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멋짐의 조건_지혜롭게 사는 방법 (20120317)

담마마-마까 2021. 6. 29. 08:56

https://youtu.be/73AX6jFxFpw

* 멋짐의 조건_지혜롭게 사는 방법 (20120317)

 

어떻게 살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좀 멋지게 살까? 어떻게 살면 될까?

연경이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보자.

테레비에 나오는 가수나 배우나 보게 되면 되게 멋있게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죠? 인제는 연경이도 나이가 있으니까 20대 후반이니까 그런 생각을 잘 안하겠지. 그런데 어린 학생들은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그게 멋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스님이 대학에 다닐 때에는 어떤 게 멋있었느냐면, 사회에 대해서 데모라는 형태로 뭔가를 부르짖고, 그때는 광주사태도 있고 막 이러던 때니까. 그래서 뭔가 내 잘난 체를 해야 멋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대학생들이 이렇게 많지도 않고 하니까 지성인이라는 표시를 그렇게 해서 나타냈어요. 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하고 그리고 날 알아주시오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막 드러내고 하는 것들을 했었거든.

 

그런데 지나놓고 와서 보니까 물론 그 사상이나 이런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잘 산 것 같지는 않아. 그게 멋있게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고 그것을 후회하고 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나이 또래는 잘 몰라. 지나놓고 보면 ‘아, 그것도 아니었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사회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멋있게 좀 잘 살려고 할 거 같으면 돈을 많이 모으고 이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고,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가들도 있겠죠. 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건강해질려고 그렇게 하고, 아니면 뭐 정치가나 '사'자 붙은 사람들은 조금 더 직급이 올라가든지 명예가 올라가는 것들을 멋있게 잘 살아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 스님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 돌아봤을 때 '아! 그거 별 거 아니었다' 하고 대부분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그렇게 평가하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평가를 할까?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육체적인 외모를 가지고 부처님이 평가를 할 거 같진 않죠? 그건 틀림없죠!

왜 그럴까? 왜 외모 잘생겼으면 멋있게 보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평가를 할까?

 

이 육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맞습니까?

내가 하는 일은 이 육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행하고 하는 것이지 육체가 알아서 자기가 하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육체가 뭔가를 할 거 같으면 내가 죽고 나서도 몸이 뭔가를 해야 되겠지? 그런데 그렇게 하진 않죠. 잠잘 때도 마찬가지고.

적어도 내 일이고 내가 살아가는 건데, 내가 하는 일조차도 모르는 육체라는 것은 별로 크게 뭐 잘난체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육체는 자신을 속입니다. 여러분들을 크게 속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감기가 초기에 들어올 때 탁 아는 사람 있어요? 잘 없습니다. 감기가 걸리고 나서 아이고 콧물이 나니까 감기에 걸렸다고 압니다. 병도 암이 걸리고 나서 알지 암이 처음 탁 생길 때 그걸 알지를 잘 못합니다.

몸은 교묘하게 자신을 속입니다.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를 않습니다.

몸만 그런 게 아니고 마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깨끗이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그렇게 합니다. 불결한 것들을 감출려고 하고, 또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을 자꾸 씻어주면 더럽지 않을까봐 자꾸 씻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안 더러워질 수가 없죠?

오늘 이렇게 선원에서 수행하고 집에 들어가 봐요. 얼굴을 닦아보면 얼굴에 뭐가 잔뜩 묻어있습니다.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건데도 우리는 그걸 감출려고 자꾸 노력합니다. 마음만 감추는 게 아니고 육체도 스스로 그렇게 감춥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그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면 감기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감기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이상이 생기는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보통 불교에서는 육체를 평가할 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재산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자식도 꼭 마찬가집니다. 물론 재산이 많고 자식들이 화애롭게 그리고 조화롭게 잘 산다고 할 거 같으면 참 좋은 일이죠.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돈이 많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나누어 줄 수도 있고, 또 자기가 마음이 편하게 좀 더 잘 살 수도 있고, 참 좋은 일이긴 좋은 일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 뒷편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은 모였으면 항상 있지 않고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자랑할만한 꺼리라서 화애를 한다고 하더라도 싸울 때도 있는 거고, 그리고 그 자식들도 나로부터 떠나가게 돼 있는 거고.

그래서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그 뒷편을 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꼭 그것들이 자랑을 해서 내세울만한 것들은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면 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를 합니까?

'저 사람 참 멋진 사람이다. 잘살고 있다' 하고 평가할 때는 여러분 뭐를 가지고 평가합니까? 마음을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내느냐? 어떤 마음으로 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평가를 하지 않고 육체나 아니면 재산이나 가족이나 이런 것들로 평가를 하게 되면, 그걸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혐오에 빠지게 되고, 또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차별할려고 하게 됩니다. 평등하게 모든 사람을 볼려고 하는 것들은 되지 않는 거죠. 그런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전에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요다지와 경」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도 월남전 갔다 온 사람들은 월남전 영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6.25사변 기념일이 되면 각국의 전쟁 참전했던 사람들을 초대해가지고 여러 가지 행사도 하면서 영웅과 같이 대접을 해줍니다. 아마 세월이 한참 지나도 이런 패턴들이 이어지겠죠. 그전에 옛날에도 꼭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던 모양이라요. 나라를 위해서 나가서 싸우고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장한 일이라고 생각들을 했습니다. 이 요다지와 라고 사람이 자기도 그런 군인인데 부처님한테 와서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친척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가지고 적을 무찔러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그 사람은 영웅과 같이 대접할 뿐아니라 그 사람이 설혹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그게 맞습니까?”

 

월남전 전쟁 치뤘던 분들은 돌아가신 분들인데 천상에 태어났을까?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고? 아니면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맥아더 장군도 천상세계에 태어났을까? 확신할 수 있어요? 못하죠? 그렇다고 안 태어났다는 확신도 못하죠?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천상에 안 태어났다!”

왜 그럴까? 전쟁에 나가서 내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을 죽여야 됩니다. 적을 무찔러야 되고 그래야만이 내가 살아남습니다. 적을 무찌르고 죽일려고 할 거 같으면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그리고 죽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죽일 수 없습니다. 그거는 틀림 없죠?

“마음을 그렇게 먹은 사람인데 어떻게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살인을 하고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인데. 오히려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그 사람은 살아서 전쟁영웅이란 칭호를 받았든 어쨌든 간에 죽고 나서는 만약에 그것이 원인이 돼서 다음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당연히 지옥에 태어나야 맞지않느냐.”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아니야. 그런 사람들 다 천상에 태어났어" 하고 말하고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도 오히려 그 나쁜 견해로 인해서 그 사람도 틀림없이 지옥이나 아니면 그것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축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난 오히려 그렇게 본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오히려 더 맞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연경이가 좋아하는 가수나 연예인이 있다. 그러면 그 가수나 연예인들도 죽으면 천상에 태어날까?

예를 들어보자. ㅇㅇㅇ 씨 같은 경우에는 선행도 많이 합니다. 이번에 보니까 평창 땅도 기부하고, 그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좋은 일들을 많이 했으니까 천상에 태어나야 될 거 아니라. 그리고 ㅇㅇㅇ씨는 어쨌든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줬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상에 한 일이 많으니까 천상에 태어나야 될 거 아니라.

 

“부처님 맞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다른 경우입니다 이. 과연 그럴까? 부처님이 거기서도 아니라고 그러거든.

남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여러분들은 어떨 때 즐거웁고 기쁩니까? 부처님 말씀 아무리 해줘봐야 거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열명 중에 한명 정도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이 즐겁고 기쁜 일들은 뭐가 있어요? 별 의미도 없는 얘기라도 막 떠들고, 우스개소리 하고 그리고 술 한잔 하고, 뭐 감각적인 것들 찾아서 노래방이라도 가서 노래들 하고, 이래야 즐겁고 기쁘다고 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연예인들이 우리에게 즐겁고 기쁨을 줄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부분을 섞어야만이 사실은 가능한 겁니다. 진실만을 얘기 해가지고는 절대 우리를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보면서 하하 웃는 사람 별로 없어. TV오락프로그램 보면 하하하 웃거든. 그거는 뭐냐면 사실과 그리고 픽션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까? 쉽게 말하면 적절한 거짓말을 섞어야만이 쉽게 말하면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사람을 즐겁게도 합니다.

 

그러면은 말하는 자신은 거짓말한 것이 죄가 되고, 또 사람들에게 욕구를 잔뜩 일으키게 해서 그 욕구에 속박되도록 만들고, 그리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게끔 만들고, 드라마 보면 그러지 않아요? 드라마 주인공에 따라서 슬퍼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그걸 일으키게 흥분을 하게끔 만듭니다.

그런 행동을 일으키게 했으니까 당연히 부처님이 봤을 땐 그런 연예인들은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나지 못한다. 당연히 그렇게 했으니까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지옥 아니면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맞지않겠느냐?

그마만큼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쁘고 즐거움을 느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은 보면 나중에 지나고 나서는 크게 멋있다고는 얘기를 안 하는 부분들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도 그런데, 천상에 있는 신들은 어떤 인간을 보고 "참 멋진 자다! 멋있게 잘사는 자다!" 하고 얘기를 할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첫 번째가 부모님을 잘 모시는 자.

천상세계는 물론 천상세계 각각 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보면 부모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부러워? 인간 세상에 부모님들 모시고 다정하게 살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 굉장히 부러워합니다.

외국 사람들도 옛날에 한국을 보면, 요즘은 좀 덜하지만 굉장히 부러워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부모님하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잘 안 하거든. 그런데 그 모습을 부러워한다는 거라. 천상세계 신들도 아마 그랬던 모양이라. 부모님을 모시는 건 잘 모시든 못 모시든 간에 모시고 살고 그래도 밥이라도 같이 먹고, 아니면 가끔씩 기념일이나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면 꼭 챙기면서 가식적이든 어쨌든 간에 부모님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서 살고 이런 사람들 보니까 아, 참 존경스럽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손위 사람을 존경하는 자.

나이가 한살이라도 더 먹었든지 아니면 나보다도 부처님 말씀을 먼저 배운 자들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것.

이게 무너지면 사회가 참 힘들 거라. 하극상들 자꾸 일어나고 니가 뭘 아느냐 해쌌고 할 것 같으면 만날 다툼만 있지, 그게 아귀 세상과 마찬가지지 인간 세상이라고 하겠어요?

그런 인간 세상은 손위 사람들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따뜻한 것들이 있고 물론 다이나믹하기도 하지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그런 모습들을 보고 천상세계 신들은 부러워하는 거라.

 

그다음 세 번째가, 상냥한 표현을 하는 자.

말을 해도 툭툭 내뱉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상냥하게. 마음속에서 자애로운 마음이 있고 그사람을 보면 “아이고 참 고맙습니다” 하고, 그사람을 보고 “아이고 참 반갑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처음 본 사람이든 아니면 오래도록 본 사람이든 그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도록 하라는 거라. 어려운 부분이긴 한데, 그렇다고 크게 어려운 부분은 아닙니다. 그렇죠? 저번에 그래서 무디따 부분을 얘기를 했던 겁니다. 상냥하게 자꾸 말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거짓말하지 않는 자들.

아무리 자식에게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면, 욕심부리지 않고 서로 나눌려고 하는 자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진실을 말하는 자들.

그다음 일곱 번째가, 성냄을 이기는 자들.

 

여러분들 다른 것들은 대부분 할 수 있을 건데, 성냄을 이기는 건 참 힘이 들 겁니다. 그렇죠? 그리해도 이걸 이겨내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스님도 전에는 참 성을 많이 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성을 내지 않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은 것이 뭐냐면, 태국이나 이런 데서는 스님이 성을 내면 중 취급을 안 해줍니다. 아예 같이 얘기조차도 안 할려고 합니다. 또 같이 절에 있을 거 같으면 성내는 사람이 있을 거 같으면 난 저 사람하고 같이 머물 수 없다 하면서 떠나버립니다. 저쪽에서. 그마만큼 성낸다는 게 해롭다는 것을 아는 거라. 그래서 성냄의 해로움을 자꾸 알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성냄을 극복해서 성냄에서 이기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혀를 깨물든지 아니면 몸을 꼬집든지 뭘 하든지 간에 성이 날 때는 성을 내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냄을 극복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를 잘 행하는 자들을, 천상세계의 사람들은 "아, 참 그 사람은 멋지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크게 어려운 부분은 아니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제석천은 그런 것도 다 필요 없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뭘 존경하느냐 하면,

 

올바른 방법으로 가장이면 가족을 책임져서 살아가는 재가자.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올바른 방법으로, 차라리 그게 적게 버는 일이든, 아니면 그게 다른 사람들이 혐오하는 일이든 간에, 올바른 방법으로 내가 일한 만큼 벌고, 내가 바른 방법으로 벌고, 또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재가자들.

 

그리고 나쁜 일들을 하지 않는 자들.

쉽게 말하면 조금 전에 스님한테 오계를 받았죠? 계율을 잘 지키고, 거짓말하지 않고, 또 내가 남의 여자 안 쳐다보고, 또 살인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도 먹지 않고, 이렇게 도덕적으로 선한 방법으로 그걸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자.

 

그러면서 남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무조건 절을 하겠다.

제석천이 그럽니다. 신들의 왕인 제석천이 그럽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 세 가지만 지켜나가면 만날 제석천이 조석으로 여러분들한테 “고맙습니다” 절을 한다는 거라. 진짜!

 

-- 짜 뿌-자니--(Pūjā ca pūjanīyānaṁ), 존경해야 될 분들을 존경한다.

존경받을 만 하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제석천이지만 존경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존경할만한 분들은 틀림없이 존경을 합니다.

그분이 스님이든 아니면 일반 재가인이든 아니면 여러분들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사람이든 존경할만한 일을 하고 존경할만한 분이면 존경하라는 거라.

나를 내세우고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저 사람보다 많이 배웠는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부분이라? 오히려 그 사람이 하는 것들은 나보다도 훨씬 존경할만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럼 존경하라는 거라.

 

그런데 존경받는 대상이 되는 분들은 조심을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존경만 받다 보면 "에헴"하게 됩니다. 특히 스님들. 아주 보살님들이나 거사님들 보기를 아주 우습게 봅니다. 사실은 자기가 그 보살님들이나 거사님들 보다도 훨씬 못할 경우들이 많은데도 아주 우습게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느냐면 "오래도록 살고 싶고 건강하고 싶은 사람에게 청산가리를 먹이는 거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존경받는 일을 하는 존경 당하는 자는 청산가리를 항상 지니고 먹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라. 굉장히 조심하지 않으면 그 존경받는 자리에서 자기는 잘못된 것들을 행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다는 것, 그게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존경받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반드시 판단을 해야 됩니다.

남이 나를 존경하든 존경하지 않든 그것은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니고, 나는 단지 존경받을 수 있는 일들을 계속 해나가면 되는 거라.

 

제석천이 그런 재가자들에게는 아까 얘기한 세 가지들을 행하는 재가자에게는 항상 조석으로 존경의 예를 올리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석천이 이 방에서 착 나가면서 어디다가 절을 하고 가느냐면 상가, 스님들이 있는 곳에다가 탁 절을 하고 가거든.

그러니까 맛달리라고 하는 마부가 제석천을 모시고 다니는 마부가, 조금 전에는 제석천님이 자기가 분명한 방법으로 바르게 가족을 부양하고, 계율도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 그런 재가자들한테 존경의 예를 올리겠다 이래놔놓고, 와 스님들한테 왜 절을 올립니까? 저 스님들은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썩어 문드러질 몸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천상세계는 안 그렇거든. 죽기 직전까지도 썩지 않고 늙지도 않고 미소년 형태로써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썩을 몸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구더기가 바글바글한 그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 몸을 지니고 살고 있다는 거라. 이 몸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얼마나 병균들이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그거 지니고 좋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만날 하루 한끼만 먹으니까 얼마나 배는 고플 거라. 아이고, 밥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런 스님들, 그리고 여기 있는 스님도 마찬가지지만 집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번듯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집도 없는 거지 같은 저 분들에게 뭐 좋다고 거기다가 제석천님이 절을 하고 나가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왜 제석천이 그렇게 절을 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또 뭐 저장해 놓고 있는 창고도 없고, 스님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는 통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통장이라는 거는 보통 보면 십만원 이십만원 이상 총금액이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통장 잔고가.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저장할 수 있는 창고도 없다는 거라.

그런데도 받은 것만으로서 만족하고 산다는 거라.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은 나쁜 생각 안 한다는 거라. 맑고 깨끗한 생각을 하면서 산다는 거라. 그리고 말해야 될 때는 말하고, 침묵해야 될 때는 침묵하고, 자기 혼자 있다고 해서 심심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 고요함을 즐길 줄 안다는 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잘 제어하는 사람이라는 거라.

 

그런데 한번 보라고. 우리 천신들은 만날 아수라하고 싸움박질하고 있다는 거라. 인간들은 인간들 저들끼리 막 싸움박질하고 다투는 거라. 안 싸우고 사는 사람들 없죠?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니가 잘 보라고. 설혹 상대가 적이라고 하더라도 싸우지 않는다는 거라. 분노를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분노가 있는 세상에 있지만, 분노가 없다는 거라. 집착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거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이니까 나는 당연히 내가 이 방에서 나갈 때는 “아이고 존경합니다” 하면서 그 스님들한테 절을 한다는 거라.

 

멋지게 사는 방법이라는 거라. 천신들도 부러워하는 삶의 방법이라는 거라.

제석천이 이 방을 나가면서 절을 한 것이 꼭 출가한 스님들에게만 해당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면 당연히 천신이 이 방을 나가면서 존경의 예로 삼배를 하고 갑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살아가는 목표를 분명하게 잡아야 됩니다.

멋진 삶을 목표로, 그러한 삶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경전의 내용을 좀 들려드리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뛰어난 보물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을 모으면 행복하게 될 수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맛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의 방법인가?

하고 네 가지를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대답 했느냐면

진리에 대한 확신, 그런 믿음이 가장 뛰어난 보물이다.

진리에 대해서 '아, 이게 진리구나' 하는 확신만 들면 이미 그 사람은 가장 뛰어난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더 이상 뛰어난 보물이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런 확신만 들면 자기는 나아가게 돼있습니다.

 

그다음에 뭘 모으면 행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부처님 법을 배우는 것.

바른 법을 배우는 것으로서 행복하게 된다. 그 법을 배우고 있으면 아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자꾸 하게 되니까 그렇게 삶을 살게 되고 행복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법을 배우게 되는 것으로서 행복하게 된다.

 

최고 맛있는 것은 진리이다.

부처님이 먹어보니까 진리가 가장 맛있다는 거라. 진리가 깨닫고 보니까 그것 같이 맛있는 게 없다는 거라. 가장 맛있는 걸 먹도록 하십시오.

 

그다음에 지혜에 따른 삶의 방법이 최고의 삶의 방법이다.

지혜에 따라서 바르게 잘 살아가는 그게 살아가는 방법 중에서 최고라는 거라. 감정에 따라서, 아니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혜에 따라서 사는 것.

지혜에 따라서 사는 삶의 방법은 사실 어렵죠? 어떤 게 지혜롭게 사는 것인지? 사실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무상한 성품에 대한 것을 이해를 하고, ''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뭐든지 불만족하게 돼있다는 사실을 명심만 하고 있으면 그 범주에서 생각을 하면 그렇게 어리석게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이거는 지가 하고 있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 지혜로운 말들이 아니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래도 잘 살아갈려면 그 '지혜롭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하겠습니다. 다른 거는 여러분들이 크게 어려운 부분이 아닐 겁니다.

 

어떤 일을 해야 될 때 세 가지로써 판단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가설인가? 아니면 망상인가?

여러분들은 수행하고 있죠?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잘 되고 있는 방법이든 잘못되고 있는 방법이든 자기가 직접 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처님 말씀도 이미 실증이 다 끝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닦으는 것도 사실이라. 요렇게 하면 행복하게 된다. 요렇게 하면 해탈에 이른다. 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이때까지 증명해왔던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사실이라.

 

그런데 수행의 실천은 사실이지만, 수행의 실천 방법은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그건 가설이죠? 실천 방법에 대한 것들은 가설입니다. 책을 열심히 보고 하는 것들, 아 수행은 요렇게 요렇게 하는구나 하고 아는 것들, 그건 사실은 가설입니다. 개념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를 들어서 우리 방하착님은 심념처 식으로 예를 들어서 마하시 방법으로 배가 불러오고 있으면 '일어남' 하면서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사라짐'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안다.

저 저쪽에 연경이는 예를 들어서 그렇게 안 하고 배가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는 것으로만 알아차리고, 개념을 붙이지 않고, 배가 꺼지면 꺼진다고만 알아차리고, 아 그래서 마음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수행을 하고 있다.

 

둘이가 말다툼이 붙으면 '니가 옳니, 내가 옳니'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조금 전에 얘기한 건 뭡니까? 가설이죠! 수행방법 입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방법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

 

내가 돈 백원을 벌어야지 하고 열심히 생각을 하고 있다. 그거는 사실은 가설이죠? 실제 돈 백원을 번 게 아닙니다. 그런데 돈 백원을 벌어야 되겠다 하는 사람이 있고, 저쪽에서는 돈 이백원을 벌어야 되겠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실제로는 백원 벌지도 않고, 이백원을 벌지도 않았는데, 너는 왜 이백원 벌어야 되는데, 백원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너는 왜 욕심 많게 백원만 벌어도 되는데 이백원 벌겠다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싸움해봐야 꼭 마찬가집니다. 실제로는 벌지도 안 했으면서. 그러면 그 가설이 사실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실증하는 방법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내가 백원을 벌 수 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방법이 있어야 됩니다.

배가 불러올 때 배가 '일어남'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불러옴이 탁 끝나고 나면 배가 꺼질 때 '사라짐'하고 명칭을 붙여서 '사라짐'하고 명칭을 끝낼 때는 배가 완전히 꺼지고 나서 '사라짐'하고 명칭을 끝내야 되는 거고, 이렇게 방법이 있다는 거라.

그런 방법이 있을 경우에는 그걸 가설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가설일 뿐이지 그게 사실은 아닙니다. 실제는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방법론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가설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하고 있든 그렇게 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줘야 되는 것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하고 개념이 다르다 해가지고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는 거라.

남이 수행을 어떤 방법으로 하든 냅둬! 가설을 붙잡고 싸우는 것같이 어리석은 게 없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설만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고 망상 가지고도 싸웁니다.

망상은 가설이나 개념보다도 더한 거라. 망상은 실증할 수 있는 수단조차도 없어. 쉽게 말하면 자기 혼자서만 열심히 머리 굴리고 결론을 내리고, 다른 사람 아무도 볼라. 내가 뭘 했는지, 뭔 망상했는지조차도 몰라. 오히려 자기조차도 나중에 다 까먹어버려. 그런 것이 망상이라. 실증할 수 있는 수단조차도 방법조차도 없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부처님을 믿는 자는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난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뭐겠어요? 사실입니까, 가설입니까, 망상입니까? 망상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자는 '부처님을 믿는다' 하는 전제조건하에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천상에 태어났는지 지옥에 태어났는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차라리 부처님을 믿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요렇게 요렇게 살아가면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것이 맞다는 거라. 그러니까 방법을 가르쳐주면 적어도 그것은 망상이 아니고 가설은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어떻게 믿는지도 얘기도 안 해놓고 부처님 믿으면 무조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할 거 같으면 이거는 망상부리는 거라. 법문을 해도 그렇게 법문할 거 같으면 그거는 망상피우면서 법문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 한국에 그러죠? "아미타불 세번만 부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

적어도 그것은 가설입니다. 아미타불을 세번 부르기 때문에. 지극정성으로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만 부르면, 그런 가설을 세우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 그것은 가설이 됩니다.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극락정토에 태어날려면?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해가지고 분명하게 그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아미타불을 부를려고 할 것 같으면 쉽게 말하면, 지극정성으로 부를려고 할 것 같으면, 예를 들어서 염불할 때는 딱 멈추어 서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면서 부르도록 해야 된다, 염주도 돌리지 말고, 절도 하지 말고, 마음은 한가지밖에 못하니까 오로지 아미타불만 불러라.

그리고 만약에 절을 할 것 같으면 아미타불을 부르는 걸 탁 멈추고 절을 하면, 절을 하는 걸 내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왼손이 내려갔으면 왼손이 내려갔다고 알아차리고 오른손이 내려갔으면 오른손이 내려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머리가 닿았으면 머리가 닿았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래서 선한 마음을 자꾸 내서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 분명히 머물도록 해가지고 절을 해라.

그러고 나서 염주돌릴 것 같으면 딱 절하는 것을 멈추고 염주하나 내가 돌린다 하면서 돌리는줄 알고 돌리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탁 하는 사람은 그렇게 선한 마음을 자꾸 내고 내가 분명히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습관쌓여지면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돼있는 거라. 그거는 쉽게 말해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설을 실천하는 자는 극락정토에 가는 거라.

그게 사실과 가설과 망상의 차이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가려면 네 가지를 하라 그럽니다.

베풀어라.

스님이 만날 "널리 베푸시오" 이렇게 말한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가설이 될 수도 있고 망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스님도 직접 베풀어야 됩니다.

“아! 베푸니까 이리 이리 해서 이런 것이 좋더라. 이렇게 마음이 행복해지고 좋더라.” 말로만 할 거 같으면 그것은 가설이 돼버립니다.

“그냥 베풀어라. 그게 부처님 말씀이다.” 이럴 것 같으면 그것은 망상이 돼버립니다.

“요렇게 요렇게 베푸니까 얼마나 좋느냐.” 그리고 본인이 직접 베푸는 경우에는 그거는 사실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베푼다는 걸 받아들일 때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되고, 그리고 내가 실천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망상으로 아무리 잡고 있어봐야, 그거 좋은 줄은 알지. 그런데 그거는 내가 백원 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하고 꼭 마찬가지라. 물론 백원 벌기 위해서 남을 죽이겠다 망상 피우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해도 차라리 내가 실천을 조금조금씩 해가는 것보다는 더 못하는 거라.

그래서 먼저 부처님이 말한 게 베풀어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애어(愛語) 사랑스러운 말, 자비로운 말.

자비로운 말은 해야 됩니다. 마음을 그렇게 먹어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자꾸 자애로운 말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실천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세 번째가 가치 있는 삶의 방법입니다.

그걸 보통 이타(利他)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치있는 일들을 하는 것. 오늘 원래 일요법회는 부엌에 점심을 책임지고 있는 보살님들이 세 분이 있어요. 그 세 분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인도 그것이 가치있다고 느껴야 됩니다. 남이 그걸 잘 먹든 못 먹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가치있는 일을 했으면 거기서 끝내. 그런데 맛있게 했는데 안 먹었다 그러고 성질부리고, 와 이거 내가 했는데 안 먹느냐 할 거 같으면 실제로는 가치있는 삶을 살아놔놓고 그 뒤에는 가치 없는 행위들을 또 하게 되는 거라. 그런 오류는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평등, 어떤 것이든 똑같이 대하라.

그렇게 말을 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자꾸 먹도록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이 네 가지만 할 거 같으면 '참 잘 살아간다' '멋지게 살아간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쉽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는 이 세상은 나름대로의 사이클이 있습니다.

어제 그게 서울에 10시 20분까지 서울역에 도착을 해야 되니까, 적어도 7시 반 기차표를 예매를 했어요. 그러니까 10시 8분에 서울역에 도착을 하더라고. 그걸 예매를 해놔놓고 여기서 부산역까지 나가야 될 거 아니라. 그런데 내가 좀 일찍 나갔어. 6시 반 정도에 나가도 7시 반 기차는 타는데, 6시 정도 돼서 나갔어. 나가가지고 부산대 전철역 있는데 가가지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차가 빨리 오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술이 이만큼 취한 사람이 보여.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아마 밤새껏 먹은 모양이라.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거라. 냄새가 굉장히 많이 나는거라.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 저쪽으로 가서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그냥 꾹 참았어. 참고 그 얘기를 그냥 들어줬어.

 

기차가 올 동안에 내내 혼자 이러쿵저러쿵 자기가 왜 술을 먹었고 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마누라하고 싸웠는데 기분나빠가지고 집을 나와가지고 술을 먹었는데 지나고보니까 후회가 되더라. 그래서 아침에 새벽에 마누라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여보 미안해. 내 들어갈게” 하고 얘기를 했다는 거라. 그런데도 실제로는 들어가려니까 남자가 좀 쪼잔해보이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해가지고 이렇게 기차역에 나와서 있다는 거라. 그냥 들어줬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기차를 탔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내가 부산역 간다니까 부산역까지 같이 간거야. 가면서도 계속 얘기를 하는 거라. 그래서 들어만 줬어.

 

그러면서 마지막에 스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성냥개비를 가지고 불을 착 붙이면 불이 붙습니다.

성냥개비에 불이 붙었을 때 이 불이 번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성냥개비에 불이 있을 때 그 불을 꺼뜨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냥개비에 불이 붙은 걸 종이에 붙이면 불은 더 커져버립니다. 나무에 붙이면 불이 더 커져버립니다. 그때는 감당을 못합니다. 불은 반드시 성냥개비에 있을 때 꺼버려야 됩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느끼고 하는 마음이 들 때 빨리 꺼버려야 됩니다. 잘못했다 싶으면 가서 잘못했다고 해야됩니다. 마음 속에서만 있어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

 

빨리 집에 들어가서 “아이고, 마눌님 잘못했습니다. 내 다시는 그리 안 하겠습니다.” 싸움을 어떻게 했든지 간에. 자기가 어쨌든 집을 나온 것은 잘못한 거고, 나왔으니까 술먹고 방황하는 것도 잘못한 거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라는 거라. 그래도 그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시에는 실천할 마음이 없어. 언제 해야 될지를 마음을 못잡는 거라. 그러다 마눌님이 “너 인제 들어오지마” 할 것 같으면 “에잇, 나도 안들어간다” 자꾸 더 번져버린다는 거라.

반드시 성냥개비에 불은 꺼버려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돌아가집니다. 그걸 히리 옷땁빠라고 그럽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 알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잘못한 거에 대해서 그 닥쳐올 결과에 대해서 무서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적어도 그 사람도 이것은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사회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는 거라. 나쁜일 자꾸 안 하고.

 

그런데 남들이 나를 자꾸 비판한다고 해가지고 “니는 왜 이런 것을 잘못 하느냐” 해가지고 그것을 나무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걸 언짢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렇게 비판받는 게 당연한 거라.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비판받고 나서 아! 내가 잘못을 시인하고, ‘아!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할 거 같으면 그건 바르게 되는 건데, 그것이 싫다 해가지고 덮어버리려고 할 것 같으면 문제가 더 커져버린다는 거라.

 

악한 일들, 나쁜 일을 했을 때는 반드시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아! 나 참 부끄럽구나. 아! 참 이것에 대해서 일어날 결과가 참 무서운 일이구나. 하는 것을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적어도 그렇게는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히 그것보다는 한 수 위로 뛰어넘어야 되겠죠!

 

어떻게 뛰어넘으면 될까? 어리석으면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자꾸 뒤로 잡아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기가 굉장히 힘이 들어.

아무리 내가 좋은 일을 할라고 하고 정신을 차릴려고 해도 어리석어 놔놓으면 그 끄는 힘이 강하면 그게 안돼. 그러니까 만날 뒤로 밀려나버리든지, 아니면 멈춰서 있든지,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쪼매 나아가다가 탁 멈춰버리든지.

 

수레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뒤에서 잡아끄는 어리석은 것들을 탁 끊어버려야만이 앞으로 나아가집니다.

안 그러면 끊지를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계속 세지도록 할 거 같으면, 뒤에서 잡아끈다고 해도 질질질 끌려오다가 그러다가 어떻게 돼요? 한참은 끌려오겠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도 포기해버리고 손 놔버립니다.

탁 어리석음이 떨어지고, 번뇌들이 떨어져버립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뒤에서 잡아끌게 됩니다. 요놈을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노력을 하라는 거라.

 

뒤에서 잡아끄는 놈을 힘을 약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들고 나중에 손을 놓게끔 만들려고 할거 같으면,

첫 째가 뭐냐면 현재에다 마음을 두는 것.

어떠한 경우도 현재에다 자꾸 마음을 둘려고 해야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게 자극으로 인해서 살아갑니다. 자극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생각하고, 이런 여섯 가지 기관들로 인해가지고 자극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못느낍니다.

그러면 그 자극이 오면 반드시 그 자극이 오는 데다가 마음을 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잡아끌게 돼있다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데에다 마음을 둬야 되는데 두지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망상을 자꾸 부리는 거라. 뒤에서 자꾸 잡아끌게 되는 거라. 현재에다 자꾸 마음을 둬야 되는 거라. 수행할 때만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 할 때도 자꾸 그래야 됩니다. 현재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거기에다가 자꾸 마음을 둬야 됩니다. 적어도 끄는 힘을 약하게 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는 거라.

그게 첫번째입니다.

 

두 번째, 마음에 좋은 자극을 주어라.

자극은 어떤 방법으로든 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되도록이면 좋은 자극으로 오게끔 해야 됩니다. 마음에 좋은 자극을.

생각할 때도 생각하는데다 마음을 두면 됩니다. 현재에다 두면 되는데 되도록이면 그걸 나쁜생각 하는데 두지말고 좋은 생각하는데.

남을 비난할려고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어! 이거 좋은 자극이 아니다' 그러면 비난할려고 하는 마음보다도 그 사람을 칭찬할려고 하는 마음쪽에다 두라는 거라. 좋은 자극에다 마음을 두라는 거라.

내가 욕심이 일어났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아! 그거 좋은 거 아니다. 그러면은 내가 떠오르려고 하는 마음에다가 '니나 내나 뭐 별거 차이 있겠냐. 나라고 하는 것도 없는데' 하는데다가 마음을 두라는 거라.

욕구가 일어나면 자비로운 마음에다가, 그리고 이성적인 것에다가 그리고 마음이 부드럽고 고요하고 유연한 데다가, 마음을 남에게 배려하는 마음에다가, 그런데다가 두라는 거라. 맹목적으로 막 매달릴려고 하지 말고.

그게 두 번째입니다. 마음에 좋은 자극을 주도록 하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마음을 그냥두고 관찰하도록 하십시오. 마음을 그냥 두고.

좋은 쪽으로 자꾸 마음의 경향성이 기울어지고 할 거 같으면, 그게 되고나면은 그다음에는 마음을 붙잡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일부러 마음을 좋은 쪽으로 둘려고 안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돼있기 때문에, 마음은 그냥 그대로 두고, 내가 그것을 관찰하기만하면 됩니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죽을 때 설혹 내가 아무리 심한 병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힘들어해도, 마음이 자동적으로 그때는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집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켤 때도 비밀번호를 눌러가지고 켭니다. 대부분 보면 의도적으로 잠가놨을 때는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좋은 쪽으로 마음을 자꾸 낼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패스워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을 제어하고 그쪽으로 자꾸 향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향해질 거 같으면 인제는 그거 필요없습니다. 그냥 자동적으로 켜지게 됩니다. 항상 켜져 있는 거라. 그럴 땐 그냥 자연스럽게 두어버려야 됩니다.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생활하는데 나쁜 방향으로 마음이 향하지가 않고 그냥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그냥 둬야됩니다. 그냥 두어야만이 그 마음이 자꾸 자연스럽게 가는데로 내가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의도를 내면 낼수록 알아차리기가 힘들어져. 그래야만이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해탈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그냥 두고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마지막에 질질 끌려오다가 뒤에 붙잡는 놈의 손을 탁 놓을 때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그냥 두고 관찰할 때가 됩니다.

 

이 세 개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게 지혜롭게 사는 법, 지혜롭게 잘 관찰하고 또 그렇게 나아가는 것들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멋진 사람 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