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1~2012 일상수행법문

수행 중에 일어나는 현상,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20111001)

담마마-마까 2021. 6. 15. 09:00

https://youtu.be/ODLo70mMGhc

* 수행 중에 일어나는 현상,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20111001)

 

인제 가을이죠? 단풍 구경들 안 가요?

가을 되면 보통 단풍 구경 가든지 자연을 구경하러들 많이 갑니다. 스님이 단풍 좋아하는 데가 어디 나면 지리산에 뱀사골이라는 데가 있어요. 뱀사골 단풍은 다른 단풍하고 다르게 아주 짙붉습니다. 옛날에 6.25 있고 할 때 그쪽에서 빨치산 활동들 많이 하고 해가지고 많이들 죽었죠. 그래서 일설에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 죽은 피 때문에 단풍색이 더 붉다 하고. 어쨌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거기가 단풍이 굉장히 짙게 핍니다.

그러면 계곡을 따라서 쭉 가다가 보면 단풍 본다고 정신을 놓는 경우가 있어요. 한참 가다가 보면 내가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그때라도 정신차리고 ‘어? 벗어났네’ 하고 다시 돌아와버리면 크게 문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뱀사골 계곡이 깊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당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구조되어 가지고 내려오는 경우들이 있고 그러는데, 특히 밤이 되어버리고 하면 더 힘들어지죠.

 

여러분들은 수행하다가 길을 잃어버리게 될 때, 언제 길을 잃어버려요?

수행 잘 안 될 때는 길 안 잃어버립니다. 수행 안 되는데, 길도 모르는데 길을 잃어버릴 이유가 없잖아. 수행 잘될 때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단풍 구경하다가 넋이 빠지는 거하고 똑 마찬가집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어떨 때는 굉장히 속이 메스껍기도 하고, 앉아만 있으면 어질어질어질 하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잘못 착각하는 게 수행을 잘못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그러는데, 실은 그렇지 않고 수행을 잘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있으면 뚜렷하게 뭔가 보이기도 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이 실제 눈앞에 탁 나타나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그걸 부처님이 방광한다고 그러죠? 부처님이 방광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현상들은 보면 “내가 수행이 잘됐어” 그러는데, 조금 전에 얘기한 어지러움이 일어난다든지 속이 미슥거린다든지 이런 것은 수행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해버리는데, 사실은 똑같은 현상입니다.

마음의 작용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길을 잃어버립니다.

앗차! 길을 잃었다 생각하고, 퍼뜩 정신차리고, 제 가던 길로 다시 돌아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죠! 처음에 조금 일어날 때는 '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갑다.' 하고 그냥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와서 수행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 안 하는 사람들이 있죠? 어떨 때 그렇게 안 돼요?

그냥 그 재미에 빠져버리는 경우! 자극이 강할 때!

그 기쁨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든지, 아니면 호흡에 마음에서 일으키는 작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굉장히 강할 때,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면은 그것을 계속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부처님도 방광을 했다가 부처님이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여러 가지 조화들을 부리게 되는 거고, 어지럼증이 있는 사람들은 일어서도 어지럽고, 누워있어도 어지럽고, 뭐 어지럽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난청이 생기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소리가 그냥 들리고 이렇게들 됩니다.

내가 일부러 들을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가만히 있는데도, 수행 안 하고 있는데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그럽니다. 그렇게까지 바뀌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인제는 주대상인 호흡으로 돌아오는 건 깜깜무소식이 돼버립니다. 거기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물론 빠져서 좋은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게 좋겠습니까? 그런데 빠져버리면?

아는 소리 하죠! 인제는. 남 미래를 어느 정도 볼 수도 있고 하니까 괜히 아는 소리 합니다. “너 내일 뭐 하지마. 물가 쪽으로 가지마.” 하든지 하여튼 그 선무당들 있잖아. 선무당 하는 짓을 자기가 하고 있거든.

그런데도 지가 하는 일들은 잘 몰라.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은. 그래서 무당들은 다른 사람들 점은 잘 보는데 자기 점은 못 본다고 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왜? 자기에게 빠져있으니까! 거기에 빠져있으면 자기 일은 모르거든.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은 개발을 해나갑니다.

소리가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들리기도 하고, 뭔가가 보이기도 하고, 과거 전생들을 어렴풋이 알기도 하고 그렇게들 해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재미에 빠져서 거기에 쭉 들어가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거지.

그러면 이건 대책이 없습니다. 지 혼자서는 못 빠져나옵니다. 누가 옆에서 심하게 두들겨 패든지, 안 그러면 누군가가 가가지고 구조를 해가지고 데리고 내려와야만이 이게 해결이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수행이 꼭 마찬가집니다.

해나가다 보면 이런 현상들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럴 때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은, "내가 돌아갈 곳이 뭔가?" 하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돌아갈 곳이 어딥니까?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고, 마음을 관찰하고 있으면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고, 주대상으로 자꾸 돌아갈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수행을 하는데 그걸 기준점을 잃어버려 놔놓으면 수행에서 자꾸 벗어나져 버립니다.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그걸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스님도 거의 한 1년 가까이 그런 적이 있어요. 안 돌아와져요. 자기는 호흡한다고 하는데도 하기만 하면 그냥 뭐가 보이는 걸 어떡할 거야? 그것도 아주 강하게! 자극이 강하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누가 여러분들 입에 아주 맛난 것들을 준다고 할 거 같으면 어느 정도 달콤할 거 같으면, 내가 내 건강을 생각해서 나에게 해롭다 할 거 같으면 안 먹습니다. 맛만 보고 그냥 뱉어내 버립니다. 그런데 그게 아주 달콤해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그냥 그거 먹어버립니다. 먹어버리면 당연히 부작용들이 일어나는 거라.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그 이하로도 이상으로도 생각해선 안됩니다. 그래야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집니다. 그걸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돌아올 자리들이 없으면 안됩니다. 마음속에 항상 그렇게 염두에 두십시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나를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대상일 뿐입니다. 설혹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느냐는 거라. 호흡이 나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지, 아니면 내가 신통을 얻어가지고 남의 소리를 멀리 있는 것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나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됩니다.

 

뭔가 알려고 하고, 뭔가 조금 더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탐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탐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자연 그대로 알아차려지는 것들입니다.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빨리 열반에 이르는 것이지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 나아가는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그것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그와 같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면 좋을 건데, 마음에서 일어나면 참 다스리기가 수월하거든요. 그런데 몸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왜 그럴까? 수행이 잘되면 왜 몸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니까 몸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표출해야 됩니다. 그게 어지럽든지 아니면 기쁘든지 하는 것으로써 표출되는 것들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단풍을 보면 아, 즐겁다 하는 마음만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럴 것 같으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즐거움만 알면 됩니다. 그래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길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오히려 다스리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참 다스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어떡할 거라? 그걸 일단 넘어서야 한 경계를 넘어서는 건데! 인제 겨우 방향을 잡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 몸에서 좋은 것들도 일어나고 싫은 것들도 일어나고 할 건데, 나중에 짜증이 납니다. 아! 좀 이런 거 좀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그전에는 수행을 하면 앉아 좌선을 할 것 같으면 두세 시간은 거뜬히 하거든. 그런데 앉아 좌선만 하면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니까 앉기가 싫어. 좌선을 해도 십 분을 못 견디네. 금방 일어나야 돼. 금방 경행을 하면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또 좌선을 하고. 아마 여러분들 같으면 포기해버릴 겁니다. 그러겠죠? 그런데 포기를 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경계점입니다. 오히려 현상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더 발전된 상황입니다.

그 경계점을 넘어서고 나면 수월해집니다. 그 경계점을 넘어서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수행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잘 비추어보십시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수행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수행하기 싫은 건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수행하기 싫다고 할 것 같으면 단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거는 '어! 내가 그래도 공부 잘하고 있네'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돼! 그때는! 그때는 뭐 십 분도 못 견디겠다고 하더라도 어찌 됐든 간에 그 시간 동안 삼십 분 아니면 한 시간 할 거 같으면 그 시간을 견디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도저히 수행시간을 견딜 수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때는 수행하는 것들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십시오.

마음에서 일으키는 수행의 마음들, 자애 수행을 한다든지 해가지고 그 마음을 들뜨는 마음들이나 이런 것들을 벗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것으로서 수행을 삼아야 되는 것이지, 그냥 호흡으로 돌아올 거 같으면 실패해버립니다.

 

그걸 기준점으로 삼아서 수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자꾸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면 어느 순간에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그것이 어지럼이 오든, 아니면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주르르 흐르든,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기쁨의 현상들이 자꾸 일어나서 부처님이 보이든, 아니면 몸이 자기도 모르게 막 움직여지든,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싹 가라앉게 됩니다.

그 순간을 잘 견디도록 하십시오.

 

기준점을 반드시 잡고 그 길로 돌아오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벗어나면 다시 잡아 오고, 벗어나면 다시 잡아 오고, 그렇게 해서 수행하기 싫어하는 마음까지도 자꾸 없앨려고 해야 됩니다.

집중이 안 되고, 짜증이 나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나고 하더라도 그것은 몸의 현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면 수행이 잘되고 있다고 자꾸 생각을 하고 그걸 견디어 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수행이 안 될 때 제자리를 잡는 것이 기간이 더 깁니다.

오히려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쁨의 현상이나 우울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시간이 더 깁니다. 하기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 때문에!

그리하더라도 그걸 잡아와야 됩니다. 그 기간이 길더라도 잡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기준점을 잘 잡으면 금방 잡아와집니다. 그렇게 수행을 자꾸 대체해나가도록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이 인제는 진정으로 마음에서 일으키는 즐거움들이 있게 됩니다. 수행이 이렇게 즐겁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까지만 가면 인제는 수행은 아주 자연스러워집니다.

 

수행에 대한 걸 간단하게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수행하면서 꼭 이것은 지키도록 하라는 얘 기들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 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 그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는 터지는 게 아닙니다. 열려서 빨려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도의 문으로 들어갔다고 그럽니다. 도의 문에 들어갈 때의 느낌들은 쑥 빨려들어가는 느낌들이 듭니다.

변기 물을 내리면 어떻게 돼요? 물이 안으로 쏙 빨려들어가죠? 꼭 그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가끔씩 참 우리 조상들이 용어들을 참 잘 선택하는구나 하고 해집니다. "도로 들어간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가끔씩 요즘은 그걸 안 하고 '도통한다'고 그러는데, '도를 통한다'고 그러는데 부수면서 들어가는 현상들은 없습니다. 부수어질 때는 도를 통한 도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현상을 극복하는 겁니다. 그거는 아직 도의 과정이 먼 것입니다.

부서지고 깨지면서 환해지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을 극복한 겁니다. 그거는 아직까지도 도의 길에는 멀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도통한다'고 얘길하면 안됩니다. '도로 들어간다'고 해야 됩니다.

 

어쨌든 도로 들어가는 길 해탈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수행만 열심히 하면 돼? 됩니까? 왜 대답을 못해?

물론 수행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자꾸 착각을 하는데 해야 될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도 수행 부분만 스님이 자꾸 얘길 하니까, '수행만이 있는 갑다' 하고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들이든 거기에 맞는 것들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들어갑니다.

 

항상 그런 얘기를 자꾸 하죠! '바라밀'을 자꾸 성취하도록 하라 하고.

'열 가지 선근 공덕'들을 갖추도록 하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못 들어갑니다.

힘이 딸립니다. 아무리 변기 물을 내리려 하더라도 그 내리는 힘이 약하면 눌리긴 눌리더라도 물이 안 빨려 들어갑니다.

수행 하나만 열심히 죽자고 하면 될 거 같죠? 절대 안됩니다. 갖추어야 될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자꾸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랏타빨라 스님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랏타빨라 스님이 출가를 할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출가를 안 시켜줬거든. 그래서 일주일간 단식을 하고 나서 겨우 출가를 하게 됩니다. 언제 한번 얘기를 했죠? 출가를 하고 나서 깨달음을 이루고 다시 그집에 가서 공양을 얻어 잡숫고 그렇게 합니다.

그때 이 랏타빨라 스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수행을 합니까? 수행하는 목적이 뭐라? 여기서 4가지를 얘기합니다.

 

나는 항상하지 않다.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

견고하지 않으니까 병드는 거고 늙는 거고 죽는 겁니다. 견고할 거 같으면 병들지마라 할 거 같으면 안 들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도 그렇게 되는 법이 없거든. 항상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해야 됩니다. 생로병사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거 없다는 거라. 열심히 수행을 하고 또 열심히 내가 선한 일들을 쌓는 것 그것밖에는 없다는 거라.

백중 때 여러분들 마지막에 뭐 했어요? “이와 같은 공덕들을 돌아가신 분께 회향합니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공덕들을 쌓은 것들을 돌아가신 아귀계에 있는 분들에게 회향한다는 뜻입니다. 죽어서도 공덕을 회향받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히 공덕을 쌓는 겁니다. 생로병사의 윤회의 고리는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만들수는 있다는 거라. 지금 현재 내가 조금 더 이익이 있고 행복하게 되는 거고, 죽고나서도 조금 더 이익이 있고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되는 거고.

 

그 길은 뭐가 있습니까? 수행 열심히 잘하는 것하고 공덕을 쌓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생로병사라고 하는 것들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는 참으로 힘들다는 거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해탈하는 길밖에는 없는데 해탈이 멀리 있을 거 같으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뭐가 있겠어요? 수행하고 공덕 쌓는 거라. 그래서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는 거라. 그래서 나는 수행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 공덕을 쌓는 것도 수행을 하면서 공덕을 쌓는 것이 훨씬 크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공덕을 쌓는 것은 나의 이기심, 나의 이익을 위해서 공덕을 쌓을 것 같으면 요만큼밖에 안돼. 그런데 수행을 하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덕을 쌓게 될 거 같으면 그 공덕은 훨씬 더 클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이될 수가 있다는 거라.

 

(종소리 들림) 이 소리 들립니까? 친 것은 내가 쳤거든. 그런데 소리 들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듣게 됩니다. 공덕을 쌓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듣는 것은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몸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쌓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걸 들을려고 하는 마음만 일으켰으면 다 듣는 겁니다. 실제로는 나 혼자서 이걸 친 겁니다. 여러분들이 친게 아니고. 그런데도 소리는 여러분들이 다 듣는다는 겁니다.

 

수행을 해서 선한 마음으로서 수행을 하게 되고 그 선한 마음으로서 공덕을 쌓게 되면 그 공덕은 여러 사람들이 다 나누어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공덕이 크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나 혼자 소리내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일체 못 듣게 방에다가. 그것은 수행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공덕을 쌓는 거라. 나의 이익을 위해서. 그거는 공덕은 그대로 자기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덕은 더 커지지를 못해. 커져나가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수행을 하면서 공덕을 쌓는 것이 큰 이익입니다.

그게 첫 번째로 랏타빨라 스님이 얘기를 한 겁니다.

 

두 번째가 왜 수행을 하는가? 나를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거라.

아무리 세상을 뜯어봐도. 내가 의지할 곳도 없고 나를 지켜줄 사람도 없다는 거라. 누가 여러분들 지켜줄 겁니까? 아무도 못 지켜줍니다. 누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느냐는 거라. 세상이란 게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자꾸 착각을 한다는 거라.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보통 4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내가 이만큼 잘해줬으니까 나중에 내가 늙고 나면 나를 좀 잘 봉양해주겠지. 착각하는 거라. 요즘은 착각이라는 거 알죠?

 

그다음에 내가 너를 키운다고 대학교까지 돈이 요마만큼 들었고 시집장가 보내는데 집 마련해주는데 요마만큼 들었으니까 적어도 나중에 내가 늙고 나면 내가 그래도 먹고 살 거는 좀 만들어주겠지. 쉽게 말하면 먹을 거라도 좀 갖다주고 용돈이라도 주고 그리 하겠지. 안 하죠? 그걸 기대하니까 어떻게 되요? 추석이나 명절날 와서 인사 안하면 성질내는 거라. 그런데 그거 바라는 거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라.

 

그리고 나서 죽을 때 돼서 적어도 내가 죽고 나면 나를 위해서 슬퍼는 해주겠지. 하는 기대를 합니다. 근데 그렇게 됩니까? 물론 곡은 하겠지만 진정으로 마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키느냐는 거라. 내가 쌓은 행위로 인해서 참 돌아가신 것이 아쉽고 할 것 같으면 슬퍼 울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식적으로 울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내가 아무리 재산을 물려줬고 내가 이마만큼 키워줬다 하더라도 그거 소용이 없는 거라. 내가 행한 행위들을 떠올려서 남아있는 유족들이 슬퍼하는 거고, 그렇지 않은 거고. 만날 애만 먹였다고 할 것 같으면 나를 먹여 살렸다고 하더라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도 착각이라는 거라.

 

네 번째가 뭐냐면 죽고 나면 내 가족들이 명절 때 제삿밥이라도 주겠지, 공덕을 회향해주겠지. 하는 거라. 요즘은 인터넷에서 제사 지낸다고 그럽니다. 컴퓨터 요렇게 켜놔놓고. 물론 그것이 틀렸다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내가 공덕을 쌓지 않기 때문에 회향을 할 것이 없습니다. 공덕을 회향할려고 하는 마음들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분이 그 영향을 받는 것이고. 그런데 그런 것들을 기대를 못 한다는 거라.

 

스님은 제사 지상주의 아닙니다. 제사 다 없애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원에서도 일년에 딱 한차례 딱 잠깐 동안 합동제사 한번 딱 지냅니다. 우리 모친 제사도 없습니다. 그냥 같이 돌아가신 날이 언제가 됐든 간에 그거 다 하나로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쨌든 제사를 지내고 하면서 그것을 지내는 것은 성질부리면서 제사를 지낼 것 같으면 그거는 아무런 공덕이 안 됩니다. 좋은 마음으로 공양물을 올리고, 그 좋은 마음들로서 공양물을 올리고 그런 마음들을 영가에게 회향했을 때 영가에게 영향을 받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살아있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4가지가 있는데 그게 실현된다고 보장을 못합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서든지 죽어서든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합니까? 현명한 부모들은 자기 먹을 거 남겨둡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뭘 어쨌든 간에 땡땡거리고 살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바른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나중에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마음이 강해져 있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됩니다.

내가 수행으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길러져 있지 않으면 물질적인 것은 갖출지 몰라도 마음은 허하게 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됩니다.

나중에 하면 되지안 된다는 거라. 수행은 때가 있습니다. 힘이 있을 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힘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됩니다. 가끔은 그럽니다. ‘나는 지금 계율 잘 지키고 있으니까’, ‘나는 지금 보시 잘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되면 수행하면 되지’ 하고 합니다. 가능합니까? 안 됩니다! 이미 그때는 힘이 없습니다.

 

보시가 수행이고 계를 지키는 것이 수행이라는 생각으로서, 수행으로서 계를 지키고 수행으로서 보시를 하게끔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 그 힘이 축적이 돼나갈 겁니다.

그렇지 않고 수행 따로 다른 것들 따로 이렇게 해버릴 것 같으면 그분은 영원히 못할겁니다. 마음의 성장을 못할겁니다. 그럼 나중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지금 힘이 있을 때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꾸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그 수행의 힘들도 커지는 거고 공덕들도 더 바르게 쌓게 된다는 겁니다. 얼마만큼 빨리 쌓느냐는 거라. 경주 "요이똥" 해가지고 누구든지 여기서 저기까지 가서 저 벽돌을 쌓아라 해서 쌓는 거라. 많이 쌓으면 많이 쌓을수록 이익이라는 거라. 유리한 거라. 빨리 끝낼 수 있으니까.

모든 일들이 수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소유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제로 소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빌려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애지중지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들 몸도 애지중지 할 필요가 없고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재산도 애지중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등한시하고 재산을 돈을 벌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로써 생각을 해야 됩니다.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좀 더 이익이 있기 위해서, 나에게 많은 공덕을 쌓기 위해서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써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그 이하로도 그 이상으로도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여러분들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어요? 지금 수행하는 것뿐이라. 그래서 지금 만들어야 되는 거라. 진정으로 나의 재산을 만들어라는 거라. 다른 것들은 살아있을 때도 없어지고 죽고나서는 내 주위에 붙어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마음의 재산은 살아있을 때도 유용하게 쓰이고 죽고 나서도 유용하게 쓰여지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이 뭐냐면 항상 부족하다. 채워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거라.

조금씩 우리는 부족한 것들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걸 자꾸 채울려고 합니다. 채우고 나면 또 다른 걸 채울 것이 없습니까? 그래서 채울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욕망의 갈애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꾸 원하는 거라. 그냥 맹물 먹어버리면 그 시원하게 갈증은 해소될 건데, 조금 더 맛있게 먹을려고 거기다 뭘 탑니다. 타가지고 먹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또 갈증이 일어나는 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채울려고 하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 랏타빨라 스님의 출가 이유 네 가지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항상 머무는 법이 없다. 견고하지 않다.」

「이 세상 생명은 지켜주는 사람이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없다.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이 세상 중생들은 항상 부족해한다. 만족함이 없다. 갈애의 노예이다. 」

 

그러면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먼저 조용할 것. 맨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외관도 조용해야 되고 마음도 조용해야 됩니다. 화려한 옷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되게 바쁩니다. 겉치레를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야 되기 때문에 되게 바쁩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런 사람들의 한달 돈 쓰임새를 볼 것 같으면 체면유지비가 상당한 다수를 차지할 겁니다. 그런데 없는 사람은 체면유지비가 없습니다. 할 거리가 없으니까. 외관도 조용해야 됩니다.

 

스님들이 왜 삭발을 하고 이 가사를 동일한 가사를 입고 있겠습니까? 외관을 안정시키기 위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밖의 모양을 안정되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들뜨게 되고 바깥쪽으로 자꾸 돌게 됩니다. 일이 굉장히 분주해집니다.

그래서 밖으로도 조용해야 되고 하물며 안으로는 더 조용해야 됩니다. 마음이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칭찬하는 것 비난하는 것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마음이 물결치지 않게끔 조용하게 안정을 시켜라. 대상을 만나더라도 다시 자기의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그래서 안과 밖으로 조용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여기 올 때 좋은 옷 예쁜 옷 신경써서 입고 올 필요 없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화장 안 해도 됩니다. 스님 여러분들 얼굴 안 봅니다. 하물며 여기 부처님도 여러분들 얼굴 안 봅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수행하기 위해서 좋은 조건들을 갖추도록 자꾸 하십시요. 여기 올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상생활이 똑 마찬가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고. 항상 조용하도록 만들어서 수행하기 위한 좋은 조건을, 어느 때라도 금방 좌선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어느 때라도 경행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갖추도록 하라.

부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모습들을 원할까? 뭘 원할 거 같애요 부처님이? 얼마만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느냐? 얼마만큼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수행하고 있으면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잔뜩 가지고 있고 남에게 봉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봉사를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꾸 살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지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될 게 '아, 이게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인가?' 살아올 때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각각의 원하는 모습들로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했고, 학교가면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했고, 사회에 나오면 상사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는 안 살려고 하느냐는 거라. 오히려 그분들보다 부처님이 더 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꾸 살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이 뭐냐 하면 아라한의 모습으로 살도록 하라.

아라한이 아닌데, 어떻게 아라한의 모습으로 살까? 여러분 아라한 아니죠? 그러면 어떻게 아라한의 모습으로 살 거라? 그리해도 아라한과 같은 모습으로 자꾸 살아야 됩니다.

안되면 내가 '아, 안됐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나서는 버려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내 모습이 아라한과 같은 모습으로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좀 더 자애롭게 되고, 좀 더 내가 가슴을 열고 넓은 마음으로 품을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들을 할려고 하고,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항상 이익된 일들을 할려고 하고, 그런 모습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뭔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부족한 것들을 자꾸 채워 넣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 모습들이 채워질 때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아라한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속에 있는 것들도 그렇게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다음이 뭐냐하면 수행자들의 모임에 자꾸 들어가도록 하라.

어쩔 수 없이 그룹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속해있는 단체들, 그리하더라도 자꾸 수행자의 모임속에 들어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 속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다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수행자의 모임속에 있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여기 오면 뭐합니까? 여러분들은. 사람들끼리 얘기하더라도 일상적인 것들을 잘 얘기 안합니다.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고, 밥을 먹어도 수행하면서 먹게 되고, 일상적으로는 좌선 경행하면서 수행하게 됩니다. 모든 일들을 수행하고 연관되어가지고 하게 됩니다.

수행자의 모임에 들어가있으면 그와 같이 됩니다. 내 모든 것들을 수행하고 연관을 시키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모임에 있는 걸 자꾸 즐겨 해야 됩니다.

 

수행자의 모임은 어떤 경우든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화합해야 됩니다. 서로 양보하고, 차라리 일을 안 할지언정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뭘 하자” 해가지고 그 일을 꼭 해야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사람들이 화합해서 그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야 마음이 수행자의 모임에 들어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수행자의 모임에 꼭 여기 선원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행하는 모임에 어떤 곳이든 수행하는 모임에 자꾸 가도록 하고 거기에 자주 모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팔계를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 선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하죠? 목요일날 팔계를 줍니다. 그런데도 안 받을라고 그래요. 반쯤은 받고 반쯤은 아예 안 받고 입 다물고 있습니다. 소리가 달라요. 그런데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힘을 키워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걸 자꾸 외면하면 안됩니다. 억지로라도 자꾸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 힘이 그 정도는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걸리는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멀리 날 수가 있습니다. 계를 많이 지킨다는 것은 그마만큼 걸릴 수 있는 것들을 쳐내버린다는 겁니다.

한번 보십시요. 오후에 음식 안 먹고 수행 해보십시요. 훨씬 수행하기 수월합니다.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저녁 먹으면 앞뒤로 해가지고 수행이 잘 안됩니다. 그마만큼 걸리는 게 많아지게 됩니다.

 

계를 자연스럽게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자유로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자유로워질수록 더 멀리 빨리 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마만큼 힘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을 일부러 찾아서라도 해야 되는데 만들어주는 데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보름에 한 번씩은 팔계를 지키도록 하라. 더 나아가서 구계 십계를 지키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마만큼 수행의 힘들도 커지고 빨리 수행의 진척도 있게 됩니다.

 

그다음이 뭐냐 하면 정해진 때가 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라는 거라.

지금 여기 선원에 오래 좀 다닌 분들은 초보자들이 오면 그분들에게 수행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해줍니다.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나중에는 여러분들끼리 앉아서 주제를 정해놔놓고 한 사람이 발표하고 또 토론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발표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수행에서도 그마만큼 이루어야 되고 교학에서도 이루어야 되고, 그래야만이 발표할 능력이 됩니다. 발표할 능력이 안 갖추어지면 어떻게 되요? 그때되면 어디 도망가고 싶어서 난리가 납니다.

 

스님이 처음 태국에서 법문했을 때가 그랬어요. ‘야, 이거 어떻게 핑계 대가지고 빠져나갈 길이 없는가’ 5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큰스님이 “너 내일 법문해” 그럽니다. 그것도 법문할 주제를 딱 정해줍니다. 우리 같이 아무 주제나 잡고 하는 것이 아니고. 딱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거기에 대한 것만 해야 됩니다.

처음 법문을 할려고 하니까, 물론 수행도 하고 교학도 익혀나왔고 했는데도 두려운 거라. 그러니까 이걸 되도록이면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하는 그 생각밖에 안나는 거라. 수행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법문해야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어떤 핑계를 대야 될까? 요것부터 생각하는 거라. 안 갖춰진다는 거라. 자신있게 할 수 있도록 자꾸 능력을 키워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될 거 같애요? 때가 되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주변에서도 그렇게 이미 바라고 있습니다.

“엄마는 만날 수행한다면서 그것밖에 안돼?” 이미 수행하고 있으면 요정도는 될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안 갖춰져있다는 거라. 반드시 그걸 갖추도록 하라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거는 적어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거는 갖추도록 해라는 거라. 연령에 따라서 반드시 갖추어야 될 것들은 갖추어야 됩니다. 점점 더 갖추어져 나가는 것이 많아져야 되는 것이지, 오히려 더 갖추어지는 것이 없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뭐하러 수행해?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갖추는 자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식카빠다(sikkhāpada)' 라고 그럽니다. 처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죽이지 않는 것들을 갖추어서, '사마디야미'-내가 반드시 지키겠다는 거라. 내 것으로 만들겠다, 받아지니겠다.

'다-라야-미(dhārayāmi)' 하면 더 좋겠지. 그런데 '사마-디야-미(samādiyāmi)'-마음으로 받아서, '사미디(samādhi)' 알죠? 받아서 딱 머물도록 지키겠다는 거라. 적어도 그 하나는! '다라야미' 하면 좋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그것에 관계된 것들을 일체를 다 갖추겠다는 그런 거니까. 안 죽일려고만 하는게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도 갖추고 자애의 마음들도 갖추는 거고 널리 베푸는 마음도 갖추는 거고 이런 것들도 더불어서 다 갖추겠다는 거라.

 

적어도 '다라야미'는 안 되도 '사마디야미'는 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하나를 하고 나면 ‘아딘나다나’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갖추어나가는 거라. 각각의 연수, 수행하는 것에 따라서 갖추어나가는 것은 반드시 갖추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못 갖추면 자기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다른 사람들이 욕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뭐하러 수행하러 가노?” 그럽니다. 안 갖춰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뭐하러 가느냐는 거라. 반드시 갖추도록 자꾸 하시기 됩니다.

 

그다음이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을 수호하는 자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확신이 들어야 그것을 수호할 수가 있습니다. 이거 소중한 것을 알아야만이 이걸 지킬려고 합니다. 집에 불이 나놓으면 퍼뜩 생각하기를 뭐가 소중하다는 걸 판단합니다. 통장이 소중하면 통장을 가지고 밖으로 나올 것이고, 귀걸이가 소중하면 귀걸이를 가지고 밖으로 나올 겁니다.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나옵니다. 그걸 지킬려고. 여러분들은 불교를 부처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합니까?

 

스리랑카의 야사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근이 들어서 계속 아무것도 못먹고 굶은 스님이 있었어요. 그래도 그 스님은 끊임없이 수행하고 경전을 공부해가지고 부처님 말씀이 소중한 걸 압니다. 그걸 지켜야 되는 것을 아는 거라. 그래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가지고 거기에 물을 적십니다. 그럼 무거울거 아닙니까? 그걸 누워서 배위에다 올려놔놓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배에서 적어도 배고프다는 소리는 안납니다. 꼬로록 소리가 안 나는 것은 둘째고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배에서 배고프다고 안 합니다.

위가 여러분들 요렇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위가 위로 올라가가지고 내려온 사람들은 배고픈 걸 덜 느낍니다. 그런데 위가 좀 완만한 사람들은 금방 배고픔을 느낍니다. 이 스님도 꼭 마찬가지라. 배에다가 그 모래주머니를 하니까 그 무게 때문에 쭉 눌러지니까 자연스럽게 곡선이 생기는 거라. 그러니까 배고픈 걸 못 느끼는 거라.

 

배고픈 걸 못느끼고 자기가 해야 될 것, 그 스님은 경전을 암송하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거라. 계속 전해주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이 스님이 배고픈지를 모르는 거라. 굶은 줄을 모르는 거라. 그런데도 이 스님은 지금 뭐가 소중하다는 거를, 내가 죽기 전에 뭐가 소중하다는 거를 알기 때문에 그걸 전해주려고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스님들은 그걸 굉장히 강하게 느낍니다. 그게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그걸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체험해가지고 '아,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는 걸 반드시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걸 지키고 수호해나갈려고 할 거라. 누가 이걸 부술려고 할 것 같으면 막을 것이고.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존경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적어도 수행하는 자들, 수행하는 일반 재가자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버려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또 수행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은 출가자들로 인해서 전해져 왔습니다. 재가법사에게 들어서 안다고 하더라도 그 재가법사는 반드시 출가한 스님에게서 그것을 배웁니다. 그 근원을 따지면 결국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들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출가한 스님들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들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내가 설혹 출가하신 분들보다도 더 높은 수행경지에 이르르고 더 많은 불교를 안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는 마음까지도 없애버릴 수 없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 스승을 두고 왕자일 때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분이 왕이 되고 나도 그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설혹 불환과에 이르르고 도와 과에 이르르고 하더라도 출가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내 수행들은 더 무르익게 됩니다.

 

이게 수행하면서 가져야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또한 지금 현재 내가 이마만큼 이르렀다 해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은 지켜나가고 있으니까, 또 이것은 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머물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자들 ‘나 이제 조금만 더하면 깨달음에 이르는데 조금 있다 하지’ 그런 마음 먹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보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수행은 조금 있다 하지’ 그런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어느 만큼 이루었든 간에 내가 아라한에 이르기 전에, 완전히 도와 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그 길을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공덕을 완전하게 다 성취해서 열 가지 바라밀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이마만큼 보시를 하고, 이마만큼 계율을 지키고, 이마만큼 선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생에서는 요만큼만 해도 된다, 하고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선근공덕은 반드시 다 성취하고 나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공덕을 하루빨리 이룰려고 해야 되는 거고 수행도 하루 빨리 접해서 도와 과에 이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완전하게 공덕을 성취하고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