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사람의 사유 2. (20120129)
저번 시간에 이어서 위대한 사람의 사유, 저번에 첫 번째, 두 번째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부분입니다. 빠위윗따(Pavivitta)라고 하는 겁니다.
3. Pavivit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saṅgaṇikārāmassa;
(빠위윗땃사-양 담모-, 나-양 담모- 상가니까-라-맛사.)
「이 법은 멀리 떠남을 기뻐하는 자의 것이지 무리지어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니다.」
멀리 떠나면 기쁩니까? 기뻐요? 안 기뻐요? 무리지어서 노는 게 좋아요?
여기서 빠위윗따라(Pavivitta)고 하는 것은 빠(Pa) '~향하여', 위(vi) '벗어난다', 윗(vic) v브이 i아이 c시 라 해서 그것도 '벗어난다' 벗어나고 벗어나는 쪽으로 계속 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멀리 벗어난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죠.
원래의 의미는 그런 건데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뭐냐면 '묶여진 것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속박되는 것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나이 든 보살님은 손자가 있으면 손자 때문에 되게 기쁘죠? 손자가 재롱피우면 되게 기쁩니다. 거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손자가 만약에 탁 병에 걸렸다든지 아니면 나쁘게 얘기해서 죽어버릴 것 같으면 굉장히 낙담하게 됩니다. 굉장히 슬퍼하죠.
다르게 얘기하면 나의 즐거움이나 나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가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즐거울 일도 없고 괴로울 일도 없다는 얘기죠.
사람한테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죠. 물건에도 꼭 마찬가지죠. 물건 때문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즐거워하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벗어나라 하는 의미가 이 빠위윗따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하죠? 뭔가 조금 더 편리한 걸 조금 더 가지려 그러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 하고 만날려고 그러고, 그게 없으면 뭔가 허전합니다. 그래서 혼자 고요하게 즐기는 것이 될 거 같으면 못견뎌 합니다. 외로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또 부처님 법들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어떤 것에도 사람과의 관계든 아니면 물건과의 관계든 그런 것에 걸림이 없도록 하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특히 스님이 가끔씩 전철을 타다 보면 사람들 대부분 뭐 하는지 아세요? 요즘은 스마트폰 해가지고 그거 내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생각하기로, 저 사람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가장 좋은 벌이 뭘까? 스마트폰을 뺏어버리는 거라. 아마 어떤 형벌보다도 더 괴로워할 거라. 특히 젊은이들 같은 경우는. 뭐 젊은이만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잊어먹고 휴대폰 놔두고 갔다, 아마 며칠 동안 잊어버리고 안 찾으러 오는 사람 없습니다. 당장 찾으러 옵니다. 그게 없으면 안 되니까. 그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스님도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차에다가 휴대폰을 놔두고 올라옵니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휴대폰 내가 놔두고 간다. 일부러 그렇게 놔둬 버려. 그러고 나서 올라와버려. 나중에 하루나 지나서 찾아가 보면 전화가 몇 통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거라. 하루 동안은. 뭐 걱정할 일도 없고, 물론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기면 그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라도 선원 전화를 통하든지 아니면 누가 찾아오든지 급한 일이 생기면 해결되게 돼있는데 우리는 그걸 못 참는 거라. 그러니까 휴대폰을 놔두고 왔으면 당장 와서 가져가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무엇에 그렇게 많이 걸려가지고 있습니까? 물건에 걸려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에 걸려있습니까? 다 걸려있죠? 다 걸려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멀리 떠남을 기뻐하라는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속박하는 것들이 없도록 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의존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든 조금 전에 얘기했던 손주이든 아니면 여러 가지 물건이든 그런 것에 의존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가끔씩 그럽니다. 스님 혼자 있으면 안 심심합니까? 난 그렇게 좋은데. 심심한 게 아니고 그렇게 좋은데.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지고 모든 일상 일들로부터 벗어나서 내 혼자서 공부하고 내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더없이 즐거운 일인데 사람들은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런 의존하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러지마라 라는 겁니다.
그 뒤에 보면 무리지어 즐기는 것, 상가니까라마(saṅgaṇikārāma) 그럽니다.
상(saṅ)은 모인다는 것, 가나(gaṇa) 라고 하는 것은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까라(kāra) 행한다는 건데, '수까라' 할 것 같으면 즐거움을 행하는 거고, '두까라' 할 거 같으면 괴로움을 행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리지어 모여가지고 뭔가를 갖다가 행하는 거라. 그러지 않으면 못견디는 거라. 여러분들 지금 여기 무리지어 있죠? 뭘 행합니까?
여러분들은 수행이라도 행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게 아니고 뭔가를 행하긴 행합니다. 그게 즐거운 일이든지, 괴로운 일이든지, 남을 막 비방하고 할 거 같으면 자기는 후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면 자기 자신도 괴로웁니다. 말을 나쁜 말을 하는데 괴롭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나쁜 마음을 먹어야만이 나쁜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남들하고 같이 실컷 떠들고 놀고 즐겁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거 괴로운 일입니다. 공허해지는 거라. 그것을 또 계속할 수도 없는 거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참 쓸데없는 걸 가지고 하루를 보내는 거라.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혼자서, 자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들을 자꾸 택하라는 거라. 특히 연세가 드신 분들은 더 그래야 됩니다. 얽매여버려 놔놓으면 인제는 그럴 나이들은 지났죠? 어디에 얽매이고 하는 나이들은 아마 지났을 겁니다. 왜 그러냐면 그게 참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잘 안 얽매일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런 무리지어 있는 것들, 가족들에 대한 것들, 물건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은 되도록 집착하는 것들은 떨어져나가고 나니까 어떻게 돼요?
아! 인제는 공부해야 되겠다 하고 그나마 여기 오는 거라. 그런데도 아직 완전하게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고, 그런데 사실을 얘기하면 늦었어.
사실은 공부는 공부할 수 있을 때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쎄가빠지게 해봐야 나쁜 말로 표현할 거 같으면, 아! 겨우 인제 이 법으로 인해서 그래도 내가 바른길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음, 그래요.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부처님은 이것을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이렇게 의존하는 것들은, 그것이 없으면 공허하고 힘들어 해지는 것들은 정신적인 병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의존하지 않으면! 당연히 마음의 침착함들도 없어져 버리는 거고, 의존하게 되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반성할 줄도 모르는 겁니다. 얼마나 나쁜 것들이라.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내가 참회할 줄 알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내가 평등한 마음을 가져서 침착하게 지내야만이 되는데 그것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의존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이 세 번째, '멀리 떠나는 것을 기뻐해야지, 무리지어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멀리 떨어지는 것, 또 가진 것 없는 것, 이런 것들로부터 기뻐하라는 거라. 대중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것들, 얼마나 좋은 일이야! 그거만큼 좋은 일이 없는데 그걸 힘들어 한다는 거라.
스님들이 봤을 때는 참 반대로 살고 있다. 가끔씩 와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합니다. 무슨 얘기 무슨 얘기 뭐 수행에 대한 얘기든 아니든 여러 가지 일들, 대부분들은 보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의존하는 마음들에 대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병들이라. 그래서 스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 그것들에 의존하지 마라. 니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말이 귀에 안 들어갑니다. 맞는 얘긴데도 왜? 이미 그렇게 중독되어있는 거라.
얼마만큼 빨리 여기서부터 탈출하느냐? 그렇다고 해가지고 벗어나라고 한다 해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지금 스님들 같이 만날 벗어나가지고 아예 안 만나도록 하라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불교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지질 않습니다. 그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의존하지 않고 집착하지 말아라는 것이지 멀리 떠나서 혼자서 토굴 속에서 지낸다 해가지고 그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문관에 십 년 있어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의존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 대해서 가엽이 여기고 자애의 마음을 한없이 가지는 것들! 내가 집착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가능한 거라. 그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거라. 그게 불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열심히 도우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자비의 마음들이 더욱 더 길러지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보다 더 증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멀리 떠나만 있는다고 해가지고 증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떠나는 이유가 뭡니까? 마음을 증장시키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증장을 시키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해서 벗어나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도 그 물건을 쓰고 있든지 아니면 사람들하고 어울려 있든지 그렇지 않고 혼자 있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 확고부동하도록 만들어라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의존하는 것들이 없도록 하라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고 할 것 같으면 오히려 사회에 살더라도 잘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멀리 떠나는 겁니다.
군중 속에 있어도 멀리 떠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4. Āraddhaviriy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kusītassa;
(아-랏다위리얏사-양 담모-, 나-양 담모- 꾸시-땃사.)
네 번째 부분은, 「이 법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지, 게으른 자의 것이 아니다.」
아랏다위리야(Āraddhaviriya) 노력하는 것들. 여러분들은 노력하고 있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노력하는 게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좀 더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을 합니다. 실제로는. 참 모순적인 거죠?
노력을 하면 더 사람들이 평화로워지고 오히려 더 좋아져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게을러지면 그냥 게을러져버리면 되는 건데, 그런데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라. 조금 더 편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밥도 옛날에는 가마솥에 하던 것들이 전기밥솥에 뚝딱해가지고 먹고, 좀 더 게을러지기 위해서. 야채를 직접 길러 갖고 먹는 것보다 마트 가서 사가지고 먹는 것들, 좀 더 편해지고 게을러지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라. 그렇게 게을러지기 위해서 돈도 좀 더 노력해서 벌어야 되는 거고, 좀 더 좋은 조건들을 만들어야 되는 거고.
여기서 그럼 노력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니겠죠! 일반적인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서, 조금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 아니면 좀 더 명예가 높아지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봤을 때는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라.
바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지긋지긋한 윤회의 사슬을 갖다가 벗어 던져버릴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위해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고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하면 점점더 쇠퇴해져버립니다. 마음은!
전철 타고 다닐 거 같으면 걸어다니는 것보다도 육체적으로 쇠퇴해져 버리는 거고 그거는 당연한 겁니다. 마찬가집니다. 내가 조금 더 편해지고 내가 좀 더 게을러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될 거 같으면 마음은 당연히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노력을 할려고 하지 말고, 더욱더 어떻게 하면 이 윤회의 사슬을 끊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노력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편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 피우는 것들을 아예 싹 지워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부처님의 법을 따라가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아예 할려고 하지 않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화내는 것들이 부처님 법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아예 안 할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변명들은 많이 합니다. 열심히 노력했다!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거는 자기 자신이 게으른 거라. 무엇 때문에 그랬는가를 잘 판단해야 됩니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그 화나는 거를 없애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탐진치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버려가지고 내가 윤회의 고리를 끊기위해서 그러는 건지 한번 판단을 해보라는 거라.
대부분 보면 편해질려고 합니다. 그것이 있으면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없애고 나니까 또 다른 것들로 인해가지고 편해질려고 합니다. 뭘 하나 개발하면 조금 더 편해지고 조금 더 용이한 것들이 또 개발되어지고, 또 그것을 사용하면 또 더하게 되고, 마음은 계속 충동질을 하게 되는 거라.
수행할 땐 안 그런 것 같아요? 꼭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하는 거라. 오로지 부처님 법에 따라서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이 장에서 얘기하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지, 게으른 자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게으름 피우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위대한 인간이 됩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다음에 밑에 것을 보면,
5. Upaṭṭhitasati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muṭṭhassatissa;
(우빳티따사띳사-양 담모-, 나-양 담모- 뭇탓사띳사.)
「이 법은 지금 일어난 것을 잘 알아차리는 자의 것이지, 어리석은 자의 것이 아니다.」
잘 알아차린다, 우빳티따(Upaṭṭhita) 그렇게 돼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현존하는' 이란 뜻입니다. 우빳티따(Upaṭṭhita) 사띠(sati)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일어난 것, 현존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뒤에 뭇타(muṭṭha)라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 깜빡깜빡하고 그리고 망실해버린다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나쁘게 표현하면 건망증이라는 그런 것입니다. '변덕스러워서 행하는 것에 일관성이 없는 것', 그리고 '침착함이 없는 것' 이런 뜻이 '뭇타'라고 하는 겁니다.
사띠를 하더라도 어떻게 사띠하라고? 현존하는 것!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라. 그래서 그걸 스님은 「잘 알아차려라」하고 풀이를 해놔놨습니다.
참, 우리는 욕심내고 화내고 질투하고 자기 잘났다고 막 내세우고, 그거 없으면 참 힘듭니다. 그게 살아가는 동력이다시피 합니다. 질질질 그것에 끌려가지고 삽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몰라. 그냥 거기에 끌려드는 거라. 그리고 진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될 것도 감정이 앞서가지고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는 거라.
지금 내가 뭘 해야 될지도 모르고 있다는 거라.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으면 말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듣고 있으면 듣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지금 해야 될 일들인데 지금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거라.
또 다르게 얘기하면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으면서도 만날 생각 굴리고 있습니다. 밥 먹으면서도 똑 신문 보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사띠가 될 거라. 안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걸 '알아차린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지 실제로는 딴짓하고 있는 거라.
그럼 나중에 보면 수행도 안 되고, 뭘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마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쁘니까 자꾸 그렇게 할라고 하는 거라. 실제로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이걸 '뭇타사띠'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적어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지금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당연히 여기 휴대폰 놔두고 가지는 않습니다. 건망증이 안 일어납니다. 내가 지금 휴대폰 놔뒀다고 분명히 아는데, 그걸 가져가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거라.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라.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고 그러죠? 그건 핑계입니다. 지금 현재의 것들을 내가 알아차리지 않은 겁니다. 지금 현재 것이 아니고 딴 걸 알아차리는 겁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알아차림이 강하면 기억력도 뛰어나집니다.
몇년 전에 기억해놓았던 것들도 뚜렷하게 기억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법문을 한번 해봐라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을 비유해서 뭐하지만, 스님들한테 할 거 같으면 아마 한 한달 동안 고생할 겁니다. 쎄가빠지게 적어가지고 하고 나서 나중에 법문하러 들어가서는 그것도 다 하지도 못해. 다 까먹어버리는 거라.
왜 그렇게 돼요? 사띠가 없어서 그러는 거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교수들 논문 한편 내라 할 거 같으면 보통 몇 달 걸려가지고 한 편을 냅니다. 그런데 잘 수행하는 스님들한테 논문 한 편 써내라고 할 것 같으면 그자리에서 그냥 주르르 써냅니다. 훌륭한 논문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될까?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게 머릿속에 그대로 인풋됩니다. 그대로 저장이 돼버립니다.
이 컴퓨터가 있습니다. 컴퓨터에 내가 워드를 열심히 치고 그것만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워드는 잘 저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가 만약에 여기에 바이러스가 탁 들어왔다. 아니면 이것저것 막 헷갈리게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이건 날아가버립니다. 이건 못쓰게 돼버립니다.
여러 가지를 하게 되고 불순물이 거기에 침투가 돼버리면 그것은 못쓰게 돼버립니다. 알아차릴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림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지금 일어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러면 불순물이 들어와가지고 못쓰게 되는 거하고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저장이 안되는 거라. 그걸 뭐하러 저장할려고 할 거라?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들을 분명하게,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잘 알아차려야 됩니다.
부처님 법은 그런 자의 것입니다. 만날 잊어버리고 흐리멍텅하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
여러분은 적어도 사띠를 할 때 그렇게 분명하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과거의 일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고, 미래의 일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고, 지금 현재 있는 것들에 마음을 집중해서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벗어나지 않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지금 현재 것에서!
그것이 '우빳티따 사띠'입니다. 지금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게 했을 때야 만이 마음에 불순물이 섞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저장이 돼나갑니다. 망상이 끼어들지 않게끔 주의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삼장이 경율론으로 돼있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저 뒤에 있죠. 한 전질로 저렇게 돼있습니다. 옛날에는 전부 암송해가지고 그걸 전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전했을까? 이런 알아차림이 없었으면 못해. 바르게 머릿속에 저장돼있기 떄문에, 그래서 언제든지 그걸 꺼내쓸 수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라.
그런데 요즘은 문자로 기록이 되죠? 그러니까 이걸 못하는 거라.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법문 들을 때 적을라고 하지 말아라. 법문 들을 때 스님 얼굴 이쁘다고 스님 얼굴 볼라고 하지 말아라. 그냥 귀로만 들어라.
바르게 사띠하는 법을 가르쳐주는데도 사람들은 그리 안 합니다. 뭘 자꾸 기록 할라고 그럽니다. 가지고 가서 그걸 보는지 안 보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래.
그러면서 연신 귀로는 듣고, 눈으로는 스님 얼굴 뚫어져라 보고 있고, 생각은 머릿속으로 막 굴리고 있고, 나중에 법문 뭐 들었는지 모릅니다.
데이터에 저장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저장하고 나서는 자기가 그 내용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암기를 하고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머릿속에 그냥 그대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대로 저장이 됩니다. 그게 자기 것이 되는데, 이 속에 아무리 들어가 있어봐야 이거 내버릴 것 같으면 자기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그럴려고 그러는 거라. 어떨 땐 보면 참 답답해. 그걸 천년만년 볼 것 같이 하지만 과연 돌아서 집에서 그거 한 번이나 더 읽을랑가 어떨랑가 모르겠습니다.
저장하십시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그대로 저장이 됩니다.
그게 바로 "이 법은 잘 알아차리는 자의 것이지, 어리석은 자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6. Samāhi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māhitassa;
(사마-히땃사-양 담모-, 나-양 담모- 아사마-히땃사.)
「이 법은 마음이 통일된 자의 것이지, 마음이 혼란스러운 자의 것이 아니다.」
그다음에 뒤에는, 사마디(Samādhi)라고 하는 겁니다.
사마디는 삼매를 얘기하죠? 마음 집중하는 것들. 사마디(Samādhi)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것에 기쁨을 수반한 집중력이 있는 것'을 얘기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나의 것'이 있다 하는 것마저도 버려버리고 집중되는 것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와 나의 것이 왜 버려지겠습니까? 기쁨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잘 경험하기 힘드는 것들이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 집중력이 잘못된 집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뭐로 가지고 판단하느냐면, 그 기쁨들이 변화! 변하고,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같이 행복감을 느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오롯하게 기쁨에 매달려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잘못된 집중이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분명하게 바른 사마디, 집중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기쁨을 수반합니다. 수반하는데 그런 기쁨들도 변하는 형태들을 띠고 있다는 겁니다. 기쁨이 즐거움으로 바뀌고, 평온함으로 바뀌고, 대상이 자꾸 바뀌어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걸 사마디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법은 마음이 통일된 자의 것, 사마디가 있는 자의 것이지, 마음이 혼란스러운 자, 산만한 자들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든지 집중력은 다 있습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듣고 있는 것도 약간의 집중력이 있기 때문에 들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이 일하는 겁니다. 마음이 일하도록 만들어주면 되는데, 그 마음이 일하는 것을 백퍼센트 일하도록 만들어주어야 되는데 백퍼센트를 안 만들어주는 거라. 약간만 만들어주는 거라.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백퍼센트 마음이 일하도록 만들어주라는 거라. 거기에 집중하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항상 마음은 침체되게 됩니다. 마음은 우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곳에 계속 머물러버리려고 그럽니다. 고정돼버리는 겁니다. 마음이 백퍼센트 일하게 할 거 같으면 그 일하는 것들은 자꾸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활기차게 되고, 그래서 사마디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됩니다. 깃털같이 가볍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를 내면 그 의도에 따라서 마음이 탁탁 갖다 달라붙습니다. 그 정도로 빨리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꾸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러버리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집중할 때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피곤해지지를 않습니다. 무거워버릴 것 같으면 마음이 피곤해집니다. 수행을 이렇게 열심히 할 때도 수행하고 나서 되게 피곤하다 할 거 같으면 대부분이 보면 집중하는 것이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상이 바뀌지를 않으니까 마음이 고정되고 무거워져버리니까 당연히 힘드는 것들입니다.
애 업고 가면, 깨어있는 애는 업고 가도 안 무겁습니다. 잠들어 있는 놈은 되게 무겁습니다. 마음이 흐리멍텅하게 머물러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뭘 하는지도 모르게 되고 또 마음이 흥분상태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집중을 하면 할수록 더 맑고 경쾌해지고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피곤한 것들을 모릅니다. 지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몸도 마찬가지고 피로도 회복되고, 마음도 에너지가 보충이 되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컴퓨터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금 전원이 꽂혀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계속 한 시간 동안 켜놔도 이거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녹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놈이 전원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있으면 이게 꺼져버립니다.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계속적으로 공급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바른 집중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마음이 통일된 자의 것, 사마디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마디는, 삼매는 그냥 삼매를 얻을려고 해서는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뭐로 얻습니까? 조금 전에 얘기했죠. 전원이 계속 공급이 돼야 됩니다.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있어야만이 이 화면이 그대로 사마디가 형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럼 화면이 그대로 고정되어가지고 사마디가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끊임없이 전원이 공급되어야 됩니다. 끊임없는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가능해지는 것들입니다.
수행하는 자는 사미디를 기를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사마디가 형성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삼매 개발할려고 합니다. 어떻게 삼매 개발하는지도 모르면서 가만히 있으면 삼매가 개발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거는 아닙니다.
바른 삼매를 개발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려주면 사마디는 저절로 형성이 돼나간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7. Paññāvato ayaṁ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a;
(빤냐-와또- 아양 담모-, 나-양 담모- 둡빤냣사.)
그다음 일곱 번째가, 「이 법(담마)은 지혜가 있는 자의 것이지, 무지한 자의 것이 아니다.」
지혜가 있는 자! 사실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무지한 자들입니다. 부처님의 법대로 할 거 같으면.
그러니까 지혜가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결정한 것도 번복하고 또 뭔가 잘못돼가지고 또 변경하고, 이렇게 자꾸 되는 거라.
그런데 참 더 어리석은 자들은, 그걸 주변적인 것에 좌우돼가지고 헤까닥헤까닥 자꾸 바뀝니다. 누가 뭐 한다고 할거 같으면 그말에 내가 홀라당 넘어가버리고, 누가 저기 기도 잘한다 할 거 같으면 거기 또 홀라당 넘어간다고. 주변 것에 더 휩쓸리는 거라.
자기 자신이 결단내려 가지고 아니다 할 거 같으면 변경하고, 또 아니면 그냥 밀어붙이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그나마 그래도 반은 지혜가 있는 자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주변 것들에다 그럽니다.
잘못된 것이라도 자기가 판단 내린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거 같으면 반은 성공을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현재 지금 지혜가 없으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해서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그것을 끊임없이 노력해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맞습니다. 그래야지 주변 것들에 자꾸 휩쓸려나가도록 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것은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지혜를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지식은 아무리 모이더라도 그것은 지혜를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오히려 지혜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특정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그거는 잘할지 몰라도 다른 것은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지식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개념적으로 머릿속에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의 개념을 자꾸 더 견고하게 쌓게끔 됩니다. 그래서 머릿속에 잔뜩 지식만 넣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혜롭게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뭘 하나를 배우는데 내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참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 그럴 거 같으면 참 좋죠! 수행한다 그러면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참 행복해지고 생활이 자꾸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나갈 거 같으면 참 좋은데, 그런데 수행을 하고 있는데 만날 마음은 괴롭고 힘든 쪽으로만 계속 흘러가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자기는 지혜를 지금 닦고 있는 게 아니고 지식을 닦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지혜는 어떤 경우든 닦으면 닦을수록 모든 것들이 다 동일하게 밝아지고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그러죠. 모든 것들을 아는 것. 지혜에 인해서 가능한 겁니다. 지식으로 인해가지고는 일체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지혜가 있는 자가 되려고 해야지, 지식이 있는 자, 더 나아가서 무식한 자가 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씩 부처님뿐 아니라 스님도 법을 설할 때, 지혜를 개발해주기 위해서 설하는 것보다 지식적인 부분을 전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지식적인 것들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지혜로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지혜를 개발하라. 말은 쉽지 뭘 어떻게 개발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아갈까? 만날 스님들이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돼! 지혜가 있으면!" "실제로 뭘 어찌 지혜를 있게끔 하는데?" 하면 말을 못합니다.
수행하는 자는 그러겠죠. "무조건 수행만 하면 돼!" 어떻게 수행하는데? 잘못된 수행하고 있으면서 자기 거는 다 옳고 다른 건 다 틀렸다고 하면서 그걸 수행한다고 하고 그걸 지혜있다고 그럽니다. 참 어리석은 것들이라는 거라.
적어도 지혜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지식적으로 '아, 무상한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남을 비방하지도 않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남을 비방할 게 뭐 있어? 그리고 변하는 것들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도 변하는 것들이고 남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변하는 것들인데 그거 변하는 것에 뭘 자꾸 틀렸다 맞다 시시비비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서 지는 지혜있다고 그러는 거라. 참 무지한 자들이라.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시켜줄 때는 지식적인 부분으로써 인식을 시켜줍니다. 그것이 밑바탕이 될 때, 그것에 대한 이해들이 될 때, 지혜를 개발해나가게 되는 거고.
보통 법을 설한다고 할 때 데사나(desanā)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빠리야야 데사나(pariyāya-desanā) 라고 하는 것이 있고,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 그 자체를 직접 말하는 것" 진리를 어떻게 직접 말할 겁니까?
무슨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뭐를 가지고 합니까?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행동하고 말하고!
제가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그런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을 하는데 화가 나는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않고 똑같은 말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거라. 한 시간 동안! 몸소 보여주는 거라. 그게 몸소 진리를 나타내보이는 거라.
'부처님이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닙빠리야야 데사나' 입니다.
스님들이 행동하고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바른 법을 설하고 수행을 잘 지도한다고 하더라도, 만날 화를 내쌌고 만날 알아차림도 없이 뭐 그냥 해쌌고 만날 뭐 변경해쌌고 이럴 것 같으면 그거 못 믿는 거라.
몸소 나타내 보이는 것들.
나는 깨달았다 하면서 개차반으로 산다든지, 막행막식 한다든지 거 못믿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얘기라. 반증이 있는 거라.
그다음에 또 데-사나-(desanā) 라는 것들이 뭐냐 하면
'빠리야-야 데-사나-(pariyāya desanā)' '말로써 분명하게 전해주는 것'
'고는 이런 것이다' '무상은 이런 것이다' 하고. 그런데 그걸 알려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상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원인이 돼서 무상을 자기가 직접 체험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것도,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것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르쳐주는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법을 전해주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걸 알아들을 거고, 어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왜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자기가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지식적인 것들을 잘 받아들여가지고 그것을 자기가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게 지혜가 돼버립니다. 그래야만이 그런 자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은 '닙빠리야야데사나'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형태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죠? 만날 수행하러 간다고 하고 가면서 만날 화만 내쌌고, 그럼 누가 그거 수행한다고 하겠어? 몸으로 나타내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오늘부턴 그러면 안됩니다 이.
8. Nippapañcārāmassāyaṁ dhammo nippapañcaratino,
nāyaṁ dhammo papañcārāmassa papañcaratinoti.
(닙빠빤짜-라-맛사-양 담모- 닙빠빤짜라띠노-, 나-양 담모- 빠빤짜-라-맛사 빠빤짜라띠노-띠.)
「이 법은 번뇌 망상 없음을 기뻐하고, 번뇌 망상 없음을 즐기는 자의 것이지, 번뇌 망상을 기뻐하고, 번뇌 망상을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것이, 「이 법은 무위를 기뻐하고 무위를 즐기는 자의 것이지, 유위를 기뻐하고 유위를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니다.」
무위(無爲), 유위(有爲) 밑에 적어놨죠? '현상을 극복한 진리-닙바나', '현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망상의 세계'.
닙바나를 무위라고 그럽니다. 열반! 그렇지 않는 것은 유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망상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들이 유위입니다.
여러분들은 망상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망상의 세계라는 것은 망상만 피우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내는 개념들입니다.
자! 여기 한 번 보십시오. 여기 있는 스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진용 스님 그러죠? 이거는 개념입니까, 아니면 진리입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개념을 만들고 있네? 그게 유위입니다. 개념으로 보이는 것들.
그런데 깨달은 자들은 개념으로 보질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써 구분해서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진용스님이 오늘 법을 설하지 않고, 뭐 사람이 몇 명 오지 않았다 해서 너희들이 알아서 그냥 수행해라 할 것 같으면 성질 바락 납니다. 왜? 개념으로 자꾸 듣기 때문에.
그걸 빠빤짜(papañca)라고 그럽니다.
자기 혼자 만든 세계에 갇혀있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갇혀 삽니다. 그렇죠? 인간은 인간의 세계에 갇혀 살고, 꽃들은 꽃들의 세계에 갇혀 살고, 또 동물들은 동물들의 세계에 갇혀 삽니다. 그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갇혀 살더라도 남의 것들이 잘못됐다고 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동물의 세계는 동물의 세계대로 이해를 해줘야 되는 거고, 꽃의 세계는 꽃의 세계로서 이해를 해줘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이해를 안 해주면 어떻게 돼요?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는 거라. 그걸 이해를 해줘버리면 그 세계로부터 빠져나갑니다. 그게 무위의 세계입니다.
자기 스스로 날조된 세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거기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개념화된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유위의 세계입니다. 그 유위의 세계들을 개념화된 것들로써 보면 안됩니다. 무위의 세계로써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한정된 자기의 주관적인 세계에 갇혀 있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게 부처님이 얘기한 "무위를 기뻐하고 무위를 즐기는 자가 되라. 유위를 기뻐하고 유위를 즐기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무위, 해탈을 목표로 해서 자꾸 나아가는 자가 되도록 하라는 겁니다.
이게 여덟 가지 항목입니다.
이렇게 잘 기억해서 그 길을 걸을 때 여러분들은 독립된 인간, 위대한 인간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걸 테라와다 불교국가 사람들은 자주자주 읽습니다. 일반인들도! 그래서 자꾸 되새깁니다.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자꾸 되새겨야지.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지 않고 코뿔소의 뿔과 같이 똑바로 자꾸 걷도록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걸 자꾸 거울 삼아서 아!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이게 불교의 길이구나! 이것이 내가 나아가야 될 길이구나! 하고 판단들을 해서 그 길 따라서 자꾸 실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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