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올바른 집중 (20120317)

담마마-마까 2021. 6. 30. 09:02

https://youtu.be/_YhaYCt1sBs

* 올바른 집중 (20120317)

 

오늘 울랄라님 생신이라고요? 아니에요? 여기 생일 케잌이 있는데? 맞기는 맞아요? 어쨌든 생신 축하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깜빡깜빡 하는 건 아니죠? 자기 생일까지 까먹고 그러진 않겠지. 아까 우리 산향님이 얘기를 하대. 케잌이 있기에 무슨 케잌이냐 하니까 오늘 울랄라님 생신이라고 그러더라고.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잘 잊어먹습니다.

우리 에시니, 아빠는 나이가 그렇게 먹지도 않았는데 잘 까먹잖아. 그지? 가끔씩 길을 잘 잊어먹는다든지 하는 길치인 사람들도 있어. 또 숫자 개념이 없는 분들은 숫자를 잘 기억을 못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잘 기억을 못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사람들은 괜찮아. 나이가 드신 분들은 필요한 것들은 정확히 기억해서 저장을 해놔놓는데 별 필요 없다 싶은 거는 그냥 쓰잘데 없는 거는 다 내버렸거든. 그런데 대부분 보면 필요한 것들은 지혜롭게 돼서 살아가기 위한 것들이 다들 기억이 돼있어.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그 경험이 굉장히 소중하다 하고 얘기를 하고, 그래서 지혜롭다 얘기하기도 하고.

 

젊은 애들은 안 그렇지? 에시니는 안 그렇지? 다 집어넣지? 오만 거 다 집어넣는데 실제로 보면 별로 쓸모있는 거 없어.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거 끄집어내가지고 쓸 수 있는 거는 아마 거의 없다시피 할 거라. 많은 걸 집어넣을려고 하는데, 사실은 많은 걸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단기적으로만 기억을 할 뿐이라는 거라.

 

얘기가 나왔으니까 오늘 집중력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중력이라는 것이 뭡니까? 마음에 들어온 대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 대상에 마음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집중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반대로 집중이 없다 할 때는 어떤 거라? 마음을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움직여가지고, 또한 대상에 여러 가지 외부적인 환경조건에 마음이 좌지우지 되는 것! 누가 좋은 얘기하고 있으면 '오오오오' 하면서 마음이 쏙 뺏겨버리고, 누가 싫은 얘기하면 '에이, 누가 그런 얘기해' 하면서 마음을 차단을 시켜버리고.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은 열심히 하고, 누가 공부해라 하면 공부는 지독시리 안하고 이런 것들이 '집중력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왜 그걸 집중력이 없다 그럴까? 게임 할 땐 틀림없이 집중력이 있을건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니까. 그러죠? 그런데 그것은 '바른 집중력이 아니기 때문에', '집중력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젊은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데, 실제로 나이가 들어보면 별로 남아있는 게 없거든. 좋은 집중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에 크게 그것을 저장해놓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일정한 집중력들은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개미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요? 열심히 자기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잘 찾아갑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가도 잘 찾아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땐 먼 거리인데도 잘 찾아옵니다.

또 갓 태어난 고양이라 하더라도 앞에 먹잇감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딱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고양이 옆에 가서 아무리 기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러도 그 소리를 듣는 체도 안 하고 그것만 딱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또 안 그렇습니까? 엄마품 엄마 젖이라는 곳에 집중해서 합니다.

 

선천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힘이기 때문에, 그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힘들은 다들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환경조건에 따라서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조건이 바뀌어져버리면 그 기본적인 집중력은 사실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길을 가면 길치가 되는 거라. 한 번밖에 안 봤다고 할 거 같으면. 또 모르는 장소에 갈 거 같으면 막 마음이 산란해져버리게 되고, 그 환경조건에 따라서 달라져버린다는 거라. 기본적인 조건은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그런 기본적인 집중력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집중력을 강하게 해서 더 강한 마음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린아이들은 게임하는 걸 좋아해서 거기게 집중하는 것은 있지만, 거기에는 좋은 감정이라든가 아니면 이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바른 집중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감정적인 집중력은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나쁜 결과들을 반드시 가져오게 된다는 겁니다. 감정으로 인해서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할 거 같으면 집중력의 힘은 키워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약점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우린 '밋차 사마디(miccha samādhi)' 잘못된 삼매, 잘못된 집중력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잘못된 것들은 나쁜 쪽의 마음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고, 문제는 바른 집중력을 키워주려면 나쁜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을 자꾸 내도록 해야 됩니다.

 

자꾸 집착하는 것이 없게 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 차별하지도 않으려고 하고, 이성적으로 자꾸 할려고 하고, 이런 좋은 마음들을 냄으로 인해서 거기서 길러지는 집중력은 나중에는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인제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이 집중력은 뇌에 굉장히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울랄라님 같은 경우에는 지금 연세가 칠십이 넘었습니까? (수행자 대답) 어쨌든 치매도 안 걸리고 좀 더 건강하게 살고, 그러고 수행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가 도와 과에 이르면 참 더 좋은데.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감기가 걸렸을 경우에는 코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콧물이 많이 나오고 코가 막혀버리죠? 그거는 왜 그래요? 감기라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바이러스를 몰아내기 위해서 콧물이 나오게 되고, 콧물이 나오게 되니까 당연히 코가 막혀버립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이쪽 코가 막히고, 어떨 때는 요쪽 코가 막히기도 합니다. 코가 막히면 숨쉬기가 힘들게 되죠? 바이러스가 없으면 코가 막힐 일도 없을 거고 콧물이 나올 일도 없어서 숨을 자유롭게 쉴 건데, 요놈의 바이러스가 문제인 거라. 감기 바이러스.

 

나쁜 감정 나쁜 마음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은 꼭 그와 같습니다.

감기를 몰아내기 위해서 콧물이 나온 거는 좋은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코가 안 막히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거라. 나쁜 작용들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거고.

 

뇌도 만날 활발하게 움직여주면 치매 걸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뇌를 움직이는 게 나쁜 쪽으로 움직여줄 거 같으면 아까 감기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나쁜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코가 막힌다든지 숨쉬기가 힘들어진다든지 여러 가지 나쁜 조건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만 영향을 미칠 거 같으면 바이러스 자체가 없기 때문에, 번뇌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코막힐 일도 없고 숨은 자연스럽게 쉬어집니다.

 

뇌를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좋은 쪽으로 항상 개발하도록 해야 됩니다.

나쁜 방향으로, 감정을 가지고, 좋고 싫은 감정을 가지고 뭔가를 해가지고 뇌를 개발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을 해야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돼서 치매를 예방한다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가능하겠죠. 죽는 뇌세포를 느리게 만들고, 죽는 뇌세포가 없도록 만들어주면 치매는 예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늦출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완전하게 뇌세포가 죽지 않게끔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집중력만 강하고 머리를 잘 쓰기만 할 거 같으면 그건 가능하다는 거라.

뇌세포가 죽지 않게끔 하는 것은.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잘 안 하죠. 어디 갈 때도 네비게이션 탁 치고 갑니다. 그럼 머리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어디 뭐 할 때도 전자렌지에 탁 집어넣어 버리면 탁 다 돼버리고.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전에 부처님 당시 때는 모든 것들을 다 기억을 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두 개의 분량을 머리속에 기억을 하고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도서관에 책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 두 개의 분량을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도 필요할 때 끄집어내거든.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안 되죠. 왜 그렇게 안될까?

기억을 할려면 정보가 접해가지고 접촉이 있어야 되는데, 접촉이 있는 것이 강한 자극이 주어지는 것은 저장이 될 거고, 강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저장이 안될 겁니다.

강한 자극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강한 자극에 대해서 결정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저장이 또 됩니다. 강한 자극이라고 해서 모든 게 다 저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건 기억하지 말아야지 할 거 같으면 그건 기억이 안돼버립니다.

그래서 그 강한 자극을 저장하려고 결정하는 마음이 있어야되고, 그 마음으로 인해서 내가 거기에 집중을 강하게 해줘야만이 가능합니다.

 

웨다나(vedanā) 뿐 아니라 아디목카(adhimokkha)도 있어야 되고, 사마디(samādhi)도 있어야만이 그 저장이 오래도록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원리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보통 접촉이 있으면 그 대상에 대해서 강한 자극이 오는 것은 마음이 거기서 안 떨어질려고 그럽니다. 대부분 그렇죠? 수행할 때도 강한 자극이 오면 그걸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내가 지금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리에 아픈 자극이 강하게 오면 그 아픈 거는 분명히 안다는 거라. 그걸 아는 것을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단순히 아는 거죠? 그냥 강한 자극 접한 정보에 따라서 마음이 자동적으로 반응해가지고 인식을 일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아디목카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는 호흡하다가 다리에 아픈 감각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호흡을 중단하고 다리 아픈 걸 알아차려야 됩니다. 알고 나서 좀 더 집중해서 그것을 보게끔 됩니다.

이 아디목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아는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자는 동안에도 작동을 합니다. 자는 동안에도 어떨 때는 아디목카가 강하게 작용을 했던 것들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꿈을 꾼 걸 압니다. 그런데 그 아디목카가 일정하지 않았으니까 어떤 거는 기억하고 어떤 거는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이렇게 자동적으로 인식하는 기능들이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바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보고 있지만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듣고 있지만 명확하게 듣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깊게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한 자극이 오는 것이 아닐 거 같으면 일상적인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 아디목카들은 대부분은 그때그때는 압니다. 아, 내가 호흡을 알아차릴 때 다리가 아팠다. 그러면 여기에 아! 다리가 아프구나 하는 거는 압니다.

 

그런데 그것에다가 마음을 다시 두지 않을 거 같으면 이거는 금방 잊혀져버립니다.

한 시간 지나고나서 한 번 돌아보십시오. 그것이 강한 자극이라 해서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기 전에는 이거 자체를 모릅니다. 언제 그런 것이 있었지 하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는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거라. 그마만큼 마음이 머물지 못하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집중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인식한 것은 반드시 확실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어! 다리가 아프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할려고 해야 됩니다. '다리가 아프구나' 하고 그냥 놓아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고, 뭐 또 무슨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이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리고, 그걸 또 놓아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고 이것도 필요한 부분이라는 거라. 그 부분에 대해서 다리가 아픈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관찰하라는 거라.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나서 '아,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관찰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돼요? 호흡하고 있는 것을 일체 모르게 되죠!

호흡을 하면서 다리를 인식하고 호흡을 하면서 마음에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아디목카는 있을지는 몰라도 두 개가 동시에 있을 때는 집중력은 전혀 없습니다. 사마디(samādhi)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아디목카만 계속 바쁘게 돌아다니니까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를 자꾸 하게 되는 거라. 오만 생각도 일어나고, 여러 가지. 그렇다고 해서 호흡을 놓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호흡도 어렴풋이 알면서 이렇게.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것은 집중력 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지.

 

그래서 아디목카와 사마디는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내가 뭔가를 인식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집중력은 아니다.

인식한 것을 분명하게 내가 알아야만이 그것이 집중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디목카는 자연스럽게 나타나집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알게 되는 거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배고프면 어떻게 해요? 밥을 먹기 위해서 내가 '일어나야 되겠다' 하고 알아차리면서 일어나고, '밥을 먹어야 되겠다' 해서 부엌으로 가서 밥을 먹게 되는 거라. 이럴 때는 집중력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 배가 고프네' 하고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인식을 하고 나선 어떻게 해요? 또 다른 대상이 강하면 거기에 또 마음이 가버리는 거라. 집중력은 형성이 안 되고 아디목카만 계속 바쁘게 움직이게 되는 거라.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네가 좋아하는 일은 아주 조심해라" 하고 그럽니다.

아디목카는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일어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아주 조심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디목카의 위험에 빠져버립니다. 마음만 열심히 바빠집니다.

 

언제 한 번 스님들끼리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얘기를 하다보니까 상대방 스님이 화를 내면서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왜 화를 내느냐" 하니까, 자기는 화를 안 낸대. 그래서 "넌 분명히 지금 화를 내고 있다. 그 화가 일어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하니까 자기는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라. 알아차리고 있으면서도 계속 화는 내면서 말을 하는 거라. 그게 뭐냐면 아디목카는 계속적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데 집중하는 힘이 없는 거라.

아마 에시니도 그런 과에 속할 거라. 집중하는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 싫은 것들 하기 싫어. 좋아하는 것들은, 좌선하다가 싫은 마음이 일어나면 벌떡 일어납니다. 왜? 아디목카가 작동하기 때문에. 그럼 또 경행을 합니다. 경행하다가 싫증이 나면 그것이 몇 분이 됐든 간에 벌떡 또 앉습니다. 마음만 바삐 움직이는 거라. 그 집중하는 힘이 전혀 안 키워지는데 수행이 진척이 있을 이유가 없는 거라.

 

그런데 아디목카라도 있어야만이 집중력을 키울 수는 있습니다. 뭔가가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는 기능조차도 없을 거 같으면 그건 집중하는 것은 힘들어지지. 그건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디목카만 계속 있어가지고는 그것이 많은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디목카를 이 사마디 쪽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을까?

바쁘게 움직이는 놈을 바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면 됩니다.

차단하라! 정보들을 차단하라.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차단하도록 하라.

집중력을 키워주기 위한 첫 번째 부분입니다.

 

다리가 아프다. 다리 아프다는 걸 인식했다. 또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일어났다고 인식했다. 뭐가 보인다. 보인다고 인식했다. 아디목카만 계속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다리가 아픈 것을 관찰할려고 할 거 같으면, 생각하는 거 별 쓰잘데없는 것이다 할 거 같으면 생각하는 거를 차단해야 돼는 거고. 보는 거 그거 봐봐야 별 의미가 없다 싶으면 보는 거 차단해야 되고, 정보를 차단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프다고 인식하고 나서, 다른 정보들이 있으면 정보를 차단하고 다리가 아픈 것을 끝까지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 첫 번째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차단단다는 것은 한번 인식한 대상에 집중력을 가지고 그걸 놓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것들이 일어납니다. 일어나더라도 차단해버리고, 그걸 놓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바른 집중력은 즐겁고 기쁜 겁니다.

그런데 바르지 않는 집중력도 즐겁고 기쁜 것들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죠? 게임해도 즐겁습니다. 지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즐거운 것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집중은 집중인데 아까 스님이 바른 집중력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집중력에는 반드시 기쁨과 즐거움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집중은 하고 있는데 그 집중이 한참 지나도 맹숭맹숭하고 있다면 그건 집중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집중을 안하고 엉뚱한 딴 생각을 하고 있든지 엉뚱한 다른 걸 하고 있기 때문에 집중하는 대상으로 인해서 기쁨이나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게임하는 애들은 안 그렇거든. 집중하니까 당연히 기쁘고 즐거움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뭔가의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안 일어난다고 할 거 같으면 이거는 분명히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된다는 거라.

 

그대신에 그 기쁨과 즐거움은 잘못된 집중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보다도, 바른 집중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훨씬 강합니다.

주체를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먼저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 어떤 경우든지 내가 뭔가를 집중하고 있으면 아주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하게 느낀다고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아니면 무덤덤한 마음이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이미 그 대상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켰다는 거라. 집중하는 마음을 흩어버렸다. 그렇게 판단해야 됩니다.

그럴 때는 다시 그 대상에 집중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세 번째, 집중력이 있을 경우에는 집착하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집착을 해버리면 붙잡아버리기 때문에 대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이나 즐거움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일회성으로 끝나버립니다.

대상을 어떤 경우든지 잡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산띠띠 빠라마사' 라고 합니다. 인식하는 대상, 마음이 대상을 인식할 때는 집착하지 말고 버려버려라. 놓아버려라.

 

테라와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테라와다가 최고라고 그럽니다.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은 위빳사나가 최고라고 그럽니다. 또 이렇게 스님법문 듣다 보면 스님법문이 최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에 매달려버립니다.

매달려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다른 스님들이 법문을 해도 소리가 안 들립니다. 누가 위빳사나 말고 화두참구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틀렸다고 개념을 내세우게 되고, 누가 뭐 기도하고 염불하고 한다고 할 거 같으면 쓸데없는 것들 한다고 그럽니다.

사실은 오히려 성질내는 것보다도 더 위험하게 돼버리는 겁니다.

 

? 집착했기 때문에. 나의 견해,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이 되어서 매달려버릴 거 같으면 굉장히 안 좋은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오히려 화내는 거 보다도 더 위험해져버립니다. 화내는 사람은 항상 화낼 수가 없습니다. 화내고 나서 몇 분 후면 잠잠해지지, 그것으로 인해서 화 속에 맨날 스물네시간 갇혀가지고 몇날며칠 가고 그러지는 잘 않습니다.

그런데 집착하는 것은 오래도록 갑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대상에 대해서 집착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집착하게 돼버리면 기쁨도 거기서 끝나버리고 즐거움도 거기서 끝나버리고, 집중하는 힘들도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아! 이게 좋다. 아! 이게 너무 좋다. 이게 올바르다.' 안다고 해도 거기서 그냥 놔! 그걸 놔버려야만이 성장을 하는 것이지,

'아 이게 좋은 집중이다. 너무 좋다!'

뭐 할 건데? 그거?

그냥 놔 버려!

놔 버리고, 그것도 하나의 대상으로 봐버려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를 개발하는데 가장 큰 적은 딧티(diṭṭhi)! 하고 얘기합니다.

견해를 가지는 것. 그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평상시에 집착하는 것들을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자꾸 마음을 유연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 그것도 맞지' '그래 너도 참 잘했다.' 나하고 견해가 다르고 내하고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자꾸 유연하게 해야 됩니다.

마음을 유연하게 해야될 뿐아니라, 집중력은 어떤 경우가 일어난다고 했어요? 기쁘고 즐거워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항상 기쁘고 즐거운 쪽으로 자꾸 내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할 경우에 그 일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 있고,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밌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할 거 같으면 내가 재밌게, 즐겁게.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아빠가 시킨다해가지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고, 어차피 해야 될 거 같으면 그거 내가 즐겁게, 재밌게 하라는 거라.

마음에 유연성을 가지고 마음을 즐겁게, 재미있게 해야만이 딧티를, 그래도 견해를 어느 정도는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밝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으로 자꾸 무게중심을 두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집중력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좋아하지 않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뭐지?’ 하고 해야만이 그걸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 거고, 그리고 그걸 계속적으로 관찰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관심을 안 가지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에시니 앞에 흰 원반을 놔놓고 합니다. 그걸 멍하게 보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 원반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게 변하질 않습니다.

여기서 빛이 나기를 해? 여기서 흰 색깔이 확 넓어지기를 해? 아니면 여기서 연기 같은 게 보르르르 일어나기를 해? 아무런 것도 안 일어나져. 관심을 안 가지니까 그런 거라. 그냥 '흰 거 있는 갑다' 하고 보고 있는 거라. 그렇게 해선 안되는 거라.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좋아하지 않는 것이든 이런 개념을 버려버리고. 내가 이게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가를 판단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현재 상황에서 집중할 수 있게 이게 필요하다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아예 관심조차도 가지지 말아라는얘기거라.

좋아하는 것이라 해서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 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가 아닌가를 가지고 판단했을 거 같으면 관심을 분명하게 가져라는 거라.

 

감정적인 일들에 대한 것을 떨쳐버리고 이성적으로 분명하게 판단을 해서 그것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대신에 관심을 가지더라도 어떻게 해? 마음이 유연하게, 마음을 밝게, 마음을 재미있게! 그래야만이 분노하고 탐하고 어리석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탐진치로부터.

모든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는 항상 진지하고, 재미있고, 그리고 활발하게, 가볍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또 집중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은 논리적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접근을 하고. 또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고. 그렇지 않고 무작정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해버릴 것 같으면 구덩이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내가 어느 시점에서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해가지고 여기서는 끝내야 되겠지 하고 판단을 딱 분명히 하고 나서, 접근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들 처음에 할 때 그렇게 하죠? 내 지금의 상태에서 좌선시간을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다 할 거 같으면 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됩니다.

경행을 하고 싶어도 경행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한 시간 동안 좌선을 한다고 해야됩니다. 그래서 잘 되든 안 되든 그렇게 하고 나서 끝나고 나서 경행 한 시간 또 그렇게 합니다.

왜? 지금의 상태에서 논리적으로 판단해서 한 시간 정도 할 거 같으면 약간의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한 시간이라는 좌선 시간을 정했단 말이라. 그러면 논리적인 판단이 끝난 부분인데도 나중에 감정에 따라 좌우돼가지고 그걸 못 채우는 거라. 감정에 휩싸여버리면 안되는 거라.

 

논리적으로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판단을 해서 그 판단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따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집중력은 지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회성으로 끝나버립니다. 아무리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려고 하고, 진지하게 하고, 탐진치 없이 대상을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일회성으로 거기서 끝나버리는 거라.

 

내가 판단해서 하루 중에 어느 정도의 시간은 수행에 투자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리고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생각했을 거 같으면 그것에 그대로 따라야 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걸 자꾸 따를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감정에 져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적이 돼야 됩니다.

 

그다음에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일절 멈추도록 하십시오.

모든 생각하는 것은 잡동사니라고 판단을 딱 하십시오. 생각 전혀 안 해도 관계없습니다. 모든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생각 딱 멈추도록 하십시오.

 

그러고 자애수행, 그리고 아나빠나사띠-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 이 몸은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그리고 '다른 대상들은 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구나' 아이스크림 놔놔놓고 아이스크림 녹는 거 보면서 '아 참 무상하구나' 하고 아는 거 하고 마찬가집니다. 그 무상한 것들을 봐서 관찰하고.

그리고 '이 몸은 참 더러운 것이구나' '깨끗하지 못한 것이구나' 하는 걸 관찰하고,

이런 방법으로써 집중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그렇지않고 춤에 집중한다든지, 음악에 집중한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감성적이 돼버립니다. 집중력을 키워줄진 몰라도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게임에 집중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알겠습니까?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할 사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