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조화롭게 살기 위한 다툼 처방법_선업을 지혜로움으로 (20120325)

담마마-마까 2021. 8. 4. 12:36

https://youtu.be/hbFopbUbPZU

* 조화롭게 살기 위한 다툼 처방법_선업을 지혜로움으로 (20120325)

 

스님이 설명을 미처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보충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뭐가 지혜일까? 또 뭐가 자비일까? 어떤 게 지혜입니까? 보통 지혜로운 자다 하고 얘기를 하면 어떤 자를 얘기합니까?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선한 일들을 많이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선한 공덕을 쌓게끔 됩니다. 그건 틀림없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악한 업을 많이 쌓게끔 됩니다. 선한 공덕을 쌓았는데, 그냥 선한 공덕만 쌓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여기 부산 같은 경우에는 목요일 탁발이 있습니다. 목요일 스님한테 탁발공양을 올리는 것도 선한 공덕입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우리 보살님 두 분이 점심 공양을 준비를 해옵니다. 뭐 여러 가지 양식을 준비를 해와가지고 그걸 요리하고 맛있게 해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먹일 거라. 그럼 선한 공덕을 쌓게 됩니다.

 

그럼 선한 공덕을 쌓기는 쌓았는데 거기서만 그쳐버리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뭐라 그랬을까? 잘한 거니까 그건 틀림없이 "잘했습니다. 장하십니다." 하고 얘기는 하죠? 그런데 그 선한 공덕 쌓은 것들이 지혜로운 삶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냥 "아이고, 장하십니다. 잘했습니다."에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것으로 연결이 될려면, 선한 공덕에 뭐가 전제조건이 돼야할까?

"조화로움" 입니다. 이걸 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좀 더 조화롭게 되고,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이렇게 됐을 때는 그 선한 공덕들이 지혜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조화로움으로 연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공덕은 공덕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또 그렇게 쌓은 공덕들은 크게 공덕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걸 한 행위에 대해서는 공덕이 되지만, 그 공덕이 좀 더 큰 형태로써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 하고 얼마만큼 잘 조화롭게 살 것이냐 하는 것과 같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뭘까?

당연히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남을 해칠려고도 하지 않고, 남을 가엾게 여기고 도와줄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조화롭게 말을 하게 되고 조화롭게 행동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자비로운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게 되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비가 몸에 배어있어야 됩니다.

가슴에만 있는 게 아니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될 때 그렇게 드러나져야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여러분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마음속으로만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문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 마음을 먹었으면 저사람이 행복하게 되기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될까? 무슨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것들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공양을 준비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까?만 생각하고 공양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이 공양을 먹고 얼마만큼 법문을 잘 듣고 수행을 열심히 할까 하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있고, 자비로워지게 되고, 또 지혜가 개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양을 지어서 여러분들에게 올릴 거라. 그럼 그사람은 마음속에서 당신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없어도, 이미 말이나 행동은 이미 행복하기를 바라는 형태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라.

 

공양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자비롭고 조금 더 지혜롭다 할 것 같으면 아, 이렇게 공양받은 것들이 참 고맙다 하는 것들이 마음속에 차게됩니다. 그래서 '공양 올린 분들이 좀 더 행복하기를, 좀 더 수행에 진척이 있기를'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나면 내가 저분들을 도와줄 일이 뭐가 있을까? 아니면 선원에서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조금 더 조화롭게 힘들지 않게끔 이루어질려면 어떤 일들을 해야 될까?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게 되고, 그래서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느 한 것을 떼어버리면 기우뚱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지혜는 지혜가 아니라 지식으로 흐르게 되고, 자비는 말로써만 행해지는, 생각으로써만 행해지는 혼자만의 자비가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항상 이 두 개는 같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안 싸워본 사람은 없죠?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다들 싸워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다툼이 있는 것은 일차적인 것은 자기 안에서 다툼이 있습니다. 수행이 잘되면 잘된다고 좋아하고, 수행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싫어하고, 이러면서 자기 안에서 스스로 싸웁니다.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싸우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을 멀리할려고 하는 것도 싸우는 겁니다.

싸운다고 하는 것은 나쁜 마음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에서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겁니다. 절대 수행하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기 스스로와 싸우면 안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집착할려고도 하지 말고 밀쳐낼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길하는 겁니다.

 

또 수행하는 사람들이 싸우는 게 뭐냐하면, '나는 수행하는데, 나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씩이라도 우리 선원에 와서 스님한테 오계를 받아서 오계를 만날 지키는데, 니는 수행도 안하고, 니는 오계도 지키지 않는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차별하게끔 되니까, 스스로는 오만해지게 됩니다. 사실은 그게 번뇌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져버린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더러워질려고 수행하는 것은 아닐거고, 마음이 더러워지려고 스님법문을 듣고 불교도가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

다른 사람들이 수행을 하든 말든, 다른 사람들이 오계를 지키든 말든 그사람은 그사람이 행한 것은 그사람 지가 지꺼 먹는 거니까 그냥 내둬버려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행위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와 남을 차별할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수행자가 두 번째 해야 될 일입니다.

먼저 자신과 다투지 말고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아야 됩니다.

말은 쉬운데 참 잘 안되죠?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정도로 수행이 무르익지도 않았고, 또 조화롭게 나가는 법을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이 태국가서 출가를 하게 되게 된게 그 스님이 하는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을 하게 됐다 하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스님들하고 일반인들 하고 같이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애들 데리고 오는 부모님들이 오겠죠. 애들이 무슨 수행하러 오겠어요. 저들끼리 떠들고 놀기 바쁘지. 그러니까 좀 멀리 가서 떠들고 놀면 괜찮은데 애들은 그런 거 신경 안씁니다. 스님이 있든, 수행을 하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너무 심하게 떠들고 있으니까 큰스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애들아 조용히 해라" 그렇게 하는데 그 말속에 자비가 있는 거 하고 없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이놈의 자식들. 와 여기서 떠들고 놀아?' 이런 마음으로 "애들아 조용히 해라" 했을 때의 그 톤과, 아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아, 쟤들도 자기 할 일들을 하고 있고, 자기의 권리대로 하고 있고, 쟤들도 행복해야지. 그와 더불어서 다른 수행하는 사람들도 저렇게 행복해지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에서 애들한테 "애들아 조용히 해라" 했을 때의 말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게 확 다가와지는 거라. 거기서 끝났으면 스님이 아마 뛰어나신 스승이다 하고 생각을 안 했을 거라. 그런데 그렇게 말해봐야 그때 잠깐뿐이지 조금 있으면 또 떠들고 되는 게 애들의 모습이지. 또 떠들거든. 또 한참 있다가 경행하다 저쪽으로 갔다가 여기로 돌아와서 딱 멈춰서가지고 또 똑같은 어조로 "애들아 조용히 하거라"

여기 수행하니까 조용히 하라 얘기도 안 하고, 그러면 저 저쪽 가서 멀리 가서 놀아라 그런 얘기도 안 하고, 그냥 오로지 "애들아 조용히 하거라" 합니다. 그걸 한 시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반복을 하시는 거라. 그것도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 애들이 시끄럽다 싶으면 경행하다가 딱 멈춰서가지고 그 얘기를 하는 거라.

그 소리를 애들이 어떤 때는 들을 때도 있고 안 들을 때도 있어. 그거 듣든 안 듣든 간에 일단 그 스님은 자기 할 일만 그렇게 하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아, 얼마만큼 성냄을 다스리고 있으면 저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성냄을 항상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자비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거기서만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데 평정한 마음도 함께 지니고 있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것이 저 아이들에게 이익이 있고, 어떤 것이 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는가에 대한 절충점을 찾게 되는 거라.

 

만약에 자비심만 있는 사람이다 할 거 같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했을까요? 애들에게 "애들아 조용히 하거라" 하는 거를 계속적으로 자비의 마음으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평정심을 함께한 상태에서 자비의 마음이 있는 경우에는 쟤들도 자기의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 못지않게 쟤들도 똑같이 평등한 하나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애들에게도 그 노는 권리를 빼앗지 않을 뿐만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수행하고자 하는 권리를 빼앗지 않으면서 가끔씩 와서 똑같은 말투로 얘기합니다.

 

그걸 보고 자비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혼자 있어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비심이 혼자만 있을 것 같으면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무리 내가 자비심을 발현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맞게끔 대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평정심이 있는 상태에서 자비롭게 되면 어떠한 상황 어떠한 경우가 되더라도 똑같은 형태로써 이루어집니다.

결국 한 시간 내내 애들은 거기서 어떨 때는 좀 크게 떠들고 놀다가, 어떨 때는 좀 조용히 하다가, 어떨 때는 좀 작게 떠들다가 이러면서 자기는 할 일들을 다 했어요. 똑같이 수행하는 사람들도 어떨 때는 그걸 방해를 받는 사람들도 있고, 어떨 때는 방해를 안 받고, 어떨 때는 조용하니까 수행이 잘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수행하는 사람들도 수행하는 걸 흐트러지지 않고 수행하게 됩니다.

 

다툼이 있을 때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될려면 적어도 아마 무진장하게 노력들을 해야 될 거라. 그 정도로 평소에 갈고 닦지 않으면 다툼이 있을 때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평소에 그것을 훈련들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나 큰스님들이 말한다고 해가지고 모든 걸 다 듣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 아이들도 아무리 큰스님이 얘기해도 어떨 때는 조심하고 어떨 때는 지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리합니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도 부처님 제자들이라 해서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지금 큰스님과 마찬가지로. 스님들끼리라서 만날 화합하고 잘 살거 같죠? 만날 싸웁니다. 싸우는게 그래도 적어도 테라와다 스님들은 추접은 것 가지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주지 서로 할라고 싸운다든지, 먹을 거 가지고 싸운다든지, 아니면 신도들 많이 확보할라고 싸운다든지 이런 추접은 거 가지고 싸우지는 안 해. 싸우는 거 보면 만날 보면 아주 시시한 것 가지고 싸웁니다.

 

진주 연화사에서 스님이 생활을 많이 했는데, 출가하기 전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거기서 살고 했었어요. 거기서 아, 스님들 삶이 참 아름답다 하고 느낀 게 언제냐면 스님 두 분이 소나타 차를 똑같이 뺐어. 한 스님은 연화사 주지스님이고 한 스님은 또 다른데 있었는데, 똑같은 날에 똑같은 차를 뺐는데, 한 스님 차에는 보니까 누가 윈도브러시에 옵션으로 물이 잘 나가도록 뭘 하나 끼워줬어.

한 스님은 그게 샘이 난 거야. 그래서 이거 봐라 나는 이것도 있다 하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쪽 옆에 있던 스님이 지기는 싫으니까 내거 봐라. 자동차 핸들 카바 얼마나 예쁘냐.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싸워도 예쁘게 싸운다. 물론 결코 선한 마음은 아니지만은. 싸워도 저렇게 싸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스님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귀엽고 참 예쁘다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테라와다 스님들이 싸울 때가 꼭 그와 같이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크게 싸워도 다툼으로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도 그것으로 인해서 분란이 있어가지고 하나의 종파를 만든다든지, 아니면 나는 여기서 못살겠다 해가지고 다른데 달아난다든지 이런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게 뭐랄까 가진 것이 없는 분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고 또 자유로움인 것 같애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크게 싸울 건덕지가 없습니다. 솔직히.

 

스님도 가끔씩 한국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을 경계를 많이 합니다.

한국에서는 스님 통장은 어쩔 수 없이 있어야 되니까 통장에라도 돈이 들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20만원 이상을 넘지 않을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 법문을 간다, 그러면 저 차를 끌고 어디를 가야된단 말이라. 그럴 거 같으면 그 차 기름 값 하고 혹시 문제가 생겼을 때 쓸 수 있는 돈이면 왔다갔다 한 20만원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20만원이 넘지 않도록 항상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떨 때는 크게 혼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크게 혼날 걸 대비해서 돈을 모아두지는 않습니다. 내가 앞으로 아플걸 대비해서 보험에 들지 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스님은 보험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아놓은 재산 단 10원도 모아놓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안돼.

가진 것들이 없으면 그마만큼 여유로워지고 번뇌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를 하게 됩니다. 내가 왜 번뇌 생길 일을 내가 왜 해?

 

그래서 만약에 돈이 생기게 되면, 어떤 분이 돈을 주기도 합니다. 스님은 법문 가서 스님은 절대 돈을 받지는 않습니다. 법문의 댓가는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거 말고 사사로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거는 그 사람들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 이렇게 받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많은 돈을 줄 때가 있어요. 어떨 때는 50만원 주기도 하고 이럴 때가 있어요. 그럼 이걸 통장에 지금 돈이 없으면 20만원만 여놔놓고 30만원은 써버립니다. 그걸 뭐 선원에 기름 사는데 쓰든지, 아니면 선원에 부족한 거 있으면 그걸 사는데 쓰든지, 아니면 뭐 같이 있는 스님이 있으면 "야, 너 차비해" 하면서 줘버린다든지 줘버립니다. 방어를 한다는 말입니다. 스님 스스로.

 

왜 이런 마음을 가지느냐 하면 이미 출가한 스님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그렇게 다투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자기 스스로의 다툼입니다. 자기 스스로 갈등을 하고 번민에 빠지고 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왜 그걸 만들어야 돼?

그걸 경전에서는 뭐라느냐 하면, 집에 불이 났는데 불 끌 생각은 안 하고, 어느 놈이 내 집에 불을 냈느냐고 그걸 찾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툼이 있는 거는 그와 같다하고 얘기합니다. 다툼이 있게 될 거 같으면 물론 당연히 다툼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냄이나 욕심을 가진 것이나 어리석은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지금 싸움이 성립이 안됩니다.

 

그런데 나에게 지금 성냄이 일어난 상태라. 그럼 어떤 거 먼저 해야 돼?

내 성냄 먼저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 내 집에 불부터 꺼야지. 어떻게 밖의 것들을 끌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의 원인을 찾을려고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니가 이것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을 해버릴 것 같으면 문제 해결이 안되는 거라. 우선 내 불을 끄고 나면 아주 자연스럽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냉정하게 되고 이성적이 되기 때문에 다툼은 쉽게 해결해 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불 먼저 끌 생각들을 안 하는 거라. 자기의 불을 먼저 끌려고 해야 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재산 때문에,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아니면 명예 때문에, 아니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지식 때문에 참 많은 사람들 하고 다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잊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병들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사람이다, 내가 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다,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이 많다, 아니면 조금 더 명예가 높다, 할 것 같으면 조금 더 대범하게 생각할 수 없나?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면 "내가 어찌 내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겠는가? 좀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살아야되지 않겠는가" 하고 얘기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가끔씩 그럽니다. 스님들도 정기적으로 모이는 게 있습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모여서 니가 잘났니. 내가 잘했니, 그리고 스님들은 이런 생활을 해야 된다 하고 이렇게 계속합니다.

어떨 때는 하도 잔소리 듣는 스님들은 안 올라 그럽니다. 만날 가면 찐빠만 먹어쌌고, 또 공부 안 했다고 선배스님들이 뭐라 해쌌고 이러니까 안 올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핑계를 대느냐면, “스님 저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되겠습니다. 아직 내가 수행이 덜 익었고 공부가 안됐으니까 열심히 공부만 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 상가모임에 참석하는 걸 좀 빼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게 어디 나한테 통하나. “니가 어찌 니 하고 싶은 일만 할려고 하느냐. 더 위대한 일을 할려고 출가해놓고 니 하고 싶은 일만 할려고 하느냐, 더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라.”

“상가가 있어야지만 개인의 스님이 존재를 하는 것이지 상가가 존재하지 않는 스님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면 너의 의무는 해야 되지 않느냐? 그것을 수행 삼아서 하면 될 일을 갖다가 수행과 왜 다른 일상 생활을 자꾸 분리할려고 하느냐?”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아무리 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요즘이 정치 계절이니까 만날 나와서 토론을 합니다. 어떨 때는 보면 토론이 토론으로써 이어지면 좋은데 어떨 때는 보면 감정적인 싸움이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참 저걸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정당한 일을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정당한 일이 합리화되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합리적이라 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음, 토론회 잘한다 하고 바라봐야 되는데 언짢게 바라보고 있다는 거라.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그렇게 나오는 사람들이면 자기의 정당한 일을 얘기를 안 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큰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겠나 하는 것을 가끔씩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 토론회 하는 것을 보고 아, 참 잘했다. 이제 정치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일이지 않느냐는 거라.

왜 더 배우고 더 가진 사람들이 더 위대한 일을 할려고 하지 않느냐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들은 왜 자기 할 일들만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게 뭐냐하면 까루나(karuṇā )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할려는 마음들,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들을 구해줄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정당한 일만 자꾸 추구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수행만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들, 삼귀의 오계 받는 것, 그것조차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스님 법문 듣는 것, 그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서 그것조차도 안 들을려고 그럽니다.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부처님의 제자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런 것들은 가져야 됩니다.

1.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서 봤을 때 가장 먼저 갖추어야 되는 것이 공감하는 부분을 형성해야 됩니다.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형성이 돼야 됩니다.

2. 그리고 남의 행동이나 남의 말들을 듣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3. 또한 내 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을 드러낼 줄을 알고 참회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4. 그리고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능력들을 자꾸 키워야 됩니다.

5. 또한 사무량심 자···사 라고 하는 수행을 항상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게 부처님 제자가 갖추어나가야 될 일들입니다.

적어도 그렇게만 할 거 같으면 큰 다툼은 없습니다.

 

교재 내용들을 한번 보십시오.

가장 하수가 다툼이 있을 때 처방하는 방법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이 방법은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 그래도 현명하고 나이드신 분들이 다툴 때는 이렇게 하라 하고 얘기한 게 그 밑에 적어놓은 아홉 가지입니다.

1.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현재의 감정만을 말하라.

2.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지 말아라.

니가 나한테 뭘 해줬니, 나가 나한테 뭘 잘못했니, 옛날에는 뭘 어쨌니 저쨌니, 확대하지 말아라. 일어난 일만 가지고, 그 일만 가지고 얘길해야지 그 사람의 성격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거라.

3. 세번째는 한 가지 사건으로 다툴 때는 그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로 확대하지 말아라.

많이 확대들 하죠? 그거하지 말아라는 거라.

4. 네번째는 가족이나 친척을 들먹거리거나 끌어들이지 말아라.

반드시 피해야 됩니다.

 

5. 잘못을 했으면 빨리 인정하라.

성냥불을 켰을 때 불이 성냥에 있을 때 꺼야 됩니다. 꺼버리면 간단한 문제인걸 갖다가, “아, 내가 잘못했다” 했으면 끝날걸 갖다가 끝끝내 고집부립니다. 그러면 그 성냥에 켜진 불이 그냥 가만히 있습니까? 종이에 타고 나중엔 집까지 홀라당 다 태우게 되는 거라. 왜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을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빨리 인정하라. 잘못한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는게 아닙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도 자존심 내세운다고 그걸 인정을 안한다는거라. 빨리 인정하라는 거라. 그래야 싸움이 길에 이어지지 않습니다.

 

6. 합의하에 해결했으면 다시는 그것을 끄집어내지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다시 계속 얘기할려고 그럽니다. 스님들도 그럽니다. 뭔가 합의해놓으면 다음에 또 그걸 가지고 끄집어냅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짜증나고, 그러면 다시 스님들끼리 짜증을 부릴수도 없으니까 그걸가지고 또 합의를 합니다.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는대도 또 그러고 있는 거라. 다시는 끄집어내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이 그 합의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적으로 행해나가면 적어도 잘못된 방향으로 넘어가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판단을 해서, 두 갈래길에서 판단을 해서 이길로 가야되겠다고 판단을 했을 거 같으면, 설혹 그길이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그길을 쭉 갈거 같으면, 조금 고생하는 한이 있어도 목적지는 도달을 합니다. 그런데 그걸 또 바꾸고 또 바꾸고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스스로가 지쳐가지고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이거는 대부분 남자들한테 좀 많이 해당이 되고 하는데.

 

7. 이기려고 하지 말아라.

본때를 보여주겠다, 내가 이번에는 절대로 안진다, 내 자존심을 찾아서 내가 할 얘기 다하겠다, 쓸데없는 거 내세울려고 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이기려고 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기회로 아십시요. 다툼이 있으면 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 들을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냐 하고 판단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들을 수 있을 때 그 다툼이 화해가 되고나면 더 오히려 돈독해지는 거라. 그래서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이번에는 꼭 내가 이거는 이기겠다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안됩니다.

 

8. 그다음에 삼가해야 될 말은 끝까지 삼가해라.

욕 하는 거, 가슴에 상처주는 거, 그다음에 폭력적인 것들, 그다음에 시댁과 친정이나 이런 것들의 나쁜 거나 결점들 들먹거리고 지적하는 것들, 그다음에 상대방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절대 하면 안됩니다.

 

9. 그다음에 먼저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라.

쉽게 사과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런데 말하는 것들을 부드럽게 할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충분히 잡습니다. 그 기회를 잡았을 때 설혹 자기가 잘못 안해도 잘못했다고 해보십시요. 금방 문제 해결됩니다. 부드럽게 누그려뜨리도록 만들어서 잘못했다고 할 경우에는 크게 문제는 안 되는데, 성질은 바락바락 부리고 있으면서 “내 잘못했다” 이럴 것 같으면 오히려 성질을 더 돋우게 됩니다. 먼저 말과 행동으로서 부드럽게 자기 자신을 만들고 나서 잘못했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렇게 해가지고 지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사람이라.

 

10. 그다음에 오래 싸우지 마라.

각방 살림하고 다른데로 가서 며칠씩 있고, 참 바보스러운 일들입니다. 반드시 빨리 해결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게 가장 하수들이 해야 되는 일입니다.

적어도 다툴 때는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안그러면 일반적으로 대부분 성인들, 어른들은 요렇게 요렇게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입술을 꼭 깨물어라 어쩌라 저쩌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게 뭐 있을까?

다툼이 탁 있으면 다투지 않게끔 만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스님한테 누가 와가지고 맨날 남편이 뭔 말만하면 욕을 하고 그러는데 남편 말만하면 내가 성질이 납니다. 그래서 맨날 싸우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남편 안 보고 한집에서 안 살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그 스님이 그 여자분에게 물을 한 병을 줍니다. “이거 아주 영험있는 물이다. 이 물 먹으면 절대 안 싸운다.” 그러면서 그 물을 줍니다. 남편이 뭐라고 말을 해가지고 성질이 나면 탁 그 물을 먹으라는 거라. 그 대신에 그 물을 먹기는 먹는데 삼키지는 말아라. 남편이 다 말할 때까지 삼키지 말고 물을 머금고 있어라. 그러니까 말을 할 수가 없지. 결국 싸움이 안 됩니다. 일방에서 반응이 없을 거 같으면 싸움이 안됩니다.

 

대부분 반응들을 보면 말로써 반응들이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그러고 나서 행동으로 됩니다. 말이 안 나오니까 행동도 자연스럽게 안 되게 되는 거라. 속이야 부글부글 끓던 어쨌든 간에 거진 다툼이 없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남편도 자꾸 그게 지속되다 보니까 말해봐야 마누라는 대꾸도 안 하고 그리있지 뭐. 나중에는 아예 그러한 식으로 말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가지고 부인이 좋은 상태에서 왜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할 것 같으면 그때사 남편이 말합니다. 아, 내가 말할 때 그렇게 나쁜 말을 하느냐? 그러고 나면 이젠 잘 안 싸우게 됩니다.

 

다툼이 없을려고 할 것 같으면 더 좋은 것은 침묵하는 것.

지금 내 마음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끔 침묵하는 것, 더불어서 상대방과 다툼이 없게끔 말로써나 행동으로써 침묵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그 스님이 가르쳐준 거라. 그 물이 무슨 영험이 있어가지고 안 다투게 됐겠어?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다툼이 있으면 반드시 마음에서 침묵을 하도록 하고, 말과 행동으로써 침묵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거보다 더 좋은 게 지금 설명 할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떡하냐. 본게임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시간이 다 돼버렸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잡을려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말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라.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꾸 경계해야 됩니다.

'아, 내가 성냄이 있구나. 아, 내가 나쁜 말을 할려고 하는 구나. 이래선 안되지.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내 자신이 괴로울건데 내가 괴로운 짓을 내가 왜 할려고 하느냐?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성냄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성냄을 잘 다스려야만이 내가 행복할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라는 거라.

다른 사람 니가 잘했니, 잘못했니 그거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아무리 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분노로써 괴롭지 않게끔 고민하지 않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그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얘기한 다섯 가지 방법들을 실천을 하면 됩니다.

 

밑에 부분은 다음에 얘기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프린트물로 대체하도록 하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