에는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인 줄 압니다. 그게 후대로 넘어가버리면 그것이 진짜 부처님 가르침인 것으로 만들어져버립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르게 만들어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해서 그게 또 진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은 모르는 사람들은 혼란이 생겨버립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그런 부분에서는 혼란을 가져오게끔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허용하는 자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경하고 또 덧붙이고 하는 것들을 허락한 것은 틀림없이 아닐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처님이 가르침이라고 하는 불교라고 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천안 제일이 아누룻다죠! 너무나 열심히 정진하다가 결국에는 시력을 잃어버리고 신통의 눈, 천안의 눈을 얻게 된 분입니다.

아누룻다 장로스님이 하루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 나는 먹는 것도 보잘 것없이 먹는데도 나는 참 평화롭다는 거라. 잘 먹는 것도 아니고. 나무 아래서나 아무데서나 자도 아주 좋은 집에서 자는 것보다도 더 행복하다는 거라. 그래서 생각을 해봅니다.

 

'나의 생각과 일반인의 생각이 무엇이 다른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거기서 만들어진 게 일곱 가지 항목입니다. 부처님한테 가서 일곱 가지 항목을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래 그말이 맞다 하고 얘기하면서 하나를 더 덧붙여서 여덟 가지 항목으로 만들어줍니다.

그 경이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마하-뿌리사 위딱까(Mahā purisa vitakka)라고 하는 경입니다. 우리 한국 테라와다 불교 예불문의 마지막에 있는 경입니다.

 

맨 첫 번째 한 번 보십시오.

 

1. Appicc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ahicchassa;

(압삣찻사-양 담모-, 나-양 담모- 마힛찻사.)

이 법은 소욕(少慾)한 자의 것이지, 다욕(多慾)한 자의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욕심 없는 자의 것이지, 욕심 많은 자의 것이 아니다.

 

거기서 '소욕'을 스님은 '욕심 없는' 이라고 풀이를 해놨습니다. 왜 욕심없는 것으로 했을까?

압삣차(Appiccha) 할 거 같으면 보통 빨리어 내에서도 소욕으로 풀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욕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욕이 아닙니다. 욕심이 없는 것을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속세에서도 욕심 없는 사람들 많죠? 다른 사람들도 욕심이 적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도 다 위대한 사람들일까? 그렇지는 않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좀 더 내세울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명예가 높아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돈을 많이 벌까? 하고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하고는 다르다 하는 겁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조금 더 욕심을 가지고 살아갈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의 자아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낭패를 당하고, 또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목적의 차이가 이렇게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분명하게 있다는 겁니다. 세속에서는 풍요롭게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좀 더 잘살고 좀 더 부유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

그런데 불교의 목적은 그게 아니죠! 불교의 목적은 뭡니까?

윤회를 뛰어넘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덕을 짓는 것도 그것이고,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고귀한 사람들의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적어도 고귀한 자가 되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목적을 향해서 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 앞에서 법문을 들을 땐 누구든지 다 똑같습니다.

범천 신들도 그리고 왕들도 또 미천한 사람들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든 없든 간에, 배웠든 못 배웠든 간에 똑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자격이 됩니다.

왜 다 똑같이 그것을 들을 자격이 될까?

불교의 목적은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해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성장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장하는데 그런 빈부귀천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혹 왕이 부처님 앞에 온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 먼저 천민계급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으면 왕은 기다려야 됩니다.

요즘 절에서 같이 국회의원이 올 때까지 법을 설하지 않고 시간을 기다린다든지, 아니면 법회하다가도 그런 분들이 오면 중단해가지고 그분들에 대한 배려를 한다든지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압삣차(Appiccha)' 라고 하는 것을 '소욕'으로 풀이를 하면 안됩니다. 올바르게 풀이를 할 거 같으면 '무아의 정신'이 됩니다. 그 의미 자체를 따진다면.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왕이든 천민계급이든 똑같은 그냥 마음의 성장을 위해서 부처님의 법을 듣는 인간일 뿐입니다.

욕심이 적은 것이 아니고 ''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는 삶의 방법이 압삣차입니다. 그게 위대한 사람의 사유라고 하는 얘깁니다. 첫 번째.

 

아무리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 그 법을 많이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법이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 법이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그 법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성장을 하고 해탈의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압삣차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겁니다.

그 법문을 듣고 욕심을 좀 적게 가져야 되겠다 하고만 마음을 먹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그것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주고 그거로 인해가지고 너와 나라고 하는 구분들을 점점 없애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인정받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인정해주든 알려지든 아니든 그것에 전혀 관계하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부처님 제자의 올바른 정신상태라는 겁니다.

단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고 그 해탈에 이르렀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이 부처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욕심 없는 자, 욕심이 아예 없는 자를 얘기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자의 것이지, 욕심 많고 '나'라는 것을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일반 사회에서 이 압삣차를 적용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서 연경이한테 오늘 목요탁발법회 사람들 밥 먹을 수 있게끔 네가 반찬 준비해라 할 거 같으면 연경이는 아마 속으로 부글부글 끓을 거라. ‘내가 왜 그걸 해야 돼?’ 하고. 그래도 막내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치자. 그래도 연경이 마음은 어떨까? 아주 안 좋은 상태가 될 겁니다. 왜 그럴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왜 해야 돼?’

그런 생각들 때문에 본인은 마음이 성장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행복하지도 않게 된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 오늘은 다른 사람들이 다 바쁜가 보다. 저분들이 수행을 하려고 하니까 나는 요즘 수행이 안되니까, 뭐 내보고 해라 했으니까 내가 그냥 하지 뭐’ 하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반찬을 만들 때도 ‘아, 내가 이걸 만듦으로 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다른 사람들이 이걸 먹고 수행에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만들 거 같으면 기분 좋게 만드는 거라.

 

그리고 하면서도 내가 반찬 만들 때도 내가 조물락 거리면 '조물락 거리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고춧가루를 넣으면 '고춧가루를 넣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하면서 모든 행위를 하면 행위 자체도 꾸살라가 되고, 선한 행위가 됩니다.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면서도 나도 수행이 되고, 하면서도 나도 행복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또 기쁘고.

자아의식만 버려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행복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아가 없으면 오히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존엄을 소중하게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본인도 힘들어질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집니다.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할 때 '나'라고 하는 의식들을 배제를 해보십시오. 그럼 여러분들은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그게 바로 이 법을 지닌 자들이 나아가야 될 첫 번째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첫 번째 「압삣찻사-양 담모-, 나-양 담모- 마힛찻사」라고 하는 겁니다.

「이 법은 욕심 없는 자의 것이지, 욕심 많은 자의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욕심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뛰어난 공덕이나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 겸허한 삶의 태도, 욕심 많은 자는 오히려 얼마 안 되는 것도 내세울려고 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내세울려고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이와 같이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욕심 없는 자의 삶을 살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2. Santuṭṭ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ntuṭṭhassa;

(산뚯탓사-양 담모-, 나-양 담모- 아산뚯탓사.)

두 번째가, 「이 부처님 법은 만족하는 것을 아는 자의 것이지 불만족스러워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여러분 만족합니까? 누구든 만족 안 합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게끔 됩니다.

아마 만족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여러분들은 아마 거기서 모든 것들을 중단해버릴 겁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배부르니까 어떻게 해요? 거기서 중단해버리고 더 안 먹습니다. 사회생활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만족하면 아무것도 안 합니다. 게을러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불만족하니까 그래도 뭔가를 열심히 자꾸 할려고 합니다. 수행하는 것도 불만족스러우니까 더 열심히 할려고 하는 거고, 살아가는 것도 돈이 더 필요하니까 더 모을려고 하는 거고,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옛날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로 그분들도 상한선이 없었습니다. 멈추는 법이 없었습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그렇게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진다는 얘깁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똑같이 그렇게 만족하고 즐거워 할 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왜? 뭔가 하고 싶다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거 갖고 싶고 하고 싶다고 해가지고 모든 것들을 하고, 갖고 살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또 불만족스러워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좀 더 가지고 싶다" 하는 사람은 세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좀 더 가지고 싶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만은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만날 가난하다. 그러면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노력하게 되게끔 됩니다. 불만족스러워하면서 스톱하지 않고 계속 또 그걸 가질려고 노력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니까 어! 뭐 가지고 싶은 걸 가졌다. 그런데 또 다른 가지고 싶은 것이 있게끔 됩니다.

얼마 전에 스님들을 만났는데 차를 새로 바꿨어. “왜 차 뭐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하고 물어보니까 아니래. 그거 타다가 보니까 조금 더 새 차, 조금 더 좋은 차 타고 싶어서 그거 팔아버리고 새 차 바꿨다는 거라. 그래서 좋은 차를 타고 왔어요.

“참 니 중이 그래가 되겠나? 세속인도 아니고 그냥 굴러가면 되는 거지 그거 부서진 차도 아니고, 부서지면 고쳐가 쓰지 그걸 또 새 차로 바꿨나?”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거 손에 넣었지만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라.

그러니까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굴러가게 되는 거라. 배부르면 끝날 거 같지만 등 따시기를 바라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세 번째 패턴은 가지고 싶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희망만 잔뜩 부풀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은 이걸 해야지. 머릿속으로만 막 하고 실행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때되면 ‘아, 내가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구나’ 스스로 불만족스러워하고. 당연히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뭔가를 해가지고 그게 성취가 되든 성취가 되지 않든 그런 것이 아니고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세 부류 다 결국에는 불만족스러워집니다.

왜? 뭔가를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정신병입니다.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정신병과 마찬가집니다.

그게 위대한 사람의 사고라는 겁니다. 적어도 위대한 사람의 사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바꾸어 놓도록 자꾸 노력 해야됩니다. 이게 필요한가? 필요하면 노력을 하게끔 됩니다. 이게 필요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정신적인 질병들은 어느 정도는 경감이 됩니다. 최소한 필요한 것들은 필요합니다.

 

최소한 필요한 것들이 뭘까?

그것이 없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들을 최소 필요한 것들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밥을 안 먹으면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그거는 필요한 것들입니다. 추운 겨울에 옷을 안 입고 있으면 위험해집니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입어야 됩니다. 또 이 추운 겨울에 밖에서 잘 거 같으면 죽을 수가 있습니다.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그 몸을 보호해줄 집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병에 걸렸으면 약을 안 먹으면 죽을 수가 있습니다. 위험하니까 약을 먹어야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필요조건입니다. 최소한 필요한 것들이라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최소한 필요한 것들이라고 해가지고 그것을 한정 없이 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하다고 많이 먹으면 어떻게 돼요? 비만해집니다. 그럼 또 생명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충분하게 누리라는 얘기가 아니고 필요한 만큼만 쓰라는 얘깁니다. 먹고 수행하기 좋을 만큼만 먹어야 되는 거고, 먹고 내가 생활하기 좋은 만큼만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넘쳐버리면 안됩니다.

 

며칠 전에 스님이 고기가 좀 먹고 싶어. 그래서 고기를 먹었어. 몸이 이래 보니까 얼굴에 비듬이라고 그러나? 비듬이 막 피고 얼굴이 까칠까칠해. 겨울이니까 당연히 그래. 그리고 스님은 구르므 같은 것도 안 바르니까 금방 드러나는 거라. '어, 이거 기름기가 너무 빠졌다' 그래서 고기를 좀 먹어야 되겠다 싶어서 고기를 먹었어. 고기를 먹고 나니까 그다음날부터 얼굴이 뺀지르르르 하는 거야. 며칠 그렇게 계속, 아직도 번지르르해. 지금 보니까 비듬 같은 거 없지?

그렇다고 고기만 만날 먹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오히려 나태해져버립니다. 필요한만큼만 사용을 하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누구든지 그 고기가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사용을 하면 됩니다.

 

그게 만족할 줄 아는 자입니다. 만족하면 굉장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까 아누룻다가 나무 아래서 잠을 자는데도 행복하거든. 왜 행복해? 만족하니까! 거기서 자더라도 나무 아래 잔다고 해가지고 추울 땐 나무 아래서 자겠어? 추운 걸 대비해가지고 나무 아래서 잡니다. 그리해도 두려움이 없으니까. 하룻밤 거기서 자더라도 불편함이 없게끔 잘 수가 있으니까. 두려움 없이 불편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만족하고 하니까 행복하게 그 아래서 잠을 잔다는 거라. 아무리 비단 침대에 자더라도 정신적으로 괴롭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가시방석과 마찬가지라.

 

만족할 줄 알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의 컵라면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거 같으면 그것으로 몸을 지탱을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이 음식을 먹고 또 이렇게 생활을 해나가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 인해서 그런가? 하는 것을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고가가 아니고 브랜드 제품이 아니더라도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옷이 필요하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본인은 행복합니다.

 

우리 선원에 보니까 휴대폰 그 스마트폰 쓰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 같애. 스님도 스마트폰 안 쓰고 있고, 그렇다고 스마트폰 쓰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스마트폰 쓰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쓰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대부분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일반폰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그거 불만족해 있는 것은 아니죠?

연경이 스마트폰 쓰나? 불만족스러워? 그럼 되는 거라. 그럼 그 용도에 필요에 따라서 쓰고 있는 거라. 그게 바로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부처님 법은 만족하는 것을 아는 자의 것이지 불만족스러워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 법을 잘 배운 거라.

 

어떤 경우든지 그것이 단음식이든 아니면 거칠은 음식이든, 고가의 브랜드든 아니면 아주 이름도 없는 상표이든, 입고 있는 자들이 만족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을 하고 있는 거고.

지금 아마 스님의 차가 16년인가 되는 차 저게 부서져 버릴 것 같으면 스님이 굉장히 불편합니다. 어디 법문 갈라해도 멀리 갈려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으로 쓰고 있는 거라. 그럼 16년이 된 차가 아니라 20년이 된 차라 하더라도 굴러가면 그 목적으로 쓰게 되는 거라. 그럼 나는 만족하고 저 차를 끌고 다니게 되는 거고. 꼭 좋은 차가 아니라도 그 목적에 맞게끔 만족하면서 사용을 하면 되는 거라. 브랜드의 제품도 또 스마트폰도 그 용도에 맞게끔 필요했기 때문에 사용을 하는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남이 가진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 없이 자기 스스로 그것에 필요한 것들을 거기에 맞게끔 만족하면서 살도록 해라는 겁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세 번째 부분부터는 다음 화요일날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하십시오.

 

 

Mahā purisa vitakka(마하- 뿌리사 위딱까)

위대한 사람의 사유(思惟)

 

1. Appicc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ahicchassa;

(압삣찻사-양 담모-, 나-양 담모- 마힛찻사.)

이 법은 욕심 없는 자의 것이지, 욕심 많은 자의 것이 아니다.

 

2. Santuṭṭh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ntuṭṭhassa;

(산뚯탓사-양 담모-, 나-양 담모- 아산뚯탓사.)

이 법은 만족하는 것을 아는 자의 것이지, 불만족스러워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3. Pavivit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saṅgaṇikārāmassa;

(빠위윗땃사-양 담모-, 나-양 담모- 상가니까-라-맛사.)

이 법은 멀리 떠남을 기뻐하는 자의 것이지, 무리지어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니다.

 

4. Āraddhaviriy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kusītassa;

(아-랏다위리얏사-양 담모-, 나-양 담모- 꾸시-땃사.)

이 법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지, 게으른 자의 것이 아니다.

 

5. Upaṭṭhitasati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uṭṭhassatissa;

(우빳티따사띳사-양 담모-, 나-양 담모- 뭇탓사띳사.)

이 법은 지금 일어난 것을 잘 알아차리는 자의 것이지, 어리석은 자의 것이 아니다.

 

6. Samāhi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māhitassa;

(사마-히땃사-양 담모-, 나-양 담모- 아사마-히땃사.)

이 법은 마음이 통일된 자의 것이지, 마음이 혼란스러운 자의 것이 아니다.

 

7. Paññāvato ayaṁ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a;

(빤냐-와또- 아양 담모-, 나-양 담모- 둡빤냣사.)

이 법은 지혜가 있는 자의 것이지, 무지한 자의 것이 아니다.

 

8. Nippapañcārāmassāyaṁ dhammo nippapañcaratino,

nāyaṁ dhammo papañcārāmassa papañcaratinoti.

(닙빠빤짜-라-맛사-양 담모- 닙빠빤짜라띠노-,

나-양 담모- 빠빤짜-라-맛사 빠빤짜라띠노-띠.)

이 법은 번뇌 망상 없음을 기뻐하고 번뇌 망상 없음을 즐기는 자의 것이지,

번뇌 망상을 기뻐하고 번뇌 망상을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