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달빛은 차별 없이 비춘다 (20120217)

담마마-마까 2021. 6. 25. 09:05

https://youtu.be/W7qi5KqEGng

* 달빛은 차별 없이 비춘다 (20120217)

 

오늘은 상응부 경전에 나오는 원류경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달은 특정한 곳만 비추지는 않죠? 어디든지 다 비춥니다. 그리고 달이 그렇게 비춰준다 해서 우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달빛 자체는 어떤 특정한 것들을 마음에 들어해서 거기만 특별히 비춰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그대로 비춰줄 뿐입니다. 어떤 곳이든지!

단지 인간이 그 달을 보면서 보름달이 떠있구나 할 거 같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물론 들뜨기도 하지만. 그 달을 보면서 평온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수행을 열심히 할려고도 하고 그렇게 되어나갑니다.

 

부처님이 원류경을 설했던 것은 출가한 스님들이나 수행하는 자들은 그와 같이 되라 하는 의미에서 얘기를 한 겁니다.

 

여러분은 사람 차별해본 적 있습니까? 특히 집에 애 둘이 있을 거 같으면 차별하죠? 안 하는 것 같아도 차별을 합니다. 애 혼자가 있어도 내 아이하고 다른 아이하고 차별을 하게끔 됩니다. 차별하는 것들이 없으면 참 좋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맞다고는 얘기를 못합니다. 차별하는 것들이. 그래서 부처님이 이 경을 아마 설했던 것 같아요.

 

내 아이나 다른 아이들을 볼 때, 특히 출가한 스님들은 일반인들 재가자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냐면 "저 절벽 끝에서 낭떠러지를 바라보듯이, 그리고 깊은 우물 속을 보듯이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굉장히 조심하지 않으면 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리고 깊은 우물이라 하더라도 두려움을 일으키게끔 합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해야만이 출가한 자들은 세속의 일들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게끔 된다는 거죠.

 

재가생활 하시는 분들은, 특히 수행하시는 분들은 밖의 대상들을 볼 때 그렇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내 아이이든 아니면 수행의 대상에서 호흡이든 어떤 것이든 그런 식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끌려 들어가지 않게끔 자신을 그 대상과 분리해서 볼 수 있게끔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일차적인 것들입니다.

 

대상을 볼 때는 그와 같이 하라. 3자의 입장에서 머리 떨어뜨려서 보도록 하라.

출가한 스님들이 재가자를 대할 때 그렇게 멀찍이 떨어뜨려서 보는 거와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자들은 대상을 볼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하라 하는 거라. 그게 깊은 우물을 보듯이, 낭떠러지의 끄트머리에서 밑을 보듯이 하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주의 깊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부처님이 얘기했던 겁니다.

 

두 번째 얘기했던 것이 뭐냐면, 몸을 정돈하고, 마음을 정돈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을 정돈하는데 몸을 정돈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필요하냐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님도 여기서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떨 때는 아침에 세수를 하기 싫어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머리를 깍고 있으니까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별로 구분이 안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수를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세수를 하고 나면, 그날은 일상적으로 생활을 하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욕심이 일어나지도 않고 수행뿐 아니라 다른 일들도 잘되어나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게으름에 져가지고 어제 세수했으니까 오늘은 눈꼽만 떼고 세수를 안 하고 그냥 지냈다 그럴 것 같으면 마음도 편안해지지를 않습니다. 마음도 정돈이 안됩니다. 마음만 편안하게 정돈하고 마음만 고요하게 하면 되지 몸이 무슨 소용있겠나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해서 삼매에 이른다든지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으로써 정리정돈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계를 지키고 말과 행동을 하는 것들을 조심해서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겨울이니까 아마 좀 게으름지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먼저 수행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몸을 먼저 바르게 하십시오. 아마 오늘 여기에 화요법회 인줄 알고 있으면서도 늦게 온다든지 아니면 안 오는 분들은 몸을 정돈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늦어져버리게 되는 겁니다.

반드시 몸을 정돈하고 마음을 정돈하도록 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을 대할 때 오래도록 만나왔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대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들도 대상을 만났을 때는 처음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닛짜 나와까' 그럽니다. '항상 새로운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라' 그럽니다.

대상을 새로운 것으로 대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은 고정화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보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새로운 것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하게됩니다. 그런데 항상 해왔던 것들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대상에 마음이 고정돼버립니다.

물론 고요함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속에서 부처님이 말한 세 가지 특성이 잘 드러나지를 잘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대할 때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생각을 하고 대해야 됩니다.

 

스님들도 재가자를 대할 때 처음 온 사람으로 대할 거 같으면 조심하게 됩니다. 말도 조심하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그리고 그 처음 온 사람들에 대해서 열심히 여러 가지 부처님 법에 대해서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그와 같습니다.

수행자들은 대상은 항상 새로운 겁니다. 실제적으로. 그런데 그걸 새로운 것으로서 인식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대상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이 뭐라고 하느냐면 '압빠갑보(appagabbho)' 라고 그럽니다.

어떻게 보면 좀 소극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려라는 거와 마찬가진데, 출가한 스님들은 그렇습니다. 나이가 드신 출가한지 오래된 스님들이 얘기했을 때는 그 말머리를 자르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이 다 끝나고 나서 반드시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은 출가한 스님들은 죄가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밑에 있는 스님이 능력이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말머리를 자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 스님을 대신해가지고 자기가 나서서 뭘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용인을 하질 않습니다.

바르게 수행을 한 스님들이나 아니면 바르게 공부를 한 스님들은 자기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 스님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해보시오" 하고 말하기 전에는 침묵합니다. 그로 인해서 스님들 간에 화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뭔가 새로운 것들을 아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수행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 하고는 반대로 가기 때문에 이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대부분 그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놀라거나 아니면 몸과 마음이 갑작스럽게 반응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새로운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너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그것이 뭔가 하고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단지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하고 받아들여라. 그게 압빠갑보 라고 하는 겁니다.

절대로 마음을 흥분상태에 이르게 하지 말고, 마음을 대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서, 그 대상은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하고, 그래서 그 일어난 현상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아래 스님이, 손위 스님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거와 마찬가지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스님들은 한 스님이 얘기할 때 다른 스님이 동시에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스님들이 모여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말하는 스님은 한 스님이라. 이 스님 말이 끝나고 나면 다음 다른 스님이 얘기하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출가한 스님들의 세계에서는 참 조용합니다. 여러 스님들이 토론을 하고 있어도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질문을 차단하지도 않고 끼어들지도 않고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이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행의 대상은 그와 같습니다. 하나의 대상이 끝나고 나서 다음 대상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동시에 두 개의 대상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의 대상만 마음이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신 사납습니다.

내 마음이 두 개의 대상을 알아차린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마음이 들뜨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가 분명하게 끝나고 하나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깟사빠 장로가 아난다 장로에게 항상 꾸지람을 했던 게 있습니다.

아난다 스님은 마하깟사빠 스님이 은사 스님입니다. 마하깟사빠 스님에게 출가를 했으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시킨 거죠. 그래서 마하깟사빠 스님은 은사의 입장에서 이 아난다 스님에게 항상 질책을 많이 합니다. 그 질책하는 내용이 대부분이 뭐냐면 너무 번잡스럽다는 거라. 물론 부처님을 시봉하고 있으니까 여러 사람들을 접해야 되고, 여러 가지 일정을 조정해야 되고, 부처님도 시봉을 해야되고 하니까, 번잡스러운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마하깟사빠 존자가 번잡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번잡스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번잡스럽다는 겁니다. 아무리 행위가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거 같으면 번잡스럽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손을 허공에 대고 이렇게 움직이고 손을 이렇게 털어도 어떤 곳에도 부딪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손을 딱딱한 이런 나무에다가 털거나 할 거 같으면 부딪치게 된다는 거라. 당연히 소리가 난다는 거라.

마음이 자유롭게 돼있고 마음이 어떤 곳에도 걸리지 않을 거 같으면 소리가 나질 않는다는 거라. 부딪치질 않으니까. 그런데 마음이 어떤 것에다 기울어져 있다든지, 마음이 어떤 것에 고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손을 털 경우에는 소리가 난다는 거라.

 

마음을 항상 자유롭게 만들어라 하고 아난다 스님한테 얘기합니다.

생활을 하다 보면 대부분 그렇게 안됩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자유롭게 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거라? 아무리 바쁘고 하더라도 마음이 자유롭게 되지 않고 하면 부딪쳐가지고 소리가 나는데. 부딪치고 소리가 나가지고 좋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쁜 말이 나온다든지 나쁜 생각을 한다든지 나쁜 행위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자꾸 말을 할 때나 행동을 할 때는 돌아보라는 거라, 아, 내가 지금 마음이 자유로운가? 고요한가? 하는 것을 돌아보고 그렇지 못할 거 같으면 그 행위를 중단을 하라는 거라.

 

번잡스러운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아난다 존자는 그렇게 완전하게 마음이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마하깟사빠 존자가 보면 항상 뭐라 하는 거라.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느냐는 거라.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는 거라.

실제로는 복잡한 것도 마음이 복잡한 거고 힘든 것도 마음이 힘든 겁니다. 마음이 어떤 경계에도 부딪치지 않고 마음이 어디에도 붙잡히지 않고 자유로울 거 같으면 힘들고 복잡하지를 않습니다.

수행할 때는 항상 마음이 자유롭게 되도록 만들어주기 바랍니다.

 

수행에서 필요한 것들은 이겁니다.

이게 인제 부처님이 달에 비유해가지고 출가자들을 경책한 것이고, 또 일반 수행자들을 경책한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 다음으로 가장 위대했던 분을 꼽으라 할 것 같으면 보통 이 마하깟사빠 존자를 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입멸 후에 첫 번째 결집을 시도하게끔 되고.

그런데 부처님이 항상 이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항상 누더기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 옷은 다 해지고 했으니까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라. 동굴 속에서 만날 생활하기 힘이드니까 대중들이 살고 있는 처소에 내려와서 살아라. 먹는 음식도 항상 불가촉천민에게만 가서 탁발하니까 음식이 기름지지 못하니까 그런 걸 가리지 말고 탁발을 하고 누가 공양청이 있으면 공양청도 받아라. 그리고 인제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으니까 내 옆에서 있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해가지고 말을 듣지 않는 스님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유일하게 이 마하깟사빠 존자는 그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거기서 오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 마하깟사빠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동굴 속에서 살고, 탁발을 해도 아주 어려운데 가서 하고, 그리고 그 누더기옷 그것으로 살려고 하고, 대중들이 있는 곳에 있지 않을려고 하느냐?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러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마하깟사빠 존자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선 나에게 이익이 있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거라.

실제 여러분들이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좋은 일 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많이 하게끔 됩니다.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말을 하게 되면 또 행동을 하게 되면 나쁜 행위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거 안 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나쁜 행위들을 더 많이 하게끔 됩니다. 어느 정도의 수행의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그것은 누구든지 겪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인 마하깟사빠가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그런 생활을 함으로 인해서 이익이 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어울려 있다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보여준다는 거라. 그런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리고 두 번째 이익은 이 이후에 계속적으로 출가한 스님들도 이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리지 말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 4가지 의지해야 될 것들을 잊어버리는 순간 출가자의 생활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지금 현재는 탁발을 할 수가 없고, 지금 현재는 누더기옷을 입고 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을 잊어버리는 순간 맛있는 걸 먹으려고 하게 되고, 좋은 옷을 가질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하깟사빠 존자는 내가 이렇게 살아감으로 인해서 다음에 계속적으로 출가하는 스님들이 그 기본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만드는 이익이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나에게 지금 당장 이익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고 알아차리면 알아차릴수록 분명하게 대상을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악을 행하는 것들이 점점 적어지고 선한 행위들을 하고 선한 말들을 하고 선한 마음을 품게끔 됩니다.

나의 그런 행동들을 보고 주변에 사람들이 그와 같이 따라가는 이익이 있도록 해야 됩니다. 나의 가족들이 엄마 아빠가 수행하는 모습들을 보고 나도 저렇게 수행해야 되겠다. 그리고 참 좋은 엄마 아빠다 하고 본을 받을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끔 돼야 된다는 겁니다.

 

수행을 하는 이익은 그와 같아야 됩니다. 나에게만 이익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도 이익이 있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잘 해나갈 경우에는 그와 같은 이익들을 반드시 얻게끔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압삣초(Appiccho)' 작은 것에 만족할려고 하게 되고, '산뚯토(santuttho)' 만족할 줄 아는 삶들을 살려고 자꾸 노력해야 되고, 그리고 '빠위윗또(pavivito)' 라고 해서 혼자서 고요하게 자꾸 수행할려고 하는 그런 생활들을 자꾸 이어나갈려고 해야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항상 반성하고, 무서워 할 줄 아는 것, 내가 행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마음 품는 것에 대해서 아, 이런 것들이 이런 행위들이 얼마만큼 무서운 결과들을 가져오고 아, 이런 것들로 인해서 내가 얼마만큼 반성을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자꾸 마음을 품어야 됩니다.

히리 옷땁빠(hiri-ottappa)라고 그렇게 애기합니다.

 

그리고 항상 노력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을가 져야 됩니다. 또한 선한 일들을 더욱더 자꾸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혜를 가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갖추어지게 될 때 수행은 점점 무르익게 되고, 마음이 증장하게끔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없게끔 마음은 점점 더 왜소해져버립니다.

아! 이 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반성할 줄도 모르고 무서워 할 줄도 모르고 게으름 피우게 되고 또 어리석게 행동을 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고, 원한을 가진 것들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게 되고, 그리고 바른 것들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점점 더 퇴보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조건들을 갖추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믿음을, 믿음이라는 것은 확신입니다. 내가 수행으로 인해서 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고요해지고 행복해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그런 확신들을 자꾸 가질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반성하고 두려워할 줄도 알게 되고, 그래서 몸과 말과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게끔 됩니다. 열심히 살아갈려고 하고, 그리고 지혜롭게 살아가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승에서 그래도 잘 살아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에서 진척이 있게끔 됩니다. 잊어버리지 않고 자꾸 수행하는데 방편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