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혼자 수행한다는 의미 (20120112)

담마마-마까 2021. 6. 23. 09:14

https://youtu.be/rGvYNupLA-U

* 혼자 수행한다는 의미 (20120217)

 

오늘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행을 하죠?

혼자 하는 것보다도 효과가 좋습니까? 얼마만큼 좋아요? 혼자 할 때보다.

(수행자 대답)

번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오히려 수행들을 하는데 마음을 더 붙잡을 수 있는 역할들을 하기도 하고 대부분 그럴 겁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혼자서 수행을 하든 여러 명이 수행을 하든 수행을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주지는 못하죠? 혼자 하는 겁니다. 원칙은.

 

그런 마음들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단지 좀 더 좋은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에게 좀 더 좋은 조건이 여러 명이 모여서 수행할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수행하는 것일 뿐이고, 그것은 조건인 것뿐인 것이지 내 수행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혼자서 앉고 혼자서 경행하고 혼자서 눕고 이렇게 나태함 없이 수행하는 자 그래서 기쁘게 수행하는 자들, 자신을 잘 조우해서 수행하는 자들은 혼자 있는 것들을 즐거워하게 된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혼자서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참 어려운 점들이 많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태종사에서 인연이 됐던 스님이 한 분 왔어요. 상좌 한다는 걸 내가 상좌를 안 해줬거든. 결국에는 다른 데 가서 계를 받아가지고 했는데, 마음속에서는 은사 같이 모시고 싶어가지고 여기 와서 한 삼일을 지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이 벌써 십년이 너머 됐지. 그동안에 여러 곳들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삼 년간 무문관에 들어갔어요. 무문관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수행이 잘됐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수행하는 흐름이 탁 깨지게 됐는 거라.

 

한참 반 정도 지난 상태인데 어느 날 주지 스님이,

무문관은 여러분들이 잘 알겠지만 들어가 가지고 일체 외부인하고 접근이 금지됩니다. 딱 밥 때 되면 밥만 이렇게 받고, 감방 독방하고 똑같죠. 식기만 넣어주고 그렇게 하는 건데, 식기를 넣어주면서 주지 스님이 그 문을 통해서 일지를 하나 주더라는 거라. 그러면서 "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것들을 수행일지를 좀 써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했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주지 스님 입장에서도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들 모습들을 안에 있으니까 보지를 못하니까 그런 것들을 좀 알고도 싶었겠지. 어디에 활용할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런데 그 일지를 받는 순간에 그런 생각이 일어나더라는 거라. '처음부터 그러면 일지를 쓰라고 그러든지, 이미 삼년결사 해가지고 반이나 지난 상태에서 인제사 수행일지를 쓰라고 왜 하나?' 하는 생각이 처음에는 일어났다는 거라.

그러니까 이게 점점 강도가 세지면서 화가 일어나는 거라. 수행 못하는 거라. 아니나 다를까 무문관에 들어가 있던 몇 분의 스님들이 한결같이 다 뛰쳐나오는 거라. 무문관에 있지를 못하는 거라. 그걸 참지를 못하니까 답답해가지고.

그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뭣고! 하는 화두만 참구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앉아있었는데, 이젠 그걸 못하겠는 거라. 그래서 뛰쳐나오고 말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자칫 잘못 생각할 거 같으면 '자기 혼자 열심히 수행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무문관에서 그렇게 수행을 하다가 열반에 들었다, 돌아가셨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은 아', 수행하다가 참 잘 돌아가셨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인의 경지에까지 올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불교적인 것일까?

여기서 부처님이 말하는 혼자서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들을 가질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게 혼자서 수행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중하고 같이 있든 혼자 떨어져서 독립 돼서 수행을 하든 어차피 혼자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혼자서 수행한다는 의미가 뭘까? (수행자 대답)

예. 밖에 대상에 의지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은?

조금 전에 무문관 예를 들고 또 어떤 경우에는 여기 있는 도반들 중에서도 고요하게 혼자 떨어져서 수행하기를 좋아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도 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형태적인 혼자 떨어져서 있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얘기하는 혼자 수행을 한다는 의미는 그런 형태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죠! 여러분들도 수행을 할 때 형태를 가지고 수행을 하지는 않죠! 뭘 가지고 수행을 합니까? 뭘 가지고 수행을 해요? 실제 일어난 것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마음으로써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형태적인 것들은 어떤 것이든 무문관에 여러 사람들 하고 모여있든지 아니면 혼자서 떨어져있든지 어떤 것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혼자서 수행을 잘한다'고 하는 의미는 그것보다는 '마음을 일어나는 대상에 잘 기울여서 알아차린다'는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건 혼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데 생각이 일어났으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난 것들이라. 그럼 혼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법문을 듣고 있을 때는 법문을 듣고 있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그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경행을 할 때는 걸어가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차림을 해야 되는 것이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마음으로써 알아차림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혼자서 수행한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우리는 '형태적인 것들'에 많이 끄달려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전에 언제 모네이야(moneyya) 라는 법문 한 적 있죠! 모네이야가 뭐라고 그랬어요? 성자에 이르는 수행 방법, 수행의 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무니(muni)라고 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 행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들을 얘기합니다.

 

수행 방법들은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종교에 따라서 수행 방법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들도 엄밀하게 얘기하면 형태적인 것들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사마타 수행을 할지, 위빳사나 수행을 할지 그것도 형태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형태적인 것들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모네이야가 될 수 있고, 없고의 차이가 난다는 거라.

 

설혹 내가 사마타 수행을 하면 어때서? 거기에 마음을 분명하게 기울여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갈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수행을 잘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화두참구를 하면 어때서?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 형태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이 맞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형태입니다. 하나의 형태를 자기가 쥐고 있으면서도, 그 형태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려고 하는 꼴밖엔 안되게 됩니다. 그런 우는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심념처를 하고 있든 수념처를 하고 있든 아니면 법념처를 하고 있든 그것이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 수행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형태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형태적인 것들이 내게서 자꾸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여기 법문이 끝나고 나면 조금 있으면 또 어떤 형태를 취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찬탄, 담마에 대한 찬탄, 상가에 대한 찬탄 이런 것들을 해나갑니다. 그것도 형태입니다. 수행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거 하기 싫어합니다. 아주 짧은 한 십분이나 하나? 어쨌든 찬탄 게송들 하는 것도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또 담마스쿨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아 나는 수행만하고 싶은데, 담마에 대해서 배우고 싶지 않은데’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도 못하게 됩니다.

 

성자가 되는 제1단계에서 맨 처음 떨어져나가는 것이, 오하분결 오상분결 해가지고 열 가지 이렇게 얘기하는데, 맨 처음 떨어져 나가는 것이 뭐냐 하면, 이 계금취라고 하는 형태 그리고 의식적인 부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서서히 떨어뜨려 나가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들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없는 거라. 그것을 하든 안 하든 그런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게끔 됩니다.

 

이 선원이니까 이 선원에 맞는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여기선 그 형태들을 취하게끔 되는 거고, 그래서 그 형태들을 취하더라도 나에게는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할 뿐이라는 거라.

또 다른 데라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어떤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럼 그것도 꼭 마찬가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나갈 때 그것만이 여러분들이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이 부처님이 얘기한 혼자서 수행하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부처님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점을 보던 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아시타 선인이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은 반드시 출가해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하게 되죠. 그러고 나서 자기 조카 되는 분에게 간곡하게 당부를 합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은 그분에게 가서 진리를 배우도록 하라. 그대신에 지금은 너는 홀로 숲에 들어가서 수행을 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때까지 침묵하면서 그렇게 은둔생활을 하라" 얘길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해서 깨달음에 이른 나이가 서른다섯 살입니다. 그래서 35년간을 숲에서 지냅니다. 아무도 그 분이 숲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중에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멀리서 부처님을 봤기 때문에 부처님을 가까이에 가서 친견도 못한 상태라. 그런데도 그 법을 들어서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도 부처님을 뵙지 않고 그대로 다시 또 숲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참으로 성자답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리요 뚜누히 바오" 그렇게 얘기합니다.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

수행자에게 갖추어야 되는 첫 번째 덕목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말을 하고 싶어가지고 안달이 나지? 그렇지 않으면 뭔가 소외되어 있는 것 같고 뭔가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은 것 같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히 '아리야 뚜누히 바오' 그러거든.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 참 침묵을 지킨다는 건 힘이 듭니다. 침묵을 지키는 사람조차도 어떤 경우에는 손짓발짓으로 말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손짓발짓도 말로써 인정을 합니다.

언어라고 하는 개념에는 입으로써 나오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손짓발짓도 다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한글로 풀이할 때 '와짜(vaca)'를 뭐로 풀이할 거냐? '말'로 할 것이냐 아니면 '언어'로 할 것이냐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얘기했을 때는 말이라고 하면 안되고 '언어'라고 해야만이 그 의미에 맞습니다. 실제로는.

 

그래야 만이 언어라고 했을 때 손짓발짓도 거기 포함이 되는 거고, 말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했을 때는 입으로써 전달되는 것들만 말로써 해당이 되기 때문에 언어라고 쓰는 것들이 국어학상으로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 말이라 하든 언어라 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든 성스러운 침묵을 지킨다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성스러운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조건이 뭐냐하면 적게 말하는 것, 적게!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은 적게 말해야 됩니다.

말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거지 적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우울증이나 이런 정신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는 분들은 말이 적어서 문제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거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말이 많아서 문제가 되지 적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침묵이라고 하는 의미는

첫 번째, 말을 적게 할 것.

두 번째, 그 말에 의미가 많을 것.

말을 했는데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그 속에 귀담아 들을만한 의미들이 없을 거 같으면 별로 쓰임새가 없습니다. 한두 마디를 하더라도 그속에서 내가 많이 생각하고 교훈을 삼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거 같으면 그거는 의미있는 말이 됩니다. 그 말에는 반드시 의미가 많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포함이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는 것들을 "말에 품위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말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쓸데없는 말들이라든지,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든지, 또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든지, 아니면 남을 이간질시키는 말이라든지, 아니면 욕설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피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말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하더라도 크게 의미를 전달받을 수 없고, 또 그런 말은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말만.

 

여기도 밥을 먹을 때 보면, 안에서 스님이 밥을 먹으면서 문을 닫고 있으니까 안 들릴 거 같아도 다 들리거든. 참 말들 많아. 아마 우리 선원같이 밥을 오래 먹는데도 별로 없을 거라. 그렇죠? 그렇다고 여자 수행자들은 할 일이라도 많지. 밥도 차려주지, 밥도 하지, 부엌에 나중에 설거지까지 다 하지. 남자들은 한 시간 반 동안 앉아서 내내 떠들고 있습니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커피까지 다 시켜 먹고.

과연 저분들은 지금 부처님이 말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하고 의문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말이라도 의미가 풍부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 할 거 같으면 행위라도 해야 되는데 행위조차도 하지 않고, 물론 마음은 아, 오늘 공양지으시고 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여자 수행자님들 보살님들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은 가지겠지. 그렇지? 그리해도 어쨌든 의미가 없는 말들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의미없는 말은 많이 하지 않죠? 수행에 대한 얘기 많이 하죠? 그래도 수행에 대한 말도 그것이 길어지면 그것도 의미없는 말이 됩니다. 일반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데 출가한 스님들의 계율에는 토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토론하면 대부분 어떻게 됩니까? 대부분 자기의 의견이나 자기의 생각들을 전달 할려고 합니다. 그게 부딪쳤을 때 서로 싸우기도 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또 자기의 생각들이 맞다고 남들을 비난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토론을 자제하라고 게율에 분명하게 명시가 되어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게 출가한 스님들에게만 그렇겠습니까? 수행하고 있는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이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힘도 많이 뺏기고 또 그러므로 해가지고 내가 수행하는데 발란스가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한번 발란스가 무너지면 그것을 다시 되잡을 때는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하는 걸 잘 살펴가지고,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을 해야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말을 할 때도 말을 할 때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또 말을 하고 나서 내가 분명하게 바르게 전달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그렇게 하면 바른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는 말수도 적어질 뿐아니라 의미있는 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모네이야라고 하는 혼자 수행하는 성자! 성자가 되기 위해서 나아가는 길의 단추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말을 하고 싶어 하는가? 내가 이 말이 꼭 필요한가? 그리고 이 말을 해야되는 원인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끔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부처님이 찬탄했던 '혼자서 수행하는 법들이다' 하는 것들을 명심을 해야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물론 모여서 수행을 하면 좋은 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혼자서 수행을 하라고 그럽니다. 대부분 부처님한테 수행주제에 대해서 받고나면 대부분 스님들은 숲에 들어가서 수행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건 형태에 지나지 않는 건데?

모여서 수행하면 수행하는데 힘을 많이 받긴하죠! 좋은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점이 있습니디. 특출나게 뛰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만고만고만 해집니다. 그게 단점입니다.

그래서 특출나게 뛰어나게 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자기의 방식대로 수행을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혼자 떨어져서 수행을 하게끔 됩니다.

 

대부분 부처님 밑에서 출가한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부처님한테 수행주제를 받아서 숲에 들어가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고요하게 혼자 떨어져서 수행을 합니다.

"들은 만큼 실천을 하는 것", 부처님에게 이렇게 들었다 할 거 같으면 그 들은 것만큼 그대로 실천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실천을 하는 것만큼 말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여래(如來)라고 하는 의미가 원래 그런 의미입니다.

 

"앗타 와디 따타 까리(atthavādī tathākārī)" 그럽니다.

'내가 들은 만큼 행해나가는 것'

 

그리고 "앗타 까리 따타 와디(yathākārī tathāvādī.)"

'행한 만큼 또 전해주게 되는 것'

이것이 여래(如來, tathāgata)라고 하는 의미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에게서 수행방법이 이렇다 하고 들었으면 그것은 반드시 여러분들이 실천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말을 적게 하고 의미있는 말을 해라 할 거 같으면, 그렇게 들었으면 여러분들은 그걸 실천을 해야 됩니다. 실천을 해보니까 아, 이게 맞거든. 그러면 그렇게 실천한 만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전해주어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할 때는 내가 말을 적게 하고 의미가 있는 말들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부처님 따라서 나아가는 실천 방법, 수행방법이라는 거라.

그게 혼자서 수행한다는 것의 첫 번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혼자서 수행하기를 즐겨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1년차가 되고 나면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안거가 끝나고 나서 두타행을 합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지내도록 그렇게 훈련을 받습니다. 그건 어느 나라든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동일합니다.

사실은 겁이 납니다. 인제 출가한지 1년이 지난 스님이 뭐 힘이 있다고, 한적한 곳에 가서 숲에 가서 지붕도 없는 곳에가서 그렇게 수행을 할 거라? 겁이 납니다. 그런데 멀지 않는 곳에 다른 스님들이 그렇게 있습니다. 그게 위안이 되더라도 저녁이 되고 나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스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르고, 그 소리보다도 차라리 가까이에 있는 나는 나무 소리라든지 여러 짐승들 소리라든지 그리고 가끔씩 보이는 이상한 불빛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더 무서웁게 돼있습니다. 그건 한 1년차 되는 스님들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

 

그런데도 그렇게 혼자서 생활하는 법을 익히도록 하는 거라. 그렇게 일주일 아니면 보름간을 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되게 자신이 붙습니다. 혼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참 고요하고 즐거움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기가 혼자서 가서 수행을 해요.

큰스님한테 수행법에 대해서 질문하고 의문 날 때만 와서 물어보고 나서 탁 듣고 나면 또 갑니다. 가서 혼자서 수행을 하고, 그게 공동묘지가 됐든 아니면 짐승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됐든 그것에 관계하지 않고 거기 가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오는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들은 것만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실천을 하지 못할 거 같으면 당연히 겁이 납니다. 또한 함께 수행하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런 상태에 있는 분들은 함께 수행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도반들이 같이 있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고 또 수행에 도움을 많이 받는 것들입니다.

그리하더라도 말로 인해서 도반 간에 상처를 주는 거라든지 행위에 인해서 상처를 주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모여있을 때는 기본은 화합입니다. 서로 우애롭고 참 즐거운 상태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모여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걸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들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이렇게 모여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판단을 해야 됩니다. 잘못된 행위라든지 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스스로 고쳐나가야 됩니다.

모여있을 때는 그 모임 자체가 화합되게끔 자꾸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혼자서 수행한다는 두 번째 의미가 뭐냐면, '어느 것에도 마음이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아무리 스님들이라 해도 가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님도 그렇죠? 옷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거 말고도 가진 거 많죠? 스님은 노트북 있죠. 그리고 스님은 오래된 차지만 차도 가지고 있죠. 그러고 보면 가진 게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변명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스님이 여러 가지 법문 준비라든지 아니면 문서작업을 하기 위해서 노트북이 필요하다. 또 멀리 법문 다니는 일이 많으니까 아무리 16년 넘어된 차지만 저 차라도 있어야지만 내가 멀리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변명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어도 가능해집니다. 불편은 하겠지만은.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에 의존을 합니다. 그래서 이 노트북이 오래되어서 기능이 많이 떨어졌으니까, 지금 문서작업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고, 이 노트북이 법문을 녹음하기 위한 겁니다. 법문을 녹음하는데 전혀 문제없으니까, 여러분들 뭐 크게 불편합니까? 물론 어떤 사람은 소리가 작다. 이런 얘기들을 하기는 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이 노트북을 바꿀 생각은 없거든. 이 노트북이 벌써 한 7년 8년 넘어 됐어요. 그런데도 이걸 안 바꾸고 있는 거라. 나에게는 이 용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용도로는 적합하다는 거라.

 

차도 십몇년 너머 됐지만 이동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니까 그걸 이용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는 거라. 물론 수동이고 어떨 때는 시동도 가끔씩 꺼지기도 하고, 고칠 것도 많고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16년이 뭐야? 한 5년 되면 바꾸죠. 그런데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라.

의존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에게 맞게끔 쓸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의존을 해버릴 것 같으면 이것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더 필요하게끔 되고, 또 그것에 더 의존을 하게끔 됩니다.

담미니! 휴대폰 바꾼지 얼마나 됐어? 몇년 간격으로 바꿔? (수행자 대답)

뭐 하러 그렇게 자주 바꾸는데? 꼭 그게 필요한 것이야? (수행자 대답)

그래. 어쨌든 꼭 필요한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의존을 하는 습관을 들여놔놓으면 한정이 없습니다. 특히 여러분들 같이 수행을 하는 자들은 더 그래야 됩니다. 눈에 의존을 할 거 같으면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자꾸 개념화시키게 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보고 있는 꽃이 그냥 '본다'고 인식을 할 거 같으면 크게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보는 것들에 대해서 '꽃이다' '예쁘다' 할 거 같으면 '예쁜 꽃이다' 하는 것들을 마음에 딱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에 저장하는 기능들이 왜곡되게끔 저장을 합니다.

나는 그때 이걸 '예쁜 꽃이다' 하고 저장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예쁜 꽃이다 하고 누구든지 저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든 꽃이다' 저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베고니아다' 저장하는 사람도 있고, 각각 다르게 돼 있는 건데, 나는 '예쁜 꽃이다' 하고 저장을 하게 된다는 거라.

또 이것을 시주한 사람은 '내가 시주한 꽃이다' 하고 저장을 하게끔 됩니다.

 

왜곡되게 자꾸 자기가 저장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누가 "아 이거 오래되었으니까 내버리자" 할 거 같으면, 시주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성질이 납니다. 예쁜 꽃이다 하고 저장한 사람은 "아 아직 예쁜데 왜 버리려고 하느냐" 그럽니다. 의존을 해버리면 그렇다는 거라.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것에 의존을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냥 '본다' '보인다' 하고만 인식을 했을 거 같으면 이것이 어떤 상태가 다시 바뀌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바뀐 상태를 또 알아차리면 되는 거니까.

수행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여러분들은 자꾸 의존하는 것에 매달려가게 됩니다. 생활도 의존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 혼자서 수행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11시가 됐습니다.

혼자서 걷고 혼자서 앉고 혼자서 눕고 그렇게 혼자서 수행하는 것들을 즐겨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도 나태함 없이, 기쁘게 수행하는 자!

그런 자들을 보통 우리는 "잘 수행하는 자다", "부처님 법에 맞게끔 수행하는 자다." "성자의 길을 따르는 자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