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2014년 우안거 입재법회-안거(왓사)의 의미 (20140711)

담마마-마까 2021. 7. 28. 08:44

https://youtu.be/3Dstum7VQEI

* 우안거 입재법회-안거(왓사)의 의미 (20140711)

 

원래는 여러분들 내일이 안거 결제날입니다. 스님들은 모레 들어가게 됩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부처님 처음 법을 설한 초전법륜일이 내일이거든. 음력으로 유월 보름날. 한국에는 초전법륜일이라는게 잘 없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지 않았으면 우짤뻔 했어? 그래서 다른 날보다 초전법륜일을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굉장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법을 설하지 않을려고 했다가 천신들의 간청을 받고 법을 설한 것으로 경전에 나와있죠. 그 법을 설했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듣고 또 수행할 수가 있는 그런 계기가 된 겁니다.

 

처음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나서 그 다음날부터 다섯 수행자들과 같이 안거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 때 이미 처음부터 안거가 시작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처음에는 안거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고 한 곳에 머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유행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온 거죠.

어쨌든 초전법륜일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들을 가지기 때문에 그다음날 스님들은 안거에 들어가고, 일반 재가자들은 초전법륜일날 안거에 들어가는 그런 풍습들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스님들은 안거를 지내고 나면 법납을 한살씩 먹는데 재가자들은 일체 그게 없다는 것. 좀 불공평하죠? 안 불공평해요? 재가자는 결제를 지내봐야 그것으로 인해서 '나 안거 몇해 지냈다' 이런 것들을 표할 수가 없게끔 됩니다. 물론 자기가 몇해 지냈다는 건 알지만, 그거 왜 그럴까?

출가한 스님들은 안거를 오래도록 지냈다고 하더라도 후배 스님들이나 또 이제 갓 출가한 스님들에 대해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동등하게 대할려고 합니다.

재가자들은 안 그렇다는 거라. 이건 한살 좀 더 먹었다 싶으면 그냥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에 한 십년 다녔다 싶으면 인제 온 사람들을 보기를 아주 어린애보다도 못하게 취급을, 마음은 그리하더라도 항상 이끌어줄 생각들을 해야지 그걸 아주 낮은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재가자들은 안거 횟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대신에 스님들은 안거 횟수를 반드시 계산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출가한 스님들은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습니다. 두 가지밖에 없죠?

부처님 가르침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 한가지.

또 한가지는 그래서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나면 그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는 것 한가지.

이 두 가지입니다.

출가한 스님을 인도하는 것이든 재가자들을 인도하는 것이든 어쨌든 그 법을 설하는 것까지 두 가지인데, 법을 설하는 스님들 입장에서는 안거를 들어가는 것은 할 일이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들을려고 하는데 내가 거기 하루라도 빨리 가서 부처님 법을 설하고 수행지도 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안거하면서 석달 간을 딱 머물면서 가지마 할 것 같으면 그 스님은 뭐 해야 될까? 뭐 할 일이 있겠어요? 실제로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처음에 안거를 지낼 때 경전에도 그런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 할 일이 없다는 것, 앞에 있는 스님들이나 재가자들 얼굴 보고 멀뚱멀뚱멀뚱 하고 있을 거라? 그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하도 답답하니까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게 법을 설하러 다니기 때문에 안거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이 안거를 하라 하니까 안거를 하긴 하는데 세 달동안 할 일이 없습니다. 뭔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이라면 이 안거동안 뭐 해라고 그럴까? 그 스님들에게.

(수행자 대답 : 수행하라고 하겠지요.)

당연히 스님이니까 수행을 해야지. 수행을 안 할 수는 없는 거고, 당연히 수행하는 거고. 수행하는 거 말고, 그거는 기본인 거고, 뭐가 필요할까? 힌트 드릴게요.

 

부처님이 20년이 지나고 나서 아난다가 부처님의 시자가 됩니다.

그전에는 많은 스님들이 부처님을 시봉을 했어요. 그중에 메기야라는 스님이 부처님을 시봉하다가 불현듯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벌떡 일어나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부처님, 나 이제 시봉 안 하고 저 숲에 가서 수행할랍니다. 이러니까 부처님이 세 번을 말리는 거라. 안된다. 다른 사람이 와서 내 시봉자가 되기 전에는 그냥 네가 내 시봉하고 있어라. 고집을 안 꺽었어.

그래서 세 번이 지나고 나서는 메기야가 결국에는 그 숲에 가서 수행하기 위해서 떠납니다. 부처님 혼자 놔두고. 삼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메기야가 그냥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서 부처님한테 옵니다. 그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부처님 나가서 수행할려고 했더만 도저히 수행 안되고.

 

여러분들 숲에 가서 수행한다는 게 쉬운 거 같죠? 절대 안 쉽습니다. 스님들도 실제로 결제 끝나고 나서 짜리따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숲에 가서 수행하는 기간이 있어요. 보름 넘기고 나면 죽겠어요. 진짜 힘들어요. 다른 게 힘든 게 아니고 숲에서 여러 가지 모기들이나 이런 것들도 물론 힘들고 그렇지만은 그것보다는 혼자 머무르고 아무 말할 상대도 없이 혼자 머무르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못견디는 거라.

그것 때문에 각각이 두려움들도 일어나고 하여튼 별스런 생각들도 다 일어나고. 고요할 것 같으면 수행이 잘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안 그렇거든. 그래서 보름 지나고 나서는 대부분 아이고, 나 일년 한차례 이거 할 뿐이지 이걸 평생하라고 할 것 같으면 진짜 못하겠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혼자서 아무하고도 얘기 안 하고 고요한 곳에 가서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크게 수행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같이 모여서 서로 탁마하면서 이렇게 이끌어주어야만이 수행에 진척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만날 번뇌망상과 싸우다가 그 속에서 함몰돼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얘기라.

 

그래서 그렇게 해가지고 돌아오니까 메기야 한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성숙되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지켜야 될 것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지키지 못했다는 거라. 마음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거라.

다 여러분들 얘기입니다. 고요하게 그렇게 가라앉아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지 않다는 거라. 외부적인 자극들 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들, 이것들에 그 자극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같이 모여서 수행을 하라.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라.

안거 때에는 그러기에 참 좋은 시간입니다. 여기에 뭐 다른 제사를 지내, 무슨 기도를 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와서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면은 도반들이 한명 더 모이고 한명 더 모이고 그러다 보면 혼자 할 때보다 훨씬 잘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해가 된다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생각만 딱 내려놔버리고 나면 오히려 도반이 있다는 것이 참 든든합니다. 수행할 때.

설혹 경행하는데 경행 코스가 짧아지고 부딪쳐서 방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같이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참 고마워. 그러기에는 안거가 참 좋은 조건이라. 여러분들의 마음을 성숙시키기에 가장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기본적으로 계율을 성숙시키기에는 참 좋은 것.

그래서 계율이 확립돼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혼자 가서 수행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라. 실제로 그래요. 스님들 혼자서 수행하면 이렇게 마음속에 있는 얘기들을 털어놔바라 할 것 같으면, 그전에는 안 그랬는데 마음 밑바닥에 잠재돼있던 어떤 욕망들이 계속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혼자서 독살이를 하다 보니까. 그럼 감각적인 욕망들도 일어나고 무슨 뭐 할 거 같으면 금방 성질도 확 일어나고, 표현은 잠재돼있던 데서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실제로는 잠재돼있던 것이 아니고 잠재돼있고 그다음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있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라. 그런 성향들이 많은 것들이 혼자 있으니까 드러나게 되는 거라.

 

드러나는데 그걸 제어할 방법이 없는 거라. 혼자 있다 보니까! 뭐 조심해야 될 게 있어요? 없어. 화가 일어나면 그냥 숲에 대놓고 "아악" 하고 고함치면 돼. 그렇다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어. 그런데 여기서 자기가 화가 일어난다고 "아악" 할 것 같으면 당장 욕먹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난다고 해서 여기서 아무나 붙잡고 뽀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당장 뺨때기 맞는 거라. 그런데 숲에서는 누가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는 거라. 오히려 그것을 잠재우고 다스려야 되는데 숲에서는 그게 안 되는 거라.

도덕적인 것들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일어난 것으로,

 

여러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가져야 되는 오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오계 자연스럽게 지키고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 도반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 억지로 억지로 겨우겨우 지킬려고 하고 아마 그럴 거라. 그런데 그걸 조금 더 자연스럽게 지켜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계기가 이런 안거철이라는 겁니다. 같이 모여 있을 때!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 해야 될 것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할 때 지녀야 될 품성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이 이런 안거철입니다.

왜? 그 반대되는 것들이 항상 일어나니까! 그래서 그걸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가질 수 있는 게 이런 안거철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부처님이 얘기한 게 이미 메기야가 부처님을 버리고 숲에 들어가 수행하겠다고 한 것은 자기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 부처님 시봉할 사람이 없으면 자기 욕심을 일단은 내려놓고 부처님 시봉자를 구하고 나서 시봉자 오고 나서 숲에 들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그런데 자기 수행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부처님 시봉이고 뭐고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 냅두고 자기 혼자 가서 수행하는 거라.

탐욕을 가진 채 수행처에 가서, 숲에 들어가서 수행을 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탐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함께 모여있을 때 다스릴 수 있다 하는 거라.

빵이 하나 있다 할 것 같으면 아무도 없으면 자기 혼자서 그걸 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게 탐욕인 줄 모르고 먹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 있으면 그걸 다섯 명이면 다섯 등분 내야 됩니다. 공평하게. 여러 사람 있을 때 탐욕을 다스리기가 수월합니다. 혼자 있을 때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탐욕을 소멸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혼자 있으면서. 소멸한 것이 아니고 감추어진 겁니다. 언젠가는 조건이 되면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욕심을 안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그런데 안거 기간에는 그 욕심을 다스리기가 참 좋은 시간이라는 거라.

 

스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좀 해봅니다. 사람들이 욕심이 조금만 없어도 참 사회가 그래도 참 아름다울 것이다 하는 거라. 같이 모여서 나누는 법들을 모르기 때문에, 같이 있을 때 해야 될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욕심들이 자꾸 앞서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전부 개인적인 일들로써 자꾸 바뀌어나갑니다. 그래서 계속 분화가 됩니다. 무슨 수행자 그룹도 분화가 되고, 그 그룹 내에서도 또 몇몇으로 또 분화가 되고, 계속 쪼개지는 일들만 합니다. 합해지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안거는 쪼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같이 어울려서 살아야 됩니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같이 어울려서 같이 수행해야 되고 같이 법을 듣고 그래야 되는 것들입니다. 내 욕심들 조금씩들 없애고 남에 대한 배려들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이런 안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숲에 들어가면 혼자서 수행하면 나쁜 생각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결제를 할 거 같으면 나쁜 생각보다는 좋은 생각이 더 일어나게끔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생각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어떤 생각이든. 그러면은 되도록이면 나쁜 생각보다는 선한 생각들을, 그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이 사람들을 보고 나쁘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을 보고 '아, 참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자애의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 그게 오히려 훨씬 낫다는 거라.

선한 생각들을 이끌어내기에는 안거라고 하는 것이 참 좋은 때입니다. 모여 있을 때 여러분들이 생각들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도록 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보는 지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가장 수행의 기본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모를 것 같으면 더 이상의 지혜, 더 이상의 도와 과에 이를 방법이 없습니다.

수행을 하다가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것을 자주자주 경험하다 보면 집착하는 것들 그리고 뭔가 번뇌들이 떨어져나가는 것들을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경험들을 자꾸 쌓을 수 있는 것은 안거 기간이라는 거라.

이게 메기야한테 한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안거 때 뭘 해야 될까?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면 아무 할 일들이 없을 거 같지만 실제로는 할 일들이 굉장히 많다는 거라. 그러니 자애의 마음을 가진 스님들은, 고참 스님들은 후배 스님들을 지도할려고 할 것이고, 후배 스님들은 더욱 더 열심히 수행하고 또 경전 공부하고 도와 과에 이를려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를 볼려고 열심히 더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안거철이 되면 스님들 눈이 탁 틀려집니다. 반짝반짝반짝 해집니다. 뭔가를 찾아서. 스님들만 그럴 거 같애요? 재가자도 꼭 마찬가집니다.

 

안거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들을 가집니다.

단순히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비가 오는 때이기 때문에 생명이 자라는 것들을 밟지 않고 또 그 생명들을 죽이는 일들을 피하기 위해서 안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대에 아스팔트 다 놓아졌는데 풀이 자랄 데가 어디 있고, 가기에 밟고 다닌다 해서 생명체들 얼마나 있을 거라고, 법을 설하러 다닌다고 해서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지금 현재 그걸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제정해놓은 것이라서? 물론 그거는 맞습니다. 그런데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니면서 수행하는 것보다도 한곳에서 모여서 수행하는 것이 더 큰 효과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스님들은 탁발 조차도 안 나갑니다. 안거 기간 동안에는.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이 가사를 스님에게 공양 올렸는데 가사는 종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왓사 찌와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기 때 목욕하기 위한 가사다 하는 겁니다.

까티나찌와라, 빵수꿀라찌와라, 톳까틴찌와라, 뭐 이렇게 종류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우리말로 쉽게 하면 '목욕가사'라.

사실 테라와다 불교권에 가면 안거하는 날에 보면 사원에서 이 가사들 탄다고 난리가 납니다. 사원에서는 경제적인 것들을 확립하기 좋은 수단으로써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차라리 내년부터는 여러분이 어디서 가사를 하나 구입을 해와가지고 스님에게 목욕가사를 올리면 됩니다.

 

왜 이걸 주느냐면 안거 때 그전에는 스님들이 목욕가사가 없을 때는 이 가사를 입고 목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러분들은 아마 그럴 거라. 목욕탕 가면 발가벗고 목욕하죠? 그런데 스님들은 목욕탕 가더라도 발가벗고 목욕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이 밑에 가사를 걸치게끔 돼있습니다. 그게 생겨난 게 뭐냐면 스님들도 똑같이 발가벗고 목욕하다 보니까 스님들이 있는 곳이라 해서 일반인들이 못 오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 하고 찾아왔다가 보니까 스님이 발가벗고 목욕하고 있으니까 “엄마야” 하고 놀래고 가고 그랬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그렇게 건의를 합니다.

위사카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 스님들이 목욕할 때 입는 옷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리하자.” 해가지고 스님들 목욕할 때 입는 옷을 갖다가 받는 때를 딱 정합니다. 딱 한때밖에 없습니다.

 

결제 한달 전부터 시작해서 목욕가사를 지을 수 있는 천들을 올릴 수 있게끔 합니다.

그런데 목욕가사를 만들어서 올릴 수 있는 기간은 결제 보름 전부터 시작해서 결제날까지 딱 보름간입니다. 보름간만 이 가사를 올릴 수 있게끔 합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그뒤부터는 스님들은 반드시 목욕할 때조차도 반드시 이 옷을 입고 목욕해야 됩니다. 잘 때도 이 옷 말고 그냥 일반 가사를 입고 자야 되듯이, 이걸 반드시 입고 해야되는 거라.

그걸 주는 것이 대부분 언제 주느냐면 물론 결제 보름 전부터 해서 결제날까지 가능한데 대부분은 보면 결제날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가사를 올리게 되는 겁니다.

 

안거라고 하는 것도 일반 재가자들이 “부처님, 우리도 다른 사람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안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부처님이 받아들였던 것이고, 목욕가사도 다른 일반인들이 “부처님, 스님들이 목욕가사를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받아들인 겁니다.

부처님이라는 분은 보면 법을 가르치고 하시는 분이시지만, 재가자들의 의견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맞다고 타당하다고 할 것 같으면.

계율 속에도 그런 것을 만들어 놨습니다. 계율 속에도 재가자 중에 현명한 사람 두 사람을 뽑아가지고 그 두 사람 중에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스님들이나 아니면 상가에 대해서 건의할 것이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받아들이라는 거라. 그거는 출가한 스님들이라 해서 똥고집 부리고 있어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그렇게 부처님이 계율로써 정해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 아들이 딸이 뭔가를 건의를 했는데 그걸 귀담아들을 귀는 열어놨습니까? 가끔씩 전화로써 문답하는 분 중에 한 분이 그런 경우가 있어요.

“스님, 내가 애하고 만날 싸우다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내가 애를 때려죽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뭔 일로 가지고 그렇게 때려 죽일만큼 마음이 안 좋게 됐느냐?” 여러분들하고 저분 하는 것하고 아마 거의 같을 겁니다. 공부하라면 공부는 안 하고 만날 게임만 하고, 학원 가는 것도 잘 안 갈라 그러고 어쨌든 핑계대서 공부 안하고 놀 궁리들만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엄마는 어쨌든 게임 못하게 해야 되고 공부하도록 해야 되고 학원 보내야 되고, 가기에 맞출려다 보니까 애하고 자꾸 트러블이 있다 보니까 때려죽일 거 같다는 거라.

 

엄마 입장만 계속 내세우다 보니까 때려죽일 정도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한번이라도 애의 입장에서 애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준 적이 있느냐는 거라. 물론 그러겠지. 스님, 그렇게 하다가 어쩔려고 그럽니까? 애 게임하도록 놔둔다? 학원 가기 싫다고 하면 안 가도 그냥 용인한다? 그러다가 어찌하려고요?

만날 그렇게 하라 그래? 가끔 한번씩 그렇게 해보라는 거라. 오히려 애 입장에서 아, 엄마가 내 말을 들어준다는 생각만 가지도록 해주는 것들도 큰일인데, 아예 그거는 봉쇄하고 부모 입장만 자꾸 내세운다는 거라. 애 입장은 전혀 무시해버리고. 그러면서 애를 때려죽일 거 같다는 거라.

사람 간의 신뢰라고 하는 것은 나를 믿어준다고 느낄 때 신뢰는 형성이 됩니다. 한번 하루종일 게임하게 한다? 오늘은 “그래 니가 가기 싫으니까 학원 가지마. 그리고 엄마하고 놀자” 이런다 해가지고 애가 뭐 크게 잘못 돼? 오히려 그러고 나면 더 좋아질 수가 있는데 그걸 안 한다는 거라.

 

어쨌든 결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부처님도 완전하게 아시고 완전하게 이해하시는 그 부처님도 아주 하잘 것없는 것 같지만 그것을 받아들여가지고 재가자의 말을 받아들여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받아들여 보라는 거라.

받아들여 보고 그게 틀렸으면 다시 바꾸면 되는데.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할 거 같으면, 나보다도 더 못하고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짜 좋은 것들을 만들 기회를 여러분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거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겁니다.

자기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못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의 건의를 받아서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정착시킨 게 이 안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안거에는 안거 게송도 했지만 아까 처음에 안거게송 하기 전에 스님에게 참회하는 게송도 했고, 여러분들끼리는 또 참회하는 의식들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안거 기간 동안에는 스스로를 점검해야 됩니다. 뭐가 잘됐고 뭐가 잘못된 것을 분명하게 점검을 해야만이 안거를 하는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다고 해요. 묵언하면서 안거 석달을 지내고 나서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우리 안거 잘 지냈습니다. 묵언하면서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서로 간섭할 일 별로 없고 편안하게 잘 지내다 왔습니다.”

부처님이 되게 뭐라 합니다. “이놈들아, 니들 세 달 동안 마음 편히 있으라고 이 안거 만든 줄 아느냐,”간섭 안 받고 편안하게 지내라고. 그게 아니라는 거라. 안거 석달 동안은 어떤 경우든지 서로 탁마해야 된다는 거라. 니 뭐 잘한다, 니 뭐 잘못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받고 해가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것, 화가 일어난다 아니면 내가 칭찬받았으니까 기분 좋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것을 다스릴 수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데 말을 안 하고 모여 있을 거 같으면 그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해야되는 것이 참회하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게송에는 정형화 돼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참회할 때마다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아, 내가 잘못한 것들 참회합니다.'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아, 오늘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그거 안할라고 자꾸 해야되는 것이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잘못한 거 참회합니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자신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루에 한번씩은 그것을 돌아보고 참회하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또 남들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 잘못들을 자꾸 지적만 할려고 하지 말고, 그 잘못한 사람들을 진짜 자애롭게 감싸주는 마음들을 가지고 용서해 주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어떤 짓을 하든. 오히려 연민심을 일으키고 그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안거 기간에는 반드시 참회하는 의식들이 있게 됩니다. 매일같이 참회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프린트물로 대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우안거에 대한 이거는 작년엔가 아마 하면서 정리했던 겁니다. 그래서 우안거 것만 뽑아온 거니까 글자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우안거에 대해서 의미들을 파악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올해는 안거를 지내면서 아, 진짜 보람있게 삼개월을 잘 보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선원에서도 이번 우안거 때는 화요일 날은 경전을 강독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경전을 너무 몰라요.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정해서 그것에 대해서 스님이 설명을 하고 여러분들이 그것을 독송을 하는 그런 시간들을 좀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