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다툼에 대처하는 법 (20120408)

담마마-마까 2021. 9. 24. 23:03

https://youtu.be/ThOuL1HStAI

* 다툼에 대처하는 법 (20120408)

 

오늘은 목요일 탁발법회 날입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있어요? 다투지 않고? 아무도 없을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다들 트러블들을 일으키고, 트러블들이 있게끔 됩니다.

동물은 그런 트러블들이 있을까? 동물들끼리 싸우기는 싸우죠? 그런데 그 싸우는 거는 먹이 때문에 싸우지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인간관계도 그런 감정적인 트러블들을 빼버리고 나면 크게 다툴 일은 없을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일단 밥 먹는데 밥그릇 빼앗는 사람은 없잖아. 사회에서 밥그릇 빼앗는 것은 인간관계 부분에서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밥상 위에 차려놓은 밥그릇은 그거 하고는 다르죠? 그래서 거의 다툼이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문제가 없었을 것 같아요? 부처님도 꼭 같이 그런 문제들이 있었죠!

가장 대표적인 게 꼬삼비 비구스님들이 분쟁-다툼이 있었을 때 조정하러 가니까 그게 조정이 안됐죠! 결국 그래서 숲에 들어가서 부처님이 삼개월을 지내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싶으면 혼자 살아라." 혼자 생활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숲에서 3개월을 살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면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죠? 여러분들 보고 싸우기 싫어서, 사회문제 일으키기 싫어서 그거 벗어나서 숲에 가서 삼개월을 살아라 할 거 같으면 아마 무서워서 다들 도망내려 올 거라.

스님들도 상가 생활을 하다가, 이 절 생활을 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되면 두타행을 가는데 두타행을 가면 혼자서 생활해나가야 됩니다. 숲에서. 대부분 일주일이 진짜 지옥 같아요. 그 일주일을 견딘다는 것은. 다른 것 때문에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고 무섭고, 또 하나는 내 자신이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스님들이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무서운 거는 며칠 지나고 나면, 밤에 우는 소리라든지 이상한 것이 보인다든지 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극복이 안되는 것은 뭐냐하면 '나'라고 하는 것!

내가 지금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이 내 자신을 의지해야 되는데 내 자신이 힘이 없을 것 같으면 그걸 못 하는 거라. 그래서 혼자서 외롭다, 힘들다, 하는 그런 생각들, 또 여러 가지 망상들을 피우다가 내려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문제없이 살고 싶으면 혼자서 생활하라" 하는 것은 진짜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정신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고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살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안 일어나는데, 대부분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보통 트러블들을 일으키게끔 됩니다.

 

부처님은 혼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인데도 혼자서 살아가시지 않았죠? 사회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사람들의 고민이나 괴로움들을 들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사회로 들어갔습니다. 정신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에서 부처님 자신이 크게 문제를 일으킨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들을 부처님이 오히려 해결하는 방식을 취했죠. 그게 부처님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평온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뭐냐하면,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을 비방해도 부처님이 그 사람을 왜 이렇게 비방하느냐 하고 비난하지 않고 거기에 맞대응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방한 사람이 스스로 ‘아, 내가 이렇게 잘못했다’ 하는 거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려고 할 것 같으면 오히려 저항감만 생기지 그것이 바로 잡히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것을 바로 잡을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아이한테 너는 왜 이러 이렇게 해가지고 잘못했냐? 하면서 설교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자기 자신의 마음에 경고를 보냅니다. '어? 내가 나를 내세울려고 하네?' '내가 나의 생각에 다른 사람을 맞출려고 하네?'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경고를 해야 됩니다.

아이를 바로잡아 줄려고 아이에게 여러 가지 설교를 해가지고 내 자신이 후련해지냐면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고 나서도 나도 찝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하면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서 평화롭고 즐겁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분노로부터 고민하지 않게끔 해야 되는 거고, 자기 자신이 탐욕으로부터 고민하지 않게끔 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고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려고 하는 것보다는 '아, 내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가지고 있구나, 이런 분노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자기 자신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훨씬 낫습니다. 그래야만이 자기 자신은 적어도 평화로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이걸 이렇게 해야된다 하는 생각때문에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허락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더 초조해지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들은 더욱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다툼이 생겨나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맨 먼저 그 다툼의 대상에게 자애를 실천하라.

누군가에 의해서 다툼이 일어나고, 누군가에 의해서 분노가 일어나고, 누군가에 의해서 초조한 마음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자기 마음에 들게끔 만드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오히려 멧따바와나를 행하라. '아, 당신이 참 행복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분노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을 자꾸 말하라는 거라. 저 사람이 나의 친구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자꾸 해야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다툼이 생길려고 할 때의 처방전은, 까루나 바와나입니다.

'아, 저 사람이 저런 괴로움이 없기를. 아,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을 가질려고 해야됩니다.

 

세 번째는 우뻭카 바와나입니다. 평등한 마음을 가지는 것.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도 저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 사람을 고칠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은 더욱더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침착하게 해서 대응을 하면 초조함은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설혹 상대방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본인은 냉정하게 평온하게 있을 것 같으면 크게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차에 사람이 뛰어들어서 부딪칠 위기가 생겼다, 그러면 운전하는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한 사람이라도 냉정하게 있을 것 같으면 운전하는 사람에게 "야, 사람있어!"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운전하는 사람과 같이 흥분을 하게 되고 냉정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으면, 옆에 있는 사람도 "엄마야" 하면서 자기 자신이 놀라게 됩니다. 그럼 당연히 사람을 치게 됩니다. 설혹 치게 되더라도 뒤처리를 잘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두 사람 다 흥분상태에 이르도록 만들면 안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여러분들은 반드시 우뻭카의 마음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 냉정한 마음을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문제가 생길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냉정해야지' 하고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그런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

생각하는 대상으로 만들지 말고 무관심해라. 아이가 마음에 안 들고 할 거 같으면 계속 자애 수행하고, 우뻭카 수행하고, 까루나 수행하고 해도, 애가 그렇게 안 바뀐다 할 것 같으면 그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자꾸 불만족스러운 게 보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우뻭카의 마음도 없어지고, 자비의 마음도 안 생깁니다. 그러면 그걸 대상으로 하면 안 됩니다. 내 관할 밖의 사람이다. 관할 밖의 대상이다 하고 여겨야 됩니다. 상대방을 계속 생각하면, 설혹 성내는 것을 억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독침을 감추는 거와 같다는 거라. 감출 수는 있지만 언젠간 그 애를 또 보면 독침을 끄집어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계속해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할 때도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그 대상이 변하는 성품을 알지 못할 거 같으면 대부분 수행자들은 그렇게 생겨나는 대상들을 무시해버립니다. 대상이 아닌 것으로, 내 수행 관할 밖의 것으로써 여겨버리고 무관심해버립니다.

그래서 실제 주대상으로 돌아와서 그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그 느낌들이 변하는 성품들을 보게 함으로 인해서 번뇌들이 떨어져 나가고 집착하는 것들이 떨어져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관할 밖의 대상으로 여겨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모든 생명들은 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법칙을 항상 생각하라.

업은 자기 자신의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지른 일로 해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저지른 업으로 인해서 내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법도 없습니다.

업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교차하지도 않고 공유할 수도 없습니다.

업은 곧 그 자신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저지른 것은 자기가 가져가는 거라.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업을 짓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내 업이 돼버리는 거라. 내가 성질내고 욕심내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내 업이 되는데, 왜 나쁜 업을 자꾸 저지르려고 하느냐는 거라.

다른 사람의 성격이 마음에 안들고, 태도가 마음에 안들고,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설혹 그사람이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사람이 짓는 업이라. 내 자신에게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업은 기능하는 겁니다. 행위와 행위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각각은 각각의 업을 짓게 돼있고, 받게 돼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맞출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찰하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업은, 저 사람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자신의 업을 상속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자신의 업으로부터 태어났고, 자신의 업이 곧 자신의 가족과 같은 것이다. 친족과 같은 것이다. 그 업을 주인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한 행위는 그 사람이 받는 것이고,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할 것 같으면 좋은 결과를 받을 것이고, 나쁜 일을 할 것 같으면 나쁜 결과를 받는 것이고, 본인이 받는 것이다. 하고 자꾸 생각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어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에게도 똑같이 해당이 됩니다.

 

사리불 존자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누가 와서 물어봅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가 그럽니다.

"사람은 아주 다양하다.

몸으로 짓는 행위는 나쁜 것을 짓기도 하지만, 말을 할 때는 아주 부드러운 말, 아주 상냥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라. 그럼 그사람 어디를 보고 나쁘다, 아니면 좋다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느냐. 말을 보고 좋다고 할 것이냐, 아니면 행위를 보고 나쁘다고 할 것이냐. 그 사람은 동일한 사람인데.

또 어떤 사람은 행하는 것은 잘 행합니다. 좋은 일을 행하는데 말하는 것을 보면 아주 거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보고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다는 거라.

또 어떤 경우에는 마음을 여는 경우도 있고,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좋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각각 틀린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럼 그 어떤 걸 보고 그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좋은 행위? 나쁜 행위? 아니면 좋은 말? 나쁜 말? 아니면 좋은 생각하는 거? 아니면 나쁜 생각하는 거? 아니면 마음을 여는 거? 아니면 마음을 폐쇄해가지고 있는 거? 어떤 걸 보고 판단하느냐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할 때는 어떤 것 하나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고 '아,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나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아, 나는 나쁜 행위를 하지 말아야지', 틀린 말을 할 것 같으면 '아, 나는 저렇게 틀리고 나쁜 말, 사악한 말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다른 것들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적어도 마음을 열고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려고 해야 되겠다', 나쁜 생각을 품지 않으려면 '아, 나쁜 생각으로 인해서 얼마만큼 나쁜 결과들이 오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서 나는 좋은 마음을, 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켜야 되겠다 하고 판단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스스로가 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을 거 같으면 인간관계들은 호전되어 나갑니다. 그것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남을 가르치겠다, 아니면 남을 이쪽으로 인도하겠다' 이런 생각 아예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서로의 관계들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수행을 할 때도 수행이 잘 될려고 할 경우에는 구비해야 될 조건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수행하는 것이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이 말을 하고 이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을 먼저 해야 됩니다.

꼭 마찬가지로 내가 보시를 할 경우에 이 보시로 인해서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내가 이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라는 거라.

 

두 번째, 수행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선택을 하라.

아, 내가 적당한 시간에 오늘 목요일 탁발법회니까 사람들 모였을 때 수행하면 수행이 더 잘된다. 아, 그러면 목요일 탁발시간에 와야되겠다. 그러면 제 시간에 맞춰가지고 적당한 시간에 오면, 그래서 스님 법문도 듣고 수행도 하게끔 된다는 거라. 특히 저 게으름지다보면 적당한 시간을 놓쳐버립니다. 스님 법문들 다 해가고 나면 인제 들어오는 거라. 적당한 시간을 모르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저 사람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저사람 나름대로 이유는 있겠지.

그런데 그걸 여러분들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최적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

그다음에 최적의 수행할 수 있는 장소를 고르는 안목,

훌륭한 스승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

이런 것들이 수행에서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 잘 선택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다툼이 있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이 말을 하고 이 행동을 했을 때 지금 적당한 시간인가? 그리고 다른 아이들하고 있는 이 장소가 내가 이 말을 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인가, 아니면 데리고 가서 다른 장소에서 얘기를 해야 되는가? 내가 이 아이에게 이런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런 훌륭한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할 수 있는가?

잘 선택해서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시간도 안 맞고, 장소도 안 맞고, 그럴 것 같으면 그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라.

 

그다음에 수행이 잘 무르익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목표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집중할려고 하고, 또 지혜롭게 될려고 하고, 탐·진·치가 없이 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지속성이 없으면 안됩니다.

아, 오늘은 몇시간 수행하겠다. 그 목표를 정했으면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지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만 핑계 다 대고 자꾸 그 시간 빼먹어버립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밥 먹는 건 안 빼먹어. 잠자는 것도 안 빼먹어. 또 테레비 보는 시간도 안 빼먹어. 도반들끼리 만나서 수다떠는 시간도 안 빼먹어. 그런데 꼭 빼먹는 게 수행시간만 빼먹어. 자기가 목표한 것에서. 그래놓고 "스님, 나 수행 잘 안됩니다." 안될 조건들을 만들어서 하면서 그럽니다. 목표한 것들을 설정했으면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알아차려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네 번째가, 알아차림을 하더라도 앞과 뒤의 원인 결과를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앞의 원인으로 인해서 뒤의 결과가 생기고, 뒤의 결과로 인해서 또다른 원인이 생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배가 꺼진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발을 들어올리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발을 내려놓는다는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거 같으면 연속하지 않게끔 됩니다.

지혜도 연속하지 않고, 알아차림도 연속하지 않고, 집중하는 것도 연속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원인·결과로써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어난 것들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고,

그렇게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참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하는 사실을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기고 소멸하는 현상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분명하게 해야만이 수행에서도 성공하게끔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툼이 생겼을 때도 이 다섯 가지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됩니다.

그 방식대로 다툼을 잘 해결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멧따를 실천하고, 까루나를 실천하고, 우뻭카를 실천하고, 대상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업을 짓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서 그 방식으로 인해서 대응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살아가는 것에서 다툼이 없게끔 되고, 내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일들로 인해서 초조해지고 긴장해지는 것들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나의 사고·관념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버려 두십시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몫들만 자꾸 챙기도록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